성경읽기 0095 : 로마서 12장(19절)~14장
12장 19절
여러분이 직접 원수를 갚지 말고 하나님의 진노에 맡기십시오. 성경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원수 갚는 것이 나에게 있으니 내가 갚을 것이라.’”
21절
악에게 지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십시오.
의인의 고난과 악인의 형통은 <욥기> 이후부터 성경에서 줄곧 다뤄졌던 고전적인 주제다. “신은 진실을 알고 있다. 다만 때를 기다리실 뿐이다.” 그 때는 언제인가? 기다리다 지친다. 기다리다, 기다리다, 그 때를 보지 못하고 죽는다.
“신은 정의를 세우실 것이다. 다만 때를 기다리실 뿐이다.” “신은 불의를 심판하실 것이다. 다만 때를 기다리실 뿐이다.” 신은 항상 기다리고만 계신가? 언제까지 기다리고, 어디까지 보고만 계실 것인가? 신이시어, 그만 잠에서 깨어나소서!
직접 원수를 갚지 않고 하나님의 진노에 맡기기가 쉽지 않다. 잘 나가는 악인의 권세도, 줄곧 깨지고 밟히는 의인의 고난도, 마냥 보고 있기가 힘이 든다. ‘주의 뜻대로 하소서’란 말은 쉽게 할 수 있는 말이 아니다. 욥의 믿음을 갖고서야, 욥의 고통을 겪고서야, 비로소 진실되게 할 수 있는 기도다.
그럼 우리는 어찌해야 하는가? 직접 원수를 갚으러 찾아나서야 하는가? 악인을 징벌하러 일어서야 하는가? 아니면 악의 득세와 창궐을 지켜보고만 있어야 하는가? 죽여도, 죽여도, 원수를 축복하며 목을 내밀고 순교를 자처해야 하는가? 또는 사회, 정치적 문제에 사사건건 개입하고 의견을 밝혀야 하는가? 아니면 하나님의 공의를 묵상치 않고 사회정의에 무관심한 채 세상을 등지고 살아야 하는가? 나 몰라라 개인주의에 빠져 교회 안에서만 머무르는 죽은 교회로 남아있어야 하는가?
어려운 문제다. 특히 정치, 사회, 경제적으로 세속에 발을 담그고 있는 믿음 약한 일반 성도들에겐 너무 어렵다.
며칠 전(8월 31일) 국회에서 성희롱발언으로 물의를 빚은 한나라당 강용석 의원의 제명안이 국회의원들만의 비밀투표에서 부결되었다. 전 국회의장이었고 의장석에 앉아 성경을 읽었다던 독실한 교회장로인 한나라당 김형오 의원이 성경구절을 인용해 제명안을 반대하였다고 한다.
“너희 중에 죄 지은 적이 없는 사람이 먼저 이 여인에게 돌을 던져라.”[요한복음 8:7] 졸지에 강용석 의원이 막달라 마리아가 되었다. 국회의원들이 부끄러움을 아는 선하고 소박한 사람들이 되었다. 국회가 징벌보다 사랑을 실천하는 거룩한 성전이 되었다. 강 의원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을 것이다. 어쩌면 돌아서서 씨익 회심의 미소를 지었을 수도 있다.
“만일 네 오른손이 죄를 짓게 하거든, 그 손을 잘라 내어 던져라.”[마태복음 5:30] 역시 예수님이 하신 말씀이다. 그리스도인은 어찌해야 하는가? 김형오 의원은 성경을 옳게 읽고 옳게 인용하였나? 그는 이웃을 사랑과 용서로 감싸고, 진노와 심판은 하나님께 맡기는 믿음 깊은 그리스도인인가?
하나님의 뜻과 예수님의 말씀은 자신에겐 엄격하고 이웃에겐 너그러워야 한다는 말씀이다. 하지만 이 경우엔 자신에겐 관대하고 대중에겐 가혹한 결정이다. 국회의원들 자신에게만 관대할 뿐 국민들을 철저히 무시하고 깔보는 만행이자 횡포다. 국민들이 뽑아준 국회의원, 공인들이다. 강 의원은 옆집 아저씨가 아니고 김 의원은 성직자가 아닌 국회의원으로 그 자리에 있는 것이다. 국회는 마을회관도 아니고 동네교회도 아니다. 이는 명백한 용서를 빙자한 담합이다. 담합을 넘은 협잡이다.
문을 닫아걸고 누가 찬성하고 누가 반대했는지도 알 수 없게 비공개로 진행했다. 골방에 모여 저들끼리 도둑이 도둑을 용서한 꼴이다. 제 팔, 제 식구 감싸기에 불과하다. 김형오 의원은 뭔가 크게 착각하고 있다. 신앙과 양심 이전에 공인이 갖추어야 할 기본적인 자질과 능력이 부족하다. 정교(政敎), 공사(公私), 사리(事理)를 분별치 못하고 있다. - 생선을 고양이에게 맡긴 가게주인의 책임이 크다. 국회를 도둑들에게 내준 국민들의 책임이 크다.
성경을 함부로 인용하지 마라. ‘하나님의 이름을 함부로 부르지 마라.’[출애굽 20:7] ‘기록된 바와 같이 하나님의 이름이 너희로 인하여 이방인 중에서 모독을 받는도다.’[로마서 2:24] - 자꾸 이 구절을 인용하게 되는 것이 유감이다.
여기에 있는 돌 하나도 돌 위에 남지 않고 다 무너질 것이다.[마태 24:2]
누구나 꿈꾸는 시원한(!) 장면이지만 하나님의 공의에 충실한 의로운 사람들로만 채워져
진정한 민의의 전당이 된다면 각자 전용기를 사준대도 무에 아깝겠는가!
미워하기보다는 차라리 미움 받는 쪽을, 비판할 바에야 차라리 비판받는 쪽을 택할 텐가? 빼앗는 것보다 오히려 빼앗기는 편이 맘 편하고, 때리는 것보다 오히려 맞는 편이 덜 아픈가? 죽이는 것보다 차라리 죽임을 당하는 쪽이 견딜 만한가? 그렇다면 분명 성인(聖人)이다. 하지만 세상은 성인들만 사는 천국이 아니다. 성인, 의인, 선인, 속인, 악인, 죄인... 세상에 사는 사람 중에 가장 적은 것이 성인이다.
우리는 끊임없이 타인과 섞여 부딪히고 평가하고 판단하며 살아간다. 때로는 사랑을, 때로는 증오를 느끼기도 한다. 질투, 분노, 동정심을 느끼며 울고 웃으며 살아간다. 때로 세상은 우리에게 선택과 판단, 심지어 심판과 정죄까지도 강요한다. 때로는 결백하지 않더라도 돌을 던져야만 할 때도 있다. 몸에 겨를 묻힌 채 다른 이의 몸에 묻은 똥을 지적해야 할 경우도 있다.
거칠고 비루한 세상을 견디지 못하는 순결한 영혼, 하늘의 이치와 불화하는 세상의 이치를 감당치 못하는 연약한 영혼들은 세속을 떠나 교회 안으로 숨어들어야 할까? 그리하면 문제가 풀리고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날까? 세상과 어떻게 관계를 맺어야 하는가? 그리스도인들에겐 저마다 풀어야 할 큰 숙제다.
무엇이 용서고 무엇이 면죄부인가? 무엇이 사랑이고 무엇이 도덕적 해이인가? 무엇이 관심과 애정이고 무엇이 교만과 간섭인가? 무엇이 존중하는 것이고 무엇이 방기하는 것인가? 무엇이 가이사의 것이고 무엇이 하나님의 것인가? 무엇을 용서하고 무엇을 심판할 것인가? 우리 인간은 어디까지 판단하고 심판하고 정죄할 수 있는 것일까? 언제 돌을 들고 언제 돌을 놔야 하는가? 그 경계선은 어디일까? 그 때는 언제일까? 어렵다! 너무 어렵다!
하지만 이것만은 분명하다. 하나님의 가르침은 응징보단 용서다. 미움보단 사랑이다. 심판할 땐 심판하고, 처벌할 땐 처벌하더라도 용서와 사랑이 먼저다. 그리고 최후의 순간, 결단의 순간에 그것이 하나님의 뜻에 부합하는지, 혹 자신의 교만과 욕심에 의한 자의적 판단은 아닌지 하나님께 물어봐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용서든, 처벌이든, 하나의 죄가 또 다른 죄를 낳는 것에 불과할 뿐이다.
선으로 악을 이긴다는 것은 무엇인가? 악을 때려눕히는 것인가? 밀어내는 것인가? 제거, 소멸시키는 것인가? 승부, 게임이라면 격투기인가, 스모인가, 전투 시뮬레이션인가?
내 생각엔 테니스나 달리기 쪽에 가깝다. 하수(下手)의 선(善)은 악(惡)과 치고받는 격투기일 뿐이다. 중수의 선이 테니스 선수라면 고수의 선, 지극한 선은 달리기 선수다. 지척에서 적의 눈을 노려보며 그 얼굴을 향해 주먹을 날리는 선(善)은 하수다. 관중 앞에서 멋진 플레이로 포인트를 올려 전광판의 숫자를 늘리는 선은 중수다. 오직 자신만의 트랙에서 결승선을 바라보고 자신과의 승부를 펼치는 선이 고수다. 어느새 승부를 떠나 한계에 도전하고 완전함을 추구하는 것이 고수다.
하수는 맞닥뜨린 적을 본다. 중수는 지켜보고 있는 인간을 본다. 고수는 도달해야 할 하나님을 본다. 복수와 심판을 위해 굳이 악인과 나뒹굴 필요는 없다. 악인이 쓰던 반칙을 쓰고, 악인이 들었던 칼을 들어서는 악인과 다를 바 없다. 의인은 의인의 길이 있다. 의인의 방식이 있고 의인의 칼이 있다. 그리고 의인에겐 하나님의 정의에 대한 신념과 믿음이 있다. 뱃길을 안내해주는 북극성처럼, 고개를 들어 쳐다볼 수 있는 밤하늘의 별이 있다.
그 별을 부지런히 따라가다 보면 어느새 승리하게 되어 있다. 하나님의 정의와 영광에 다가가 있다. 악인이 거침없이 악의 길을 가듯이 의인은 거침없이 의의 길을 간다. ‘악인이 마련한 장소에서 악인의 방식으로 싸우지 말고, 의인의 방식으로 의인의 길을 가십시오. 악에게 지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십시오.’
13장 1절
누구든지 국가의 권세 잡은 사람들에게 복종하십시오. 하나님께서 세우시지 않은 권세란 없습니다. 세상에 있는 권세는 다 하나님께로부터 나왔습니다.
3절
의로운 일을 하는 사람에게는 통치자들이 두려움의 대상이 아니지만, 악한 일을 행한 사람에게는 두려움의 대상입니다.
4절
통치자는 여러분에게 유익을 주기 위해 일하는 하나님의 일꾼입니다. 그는 악을 행하는 사람에게 벌을 내리는, 하나님의 진노를 집행하는 사람입니다.
현대 민주주의 사회에서는 재해석해야 할 구절이다. 정치체제가 바뀌어 왕도 없어졌고 지도자를 통치자라 부르지도 않는다.
‘이신칭의’의 믿음이 올바른 믿음이란 대전제가 있듯이 여기서의 권세, 통치자 역시 하나님의 뜻에 부합하는 정의로운 권세, 통치자란 대전제가 있다. 당연한 말이지만 불의한 통치자, 하나님의 의에 대적하는 권세를 말함은 아니다.
3절에 보듯이 악한 일을 행한 사람이 두려워하는 의로운 통치자인 것이다. 4절에 보듯이 하나님의 뜻과 진노를 집행하는 하나님의 일꾼인 것이다. 바꾸어 말한다면 ‘불의한 통치자, 하나님의 뜻에 대적하는 권세에는 불복종해도 된다.’라고 해석할 수 있다. 한발 더 나아가 마땅히 불복종해야 하고, 두발 더 나아가 저항하여 싸우라는 데까지 해석할 수도 있다.
로마서다. 제국의 심장인 로마에 있는 교회에 보내는 편지다. 바울이 이 구절을 쓴 이유는 이것과 관련되어 있지 않을까? 지상의 권세와 불화하지 말고, 경거망동하지 말고, 지혜롭게 처신하라는 권고일 수 있다. 하나님 나라의 확장, 예수님의 복음 전파가 최대관심사고 소명인 바울에겐 중요한 현실적 문제다.
“권력을 두려워하지도 말고 깔보지도 말라”(노무현) 이것이 민주주의에 적합하게 보다 현대적으로 재해석한 견해와 입장이라고 생각된다.
14장 1절
믿음이 약한 사람을 받아들이고, 논란이 있는 문제에 단언을 내리지 마십시오.
2절
자기가 가지고 있는 믿음에 따라 모든 음식을 먹는 사람이 있지만, 믿음이 약하여 채소만 먹는 사람도 있습니다.
3절
모든 음식을 먹는 사람은 채소만 먹는 사람을 업신여기지 마십시오. 또 채소만 먹는 사람은 모든 음식을 먹는 사람을 비난하지 마십시오.
14장 14절
내가 주 예수님 안에 있는 사람으로서 확신하기로는, 그 자체로 부정한 음식은 하나도 없습니다.
17절
하나님의 나라는 먹는 일이나 마시는 일이 아니라, 성령 안에서 누리는 의와 평강과 기쁨입니다.
22절
스스로 옳다고 믿는 일을 할 때, 자신을 정죄하지 않는 사람은 복 있는 사람입니다.
23절
그러나 의심을 하면서 먹는 사람은 정죄를 받은 것입니다.
초대교회에서 교리적, 율법적으로 가장 문제가 되었던 것은 먹는 것, 할례, 안식일 등이었다. 이에 대한 바울의 기본입장은 다음과 같다. ‘자신의 믿음과 양심에 비추어 거리끼지 않다면 무방하다.’ ‘각자의 위치에서 각자의 믿음을 지키면 무방하다.’ 의심과 죄의식이 일어나지 않는다면 무방하다는 것이다. 이러한 유연한 입장은 당시 유대율법에 비해 매우 진보적이고 심지어 자유주의적인 태도였다.
하지만 바울이 마냥 자유주의적이고 느슨했던 것만은 아니다. 결혼보다는 금욕적인 독신생활을 성도들에게 권하였고 스스로에겐 매우 엄격하여 평생 고기를 먹지 않을 것이라고 공개적으로 선언한다. 이는 바울의 믿음이 약했기 때문이 아니라 성도들이 걸려 넘어지지 않도록 하기 위함이었다. - 내가 먹는 음식 때문에 내 동료 성도들이 걸려 넘어지지 않도록 하기 위해 나는 평생 고기를 먹지 않을 것입니다.[고린도전서 8:13]
바울은 무엇을 먹든지, 무엇을 입든지, 믿음이 흔들리지 않을 신실한 사도였다. 하나님의 사도로서, 그는 성도들에게 너그럽고 자신에겐 엄격했던 것이다.
바울은 율법의 전문가답게 기존 율법을 새롭게 정립했다. 유대율법에 얽매이지 않고 예수님의 사랑의 가르침에 입각하여 율법을 새롭게 해석, 정립하였고 그 율법을 자신에게 철저히 적용시켰다. 오직 하나님 나라의 확장을 위해 자신을 하나님과 교회와 성도들에게 온전히 바쳤던 위대한 전도자였다.
또한, 할례, 먹는 문제, 결혼 문제 등에 관하여 교리서에 쓰여 있는 바울의 주장들을 보면 바울은 매우 합리적이고 전략적인 인물이었음을 알 수 있다. 그는 율법, 교리의 중심을 놓치지 않으면서도 유연성을 발휘하여 실용적으로 접근했다. 이러한 그의 태도는 기독교가 제국 방방곡곡, 이방인들에게까지 전파되는데 큰 도움이 되었을 것이다. 그는 예수님의 가르침대로 비둘기처럼 순결하고 뱀처럼 지혜로웠던 능력 있는 전도자였다.
바울은 교회 내의 분열과 다툼을 경계, 걱정하고 마지막 인사로서 로마서를 끝맺는다.
로마서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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