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몬, 때론 먹의 향내가 나는 글과 음악 그리고 사람

성경, 신앙생활

성경읽기 0097 : 고린도전서 7장~14장

어멍 2011. 9. 6. 23:41

    성경읽기 0097 : 고린도전서 7장~14장



7장 8절

여러분들도 나처럼 결혼하지 않고 지내는 것이 여러분에게 좋습니다.

9절

그러나 자신을 절제할 수 없거든 결혼하십시오. 욕정에 불타는 것보다 결혼하는 편이 낫습니다.

28절

결혼한다고 해도 죄를 짓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결혼한 뒤에는 이 세상에서 겪는 환난을 맞이하게 될 것입니다. 나는 여러분을 아껴서 이런 말을 하였습니다.

32절

나는 여러분이 마음 쓰는 것 없이 살기를 바랍니다. 결혼하지 않은 남자는 어떻게 하면 주님을 기쁘시게 할까 하고 주님의 일에 마음을 씁니다.

33절

그러나 결혼한 남자는 어떻게 하면 아내를 기쁘게 해 줄까 하며 세상일에 마음을 쓰게 됩니다.

38절

그러므로 자기가 약혼한 처녀와 결혼을 하는 것도 잘하는 것이지만, 결혼하지 않는 것은 더 잘하는 것입니다.

 

    결혼하는 것은 좋다. 결혼하지 않는 것은 더 좋다. - 바울의 말씀이다. 왜냐하면 결혼하지 않으면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일에 매진하기가 더 쉽기 때문이다. 바울은 철저히 하나님을 섬기기 위한 사도의 입장에서 말하고 있다.

    개인적으로, 원칙적으로, 어떤 종교든지 모든 성직은 독신이 더 적합하다고 생각한다. 바울의 말처럼 아내와 남편과 자식이 딸리면 몸과 마음이 거기에 메이기 때문이다. 세상일에서 자유롭기가 쉽지 않기 때문이다. 거의 불가능하다고 본다. 바울이 지금 여기에 돌아온다면 목사님보다는 신부님을 택할 것이다.

    일반 성도, 생활인들의 삶을 좀 더 잘 이해할 수 있다는 점에서 결혼이 목회자의 길에 도움을 주는 장점이 될 수는 있다. 하지만 일상적 삶의 경험은 종교인의 덕목이라기보다는 정치인의 덕목이다. 가장 세속적인 것을 다루는 정치인은 연애도 해보고 돈도 벌어보고 결혼도 해볼 필요가 있다. 반면 세속과 어느 정도 거리를 둬야 하는 성직에 있어서는 결혼은 장점보다 단점이 더 많다는 것이 개인적 생각이다.



9장 3절

나를 비판하는 사람들에게 나의 입장을 이렇게 밝힙니다.

4절

우리에게 먹고 마실 권리가 없습니까?

9절

“곡식을 타작하는 소의 입에 망을 씌우지 마라.” 하나님께서 소를 생각해서 이 말씀을 하신 줄 아십니까?

11절

우리가 여러분에게 영적인 것을 뿌렸다면, 우리가 여러분이 갖고 있는 물질을 거두어들인다고 해서 지나치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성도들이 바울이 너무 많이 먹는다고 뭐라고 하였나? 아니면 성도들이 바울에게 너무 부당하고 인색하게 굴었나?

    바울은 서운하다. 억울하다. 어쩌면 화가 나 있다. 여기서 말하는 ‘우리’는 영적 지도자, 사도들이다. 목회자들이다. ‘(우리는) 모욕을 당하여도 다정한 말로 대답하였습니다. 바로 이 순간까지 우리는 세상의 쓰레기와 만물의 찌꺼기가 되었습니다.’[고린도전서 4:13]


    바울이 말하는 바는 모든 성직자들의 고충이기도 하다. 어쩌면 숙명 같은 것이다. 훌륭해야 한다. 거룩해야 한다. 화내지 말아야 한다. 금욕해야 한다. - 자신을 버려야 한다. 먹고 싶은 것도 못 먹고, 입고 싶은 것도 못 입는다. 평범한 인간이 아닌 성인(聖人)이어야 한다. 어쩌면 인간이라기보다 신의 모습에 가까워야 한다. 바울을 따르고 아볼로를 따르며 때론 신처럼 받들다가도 조금만 빈틈을 보이면, 실수라도 하면 가차 없다. 용서 없다.

    영화 <캐리비안의 해적>에서 주인공이 오지의 미개한 원주민에게 잡힌 후 그들에게 왕 대접을 받는다. 원주민들은 그에게 큰 절을 하고 좋은 옷을 입히고 왕관을 씌우며 하늘에서 내려온 신인 양 경배한다. 그는 먹고 마시며 즐거워하지만 곧 죽임을 당해 제물로 받쳐질 것을 알고는 줄행랑을 친다. 결국 그는 자신에게도, 원주민들에게도, 신은 아니었다. 인간은 신이 아니다. 신이 될 수 없다. 인간에게 하나님의 것을 요구할 수 없다.


    사도, 목회자들을 대하는 평신도들의 태도는 어떠해야 하는가? 하나님처럼 떠받드는 것도 곤란하고, 제단에 바쳐진 제물처럼 일방적인 희생과 금욕을 강요해서도 안 된다. 하나님 안에서는 기본적으로 모두 평등한 존재다. 인간이다. 꼴찌가 첫째 되고, 첫째가 꼴찌 된다. 다만 평등 안에서 영적 지도자, 인도자임을 인정하고 존경해야 한다. 특별히 선택된 분들이다. 소명을 가지고 많은 훈련과 기도를 한 분들이다.

    ‘주님의 종’이라 해서 건물을 지어주고, 필요이상의 좋은 옷, 고급차를 주는 것도 곤란하지만 평균이하의 궁핍하고 금욕적인 삶을 강요해서도 안 된다. 최소한의 품위 유지와 경제적 삶은 보장해주어야 한다. 인간적으로 이해하고 신앙적으로 존경해야 한다.


    여러분은 무엇을 더 원하십니까? 내가 여러분에게 갈 때, 채찍을 가지고 가는 것이 좋겠습니까? 아니면 사랑과 온유한 심정을 가지고 가는 것이 좋겠습니까?[고린도전서 4:21]

    이 구절은 고린도교회의 문제가 생각보다 심각했음을, 그것에 대한 바울의 걱정이 생각보다 컸었음을 시사하고 있다. 파벌분쟁, 교인들 간의 소송, 음행에 대한 소문, 사도들에 대한 성도들의 비난 등 지금의 교회와 크게 다르지 않다.



9장 23절

“모든 것이 허용되었다”고 여러분은 말하지만, 모든 것이 다 유익한 것은 아닙니다. 또 “모든 것이 허용되었다”고들 그러지만 모든 것이 다 덕을 세우는 것은 아닙니다.

29절

양심은 여러분 자신의 양심이 아니라 다른 사람의 양심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왜 나의 자유가 다른 사람의 양심에 의해 판단을 받아야 합니까?

33절

나처럼 하십시오. 나는 나의 유익을 구하지 아니하고, 많은 사람들의 유익을 구하였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구원 받도록 모든 면에서 모든 사람들을 기쁘게 하려고 하였습니다.

 

    바울은 그리스도인의 자유는 자신의 믿음과 양심에 거리낌이 없다면 기본적으로 무방하다는 입장이다. 하지만 무분별한 자유, 적극적인 모든 자유는 경계한다. 모든 독서가 유익한 것은 아니다. 모든 경험이 살이 되고 피가 되는 것은 아니다. 또한 남의 믿음과 양심에 의혹을 일으키는 자유 역시 경계한다.

    자신의 양심엔 거리낄 게 없어도 믿음 약한 성도들에게 걸림돌이 되는 자유여서는 안 된다. 29절을 보면 이는 주관 없는 ‘눈치 보기’라기 보다는 도덕적, 종교적 결벽증 쪽에 가까운 느낌이다.

    내가 먹는 음식 때문에 내 동료 성도들이 걸려 넘어지게 되면 그 사람이 걸려 넘어지지 않도록 하기 위해 나는 평생 고기를 먹지 않을 것입니다.[고린도전서 8:13] 바울은 자신의 유익을 구하지 아니하고, 많은 면에서 많은 사람들의 유익을 구하였던 희생적 삶, 구도자적 삶을 산 사도였다.




예수님의 사랑의 가르침을 온 몸과 온 마음으로 실천한 사도 바울



13장 4절

사랑은 오래 참습니다. 사랑은 친절합니다. 사랑은 시기하지 않습니다. 사랑은 자랑하지 않습니다. 사랑은 교만하지 않습니다.

5절

사랑은 무례히 행동하지 않습니다. 사랑은 자기 유익을 구하지 않습니다. 사랑은 쉽게 성내지 않습니다. 사랑은 원한을 품지 않습니다.

6절

사랑은 불의를 기뻐하지 않고 진리와 함께 기뻐합니다.

7절

사랑은 모든 것을 덮어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소망하며, 모든 것을 견뎌냅니다.

8절

사랑은 영원합니다. 예언은 있다가도 없고, 방언도 있다가 그치며, 지식도 있다가 사라질 것입니다.

13절

그런즉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그 중에서 가장 위대한 것은 사랑입니다.

 

    달리 덧붙일 말이 필요 없는 유명하고 아름다운 구절이다. 진리의 말씀이다.

    내가 사람의 방언과 천사의 말을 하더라도 내게 사랑이 없다면, 나는 울리는 종과 시끄러운 꽹과리와 다를 게 없습니다.[고린도전서 13:1] 내가 예언하는 선물을 받고, 모든 비밀과 모든 지식을 헤아리고, 또 산을 옮길 만한 믿음을 가지고 있다 하더라도 내게 사랑이 없다면, 나는 아무 것도 아닙니다.[13:2] 내가 내 모든 재산을 나누어 주고 내 몸을 불사르게 내어 준다 하더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가 얻는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13:3]



14장 19절

나는 교회에서 방언으로 만 마디를 말하는 것보다 알아들을 수 있는 언어로 다섯 마디를 말하기를 원합니다.

22절

방언은 믿는 사람들이 아니라 믿지 않는 사람들을 위해 주신 표적이지만, 예언은 믿지 않는 사람들이 아니라 믿는 사람들을 위해 주신 것입니다.

23절

만일 모든 교회가 한 자리에 모여서 저마다 방언으로 말한다면, 깨달음이 적은 사람이나 믿지 않는 사람이 교회에 들어와서는 여러분을 정신 나갔다고 하지 않겠습니까?

39절

예언하기를 간절히 바라십시오. 그리고 방언으로 말하는 것을 막지 마십시오.

40절

다만 모든 것을 적당하게 하고 질서 있게 하십시오.

 

    믿지 않는 세상 밖에서 보기에 방언은 정신 나간 것처럼, 예언은 점쟁이 흉내처럼 보일 수도 있다. 예전의 내가 그랬다. 교회에 나가며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 지금도 이해되지 않는 점, 알 수 없는 구석이 남아 있는 것이 사실이다. 내가 잘 알지 못하니 말할 것이 없다.

    내겐 방언의 능력도, 통변의 은사, 예언의 은사도 없다. 깊은 기도에 이르게 되면 방언을 하게 되고, 믿음이 더 깊어지면 그것을 통변할 수 있게 되고, 더 더 깊어지면 예언까지도 할 수 있다는데... 나에겐 깊은 기도마저도 어렵다. 입술은 얼어붙고 머릿속엔 온갖 상념들이 가득하다.

    

    주님. 제게서 잡다한 것, 쓸데없는 것, 악한 것들을 떼어놓아 주시옵소서. 오직 믿음으로 나아가, 깊은 기도 속에서 주님을 만나는 은혜와 영광을 주시옵소서.

    주님. 제게 은사를 주시기를 간절히 바라옵니다. 제가 부족한가요?

    그렇다면 제게 깊은 기도를 주시기를 간절히 바라옵니다. 혹 제가 불순한 것에서 자유롭지 않은가요?

    그렇다면 제게 지혜라도 주시기를 간절히 바라옵니다. 혹 제가 교만한가요?

    그렇다면 제게 다만 사랑을 받고 사랑을 하는 행복하고 값진 삶을 주시기를 간절히 바라옵니다. 오직 예수님의 가장 거룩하고 위대한 유산인 사랑을 제게 주시기를 간절히 바라옵니다. 예언은 있다가도 없고, 방언도 있다가 그치며, 지식도 있다가 사라진다고 했습니다.

    사랑! 그것을 제게 주시옵소서. 아멘.

 

    고린도전서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