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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 신앙생활

성경읽기 0036 : 시편 23편~37편

어멍 2010. 11. 24. 00:03
 

    성경읽기 0036 : 시편 23편~37편



23편 1절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습니다.

2절

그가 나를 푸른 풀밭에서 쉬게 하십니다. 여호와는 나를 잔잔한 물가로 이끌어 쉬게 하시며

3절

나에게 새 힘을 주십니다. 자신의 이름을 위하여, 주님은 나를 의로운 길로 인도하십니다.

4절

내가 음산한 죽음의 골짜기를 지나가게 된다 하더라도, 나는 겁나지 않습니다. 그것은 주님께서 나와 함께 계시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막대기와 지팡이가 나를 든든하게 보호해 줍니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로 시작하는 개역한글판 번역으로 더 잘 알려진 구절, 수많은 찬송가의 소재가 된 구절, 시편뿐 아니라 성경 전체에서도 손꼽을 정도로 유명한 구절, 크리스천뿐 아니라 일반인에게도 폭넓게 사랑받고 있는 구절이다. 역시 다윗의 시로 선하시고 의로우시고 완전하신 하나님을 보호자이자 공급자로 찬양하면서 전적으로 의탁하고 있다.

    2절은 한 폭의 전원풍경화가 그려지는 것이, 평화롭고 안온하고 심지어 나른함까지 밀려오는 것이... 신뢰와 감사의 찬양이 절로 난다. 반면 4절은 공포영화의 한 장면이 연상되는 것이, 급박하고 간절하고 심지어 처연한 느낌마저 드는 것이... 죽는 날까지 주님만을 믿고 따르려는 각오와 신앙심이 느껴진다.




모세와 다윗 역시 양치기 출신이다.



    역시 다윗은 위대한 시인이다. ‘푸른 풀밭’과 ‘음산한 골짜기’의 극적인 대비, 신적인 경건함과 풍요로운 인간성의 절묘한 조화다. 승리의 확신, 감사, 기쁨, 평화를 담아냈으면서도 삶의 장엄함과 치열함을 함께 드러내고 있다. 다윗 본인이 양치기(목자)에서 왕까지 오른 입지전적인 인물이었다. 그의 삶 자체가 골리앗, 사울, 온갖 이방세력 그리고 아들 압살롬까지 수많은 적들과 배신자들의 핍박과 위협을 극복하고 승리한 파란만장한 인생이었지 않은가.

    이 시는 틀에 박힌 관념적인 신앙의 표현도 아니고 이미지를 잘 그린 아름다운 시적 표현도 아니다. 바로 광풍이 몰아치는 생의 한복판에서 살아계신 하나님 즉 ‘거기 계시고 말씀하셨던 하나님’을 생생히 보고 듣고 만졌던 피 보다도 진한 고백적 기록이라고 할 수 있다. 위대한 왕의 영웅담, 아름다운 시인의 선율이 아니라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바로 알았던 한 인간의 겸손한 고백이라고 부르는 것이 옳을 것이다.

    그래서 더욱 애송되고 울림이 큰 구절이다.



37편 1절

악한 사람들 때문에 속상해하지 말고, 나쁜 일하는 사람들을 부러워하지 마십시오.

3절

이 땅에 사는 동안, 여호와를 굳게 믿고 착한 일을 하면서 주님의 모습을 닮아 가십시오.

7절

악한 자들이 잘 산다고 해서 속상해하거나 그들의 악한 계획들이 이루어진다고 해서 좌절하지 마십시오.

8절

노여워하거나 화를 터뜨리지 마십시오. 속상해하지 마십시오. 자신에게 해로울 뿐입니다.

분을 그치고 노를 버리라 불평하여 말라 행악(行惡)에 치우칠 뿐이라

 

    악인의 형통과 의인의 고난, 인간의 나약함과 인심의 가벼움, 부조리한 세상과 하나님의 침묵... 시대와 공간을 뛰어넘어 세상모습도, 사람들의 생각과 고민거리도 모두 비슷비슷한 듯하다. 다윗 역시 욥기 이후 내가 계속 적어왔던 이야기들을 계속하고 있다. 내가 너무 불의에 민감한 도덕군자라서, 정치에 들뜬 주책(!)이라서 보고 싶은 것만 보이고 읽고 싶은 구절만 읽히는 것일까??


    전체적으로 <쉬운 성경>이 <한글개역판>보다 자연스럽고 합당한 듯하다. 8절 역시 마찬가지다. ‘속상해하다’, ‘자신에게 해롭다’가 ‘불평하다’, ‘행악(行惡)’보다 나은 듯싶다. 전자가 연민과 공감의 뉘앙스라면 후자는 질책과 비판의 뉘앙스다. ‘성스런 분노’, ‘합당한 비판’도 필요하지만 분노, 증오, 비판, 원망, 슬픔은 그 자체로 긍정적인 감정은 아니다. ‘슬픔도 노여움도 없이 살아가는 자는 조국을 사랑하고 있지 않다’라는 말도 있지만 이런 감정들은 자칫 건강을 해치고 자신을 병들게 한다.

    세상이 각박해지고 경쟁이 치열해지다 보니 사람들도 날카롭고 예민해졌다. 서로 편을 갈라 거친 말과 행동을 주고받으며 갈등과 증오를 증폭시킨다. 한쪽에선 싹을 잘라 멸절을 시키려하고 한쪽에선 와신상담 복수를 꿈꾸며 칼을 간다. 편을 갈라 싸우다보면 즐겁게 비판하고 건강하게 충고하기가 힘들다.

    행복과 기쁨을 맛보며 서로 축복하고 응원하는 세상이면 얼마나 좋겠는가. 슬퍼할 필요도 노여워할 필요도 없다. 하지만 이런 세상이라도 애정과 관심과 참여는 필요하다. 적어도 이것이 없이는 그 대상이 무엇이든 평가하고 욕할 자격이 없다. 애정없는 비판은 냉소와 비아냥, 유치한 감정의 배설일 뿐이고 능력과 의지가 없는 분노는 자칫 감정의 일시적 소비, 한풀이가 될 수 있어 스스로를 병들게 한다.


    “만수산 칡넝쿨이 이런들 어떠하리 저런들 어떠하리!” - 그럼 좋은 게 좋은 거라고 하하호호 즐겁고 행복해 해야만 할까. 모든 비판과 비평은 불평이고 투정이니 그 자체로 행악일까?

    불평불만에 투정만 부리는 자는 불행한 자이다. 모나고 까칠하여 삐뚤어진 자는 가엾은 자이다. 울부짖는 자는 아픈 자이다. 심지어 무엇이 옳고 그른지, 누가 자기 이익을 훔쳐 가는지 분별치 못하고 번지수를 잘못 찾아 엄한 이를 원망하는 자, 오히려 의인을 욕하고 악인을 칭송하는 자도 엄연한 약자이다. 교활하고 강한 선동하는 악인들은 동정의 여지가 없지만 어둡고 약한 선동당하는 속인들은 안타까움과 연민의 대상이다.

    폭군, 간신, 강도, 도둑, 사기꾼을 미워하라. 과부, 고아, 빈자, 병자들을 사랑하라. 거짓말쟁이, 감언이설, 교언영색, 표리부동한 자를 비판하라. 원망하는 자, 투정하는 자, 졸라대는 자, 삐뚤어진 자, 울부짖는 자를 긍휼히 여겨라. 악인들은 멀리하고 의인들은 가까이 하라. 강자들은 냅두고 약자들을 챙겨라.

    배은망덕에 비하면야 꼬박꼬박 선은 선으로 악은 악으로, 은혜는 은혜로 원수는 원수로 갚는 것이 칭찬받을 일이겠지만 호들갑까지 떨 일은 아니다. 진정으로 힘든 것은 악을 선으로 갚고 원수를 사랑으로 대하는 것이다. 편하고 이득이 되는 강자 편을 드는 것보다 불편하고 손해보는 약자 편을 드는 것도 이것만큼이나 힘들다. 세상살이가 잠시잠깐 약팀을 응원하는 축구경기는 아니니까.


    이것은 선악의 개념과는 약간 틀리다. 강한 것이 무조건 악한 것이 아니고, 약한 것이 무조건 선한 것은 아니니까. 어쩌면 심성, 성격, 취향, 미적 감각과 더 밀접한지도 모른다. 완벽한 절대강자의 힘에 매료되는 이가 있는 반면 엎어지고 꼬꾸라지면서도 끊임없이 도전하는 약자들의 고군분투에 더 매료되는 이도 있다. 불로장생의 십장생도, 화려한 상감청자, 럭셔리하면서도 섹시한 뮤지컬을 좋아하는 이도 있고 지조와 절개의 세한도, 단아한 백자항아리, 구수하고 해학적인 마당극을 더 좋아하는 이도 있다.

    강약(强弱), 선악(善惡), 미추(美醜)는 다른 개념이다. 개인마다 판단의 가중치는 다르다. 옳다 여기면서도 추하다고 느끼기도 하고, 아름답다고 여기면서도 옳지 않다고 느끼기도 하며, 옳은 일이라 여기면서도 약자를 외면하고 강자를 좇기도 한다. 부귀영화야 모두가 바라는 바이지만 ‘간혹’, ‘진짜’ 다른 것을 더 소중히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 고생을 사서하고 스스로 춥고 배고픈 이들과 함께 하려는 이가 있다. 잘생기고 준수하고 넉넉한 이보다 못생기고 볼 품 없고 삐뚤어진 이들을 더 품에 안으려는 이가 있다. 아마도 하나님의 사랑이 이런 것이 아닐까. 잘난 자식보다 못난 자식이 더 가엾고 맘이 가는 부모의 심정이리라.

    그래서 스스로 해함을 염려하는 것이 아닌 행악이라 꾸짖는 것이 야속한 것이다.


    그러면 행악(行惡)은 전혀 엉뚱한 번역일까... 하면 그렇지는 않다. 악(惡)을 ‘나쁜 것’이라고 하면 ‘해로운 것’과 비슷해지지만 ‘악한 것’이라고 해도 전혀 엉뚱하지는 않다.

    무언가? 욕하면서 닮는 것을 경계한 것이라는 것이 내 생각이다. ‘악의 심연을 바라볼 때 항상 조심해야 한다. 악의 심연도 너를 바라본다.’란 말처럼 악에 물들 것을 염려한 것이다. 건강한 비판이 아닌 병적 분노, 불평, 증오, 저주 등은 확실히 자신을 병들게 할 뿐만 아니라 그 자신도 악하게 할 가능성이 다분하다. 악인의 형통에 대한 부러움도 위험하지만 증오도 위험하다.

    악의 수단을 빌어 악을 징치하는 순간이 악의 유혹에 넘어가는 순간이다. 받은 데로 되갚아 준다면서 똑같은 수법으로 똑같은 고통을 주는 상상을 즐기며 원한을 키운다. 입은 더러워지고 몸을 황폐해져 악다구니만 남는다. 기존의 악이 징치되더라도 또 다른 악, 또 다른 사탄의 대리인일 뿐이다. 문학과 영화 등에서 많이 다루어졌던 낯익은 주제다.

 



타락천사 다스베이더
그도 한 때는 사랑의 열병을 앓았던 젊은이, 정의의 수호자인 제다이 기사였다.



    의인의 삶은 악인의 그것과 같지 않다. 추구하는 바도 같지 않고 수단 역시 같지 않다. 의인이 쓰는 전가의 보검은 악인이 쓰는 가공할 병기(兵器)와 다르다. 악인이 꾀하는 부귀영화는 악인의 보람이다. 악인의 권세는 악인의 것이다. 악인의 병기는 악에게 어울리는 것이다. 하다못해 광선검도 루크와 다스베이더의 것이 색깔이 다르지 않은가. 부러워 탐할 것이 아니다.

    물론 수단이란 가치중립적인 '도구'를 일컫는 것은 아니다. 색깔이 다른 건 상징일 뿐 루크의 광선검을 다스베이더가 잡는다고 순식간에 색깔이 바뀌거나 쓸모없는 것이 되지는 않는다. 수단이란 공명정대한 방식이요 절차다. 백범 암살범 안두희를 정의봉(正義棒)이라고 쓰여진 몽둥이로 때려죽였다고 해서 악을 징벌하였음을 보장받진 못한다. 그래서 무엇이 나아졌나?

    물론 의로운 행동일 수도 있고 개인적으로 그 심정을 이해 못할 바도 아니다. 뻔히 범인이 밝혀져 있는데도 이승만 자유당 정권에 의해 줄곧 비호 받고 있었으니까. 하지만 정상적인 방식과 절차는 아니었다. 사적 보복으로는 이 세상에 무엇 하나 바꿀 수 없다. 바꾼다 해도 일시적이고 오히려 되치기의 빌미가 될 수도 있다.

    악인이 암살을 당하거나 벼락을 맞아 급사하는 것을 하나님의 심판이라 볼 수 있을까... 이런 방식으로는 하나님의 섭리와 의로우심을 모두에게 알릴 수 없다. 이 세상이 크게 진보할 수 없다. 생명을 뺐지 않더라도 절차에 따라 권리를 보장해주면서 대명천지(大明天地) 만인의 법정에 세워 재판과 형벌을 받게 하는 것이 하나님의 방식이요, 세상의 진보다.


    8절은 내겐 꾸짖음보다 경계요, 경계보다 연민으로 읽힌다.



37편 16절

적은 재물을 가지고 의롭게 사는 것이 많은 재물을 가지고 악하게 사는 것보다 낫습니다.

 

    16절 말씀이 아프게 다가온다. 내 자신이 ‘그렇고 말구요. 물론입니다. 오브 코오즈. 두말하면 잔소리, 천당만당지당하신 말씀, 주저치 않고 그 길로 뛰어나가겠습니다.’라고 자신 있게 대답할 수 없기 때문이다. 크고 작은 부당한 유혹, 특히 자잘자잘한 물질의 유혹에서 자유롭지 않은 속된 인간이기 때문이다. 배금주의, 물신숭배가 판치는 현대자본주의 사회에서 그 누구도 완전히 자유롭지 않다.

    “10억이 주워진다면 범죄를 저지르고 몇 년간 감옥에서 썩을 의향이 있다? 없다?” 정확한 수치는 기억나지 않지만 이 질문에 많은 중고등학생들이 돈을 택했다는 설문조사 결과를 예전에 어느 뉴스에서 보았던 기억이 난다. 확실히 우리사회는 정상이 아니다. 속으로 병들어 있다.

    자라나는 청소년들까지 이렇다는 것은 총체적 실패다. 타락이다. 사회전체가 도덕적으로 거대한 가면극을 하고 있는 거다. 도덕, 윤리, 정직 심지어 하나님까지 버리고 무조건 밟고 올라가라는 것 아닌가. 예전도 지금도 모두가 ‘무능보다 부패가 낫다’면서 우리의 대표들을 세우고 있지 않은가. 그것도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대놓고 부패를 변호하고 주장하고 있다.

    그 능력이란 것도 도적질하는 능력인지, 봉사하는 능력인지 의문이지만 크리스찬이라면 능력보담 도덕을 절대적으로 우선에 두어야 한다.



37편 25절

내가 어려서부터 늙기까지 이제껏 살아오면서 여호와께서 의로운 사람을 내버려 두시는 것과 그들의 자녀들이 구걸하는 것을 보지 못했습니다.

26절

의로운 사람은 언제나 넉넉하여 다른 사람에게 나눠 주기를 좋아합니다. 그래서 그들의 자손들이 복을 받습니다.

 

    다윗은 어떤지 몰라도, 내가 많이 살지는 않았어도 나는 봤다. 들었다. 알고 있다.

    의로운 사람도 비극적으로 죽고 그들의 자녀들도 잘 풀리지 않고 심지어 구걸하는 것을. 의로운 사람은 마음은 간절하되 넉넉하지 않아 베풀지 못하고, 악한 사람은 물질은 넉넉하되 탐욕에 갇혀 베풀지 못하는 것을.

    멀리 갈 것도 없다. 대를 이어 계속되는 친일매국 인사들과 그 자손들의 출세와 성공, 독립애국 지사들과 그 자손들의 패퇴와 빈곤이 있지 않은가. 연좌제를 적용할 것은 아니나 친일파 조상의 재산을 부끄러움도 모르고 아등바등 되찾으려는 자손도 있고 공식적으로 피해자와 민족 앞에 조상의 악행을 사죄하는 자손도 있다. 반면 애국독립지사의 자손으로서 출세를 위해 조상의 명예를 더럽히는 자손도 있다.


    생물학적으로 악이 악을 낳고 선이 선을 낳는 것이 아니라 악이 선을 낳기도 하고 선이 악을 낳기도 한다. 선악의 도덕을 결정짓는 것은 적어도 유전자, 혈통의 선천적 요인보다 교육, 환경의 후천적 요인이다.

    참여정부 때 열린우리당 인사 중 신기남씨와 조기숙씨는 조상의 친일과 관련하여 변명하거나 합리화하지 않고 시인, 사과한 것으로 알고 있다. 쉽지 않은 일이다. 격려하고 칭찬할 일이다. 반면 안중근 장군의 자식은 대중 앞에서 이토 히로부미의 자식에게 사죄를 청하는 모습을 공개적으로 보여주는 이벤트 비슷한 행사를 연출하여 그 생계와 안위를 보존하였다고 한다.

    조선에겐 독립지사, 일제에겐 암살범일수도 있는 안 장군. 안 의사를 안 장군으로 지칭하는 것은 그가 민간인 신분이 아니고 독립군에 소속된 어엿한 군인 신분이라는 얘기다. 즉 단순한 암살이 아니라 전쟁의 일환이었다는 의미다. 하지만 안 장군의 의거도 일제의 발호를 저지하거나 정세를 역전시키지는 못했다. 역사는 몇몇의 인물들이 만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세력 대 세력들의 각축장이기 때문이다.




안중근 아들 안준생(좌측 의자)과 이토 히로부미의 아들 이토 분키치(우측 의자)
1939년 10월 16일, 조선호텔



    의사 안 장군의 아들은 아비를 부끄럽게 만든 친일파다. 위대한 왕 다윗의 아들 압살롬은 아비를 쫓아내고 왕위를 찬탈하려는 무도한 자다. 당나라를 벌벌 떨게 했던 고구려의 명장 연개소문, 그의 맏아들 연남생은 살아남기 위해 스스로 당나라의 선봉장이 되어 조국을 멸망시키는데 일조한다.

    핏줄과 인물됨은 별개다. 위업과 자식농사는 별개다.


    안 장군이 둔 2남 1녀 중 장남 분도는 12세 때 사망한다. 독살당했다는 설이 유력하다. 차남 준생은 아버지 얼굴 한 번 보지 못한 채 3살 때 아버지를 잃게 되는데 후일 일제에 회유되어 아버지의 행위를 대신 사죄하게 된다. 호부견자(虎父犬子). 호랑이 아버지에서 개 자식이 나온 것인가.

    아비는 목숨을 바쳤는데 자식은 먹고 살기 위해 친일을 해?! - 위인 아비를 둔 평범한 자식의 박복한 운명인가! 출세를 위한 적극적 친일이 아니니 욕할 수는 없다 하더라도 맥 빠지는 일이다. 살아남기 위한 불가피한 선택이었다 하더라도 선전효과가 상당했을 것이다.

    어려서부터 아비의 잔정도 평범한 행복도 맛보지 못하고 겪어야 했을 온갖 간난과 고초를 생각해볼 때 일방적으로 비난만 할 일은 아니다. 어린 것이 얼마나 추위와 배고픔에 힘들었을까. 외로움과 두려움에 떨었을까. 하지만 아비에 비하면 한참 미치지 못하는 것은 엄연한 사실이다.

    안 장군의 위업과 준생의 치욕. 아비의 의업과 아들의 비루함. 화나기보단 슬픈 일이다.


    결론은? 우리가 하나님을 믿고 따르는 것은 재물을 쌓기 위해, 출세하기 위해, 부귀영화를 누리기 위해, 생존하기 위해서가 아니다. 그것이 옳기 때문이다. 진리이기 때문이다.

    또다시 되풀이다. ‘친일하면 삼대가 흥하고 독립운동하면 삼대가 망한다’해도, ‘복부인 어머니 고맙습니다. 친일파 할아버지 감사합니다’해도 부러워 탐할 것이 아니다.



※ 시편 23편에 대한 감상은 시편 23편은 정신건강의 명약! 글을 참고, 인용함.

※ 안중근 가계(家系)에 관한 내용은 안중근 아들 안준생을 위한 변명 글을 참고, 인용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