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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 신앙생활

성경읽기 0034 : 욥기 38장~42장

어멍 2010. 11. 12. 22:33
 

    성경읽기 0034 : 욥기 38장~42장



38장 1절

그 때 여호와께서 폭풍 가운데서 욥에게 말씀하셨습니다.

11절

“그 때 나는 바다를 향하여, ‘너는 여기까지만 오고, 더 이상 넘치지 마라! 너 교만한 파도야, 멈추어라!’하고 명령했다.

이르기를 네가 여기까지 오고 넘어가지 못하리니 네 교만한 물결이 여기 그칠지니라 하였었노라

When I said, 'This far you may come and no farther ; here is where your proud waves halt'


40장 2절

너는 아직도 전능자와 논쟁하려 하느냐? 나, 하나님을 비난하는 사람은 대답하여라.

9절

네가 하나님처럼 강하단 말이냐? 네 목소리가 천둥 같단 말이냐?

12절

교만한 자들을 찾아서 겸손하게 굴복시키고 악인들을 그 자리에서 짓밟아 보아라.

14절

그렇게 하면, 나도 네 힘이 너를 구원할 수 있다고 인정하겠다.”

 

    38장에 와서 드디어 하나님이 욥에게 응답하신다. 38장 11절은 유명하기도 하려니와 많은 것을 의미, 시사하고 있어 따로 개역한글판과 NIV 영어성경을 올려봤다. 이 구절은 하나님이 땅과 하늘, 해와 별, 구름과 바다, 바람과 번개 그리고 그 안의 모든 생명들을 지으신 창조자이자 빛과 어둠, 생과 사를 포함한 모든 것을 관장하는 절대주권자라는 것을 주장하는 구절의 일부이다. 하지만 긴장감이 있는 멋진 표현이기도 하려니와 여러 의미로 해석, 인유될 수 있다.

    오래 전에 읽었던 댄 브라운의 소설 <다 빈치 코드>에서 이 구절이 인상 깊게 인유된 것이 기억난다. 성배를 둘러싸고 이를 지키려는 시온수도회와 뺏으려는 오푸스데이, 이 두 비밀결사체 사이의 추격전을 그린 재미난 소설이다. 성배를 뒤쫓는 오푸스데이의 조직원이 성당을 뒤져 찾아낸 단서에는 달랑 성경구절 한 줄만이 적혀있는데 바로 이 구절이다. “여기까지는 와도 좋지만 더 이상은 넘어오지 마라!” 좀 더 직설적이고 강력한 번역이다.

    욥기 내에서는 그 대상이 바다가 될 수도 있고 사탄이 될 수도 있고 욥 자신이 될 수도 있다. 사탄의 첫 시험 때 하나님은 사탄에게 욥의 “몸에는 손대지 마라!”고 하신다.(1장 12절) 두 번째 시험 때는 “생명만은 건드리지 마라!”고 하신다.(2장 6절) 사탄이 욥의 생명을 거두려 하였다면 하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을 것이다. - “더 이상은 넘어오지 마라!”

    욥은 첫 재앙을 당한 뒤에도 하나님을 원망하지 않는다. 하지만 두 번째 재앙을 당한 후 고통과 슬픔을 못 이겨 하나님을 원망하고 자신의 생일을 저주하며 허무해한다. 아파하다가 슬퍼하다가 애원하다가 원망하다가 종국엔 저주하게 될 수도 있다. - “더 이상은 넘어오지 마라!”




영화로도 만들어진 <다 빈치 코드> 2006년작



    의미를 보다 확장하자면 그 대상은 교만한 인간, 끝간데 없는 악인, 신의 영역을 넘보는 과학, 인류문명 전체로 해석할 수도 있다. 생명을 창조하려는 생명공학, 우주의 근원을 밝히려는 천문학, 스스로 파멸을 부를 수도 있는 원자폭탄 등의 무기과학이다.

    개인으로서의 인간은 나약하다. 하지만 조직은 강력하다. 집단은 더더욱 강력하다. 혼자서는 비행체에 생명을 실어 우주로 날려 보낼 수 없지만 축적된 지식을 바탕으로 화학자, 물리학자, 생물학자, 기계공학자가 협동하면 가능하다. 멀지 않은 미래에 지구의 자원이 고갈되면 영화 <아바타>처럼 인류는 자원 확보를 위해 우주식민지를 찾아 나설지도 모를 일이다. 하지만 과학과 문명의 발달이 인류지성의 발달, 인간영성의 발달을 담보하지는 않는다.

    인류의 역사, 과학문명의 발달 자체가 하나님의 권능, 신의 영역을 야금야금 빼앗는 역사였다. 언제까지, 어디까지 가능할까. 교만한 인간, 맹목적인 집단은 결정적인 순간에 지성과 자제력을 발휘할 수 있을까. 하나님을 향한 경외심과 믿음을 회복할 수 있을까. 하나님이 설정하신 마지노선을 넘었을 때 개인과 인류는 구원을 받을 수 있을까.

    아무리 힘센 인간, 강한 집단이라도 하나님을 대적할 순 없다. 아무리 과학문명이 발달하더라도 그것이 우리의 영혼을 위로하진 못한다. 우리를 구원하지 못한다. 아무리 잘난 인간이라도, 엄청난 위업이라도 하나님의 인정을 받을 수는 없다.

    “여기까지는 와도 좋지만 더 이상은 넘어오지 마라!”




핵폭발로 인한 버섯구름(a mushroom cloud in an A-bomb explosion)
굳이 하나님의 심판이 필요치는 않다.



41장 1절

(여호와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네가 낚시 고리로 악어를 끌어 낼 수 있겠느냐? 끈으로 그의 혀를 맬 수 있겠느냐?

15절

그 등은 방패들이 서로 단단히 연결되어 늘어선 모습과 같고

18절

재채기와 함께 번갯불이 번쩍이고, 그 두 눈은 동틀 때의 쏟아지는 햇살 같구나.

19절

입에서는 타는 횃불이 나오고 불똥이 튀어 나온다.

20절

그 두 콧구멍에서 연기가 뿜어 나오니, 마치 끓는 솥에서 나오는 것 같구나.”

 

    41장에 나오는 악어는 바다에 산다고 생각되는 거대한 동물로 곧 레비아탄(Leviathan, 히브리어로 리워야단)이다. 고대인들은 이것을 혼돈을 가져오는 신화 속의 짐승으로 이해했는데 비슷한 것으로는 머리가 일곱 개인 로탄(Lotan)이란 짐승도 있다.

    성경뿐 아니라 서구 문학에서도 자주 등장하는 짐승인 레비아탄은 주로 타락한 세상, 혼돈, 악마적 세력 등을 상징하지만 욥기에서는 이런 의미보다는 인간이 다룰 수 없는 엄청난 힘을 지닌 피조물로 말해지고 있다.




Destruction of Leviathan(레비아탄의 파멸) - Gustave Dore(귀스타브 도레)



42장 3절

(욥이 여호와께 대답했습니다.) “정말 저는 알지도 못하면서 말하였고, 깨닫지 못하는 일들을 아는 체 하였습니다.

5절

주님에 대하여 귀로 듣기만 했는데, 이제 저는 주를 눈으로 직접 보았습니다.

6절

이제 제 자신을 경멸합니다. 그리고 티끌과 재 가운데서 회개합니다.”

그러므로 내가 스스로 한하고 티끌과 재 가운데서 회개하나이다.

7절

여호와께서 욥에게 말씀을 하신 후에 데만 사람 엘리바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너와 네 두 친구는 정말 나를 화나게 하였다. 너희들은 내게 욥처럼 옳게 말하지 않았다.”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에 이은 욥의 대답과 하나님의 최종 처분이다. 이것으로 모든 대화는 끝난다.

    세 친구는 속죄를 위해 번제물을 바치게 되고 욥은 전보다 두 배나 많은 복을 받게 된다. 엘리후는 세 친구와 다르게 하나님에게 책망을 받지 않는다. 욥은 많은 재산과 친구, 이웃을 얻고 다복한 가정을 이루어 자손을 사 대까지 보면서 백사십 세까지 오래 살다가 세상을 떠난다.


    욥기는... 깊다. 바로 앞에 있는 에스더 편과 무척 대비되는 것이... 에스더가 이야기 위주의 흥미진진한 소설이라면 욥은 대화 위주의 무겁고 진지한 철학서다. 읽으면서 자연스레 사색하고 고뇌하게 된다. 또한 욥에게 동감하게 된다. 어쩌면 욥의 입장에만 치우쳐 글을 써내려 왔는지도 모르겠다. 동정심, 억강부약하려는 응원은 인지상정이니까. 똑같이 불완전한 인간, 끊임없이 수고로이 고뇌하고 때론 시험당하고 고통당하는 인간이니까.

    그래서 세 친구가 불만이다. 마치 욥이 된 양 그들의 발언이 상처에 소금이 뿌려지는 것과 같이 고통스럽다. 엘리후마저도 크게 다르지 않다. 세 친구는 죄 없는 고통은 있을 수 없다고 하고 엘리후는 하나님은 틀림이 없으시니 (끝까지) 형통하는 악인은 없고 구원받지 못하는 의인은 없다고 한다. 세 친구는 인간(human)을 탓하고 엘리후는 하나님의 완전하심을 주장한다. 그 누구도 적극적으로 욥, 지금 여기서 고통에 신음하고 있는 한 인간(man)을 위로하지 않는다. 심지어 하나님마저 왜 아무 잘못이 없는 욥에게 재앙을 주어 고통의 시험에 임하게 하였는지 야속하고 원망스럽다.

    말인즉슨 모두가 맞다. 특히 엘리후의 말은 무엇 하나 버릴 것이 없다. 만인의 귀감이요 금과옥조다. 반박할 수 없다. 하지만 고통에 찬 욥에게서 멀찍이 떨어져 공자왈 맹자왈 고담준론을 읊어대고 있는 모양새다. 하나님 역시 고통을 주시고 얼마나 인내하나, 얼마나 신실하나 관찰하시는 모양새다. 당장 아파 죽을 것 같은 이에겐 같이 울고, 욕하고 옆에 다가와 안아주며 상처를 핥아주는 것이 절실하다. 위로가 된다.

    인간의 사랑과 우정이란 것이 이토록 허약하고 쓸모없는 것이었던가... 하나님은 그토록 잔인하고 심술궂은 분이셨던가... 아~ 괴롭고 괴롭도다. 슬프고 슬프도다. 자식들은 죽고 아내는 떠나가고 친구들은 위로한답시고 와선 자기주장만 하며 상처만을 주는구나. 마지막 증언자이자 심판자이자 위로자인 하나님은 여전히 침묵하고 계시는구나...


    결국 엘리후의 말처럼 완전하신 하나님으로 하여 욥은 시험을 벗어나 더 큰 복을 받게 된다. 해피엔딩이다. 그럼 욥의 항변은 괜한 투정이었나. 끝이 해피하면 모든 것이 해피한 것인가. <개콘> 행복전도사 최효종처럼 우리는 행복한 거고, 세상은 아름다운 거고, 하나님은 자비로우신 것인가.

    인간은 스스로 구원할 수 없고 오직 완전하신 하나님만이 우리를 구원할 수 있다는 것. 그 분을 믿고 끝까지 신실함을 잃지 않으면 결국 구원과 안식을 얻으리라는 것. 물론 소중한 교훈, 큰 가르침이다. 하지만 뭔가 아쉽다. 뭔가 놓친 것 같다.


    내(우리)가 욥의 고통에 같이 아파하고 그에게 공감하는 것은 그의 개인적인 고통 때문만은 아니다. 욥 역시 그의 고통을 인간의 고통, 세계의 고통으로 인식을 확장하였듯이 이 세상에 살아가는 우리들은 부조리한 이 세상을 인식하고 있기 때문이다. 악인이 끝까지 형통하고 의인이 여전히 고통 받는 경우를 여기저기서 목도하고 있기 때문이다. 선이 패하고 악이 승리하는 현상은 이 현세(現世)에선 비일비재하기 때문이다.

    결론은? 길흉화복을 보고 하나님을 믿어서는 아니 된다. 욥이 고통에 신음하며 고생만 하다가 결국 그대로 죽었다면 우리는 우리의 신앙을 버릴 텐가. 이런 일이 현실에서 안 일어난다고 확언할 수 있겠는가... 믿음은 결단이다. 우리가 하나님을 믿기로 작정한 것은 복을 바라고 믿는 것이 아니라 악인의 보람과 우리의 보람이 같지 않기 때문이다. 욥이 말한 것처럼 ‘악인의 꾀를 멀리’하고 ‘악인의 계획은 나와 판이’하기 때문이다. 그래야 하기 때문이다.

    길흉화복을 쫓아 하나님을 믿는 것은 옳은 믿음이 아닐뿐더러 피곤한 일이다. 결코 길지 않은 인생에서 매순간 일희일비해서는 하나님의 뜻에 다가갈 수 없다. 넘어지면 일어서고 일어서면 또 넘어지는 인생, 길흉화복이 반복되는 인생에서 복만 바라고 하나님을 믿어서는 쉽게 넘어지며 한번 넘어지면 다시는 일어설 수 없다. 한번 하나님께 멀어지면 다시는 그 분께 돌아오지 못한다.


    욥기는 고통 받는 의인만을 그리고 있다. 하지만 그 반대편에 부귀영화의 악인이 있다. 욥기는 하나님의 허락을 받은 사탄에 의한 고통의 시험만을 그리고 있다. 하지만 그 반대편엔 사탄에 의한 쾌락의 유혹이 있다. 고통 받는 의인만큼이나 형통하는 악인 역시 우리를 좌절케 한다. 고통의 시험만큼이나 쾌락의 유혹 역시 강력하다. ‘그래서 모두가 행복하게 오래오래 잘 살았답니다’로 끝나는 디즈니 만화식 교훈이어서는 사탄이 내미는 부귀영화, 쾌락과 행복의 유혹에 취약할 수밖에 없다.

    악의 부귀는 악의 보람이다. 악의 권세는 악의 것이다. 부러워 탐할 것이 아니다. 불교에서도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라는 비슷한 경구가 있다. 하늘이 무너지고 땅이 꺼져도 아닌 것은 아닌 거고 긴 것은 긴 것이다. 세상 모든 이가 악에 물들고 그른 것을 옳다 하며 나를 버려도 끝까지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의 공의를 주장해야 한다. 어차피 인생은 주관이다. 결단이다.

    이것이 욥기가 주는 진정한 교훈, 메시지가 아닐까?!


    정의로우신 하나님. 의인에겐 축복을 악인에겐 징벌을 내려주시고, 겸손한 자는 높여주시고 교만한 자는 낮춰주소서. 의인이 하나님을 찬양하고 악인이 하나님을 경외하고, 겸손한 자가 쓰임을 받고 교만한 자가 묵상토록 하시옵소서. 의인, 악인, 겸손한 자, 교만한 자 할 것 없이 모든 이가 하나님의 뜻을 알고 그 사랑을 깨닫게 하옵소서.

    사랑과 은혜가 충만하신 하나님. 한없이 자비로우신 하나님. 저를 불쌍히 여겨 주시옵소서. 저희들을 불쌍히 여겨 주시옵소서. 이 세계와 거기에 깃든 뭇 생명들을 불쌍히 여겨 주시옵소서.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이 지으신 것이 아니옵니까.

    저희를 고통의 시험에 들지 말게 하옵시고 혹 시험하시더라도 너무 길게, 가혹하게 하지 마옵소서. 가혹하게 하시더라도 저희가 하나님을 욕하고 저주하지 않도록 하여 주시옵소서. 저희가 혹 쓰러지더라도 그대로 좌절치 말게 하옵시고 엎어져 울고 있는 저희를 불쌍히 여기시어 일으켜 세워주시옵소서. 저희가 하나님을 배반하더라도 저희를 영영, 아주 영영 버리지는 말아 주시옵소서. 하나님을 밀쳐내더라도 저희를 끌어안아 하나님 품에 품어주시옵소서.

    저희는 모든 것을 알 수 없는 유한한 인간입니다. 안다 한들 행할 수 없는 사람일 뿐입니다. 약하고 불완전한 존재입니다. 갓 태어난 아기가 울어재끼듯, 배고픈 아이가 칭얼대듯 하나님께 매달려 졸라대고 애원합니다.

    저희를 불쌍히 여기소서. 저희를 도우소서.


    욥기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