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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 신앙생활

성경읽기 0033 : 욥기 24장~37장

어멍 2010. 11. 11. 23:07
 

    성경읽기 0033 : 욥기 24장~37장



24장 1절

(욥이 말했습니다.) “어찌하여 전능자께서 심판의 날을 정하지 않으셨을까? 그 분을 아는 자들이 어찌 그 날을 헛되이 기다리는가?

9절

악한 자들이 과부의 자식을 그 어머니의 품에서 빼앗고, 가난한 자의 자식을 빚 때문에 담보물로 잡는구나.

10절

가난한 자들은 옷이 없어 벗은 몸으로 다니고, 굶주린 배를 쥐고 이삭을 나른다.

11절

성 안에서 기름을 짜지만 가난한 자들은 맛보지 못하며, 포도주틀을 밟지만 목이 마르는구나.

12절

성에서 사람들이 신음하고 병자가 부르짖지만, 하나님은 그들의 신음에 대답하지 않으시는구나."

 

    여전히 응답 없는 하나님! 악인의 횡포, 선한 이들의 고통, 하나님의 침묵이다.

    이제 욥이 당하는 재앙, 그 고통과 슬픔에 대한 항변은 그 자신을 떠나 하나님이 지으신 인간과 이 세상에까지 이른다. 어찌하여 하나님은 이처럼 부조리하고 고통에 찬 세상을 만들어 놓으시고 도와주시지도, 심판하시지도 않는 것일까. 욥은 하나님의 응답을 갈구한다. 자신에겐 죽음이, 세상에는 심판이 내려지기를 바란다. 욥 자신이 하나님이라면?? 당장 실행에 옮길 기세다. 위험하다.

    다음 차례는 저주 혹은 도전이다. 하나님을 배반하든지 아니면 직접 하나님 행세를 하던지 둘 중 하나다. 타락천사, 반 영웅이다. 불완전한 인간이면서 완전한 하나님 같이 절대주권자, 심판자 노릇을 하려는 헐리우드 액션영화 속의 영웅 케릭터다. ‘선한 오만’, ‘조급한 선의’, ‘불완전한 능력’으로 인해 항상 고뇌하는 불행하고 암울한 인물이다. 때론 악에 넘어가 하나님을 배반하고 결국 심판을 받기도 한다.

    하지만 욥은 돈 많은 배트맨도, 외계에서 온 슈퍼맨도 아니다. 단지 온 몸에 종기가 난 채 죽기를 소원하고 있는 병자일 뿐. 그의 목소리에는 이제 분노도 고뇌도 남아있지 않다. 오직 비탄과 애원만이 있을 뿐이다.



32장 6절

(엘리후가 말했습니다.) “나는 어리고, 당신들은 나이가 많기 때문에 내 생각을 말하지 못하고 머뭇거리고 있었습니다.

7절

‘나이가 많은 어른이라면 지혜로운 말을 할 수 있다’고 생각했지요.

8절

그렇지만 사람에게 총명을 주는 것은 사람 안에 있는 영과 전능자의 호흡이더군요.

9절

나이가 많다고 해서 지혜로운 것이 아니고, 바른 것을 아는 것도 아니더군요.”


    이제까지 듣기만 하고 침묵하고 있던 가장 나이어린 엘리후란 인물이 화를 내며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말문을 연다. 그는 욥이 하나님보다 자기가 의롭다고 주장한 것을 들어 그를 탓하고, 세 친구들에겐 욥의 말에 제대로 대답하지 못한 것을 들어 그들을 탓한다.

    사실 욥과 친구들의 말은 액면 그대로만 보면 각자가 모두 맞는 말, 지당하신 말씀이다. 하지만 그들의 대화는 뭔가 앞뒤가 맞지 않은 느낌이다. 듣는 것 없이 주장만 있고, 모두가 자기 할 말만 하고... 대화가 아닌 독백, 동문서답인 느낌이다. 결국 소통에 실패한 것이다.

    누구 잘못이 더 큰가. 세 친구의 잘못이 더 크다. 인간적으루다가 잘잘못을 떠나 지금 당장 위로가 절실한 친구에게 대할 태도가 아니다. 그것은 길 잃고 헤매던 딸자식이 밤늦게 대문을 열고 들어올 때 안아주기보다 귀싸대기를 먼저 후려치며 자초지종을 추궁하는 것 이상으로 매정하고 잔인하고 어리석은 처신이다. 진정 소중한 사람이라면 잘못을 꾸짖을 때 꾸짖고, 악행을 설득할 때 설득하더라도 지옥 입구까지도 동행해 줄 수 있는 성의가 있어야 한다.

    이치를 놓고 봐도 부당하다. 그들은 욥이 말이 너무 많다고 했다. 입을 틀어막아 발언을 원천봉쇄하여 스스로 변호할 수 있는 권리를 박탈하려 한 것이다. “네 죄를 네가 알렸다?!” 분명 죄가 있을 것이니 잠자코 듣고만 있으라는 거다. 자신들은 명확한 죄를 모르니 자신의 죄는 스스로 찾아보라는 거다. 검찰이 유죄를 입증하는 것이 아닌 피고에게 스스로 무죄임을 입증해 보이라는 ‘유죄추정의 원칙’이다. 일종의 폭력이다.


    엘리후에 의해 분분한 의견이 정리되고 욥기도 서서히 결말로 이어진다. 역시 찬물은 장유유서(長幼有序)지만 지혜는 어른 아이 순서가 없다. 그럼 그가 욥, 세 친구를 포함한 등장인물 중 가장 지혜롭고 신실한 정의로운 인물인가?

    그건 알 수 없다. 단정할 수 없다. 욥이 겪은 고통을 직접 격지 않았기에... 그가 어떤 반응을 보일지는 영원히 의문으로 남을 수밖에 없다. 세상 모든 일이 직접 겪기 전에는 알 수 없다. 직접 겪기 전에는 함부로 말할 수 없다.



33장 14절

(엘리후가 말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여러 번 말씀하시지만 사람은 깨닫지 못합니다.

34장 37절

당신은 죄를 인정하기는커녕 여전히 하나님을 모독하고, 조롱하듯 손뼉을 쳐대며 하나님께 대항하기 때문입니다.

35장 6절

당신이 죄를 지은 것이 하나님께 무슨 영향이 있습니까? 당신의 죄가 많다고 해서, 그 분께 무슨 해가 있을까요?

7절

당신이 의롭다 하더라도, 그것이 그 분께 무슨 유익이 되나요?

36장 21절

더 이상 죄를 짓지 마십시오. 괴롭다고 하나님을 대적하다니요?

37장 24절

스스로 지혜롭다고 생각하는 자를 그 분은 무시하십니다.”

 

    엘리후가 욥에게 하는 말의 요지는 이것이다. - 하나님께서는 신실한 자의 기도에만 응답하시며 다만 응답을 못 받은 것은 신실하지 않거나 귀가 어두워 듣지 못하기 때문이다. 괴롭다고 원망하고 반발하며 괜히 하나님께 화풀이 하지 말아야 한다. 스스로 지혜롭다 여기지 말고 항상 겸손하고 경건하게 기도에 힘써야 한다. 그래봤자 미물인 우리가 절대자인 하나님께 어떤 해를 입히고 어떤 이익을 주겠는가.

    34장 37절 엘리후가 말한 욥의 죄는 욥 자신이 과거에 행했던 죄, 태초부터 인간이 지닌 원죄, 기왕의 죄가 아닌 재앙을 받은 이후에 하나님과 맞서려는 현재의 죄 등으로 다양하게 해석될 수 있으나 세 번째에 방점이 찍힌 인상이다. 적어도 그는 세 친구와는 다르게 고통이 죄에 대한 형벌이라는 고대 히브리 사상을 강조하진 않는다.

    엘리후는 하나님의 전능과 정의를 강조하면서 자기주장을 끝마친다.


    뒤이은 38장에서 드디어 하나님께서 욥에게 응답하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