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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 신앙생활

성경읽기 0035 : 시편 1편~12편

어멍 2010. 11. 18. 00:29
 

    성경읽기 0035 : 시편 1편~12편



    저자 - 대부분은 다윗이 기록. 그 밖에 모세, 솔로몬, 아삽, 에단, 헤만, 고라(Korah) 자손(子孫) 등 적어도 6명의 기록자가 있다. 몇몇 편의 저자는 알려져 있지 않다.

    핵심어 - 찬양, 신뢰

    주요 내용 - 하나님의 위대한 성품, 그 분이 행하신 일들과 앞으로 행하실 일들에 대한 찬양과 기도를 주로 다루고 있다.

    특징 - 성경 중 가장 긴 편(篇)으로 150편의 시편(詩篇)은 다시 다섯 권의 책으로 구분되어 있다. 말 그대로 찬송시, 감사시, 탄식시 등 시와 노래로 역어져 있다.


시편의 구성


제1권(1편~41편) : 대부분 다윗의 노래다.

제2권(42편~72편) : 대부분 다윗의 노래다.

제3권(73편~89편) : 대부분 다윗 재위 시 성가대 대장으로 활약한 아삽의 노래다.

제4권(90편~106편) : 대부분 작자미상의 노래다.

제5권(107편~150편) : 대부분 작자미상의 노래다.

 

 

1편 1절

행복한 사람은 나쁜 사람들의 꼬임에 따라가지 않는 사람입니다. 행복한 사람은 죄인들이 가는 길에 함께 서지 않으며, 빈정대는 사람들과 함께 앉지 않는 사람입니다.

복 있는 사람은 악인의 꾀를 좇지 아니하며 죄인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

2절

그는 여호와의 가르침을 즐거워하고, 밤낮으로 그 가르침을 깊이 생각합니다.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 자로다.

3절

그는 마치 시냇가에 옮겨 심은 나무와 같습니다. 계절을 따라 열매를 맺고 그 입새가 시들지 않는 나무와 같습니다. 그러므로 그가 하는 일마다 다 잘 될 것입니다.

저는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시절을 좇아 과실을 맺으며 그 잎사귀가 마르지 아니함 같으니 그 행사가 다 형통하리로다.

4절

나쁜 사람들은 그렇지가 않습니다. 그들은 마치 바람에 쉽게 날아가는 겨와 같습니다.

악인은 그렇지 않음이여 오직 바람에 나는 겨와 같도다.

5절

그러므로 나쁜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내리시는 벌을 견뎌 낼 수가 없을 것입니다. 죄인들은 착한 사람들과 함께 있을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악인이 심판을 견디지 못하며 죄인이 의인의 회중에 들지 못하리로다.

6절

착한 사람들이 가는 길은 여호와께서 보살펴 주시지만, 악한 사람들이 가는 길은 결국 망할 것입니다.

대저 의인의 길은 여호와께서 인정하시나 악인의 길은 망하리로다.

 

    모두 6절로 이루어진 시편 1편은 워낙 유명하기도 하려니와 시편 150편 전체의 축소판으로 서론에 해당한다. 그 주제는 ‘복’으로 1~3절의 복 있는 의인의 길과 4~6절의 복 없는 악인의 길, 두 개의 삶을 설명하고 있다. 서로 대조를 이루는 교차대구법이 사용되고 있다. 즉 1,2절 의인의 길(A), 3절 나무(B), 4절 겨(B'), 5절 악인의 길(A'), 6절 의인의 길과 악인의 길(결론) 식이다.


    <쉬운 성경>과 <한글개역판>이 각각 ‘행복한 사람’, ‘복 있는 사람’(1절) ‘나쁜 사람’, ‘악인’(4절) ‘착한 사람’, ‘의인’(6절) 식으로 표현이 약간씩 틀리고 느낌도 약간씩 틀리다. 개인적으로 문장이 좀 어렵고 딱딱해도 전체적으로 <개역판>이 본래 의미를 더 충실히 살린 번역이라고 생각된다. 반면 ‘빈정대는’, ‘오만한’(1절) ‘가르침’, ‘율법’(2절)의 경우엔 <쉬운 성경> 번역이 더 마음에 든다.

     여기서의 복은 스스로 행복한 상황, 해피한 감정이라기보다는 하나님으로부터 성공과 번성의 축복을 받아 모든 것이 뜻한 바대로 이루어진 만족한 상태를 말함이다. 스스로 성취한 것이 아닌 신실함과 올바름 덕분에 하나님으로부터 축복받은 것이다. 다만 여기서 강조되는 것은 하나님으로부터 수동적으로 받는 축복이 아니라 그 축복을 받을 만한 자격, 곧 신실함과 올바름이라는 능동적 상태다. 진실로 복 있는 자는 겸손하고 온화하고 신실하고 정의로운 자다.

    나쁜 사람은 악인, 착한 사람은 의인이란 것이 전혀 틀린 말은 아니다. 하지만 엄밀히 말해 착한 것(善)과 옳은 것(義)은 차이가 있다. 뉘앙스도 많이 다르다. 착하고 못된 것은 다소 개성, 취향, 성격의 인상이 있다. 악동, 나쁜 남자처럼 심술궂음, 거칠음, 변덕스러움, 다혈질 등의 인상이 있거나 범생이, 순둥이처럼 온순함, 부드러움, 순종적임, 심지어 나약함 등의 인상이 있다. 모두 세속적이고 개인적인 소박한 뉘앙스를 품고 있다.

    여기서의 악인은 인격이 부도덕하고 악의에 차서 남을 해치는 자를 말한다. 의인 역시 강한 도덕심과 신실한 믿음으로 하나님의 공의를 지키고 따르는 자를 말한다. 모두 도덕적, 신앙적, 사회적으로 적극적인 의미를 품고 있다.


    빈정대는 것과 오만한 것도 비슷한 말이나 이번엔 <쉬운 성경>의 ‘빈정대는’이라는 좀 더 구어적인 가볍고 쉬운 표현이 더 마음에 든다. 왜냐하면 구조와 문맥상 권세 있는 오만이 아니라 종교적인 경건함, 가르침을 비웃고 경멸하고 희롱하는 속된 불성실함을 말한다고 생각되기 때문이다. 우리의 평범한 이웃인 앞집 영희, 뒷집 철수의 비루함을 연상시키기 때문이다. 1절을 내 멋대로 좀 풀어서 다시 써보자면 다음과 같다.

    “신실하고 의로워 복 있는 하나님의 사람들은 첫째 악인(惡人)좇지 아니하고, 둘째 죄인(罪人)에 함께 서지 아니하며, 셋째 빈정대는 속인(俗人)들과 함께 자리앉지 아니합니다.”

    즉 ‘악인, 죄인, 속인’이다. ‘꾀, 길, 자리’다. ‘좇다, 서다, 앉다’다. 높고 큰 악인에서 죄인을 거쳐 낮고 작고 평범한 속인으로 내려오는 것이 자연스럽지 않을까.


    꾀란 무엇인가. <쉬운 성경>은 ‘꼬임’이다. 반면 전편인 욥기 21장 16절을 보면 <쉬운 성경>에는 ‘(악인의) 꾀를 (멀리한다네)’로 <개역한글판>에는 ‘(악인의) 계획은 (나와 판이하니라)’로 나온다. 딱히 맞아떨어지진 않지만 ‘꼬임’보단 ‘꾀’가, ‘꾀’보단 ‘계획’이 더 정확한 번역이란 느낌이다.

    꾀를 ‘꼬임’에 방점을 두고 읽으면 잔머리, 속임수, 거짓말, 교언영색, 권모술수, 표리부동, 철면(鐵面)의 대담함, 사술, 구체적 유혹의 행위 등이 연상되지만 ‘계획’에 방점을 두면 목표, 도모함, 보람, 원하고 추구하는 바, 여정, 삶의 양식, 일관된 태도나 가치관 등이 연상된다. 당연히 후자 쪽에 마음이 간다. 진실로 의인의 그것은 악인의 그것과 판이한 것이다.


    ‘가르침’, ‘율법’(2절) 중 ‘가르침’이 더 마음에 드는 것은 개개 율법의 해라, 마라, 된다, 안 된다의 의미보담 ‘십자가의 도’처럼 전체적인 도(道), 길, 가르침의 의미가 더 깊고 합당하다고 느껴지기 때문이다.

    2절의 ‘깊이 생각’과 ‘묵상(黙想)’은 딱히 말하기가 힘든 게... 이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하가’가 중얼거리거나 속삭이는 것과 같은 일종의 음성을 뜻하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읊조리며 그 뜻을 깊이 궁구하고 하나님을 만남으로서 그 분의 말씀에 따라 살기를 결심하는 것이다.

    단순히 입을 닫고 깊이 생각만 하는 것이 아니다. 단순히 교훈이나 깨달음 몇 개 얻는 것이 아니다. 면벽하고 묵언수행(黙言修行)하는 선종의 선(禪)과는 다르다. 그런 의미에서 QT(Quiet Time)가 정확한 번역인지는 의문이다. 개인적으로 HD(Holy Date, 경건한 교제)나 ‘(말씀) 새김’ 정도가 더 낫지 않을까 생각해본다.


    ‘죄인들은 착한 사람들과 함께 있을 수 없습니다’, ‘죄인이 의인의 회중에 들지 못하리로다’(5절)를 보면 착한 사람, 의인들과 함께 한다는 것이 크나큰 복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지금, 여기에, 국한되지 않고 시공간을 초월해 주 예수의 ‘은혜의 강변’에 뿌리를 내린 자는 죄 사함의 은혜를 입어 하나님의 심판 때 ‘의인의 회중’에 들 수 있다.

    세속적으로 보면 유유상종이란 말이 떠오른다. 죄인(악인)들은 삿된 이익을 매개로 모인다. 의인(착한 사람)들은 하나님의 옳은 뜻 곧 공의로움을 매개로 모인다. 어느 집단이 더 강할까? 둘 다 강하다! 악인들은 하나님의 절대 심판 앞에서 바람에 쉽게 날아가는 겨와 같지만 그 자체로는 이 속세에서 생각보다 강한 결집력을 발휘한다. 실제로도 인간의 행동을 유발하는 가장 확실하고 강력한 동기는 ‘의로움’보다 ‘이득’이다. ‘옳고 그름’보다 ‘호불호’요, ‘호불호’보다 ‘유불리’다.

    장터 자릿세, 시내 영업권에서부터 이들을 단속할 공권력까지 악인들의 수중에 떨어지는 이유는 무엇인가. 동네 깡패, 시내 조폭, 권부의 고관대작과 최고통치자까지-구라 대마왕, 간웅, 간신, 탐관오리, 강도, 살인자, 사기꾼, 도적들까지 악인들이 득세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제각기 이익을 좇아 날이 새면 서로 배신을 밥 먹듯이 할 소인배들이 여전히 끼리끼리 밀어주고 당겨주며 조직을 이루고 세력을 형성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왜 근절되기는커녕 타격을 받고 재앙을 받는데도 세가 꺽이거나 붕괴되지 않고 여전히 굴러가고 있는가.

    그들이 소박한 ‘나쁜 사람’이 아니라 의지가 있는 ‘악인’들이기 때문이다. 그만큼 이익이라는 것이 강력한 동인(動因)으로 서로를 묶어주고 있기 때문이다.


    그들 악인들에겐 자기 세력과 이득을 확장하고 보존할 의지와 능력이 있다. 쌓아 놓은 금력과 권력이 있고 또한 지능이 있다. 반면 그 이너서클에 들지 못한 자는 ‘못 배운 사람’이나 ‘배워도 잘못 배운 사람’ 또는 ‘심술고약한 사람’ 그도 아니면 단지 ‘나쁜 사람’일 뿐이다. 혹은 하나님과 공의에 무관심하거나 깊이 묵상하지 않는 사람이던가.

    대부분을 차지하여 대중이라고도 부를 수 있는 이 사람들은 소박하다. 악하지 않는 것이 곧 선함이 아니요, 선하지 않은 것이 곧 악함이 아닌 사람들이다. 때론 악하고 때론 선한 사람들이다. 이들이 하나님과 의인들의 곁에 선다면 세상은 선함이 우위에 서고 사탄과 악인들의 곁에 선다면 세상은 악함이 우위에 선다.

    이들은 세상 모든 일을 개인의 소박한 취향이나 호불호로 판단한다. 사상이나 철학이라고 하기엔 깊지 않은 ‘생각’일 뿐이고, 판단준거의 원칙이라고 하기엔 때와 대상에 따라 흔들리는 ‘기분(氣分)’ 혹은 원칙이 아닌 대상에 고정된 '고집(固執)'일 뿐이다. 호기롭게 주장을 편다 해도 대개가 장기적 안목으로 자신의 정확한 유불리를 셈하는 데는 어둡다.

    반면 ‘배운 악인’들은 유불리에 철저히 밝다. 이익을 위해선 자신의 신념이나 취향, 억제할 수 없는 감정까지도 과감히 접을 수 있는 절제력을 갖고 있다. 버림을 받더라도 배반치 않는 것이 더 큰 불이익을 막는다면, 장기적으로 더 이득이라면 옳은 분노를 꺽을 수 있다. 명실상부한 악인들에겐 정의로운 배반, 내부고발, 진심어린 회개란 있을 수 없다. 오직 더러운 배신, 기회주의, 생존술만 있을 뿐이다.

     정의로운 배신자, 돌아온 탕아, 회개한 악인은 현실에서는 극히 드물다. 자기 꾀에 자기가 넘어가 자멸하는 덤앤더머 도둑들, 엎어지고 넘어지며 큰 웃음 주는 악당들, 어딘가 덜 떨어지고 순진한 구석이 있어 친근하고 만만한 허풍선이 사기꾼들, 처참히 파멸하여 결코 미워할 수 없고 심지어 연민의 정을 자아내는 악인 케릭터들 역시 드물기는 마찬가지다. 더욱이 이들은 ‘배운 악인’, ‘진정한 악한’과는 급이 틀리다. 이 본류(本流)들에게 배반이든 회개든 무언가 기대한다는 것은 너무 안이한 생각, 염치없는 공짜 심리다.

    그래서 악의 집단, 악의 세력은 강력하다. 의로운 뜻으로 뭉친 집단도 목숨을 내놓을 정도로 강력하지만 이들 역시 마찬가지다. 강력한 인력(引力)으로 인해 계속해서 유입되는 자원이 있고 한 번 유입되면 웬만해선 떨어져 나가려고 하지 않는다. 떨어져 나가는 것은 공포다. 그 자체로 죽음이다. 부귀영화, 권세의 중심에서 밀려나 멀어지는 것을 죽는 것보다 싫어한다. 비참하게 버림을 받아도 보란 듯이 배반치 못하고 굴종을 충성이나 의리라고 강변하며 어떻게든 빌붙어 연명하려 한다.

    작은 이익에는 배반이 죽 끓듯 해도 큰 이익에는 일사불란하고 질서정연하다. 자질구레한 배반은 비일비재하지만 결정적 배반, 종말을 부르는 배반은 극히 드물다. 강자가 가려지기 전까지는 서로 죽고 못 살듯 암투를 벌이지만 일단 질서가 정해지면 그 중심을 향해 일렬로 동조하는 힘과 속도는 의인들의 그것보다 더 세고 빠르다.


    밝은 낙관이 아니라 어두운 비관인가. 내가 하나님을 찬양하고 선을 권면함에 힘쓰지 않고 세상을 한탄하고 악인을 저주하는 것에만 치우친 것일까?

    시편 1편은 ‘착한 사람들이 가는 길은 여호와께서 보살펴 주시지만, 악한 사람들이 가는 길은 결국 망할 것입니다’로 끝난다. 전편인 욥기 역시 죽음과도 같은 고통과 슬픔을 이기고 하나님으로부터 전보다 두 배나 많은 복을 받아 오래오래 살다가 세상을 떠나는 것으로 끝난다. 하지만 욥기와 시편에 하나님을 찬양하고 기뻐 노래한 구절만 있는 건 아니다. 욥과 다윗이 고통과 슬픔에 울부짖는 구절, 그들이 악인의 형통함을 한탄한 구절 역시 다수다. 찬양시, 감사시만 있는 것이 아니라 비탄시, 한탄시도 있다.



10편 5절

그들(악인)은 항상 번영하는 삶을 누리며 주님의 가르침과는 거리가 먼 삶을 살고 있습니다.

6절

그들은 속으로, “내게 나쁜 일은 하나도 일어나지 않을 거야. 나는 절대로 실패하지 않을 거야”라고 말합니다.


12편 1절

여호와여! 도와주소서. 진실한 사람들이 없습니다. 충성스런 사람들을 이 땅에서 찾아볼 수가 없습니다.

2절

사람들은 저마다 이웃들에게 거짓말을 합니다. 그들은 간사한 입술로 다른 사람을 속입니다.

8절

이 땅 어디에서나 더러운 일들이 판을 치고, 악한 자들이 거침없이 활개치고 다닙니다.

비루(鄙陋)함이 인생 중에 높아지는 때에 악인이 처처에 횡행하는도다.

 

    10편과 12편 모두 다윗의 노래다. 세상을 한탄하고 슬퍼하는 것이, 분위기가 몹시 어둡다. 아마도 다윗이 사울의 핍박을 받아 목숨을 부지하려 도망다니던 곤궁한 시절에 지어진 노래가 아닐까? 아니면 아들 압살롬과 자신을 따르던 신하들의 반역으로 수세에 몰려 분노하고 슬퍼하고 상심하던 시절이던가. 어느 시절의 다윗이 가장 괴로워하고 힘들어했을지는 의문이다.

    어쨌든 의인이 고난 받고 악인이 형통하는 이 부조리한 세상을 한탄하고 있다. 착한 사람과 의인들은 숨소리를 죽이며 숨어들고 흉포한 자들과 악인들은 득의양양 천하를 호령한다. 10편 6절은 이 같은 이들의 자신감, 담대함, 확신에 찬 낙관을 드러내 보이고 있다. “이 지랄 같은 세상!” [성경읽기 0032] 포스팅에서 보았던 시추에이션이다.

    소돔과 고모라로부터 시작해 2500여년이 훌쩍 지난 다윗의 시대, 2000년 전의 예수 그리스도의 시대까지... 하나님의 선함과 의로움이 충만한 아름다운 세상이 아니었다. 지금은 어떤가. 이 세계는 어떤가. 우리는 어떤가.

    우리는 악인인가 죄인인가 속인인가. 착한 사람인가 나쁜 사람인가 의로운 사람인가. 이익을 보고 움직이는가, 의로움을 보고 움직이는가. 우리가 뽑은 우리의 지도자는 주의 신실하고 겸손한 종인가 망령되이 주님의 이름을 더럽혀 그 명예를 모독하는 악한인가. 이명박 대통령은 다윗인가 사울인가 아니면 예수인가 헤롯인가.


    12편 8절의 말씀을 내 멋대로 좀 풀어서 다시 써보자면 다음과 같다.

    “이 땅 어디에서나 우리의 더러운 비루함이 판을 칠 때에 이르러야 크고 높은 악인들이 이곳저곳에서 거침없이 활개치고 다닐 수 있습니다.”

 

    전체적 문장은 <쉬운 성경>과 유사하나 핵심은 <개역한글판>이다. 둘 중 하나를 선택하라면 <개역한글판>이다. 요점은 이 세상이 타락하여 정치인, 기자, 학자, 판사, 성직자... 연로한 스승, 눈부신 젊은이와 아가씨, 청순한 청소년, 깔깔 웃는 초딩, 갓 젖을 땐 아기, 아기를 밴 여인... 늙은이 어린이 남자 여자 너나 할 것 없이 악인의 꾀를 좇고 악에 물든 때에 이르러야만 사탄이든 적그리스도든 악마가 출현한다는 것이다. 다툼과 패망을 부를 수 있는 큰 악한이 나올 수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때엔 그에 합당한 하나님의 재앙과 심판도 함께할 것이다.


    이번엔 반대로 써보자.

    “이 땅 어디에서나 주의 사랑과 공의로움이 가득 찰 때에 이르러야 크고 높은 의인들이 이곳저곳에서 거침없이 뜻을 펼치며 힘을 쓸 수 있습니다.”

 

    남녀노소 누구나 하나님이 본래 주신 존귀함과 선함을 간직하고, 하나님의 진정한 뜻을 흐리지 않고 힘써 되새기고 실천할 때에 이르러야만 천사든 메시아든 구원자가 출현한다는 것이다. 평화와 번영을 이룰 수 있는 큰 인물이 나올 수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때엔 그에 합당한 하나님의 축복과 선물도 함께할 것이다.

    큰 노무현은, 많고 작은 노무현들이 만든 것이다. 큰 이명박은, 많고 작은 이명박들이 만든 것이다.




노무현과 이명박. 누가 하나님의 의로움에 충실했던가. 누가 하나님의 명예를 더럽히고 있는가.



    인생은 결단이다. 선택이다. 우리 앞에 두 가지 길이 있다.

    의인의 길을 갈 건지, 악인의 길을 갈 건지. 복 있는 길을 갈 건지, 복 없는 길을 갈 건지. 비루한 이 세상의 쾌락과 권세를 좇을 건지, 하나님 안에서 진정한 보람과 행복을 좇을 건지. 겉보기엔 언뜻 형통하여 화려하고 무성한 잎을 자랑하더라도 뿌리가 메마른 삶을 살 건지, 당장은 잎이 메말라 힘들고 초라하더라도 주 예수의 은혜의 강변에 튼튼히 뿌리를 내리고 그 말씀을 즐거이 양식으로 삼는 삶을 살 건지... 인생은 매 순간 선택의 연속이다. 어느 누구도 피할 수 없다.

    형통은 시종일관 만사형통이 아닌 최종적인 형통이다. 승리는 궁극의 승리다. 시냇가에 심겨진 나무는 작열하는 태양, 메마른 열풍에 입새가 부서지고 줄기가 갈라진데도 뿌리로 시냇물을 공급받으면 죽지 않는다. 높고 큰 나무들이 모두 소멸한 뒤에도 언젠간 살아남아 때가 되면 가지를 뻗고 입새가 우거지며 시절을 좇아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는다. 다 때가 있고 열매를 맺는 삶이 따로 있다. 나무는 비록 생을 다해 죽는다 해도 씨 있는 수많은 열매들은 싹을 틔워 살아남을 것이다.

    승리는 아직 결정되지 않았다. 하나님의 섭리는 시공간을 초월한다. 죽음을 넘는 시간, 우주를 넘는 공간이다. 노무현과 이명박 누가 열매를 맺을까. 누구의 것이 씨 있는 열매요 씨 없는 쭉정이일까. 싹을 틔우는 그 열매는 바로 가치요 사람이다. 누구의 가치가 역사에 남고 사람들의 흉중에 각인될까.

    예수님 역시 스스로 십자가의 길로 걸어 들어가셨지만 결국 당시의 종교기득권자들과 정치권력에 의해 못 박혀 죽으셨다. 예수님 역시 가르침과 사람들을 남겼다. 곧 말씀과 제자들이다. 이것이 가장 위대한 유산이다.

    큰 노무현은 많은 노무현들을 남긴다. 큰 이명박은 많은 이명박들을 남긴다.



    사랑과 은혜가 충만하신 하나님.

    저로 하여금 신실하고 의로워 복 있는 하나님의 사람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제가 악인(惡人)좇지 아니하고, 죄인(罪人)에 함께 서지 아니하며, 빈정대는 속인(俗人)들과 함께 자리앉지 않게 하여 주시옵소서.

    저로 하여금 하나님의 가르침을 즐거워하고, 밤낮으로 그 가르침을 깊이 되새기게 하소서.

    제 삶이 시냇가에 옮겨 심은 나무와 같이 계절을 따라 열매를 맺는 삶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그 입새가 시들지 않는 나무와 같게 하여 주시옵소서. 제가 하나님이 축복하시기에 합당한 복 있는 자가 되게 하여 주셔서 바라고 행하는 일이 모두 형통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하나님의 가르침을 힘써 행하여 착한 사람들과 함께 있고, 의인들의 회중에 들 수 있게 하여주시옵소서.

    이 땅 어디에서나 주의 사랑과 공의로움이 가득 차게 하시어 크고 높은 주님의 의인들이 이곳저곳에서 거침없이 뜻을 펼치며 힘을 쓸 수 있게 하여 주시옵소서.


    주님. 의인의 고난에 슬프고 악인의 형통함에 화가 나고 주님의 자녀임을 자처하는 자들의 악행에 창피합니다. 평범한 이들의 우매함이 안타깝고 지도자들의 탐욕이 원망스럽습니다. 그들의 살아생전에, 의인에겐 하나님의 선하심을, 악인에겐 하나님의 엄하심을 맛보게 하여 주시옵소서.

    주님께선 알면서 지은 죄가 더 무겁다 하셨습니다. 주님을 모르는 악인보다 주님을 알면서도, 그 이름을 입에 담으면서도 악행을 저지르는 자들의 죄가 너무도 크옵니다. 모든 악인들이 패퇴하여 뿔뿔이 저들의 위치로 숨어들게 하소서. 특히 망령되이 주님의 이름을 빌어 악행을 저지르는 자들은 절대 용서치 마소서.

    의인들을 도우시고 악인들을 벌하소서. 슬픔의 노래가 기쁨의 노래로 바뀌게 해 주소서. 하나님은 선하시며 그 사랑은 영원하십니다.

    이 땅 위에 그 뜻을 비춰주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