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읽기 0094 : 로마서 7장~12장(16절)
7장 7절
율법이 없었다면, 나는 죄가 무엇인지 알지 못했을 것입니다. 율법이 “탐내지 마라”고 말하지 않았다면, 나는 탐내는 것이 무엇인지 알지 못했을 것입니다.
11절
죄가 계명을 이용하여 기회를 엿보아 나를 속였고, 그 계명으로 나를 죽였습니다.
13절
죄가 죄인 것으로 드러나도록 하기 위해서 죄는 선한 것을 이용하여 나에게 죽음을 가져왔습니다. 그리하여 죄는 계명을 통해 한층 더 죄의 참모습을 드러내게 된 것입니다.
7장 21절
선을 행하려는 마음은 나에게 있지만, 악이 나와 함께 있다는 것입니다.
25절
나는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법에 복종하는 반면, 죄악된 본성으로는 죄의 법에 복종하고 있습니다.
내 자신이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육신으로는 죄의 법을 섬기노라.
바울은 그리스도인들을 핍박하고 잡아들이던 사람이었다. 바리새파에 속하여 율법에 해박하였고 또한 충실하였다. 그런 그가 다마스쿠스 사건 이후 죄를 회개한다. 7장 7절 이하는 그러한 자신의 과거에 대한 회상, 고백이라고도 볼 수 있다.
사탄의 유혹과 시험이 있고 인간의 죄악된 본성이 있다. 그것이 호응하여 죄를 짓게 된다. 게다가 인간에겐 그 어떤 본성보다도 강력한 ‘호기심’이라는 게 있다. 하지 말라고 하면 더 하고 싶다. 보지 말라고 하면 더 보고 싶다. 죄악된 본성과 호기심은 너무도 강력해서 굳이 사탄이라거나 유혹, 시험, 함정이란 것들이 필요할까 싶을 정도다.
‘죄의 참모습’[13절]은 어떤 모습인가? 죄는 기회를 엿보아 계명을 이용하여 들어온다. 그 계명은 최고의 미사여구로 치장된 아름답고 준엄한 진, 선, 미의 모습일 때도 있다. 죄는 선한 것을 이용하여 죽음을 가져온다. 그럼으로써 죄가 죄인 것을 한 층 더 드러내게 된다.
사기꾼들은 법에 밝다. 법 없이도 살 사람도 법전을 읽다보면 모르고 있던 온갖 범죄와 더러운 짓거리를 미루어 알게 된다. 소박한 사람은 물들고 사기꾼들은 똑똑해진다. 그들에겐 새로운 영역과 수법, 도망칠 구멍을 제시해주는 좋은 참고서다. 입은 정직을 말하고 얼굴은 진실한 표정이지만 손은 부지런히 사기를 치고 있다. 만약 법을 전공한 판사, 검사, 변호사들이 사기꾼의 길을 간다면 열에 아홉은 성공할 것이다. 거기에 약간의 수완과 대담함과 배포까지 겸비하면 대성할 것이다.
죄의 속모습, 본모습은 흉하고 더럽지만 그 겉모습은 선하고 깨끗하다. 죄의 겉모습은 단정하며 그 행동은 부지런하고 성실하다. 바로 회칠한 무덤이다. 악한 속모습을 한 선한 겉모습이 ‘죄의 참모습’이다.
‘죄악된 본성’[25절]을 한글개역판에서는 ‘육신’으로 번역하고 있다. 곧 마음과 육신, 성령과 육신의 대립적 관계로 보고 있는 것이다. 육신은 탐욕을 쫓기 쉽고 죄악이 들기 쉬운 취약한 존재이므로 ‘육신’을 곧 ‘죄악된 본성’이라고 볼 수도 있으나 개인적으로는 ‘죄악된 본성’이 더 적절한 번역이란 생각이다. 육신은 불완전하고 약한 존재이긴 하나 동시에 가치중립적인 존재이기 때문이다. (성령이 아닌) 마음의 어딘가에서도 분명 죄악이 잉태되고 발현되기 때문이다.
육신을 죄악 그 자체로 보고, 둘을 완전히 동일시한다면 우리는 우리의 육신을 자학하고 결국엔 멸해야 할 것 아닌가? 우리의 육체를 탓하고 저주해야 할 것 아닌가? 육신의 향락, 쾌락만을 쫓는 것도 나쁘지만 육체를 스스로 학대하고 죄악시하는 것 역시 좋지 않다. 모두 주님의 뜻에 어긋나는 양 극단일 것이다.
육신은 욕망하고 마음은 굳세지 않다. ‘악한 것은 육신이요 선한 것은 마음이라, 약한 것은 육신이요 강한 것은 마음이라’고 주장할 수 없다. 육신과 마음을 따로 떼어 선악을 나눌 수 없다. ‘죄악된 본성’은 우리의 육체와 마음에 모두 숨어 있다. 그것은 육체와 마음에 모두 담겨져 있는 본성(本性)이다.
7장 21절 이하에 보이는 '나'는 바울 개인이나 개별적 인간이라기 보다는 모든 인간, 보편적 인간들의 모습을 가리키는 의미가 크다. 어쩌면 바울은 현재의 자신에 대해서 말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예수님의 음성을 듣고 그 성령으로 세례를 받은 사도 바울, 제국의 방방곡곡을 돌며 목숨을 걸고 예수님의 가르침을 증언하고 있는 자신마저도 ‘죄악된 본성’에서 영원히, 완전히, 자유로울 수 없는 '인간'임을 겸손하고 솔직하게 고백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인간은 ‘선한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법에 복종하는 반면, ‘죄악된 본성’으로는 죄의 법에 복종하는 존재인 것이다. 이것이 '인간의 참모습'이다.
8장 3절
율법이 죄의 본성 때문에 연약하여 할 수 없었던 것을, 하나님께서는 죄를 없애기 위해 자신의 아들을 죄 있는 사람의 모양으로 보내심으로써 행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죄인들 속에 거하고 있는 죄에 대해 유죄 판결을 내리셨습니다.
8장 3절의 ‘죄의 본성’에 해당하는 개역판 구절 역시 ‘육신’이다. 역시 ‘죄의 본성’이란 번역이 더 적합하다는 생각이다.
하나님이 ‘죄 있는 사람의 모양’으로 보내신 자신의 아들, 곧 예수님의 모양은 어떠하셨나. 예수님은 인간의 육신만이 아닌 인간의 감각, 감정 역시 갖고 계셨다. 울고, 웃고, 화내고... 고뇌하고 번민하고... 고통에 아파하고 신음하는 나와 똑같은 인간의 모양으로 오신 것이다. 인간의 육신만이 아니라 마음까지 갖고 오셨다. 예수님은 단순히 인간의 몸만 빌려 오신 것이 아니라, ‘인간’으로 오신 것이다. 그럼으로써 인간을 대신해 속죄하고 인간을 구원하셨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아들을 죄 있는 사람의 모양으로 죄인들 속에 내려 보내 대신 속죄케 함으로서 죄를 없애신 것이다. 죄인들 속에 거하고 있는 죄에 대해 유죄 판결을 내리신 것이다. 곧, 죄인들은 용서하시고 죄는 벌하셨다. 죄인들은 살리시고 대신 예수님께 십자가를 지운 것이다.
12장 3절
여러분은 여러분 자신에 대하여 마땅히 생각해야 할 것 외에 다른 것을 생각하지 마십시오. 여러분은 하나님께서 각자에게 주신 믿음의 분량대로, 냉철한 판단을 가지고 자신에 대하여 생각하십시오.
4절
사람에게 몸이 있고 그 몸에는 많은 지체가 있어, 그 지체들이 하는 일이 각기 다른 것처럼
5절
우리도 여럿이지만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을 이루었고, 한 사람 한 사람이 서로에 대해 지체로서 연결되어 있습니다.
6절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은혜에 따라 저마다 다른 선물을 받았습니다.
8절
격려하는 선물이면 격려하는 일로, 남을 구제하는 선물이면 너그럽게 나누는 일로, 지도하는 선물이면 열성을 다해, 자선을 베푸는 것이면 기쁨으로 그 선물을 사용하십시오.
주님은 머리고, 기독교인은 지체다. 주님과 기독교인, 기독교인과 기독교인은 교회 안에서 하나다. 지체는 머리에 속해 있고 지체와 지체는 한 몸으로 연결되어 있다. 하나님 앞에선 단독자로, 같은 성도들 앞에선 평등한 공동체로 살아야 함을 말하고 있다.
각자 갖고 있는 믿음의 분량대로, 각자 받은 은사대로, 열성을 다해 기쁨으로 섬기고 그 선물을 사용하면 된다. 각자 자신에 대하여 마땅히 생각해야 할 것 외에 다른 것을 생각할 필요가 없다. 형제의 믿음에 대해, 은사에 대해, 왈가왈부할 일이 아니다. 남을 함부로 판단하고 정죄할 일이 아니다.
이것은 교회 안에서뿐만 아니라 교회 밖, 세상에 나가서도 마찬가지다. 예수님의 복음을 전파하고 믿음을 굳게 지키는 것은 좋으나 세상에 오만과 독선으로 비춰서는 안 된다. 배타적으로, 쓸데없이 적을 만들 필요가 없다. ‘예수천국’이라고 권면하고 주장하는 것은 좋으나 ‘불신지옥’이라고 욕하고 윽박지르는 것은 곤란하다. 이것은 신실한 것이 아니라 어리석은 것이다.
뱀처럼 지혜롭고 비둘기처럼 순결하여라.[마태 10:16] 예수님이 애정과 걱정을 담아 제자들에게 당부하신 말씀이다. 우리는 도리어 꿩처럼 어리석고, 코뿔소처럼 무식하지 않은가? 스스로의 교만과 어리석음부터 되돌아봐야 한다.
하나님에 대한, 형제자매들에 대한, 세상에 대한, 우리의 태도는 어떠한가? 뜨거운가, 차가운가? 메마른가, 기름진가? 느슨한가, 갑갑한가?... 믿음은 순종의 결단이다. 우리의 자유를 하나님의 구속으로 스스로 묶는 것이며, 그 구속 안에서 더 큰 자유를 얻는 것이다. 우리가 하나님의 구속 안에서 자유로운 것과 같이, 믿지 않는 사람들의 자유를 존중하면서 애정과 관심을 잃지 않고 복음을 전해야 한다.
‘자신 외에 다른 것을 생각지 마라.’는 자신만 생각하라는 말이 아니다. ‘오직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로움을 얻는다.’ 할 때의 믿음은 세상과 동떨어진 자신만의 주관적, 개인주의적 믿음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이 “Don't touch me! 나는 나, 너는 너! (관심 끄고) 너나 잘 하세요!”일 리는 없다. 하나님 앞에 섰을 때 나와 하나님은 1:1의 관계지만 그 관계는 교회와 세상 안에서 검증받는다.
교회는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다. 넓게는 모든 인간과 세상은 그리스도의 사랑 안에서 하나다. 교회와 세상과의 관계도 되돌아봐야 하지만 교회 내부의 우리의 모습도 되돌아봐야 한다. 교단과 교단, 교회와 교회, 성도와 성도들의 지체와 지체간의 관계가 서로 관심과 애정을 가지고 서로의 믿음을 굳건히 세워주는 이상적이고 화목한 관계였는가? 반성할 점이 많다.
친절하지 않거나, <친절한 금자씨>
교회가 세상에게 들어서는 안 될 말
12장 13절
성도들에게 필요한 것을 나눠 주십시오. 나그네를 후하게 대접하십시오.
15절
기뻐하는 사람들과 함께 기뻐하고, 슬퍼하는 사람들과 함께 슬퍼하십시오.
16절
서로 한 마음이 되십시오. 교만한 마음을 품지 마십시오. 하찮아 보이는 사람들과도 기꺼이 사귀십시오. 스스로 지혜 있는 척하지 마십시오.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은 어떠해야 하는가? 교만치 않고 이웃을 사랑해야 한다. 먼저 스스로를 돌아보고 이웃에 대한 애정과 관심을 잃지 말아야 한다. 항상 나누고 함께하는 것에 인색하지 말아야 한다.
무엇보다 사랑이 가장 소중하나 그것이 밖으로 나타나는 최고의 구체적 덕목은 겸손이다. 아무리 돈을 주고, 쌀을 주고, 사랑과 자선을 베푼대도 겸손치 않고 동네방네 유세하며 호들갑을 떤다면 난센스다. 존경과 인정을 받지 못한다.
그리스도인이 갖춰야 할 최고의 덕목은 겸손이다. 경계해야 할 최고의 위험은 교만이다. ‘자랑치 마십시오. 스스로 지혜 있는 척하지 마십시오.’ 지혜뿐만이 아니다. 누구를 만나든지 겸손하라. 주눅 들지 말고 용감하고 떳떳하되 항상 신중하고 겸손하라.
누구든지 나보다 더 부자고, 나보다 더 귀하고, 나보다 더 힘이 세고, 나보다 더 박식하고, 나보다 더 지혜롭고, 나보다 더 사려 깊고, 나보다 더 선하고, 나보다 더 잘난 것처럼 대하라. 내가 아는 것을 상대도 알고 있고, 내가 갖고 있는 것을 상대도 갖고 있다는 가정 하에 대하라. 처음 본 사람이든, 알고 지내던 사람이든, 이렇게 대하면 실수와 허물과 부끄러움이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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