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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 신앙생활

성경읽기 0032 : 욥기 8장~21장

어멍 2010. 11. 11. 22:50
 

    성경읽기 0032 : 욥기 8장~21장



8장 4절

(빌닷이 말했습니다.) “자네 자녀들이 죄를 지은 것이 분명하네. 그래서 그 죄 값을 받은 걸세.

5절

그러니 지금이라도 하나님을 찾고, 전능자에게 자비를 구하게나.

6절

만일 자네가 깨끗하고 정직하다면, 그 분이 자네를 도와주실 걸세.

7절

그러면 지금은 보잘 것 없이 시작하겠지만, 나중에는 위대하게 될 걸세.

네 시작은 미약하였으나 네 나중은 심히 창대하리라.

9절

어제 태어난 우리가 안다면 얼마나 알겠나? 땅에 사는 우리는 그림자 같은 존재가 아닌가?”


9장 23절

(욥이 대답했습니다.) “재앙이 내려와 죄 없는 자를 망하게 해도, 그 분은 낙담하는 그를 비웃으시네.

24절

악이 세상을 지배하고 재판관도 눈이 멀었으니, 하나님이 아니시고는 누가 이렇게 하겠는가?”

 

    두 번째 친구 빌닷 역시 욥의 자녀의 죄를 추측하여 욥의 고난에는 필경 무슨 이유가 있으리라 욥을 책망한다.(차마 욥 본인을 추궁하진 못한다.) 그에게 이를 인정하고 하나님께 자비와 용서를 구하라고 한다. 말인즉슨 맞지만 욥에겐 역시 서운한 이야기, 얄미운 이야기다. 더욱이 자녀의 죄 값을 대신 치루고 있다는 얘기는 연좌제를 금한다는 하나님의 말씀에도 맞지 않는다.

    8장 7절은 개역한글판 번역으로 인구에 회자되는 유명한 구절이다. 하나님의 선포도 아니고 예수님의 축복도 아니고 욥을 논박하고 타이르는 빌닷의 입에서 나왔다는 것이 기존에 갖고 있던 상식과 달라 느낌이 새롭다. 물론 좋은 말이고 말대로 이루어져 욥은 결국 시험에서 벗어나 더 큰 복을 받아 창대하게 된다. 하지만 앞뒤 문장, 문맥과 연결하여 전체적으로 읽으면 뉘앙스가 확 달라진다. 염장질을 하자는 것도 아니고... 욥은 창대고 나발이고 당장 고통에서 벗어나고만 싶다. 결백을 증명받고만 싶다. 하나님 목소리 만이라도 듣고만 싶다.

    입춘대길 건양다경(立春大吉 建陽多慶). 봄이 다가오면 대문 앞에 써붙여 놓던 문구다. 8장 7절도 개업장, 사업장에서 목판이나 액자에 새겨져 많이 볼 수 있는 문구다. 자영업자들에게 특히 인기가 많다. 어렵게 교회를 개척하여 소박하게 첫 예배를 드릴 때, 축하하러 오는 이들 가운데도 바로 이 구절을 인용하여 축복하며 성공과 번창을 빈다. 하지만 엄밀히 얘기해서 정확한 인용은 아니며 기독교의 정수가 단지 기복에 있는 것도 아니다. 성경을 읽고 인용할 때 주의해야 할 것이 이것이다. 좋은 말이라고 앞뒤 자르고 자기 편한 대로 인용하지 말고 하나님, 예수님 말씀 위주로 엄격하고 정밀하게 전체적으로 이해하고 인용해야 할 것이다.


    욥은 역시 낙담한다. 죄 없는 자는 망하고 악이 득세하는 세상! 금년 초에 방영됐던 인기 드라마 <추노>에서 주인공 장혁의 대사가 생각난다. - “이 지랄 같은 세상!” 모든 것이 부질없고 씨잘데기 없다. 이제는 자포자기와 체념, 원망과 냉소의 심정마저 느껴진다. "악이 세상을 지배하고 재판관도 눈이 먼 이 지랄 같은 세상, 하나님이 아니시고는 누가 이렇게 하겠는가?"




때론 웃으며 때론 울며, 때론 짓궂게 때론 시크하게 내뱉던 대사 - “이 지랄 같은 세상!”



11장 2절

(소발이 말했습니다.) “말이 너무 많으니 대답을 안 할 수 없네. 그렇게 말이 많아서야 변호를 받을 수 있겠는가?

6절

오히려 하나님께서는 자네의 죄를 얼마쯤 제하시고 벌을 내리신 것 같아.”


12장 5절

(욥이 대답했습니다.) “편안하게 사는 사람은 재앙을 경멸하지. 그러나 그 발이 견고치 못한 사람에게는 재앙이 덮치지.

6절

강도들의 집은 형통하고, 하나님을 분노케 하는 자들은 평안하기 때문에 저들은 하나님을 자기 멋대로 주무른다고 생각하지.

16절

(그러나) 속는 자나 속이는 자나 모두 그 분의 능력 아래 있네.

13장 4절

자네들은 거짓말쟁이들이며 돌팔이 의사와 같군.

5절

자네들, 입 좀 다물 수 없나? 그렇게 하는 것이 현명할 걸세.

8절

그 분께 아첨을 하자는 것인가? 하나님을 위하여 변호를 한다는 것인가?

15절

비록 그 분이 날 죽이실지라도, 나는 그 분을 믿고 내 주장을 굽히지 않을 걸세."

 

    세 번째 친구 소발은 한 술 더 뜬다. 욥이 이러쿵저러쿵 말이 많다는 거다. 오히려 지은 죄보다 벌을 덜 받고 있다는 거다. 욥 역시 지지 않는다. 거짓말쟁이, 돌팔이 의사라고 힐난하며 입 좀 다물라고 한다. 논쟁이 한층 가열되어 아슬아슬하다. 이 정도면 감정싸움이다. 드잡이 직전이다.

    나 같아도 화날 일이다. 억장이 무너질 일이다. 원수에게 당하는 것보다 친구에게 당하는 것이 더 아픈 법이다. 경찰보다 검사, 검사보다 판사, 판사보다 이웃, 이웃보다 사랑하는 연인과 가족, 내 부모와 아들딸들에게 버림받는 것이 더 처참하다.

    12장 5절은 친구들을 빗댄 말이고 6절은 악인들의 형통함을 한탄하는 말이다. 하지만 16절 같이 속는 자나 속이는 자나 모두 하나님의 능력 아래 있다. 너희 세 놈도 조심하란 말이다. 아무리 하나님의 이름을 나불나불 입에 달고 살며 악행과 거짓을 서슴없이 저지른다 해도, 그럼에도 여전히 형통한다 해도 하나님을 속일 수는 없고 때가 되면 죽게 되는 유한한 존재라는 거다. 아무리 내가 잘났네 니가 잘났네 짓고 까불어도 하나님 아래 모두 같은 인간족속이라는 거다. 고난 받고 있는 나(욥)도, 책망하고 있는 네 놈들(친구들)도, 지금 어디선가 잘 나가고 있는 악인들도 다 마찬가지란 거다.


    “편안하게 사는 사람은 재앙을 경멸하지.” - 재앙을 환영하고 즐겨 벗하는 이가 누가 있겠는가. 가난, 질병, 고통, 죽음 같이 모두가 피하고 싶은 바다. 인지상정이다. 하지만 남의 재앙을 대하는 우리의 태도가 연민과 동정이 아닌 경멸이라면 얘기는 달라진다.

    시기, 질투가 인간의 본성 중에 하나라서 남 잘되는 꼴은 못 보는 것이 속 좁은 인간들의 모습이다. 보란 듯이 경멸하며 남 못 되는 꼴 보기를 더 좋아한다. 적극적으로 남을 저주하기도 하고 소극적으로 몰래 배 아파하기도 한다. 소박하게는 같은 재앙, 같은 환난이라면 이왕 다 같이 받는 조건에서는 군소리 안 할 용의도 있다. 많이 가진 자는 자신이 10, 남이 8보다 자신이 5, 남이 1을 갖는 것을 더 선호하기도 하고 적게 가진 자는 자신이 8, 남이 10보다 자신이 5, 남도 5를 갖는 것을 더 선호하기도 한다. 이것이 비루하고 속 좁은 인간들이 길흉화복을 대하는 태도이다.

    남의 재앙에는 필경 무슨 죄악이 있기 때문이요, 나의 재앙은 필경 무언가가 잘못된 것이다. 하나님의 실수나 오해인 것이 분명하다. 섣불리 남을 판단하고 정죄하며 하나님의 이름을 빌어 꾸짖는다. 하나님은 틀림이 없으시니 그 편에 서서 그 분의 이름을 빌리면 안전하다. 어쩌면 법정의 팽팽한 양 당사자 중 한명처럼 하나님은 편들어준 자신을 귀여워해주실 지도 모른다. 일종의 호가호위다. 하지만 하나님은 아첨을 좋아하지 않을뿐더러 인간과 법정에서 다투는 갑과 을의 관계도 아니시다. 땅 위의 재판관들도 아니다. 하늘의 절대주권자시다. 일찍이 십계명에서 말한 바 있다. “너의 하나님의 이름을 함부로 부르지 말라.”


    욥은 하나님께 억울함을 탄원하지만 아직 믿음을 잃지 않았다. 하나님을 원망하지만 그 분을 배반치는 않았다. 다만 하나님께 억울함을 호소하며 그 분을 갈구하고 있다. 죽기를 소원하나 죽기 전에 하나님을 보기를 더 소원하고 있다. 절대자인 하나님에게 이유든 위로든 꾸짖음이든 어떤 말이라도 듣고 싶다.

    욥은 단지 치명상을 입은 짐승처럼 울부짖고 있을 뿐이다. 몸을 웅크리고 분노와 절망의 예민한 눈동자를 이글거리고 있지만 하나님께 이빨을 드러내고 있는 것은 아니다. 죽음 직전 어머니의 얼굴이 그려지는 것처럼 그는 지금 손을 더듬어 하나님의 손길을 찾고 있는 것이다.

    “제게 말씀하시면 대답하겠습니다. 아니면 제가 묻는 말씀에 대답해 주십시오.”[13장 22절]



21장 7절

(욥이 말했습니다.) “어떻게 악인이 잘 살고, 오래 살며 권세를 누리는가?

8절

그들의 자녀도 번창하고, 손주들까지 잘 자라는 것을 보며 살고 있네.

9절

악인의 집에는 공포도 없고, 하나님의 꾸중하시는 채찍도 없는 듯하네.

10절

악인의 황소는 어김없이 새끼를 치고, 암소도 새끼를 잘 낳지.

11절

그들의 자녀들이 양 떼처럼 춤추며 뛰어놀고,

12절

소고와 수금 연주에 맞춰 노래하며 피리 소리에 즐거워하는구나.

13절

저들은 행복하게 지내다가 평안히 무덤으로 내려가지.

16절

보게나, 저들의 행복은 저들의 손에 있는 것이 아니므로 나는 악인의 꾀를 멀리한다네.

그들의 복록이 그들의 손으로 말미암은 것이 아니니라 악인의 계획은 나와 판이하니라.

19절

그 분은 그들의 자녀가 아닌, 죄를 지은 바로 그 사람들에게 벌을 내리신다네."

 

    욥이 악인의 형통함에 대해서 자세히 설명하며 다시 한 번 한탄하고 있다. 13절까지의 내용과 19절의 내용은 서로 모순된다. 죽을 때까지 행복하고 죽어서도 평안히 무덤으로 내려가는가? 죽기 전에 결단코 준엄한 벌을 받게 되는가? 욥과 세 친구가 줄곧 대립하고 있는 지점도 이 곳이다. 친구들은 이 세상에 죄 없는 재앙, (끝까지) 형통하는 악인이 있을 리 없다는 거고 욥은 자신의 결백을 주장하며 그렇지 않다는 거다. 친구들은 욥에게 무언가 죄가 있으니 찾아보라 하고 욥은 그럴 리 없다는 거다. 무엇이 맞을까?

    결론부터 말하면 욥의 말이 맞다. 실재 이 현세(現世)에서 나타나는 현상이 그러하다. 권선징악(勸善懲惡)은 윤리적 목적일 뿐! 가치보다 세력, 대의보다 대세가 횡행한다. 사필귀정보다 인과응보 쪽에 가깝고 인과응보보단 작용, 반작용 쪽에 가깝다. 하나님의 뜻 역시 축복보단 섭리의 방식으로 드러난다.

     얼핏 보면 세상에서 나타나는 현상은 윤리, 가치를 떠나있다. 한마디로 정의가 항상 승리하고 의인만이 형통하는 것은 아니다. 그럼 우리는 하나님을 믿을 필요가 없을까. 주위에 하나님을 믿지 않고(혹은 믿는 것처럼 보이면서도) 악행을 서슴없이 저지르는 사람일수록, 반칙하는 사람일수록 잘 나가는 것만 보인다면 우리는 무슨 보람, 무슨 이익이 있기에 하나님을 믿고 정의롭게 살아야 할까.


    악인은 잘 산다. 그의 자손 역시 잘 산다. 필경 생이 다하기 전에 심판을 받으리라 여겼지만... 어라! 편안히 죽는다. 좋은 곳에 묻히고 일부에겐 추앙까지 받는다. 왠지 반칙하지 않고 선비처럼 살아온 자신이 억울하다. 더구나 하는 일마다 꼬이고 큰 환란까지 당하니... 역시 하나님은 없는 것이 확실하다. --- 욥이 이렇게 생각하더라도 그를 일방적으로 탓할 수 없다.

    욥은 여전히 신실하다. 왜인가? 그가 하나님을 믿기를 작정했기 때문이다. 악인들이 굶주린 늑대처럼 탐욕스레 추구하는 그 세속적 즐거움을 보람으로 여기지 않기 때문이다. 16절을 보면 ‘악인의 꾀를 멀리 한다’고 했다. ‘악인의 계획은 나와 판이하다’고 했다. 그들이 형통한다 해도 부럽지 않고 욥 자신은 그들과 다른 종(種)이라는 거다.

    믿음은 결단이다. 믿음에는 조건이 붙을 수 없다. 율법적 도그마에 빠져서는 안 되지만 이리재고 저리재고 해서는 안 된다. 나에게 복을 주면 믿고 화를 주면 믿지 않는 기복신앙에 머물러선 안 된다. 교회 다니면 무조건 형통하고 형통치 않으면 무조건 죄인이라는 단순도식에서 벗어나야 한다.

    우리가 악이 승리하기도 하는 이 부조리한 세상에서 끝까지 하나님을 믿는 것은 이 때문이다. 세속적 성공이 인간이 추구하는 목적의 다가 아니기 때문이다. 우리가 나고 죽는 이 세상이 다가 아니기 때문이다. 똥밭에 굴러도 이승이 낫다고 하나님뿐 아니라 도덕윤리마저 내팽개치고 배고픈 소크라테스를 경멸하며 배부른 돼지가 되길 소원하는 사람도 있고 천만금을 잃어도 양심과 신앙을 지키는 것이 더 큰 기쁨인 사람도 있다. 욥은 그런 사람이었다. 설혹 이대로 죽는다 해도 하나님을 욕할 위인이 아니다.


    악인의 형통함을 부러워하는 한편 악인이 패망하고 의인이 승리하는 것을 기뻐하는 것은 우리 안에 하나님의 선한 성품, 정의로움이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불완전하고 약한 인간은 사탄의 유혹에 약하고 사탄은 하나님에 버금가게 힘이 세다. 욥에게 한 것처럼 순식간에 재앙을 일으키고 고통에 빠뜨릴 수 있다. 죽기를 소원하고 종국엔 선함을 배반하고 하나님을 저주하게 할 수도 있다.

    온통 악인들만 득세하고 반칙안하면 손해 보는 사회에서는 의인이 설 자리가 없다. 너도나도 유혹에 넘어간다. 영화마저도 악인들이 최후에 승리하며 의인을 비웃는다. 정직하고 힘센 의인이 비열하고 약한 악인에게 뒤통수를 맞는다. 마지막 장면에서 무릎 꿇은 악인의 살려달라는 애원에 가엾음을 느끼고 망설이다가 신발 속에 숨겨둔 비수에 반격을 받아 숨을 거두고 만다. 해피엔딩! 사탄과 악인의 헤피엔딩이다.

    그럼에도 선을 배반해선 안 된다. 하나님을 떠나서는 안 된다. 원수를 사랑하라 하셨듯 악인이 살라달라 애원할 때 가엾음을 느낄 수 있는 정상적이고 선한 인간으로 남아야 한다. 왜? 우리는 하나님을 믿기로 결단했으니까. 십자가의 도에서 감동을 받은 사람이니까.


    하나님은 무한하고 인간은 유한하다. 길어봤자 100년이다. 알면 얼마나 알겠는가. 우리가 “모든 것이 하나님의 섭리요 역사하심이다”라고 말할 때의 ‘모든 것’ 역시 단지 우리가 알고 있는 한도 내에서의 ‘모든 것’일 뿐이다.

    완전히 악한 사람, 완전히 선한 사람은 없다. 오직 하나님과 사탄만이 가능하다. 누가 악인이고 누가 의인인가. 무엇을 근거로 최종적으로 결론 내리는가. 노무현은 죽음으로서 심판을 받은 것인가. 이명박은 하나님께서 신실한 주의 종으로 장로대통령의 영광을 주신 것인가. 전두환은 흠 없는 이라서 그의 자손들과 함께 복락을 누리며 호의호식하고 있는 것인가. 박정희의 죽음은 주님께서 너무 과하게 심판하셨다 여겨 박근혜로 하여금 차기 대권의 반열에 올려놓으신 것인가.

    그 누가 온전히 알겠는가. 한 사람의 죽음, 그 종말로도 모든 것을 종결지어 판단할 수 없다. 그래서 역사를 배워야 한다. 하지만 그로서도 충분치 않다. 이성계가 널리 인간에게 유익한 더 진보한 유교사회를 연 선한 군주인지 한낱 쿠데타를 통해 왕조를 뒤엎은 불충한 군바리, 권력욕의 화신인지는 아무도 모른다.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의 말씀만큼이나 악인들에겐 뜬금없다. 어차피 속된 것만 추구하는 그들에겐 중요치 않다. 죽고 나서의 평가가 어떻게 되든, 심지어 자신의 후손이 어떻게 되든 무슨 상관이 있겠는가. 올바름, 선함도 관심 없는데 하물며 역사나 후세까지 신경 쓸 여력이 없다. 이름을 남기기로는 위명(Fame)이나 악명(Notoriety)이나 어차피 매한가지 아닌가.

    모두가 헛되고 영양가 없는 것이다. 오직 중요한 건 지금, 여기다. 이미 물신(物神)이라는 종교를 갖고 있는 이들에겐 하나님(기독교)을 포함한 일체의 종교는 더 이상 필요치 않다. 그들의 종교는 밥이나 돈이며 그들의 율법은 없다. 있다면 수단방법 구애치 않는 생존술일 뿐이다.

    악인의 형통을 부러워할 필요도, 하나님을 떠난 그들의 헛된 삶을 조롱할 필요도 없다. 모두가 스스로의 못난 소치, 자기 위안일 뿐이다. 선을 사랑하고 악을 미워하되 함부로 판단하고 정죄해선 안 된다. 겸손하면서도 담대하게 중심을 잡고 하나님을 바라보고 그 분을 전해야 한다.

    하나님의 뜻과 섭리는 시공간을 초월한다. 죽음을 초월한 시간, 우주를 초월한 공간이다. 우리는 그 중 극히 일부만을 알 뿐이다. ‘모든 것’은 하나님의 섭리이며 역사하심이다. 다만 그 ‘모든 것’은 우리가 알지도 못하고, 알 수도 없는 ‘모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