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몬, 때론 먹의 향내가 나는 글과 음악 그리고 사람

성경, 신앙생활

성경읽기 0038 : 시편 90편

어멍 2010. 12. 2. 20:13
 

    성경읽기 0038 : 시편 90편



90편 4절

주가 보시기에는 천 년도 지나간 어제와 같고, 긴 세월도 밤중의 한 시간과 같습니다.

5절

주께서 죽음의 잠으로 휩쓸어 가시면 사람은 아침에 돋아나는 풀과 같습니다.

6절

아침에는 싱싱하게 피었다가도 저녁이 되면 시들어 마르는 풀입니다.

8절

우리가 저지른 악한 행위들이 다 주 앞에 있고, 우리가 숨어서 지은 죄들도 다 주가 보고 계십니다.

10절

우리의 수명은 칠십 년, 힘이 있으면 팔십 년이지만, 인생은 고생과 슬픔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날아가듯 인생은 빨리 지나갑니다.

12절

우리의 인생이 얼마나 짧은지 깨닫게 해 주소서. 그러면 우리의 마음이 지혜로워질 것입니다.

 

    4권이 시작되는 90편에서 문체가 사뭇 달라진다. 하나님의 사람 모세의 기도다.

    하나님의 영원성, 인간의 유한성을 말하면서 “이 짧은 인생을 하나님의 자비와 긍휼 속에서 즐겁게 보내야 하지 않겠는가? 하나님의 목적을 알아서 의미 있게 살아야 하지 않겠는가?” 자문하고 있다. 다소 진지하게 생과 삶을 관조하고 있다.

    생(生)은 생명이요 생존이다. 길어야 7,80이다. 삶은 생활이요 일상이다. 고생과 슬픔으로 가득 차 있다. 어차피 짧은 고생길, 제 멋대로 살아야 할까. 살고 싶은 대로 살아야 할까.

    인생 뭐 있어? 한바탕 신나게 즐기다 가는 거지! <노새노새 젊어서 노새, 늙어지면 못노나니~ 얼씨구 절씨구 차차차, 지화자 좋구나 차차차 ♪♬> 하다보면 인생은 비틀비틀 중심을 잃는다. 길을 잃고 헤매다가 정신을 차려보면 어딘지 모른다. <인생살이 칠팔십. 화살같이 속히 간다. 정신 차려라. 요지경에 빠진다.~ 여기도 짜가. 저기도 짜가. 짜가가 판친다. ♩♬> - 인생도 막 나가고 글도 막 나가고 @.@

    모세는 그러지 말자는 거다. 비록 짧은 인생이지만, 짧은 인생이기에 하나님의 선하심을 보람으로 삼고 하나님의 뜻을 좇아 사는 의미 있는 인생을 살아야 하지 않겠는가 권면하는 것이다. 하루를 살아도 하나님 품에서 진실하게 살자는 거다.

    하나님을 바르게 믿으면 그리 될 수 있다. 그르게 믿으면 안 믿는 것만 못하다. 인생 막 나가는 것은 마찬가지다. 거짓말을 밥 먹듯 하며 남의 인생까지 망가뜨리고 하나님의 명예에 먹칠을 한다. 순간순간 되는대로 살아가는 속인들이나 불철주야 즐거이 탐욕을 좇는 악인들처럼 ‘우리의 악한 행위들이 다 주 앞에 있고, 우리가 숨어서 지은 죄들도 다 주가 보고 계시다’는 경고에 코웃음을 친다.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 믿음은 거짓 믿음이다. 거짓말을 밥 먹듯 하는 크리스찬은 거짓 크리스찬이다.


    내일 지구가 멸망한다면 당신은 오늘 저녁 무엇을 할 것인가. 나는 무엇을 하고 싶은가.

    누구는 약탈을 하고, 누구는 쾌락을 누리고, 누구는 사랑을 고백한다. 누구는 평상시와 다름없이 사과나무를 심거나 화단에 물을 주고, 누구는 일체의 일을 중단하고 아무 것도 하지 않는다. 슬픔과 절망에 낙담하는 자, 하나님을 저주하며 분노하는 자, 불안초조에 안절부절 못하는 자 각양각색일 것이다. SF 재난영화에 자주 나오는 장면이다. 하지만 크게 나누면 슬픔과 좌절, 탐욕과 다툼, 사랑과 성찰 이 셋 중 하나의 모습일 것이다. 사람들은 주로 어떤 반응을 보일까?

    내 개인적인 생각에 대개가 세 번째의 모습일 것이다. 남의 것을 빼앗고 더 누릴 시간보다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있는 시간이 더 간절하니까. 12절 말씀처럼 우리의 남은 인생이 짧다는 걸 깨달을 때 우리의 마음이 좀 더 지혜로워질 테니까. 지혜로운 것을 넘어 때로는 우리 삶이 숭고해지기도 한다. 양보하고 사랑하고 희생하고... 마지막 순간을 함께 하고픈 간절함! 죽음이라는 운명을 얼싸안은 포옹으로, 움켜잡은 두 손으로, 마주보는 눈빛으로 함께 맞이하려는 사람들의 모습은 가슴 뭉클한 감동이다.




혜성과 지구와의 충돌을 그린 재난영화 <Deep Impact>
당신은 먹고 마시고 있을 것인가, 사랑하는 사람을 껴안고 있을 것인가



    우리의 인생이 일그러지는 것은 역설적이게도 우리 삶이 너무 길기 때문이다. 우리가 생각하기에 우리의 생이 영원할 것이라 착각하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의 생명, 재산, 권력이 영원할 것이라 여기며 혹 저물어 가면 노심초사 잃지 않으려고 아등바등하기 때문이다.

    터무니없는 착각이다. 어리석은 착각이다. 하지만 동시에 생을 추동하고 사회를 유지케 하는 힘이기도 하다. 역설적이게도 필요한 착각인 것이다. 무엇인가? 인간이 영원한 존재는 아니나 찰나를 사는 존재도 아니란 얘기다. 지속성을 필요로 하고 영원성을 추구하는 존재란 얘기다.

    인간의 평균수명이 하루, 한 달, 일 년, 십 년, 백 년, 천 년 각기 다름에 따라 이 세상의 모습은 아마도 엄청난 변화를 보일 것이다. 칠팔십의 인생은 막 살기엔 너무 길고 하나님의 뜻을 완전히 깨닫기엔 너무 짧지 않은가. 즐기기엔 너무 길고 지루하며 무언가 이루기엔 너무 짧고 아쉽지 아니한가. 그러기에 오히려 짧지도 길지도 않은 가장 적당한 세월이지 않을까?! 분명한 것은 악을 회개하고 선을 추구하는 데는 충분한 시간이란 것이다. 우리에겐 수많은 기회와 자유의지가 주어진다는 것이다.

    우리에게 내세와 영원은 둘째 치고 당장 내년, 내일에 대한 기약이 없다면 윤리, 도덕은 물론 신의, 책임감, 부끄러움이란 것도 필요 없어진다. 그것의 값어치가 바람에 날아가는 겨와 같이 똥값이 된다. 대통령이든 양아치든 인생 막 나가게 된다. 할 수만 있다면 왕창 땡겨 진탕 놀고 잽싸게 튀기만 하면 된다. 아침에 태어나 저녁에 죽을 때까지 먹을 것만 걱정하며 순간순간을 소비하는 하루살이, 한치 앞만 보며 땅위를 박박 기는 벌레일 뿐이다. 지구 최후의 순간에도 이들은 본능적인 입질에 여념이 없다. 이들의 사전에 신뢰, 약속, 가치, 원칙이란 말은 없다.

    무슨 보람을 찾고, 무슨 가치를 추구할 것인가!


    정치? 늑대들의 다툼이거나 열병에 들뜬 헛똑똑이 양들의 부질없는 푸념일 뿐! 연예? 고통보다 권태를 싫어하는 깡통들의 난장(亂場)일 뿐! 옳고 그름, 진선미를 떠나 이 세상에 무엇 하나 가치 있는 것이 없다. 기독교를 포함한 모든 종교 역시 마찬가지다. 당장 몸은 하나 먹고 하나 더를 원하는데 하물며 영원, 내세를 얘기하는 것은 뭥미! 교회 나갈 시간에 월요일을 위해 잠이나 퍼 자는 게 낫다. <성경> 읽기보다 <부동산으로 10억 벌기> 읽는 것이 낫다.

    <부동산~> 등의 재테크, 처세술의 경쟁에 지쳐 <성경> 등의 종교, 철학서에서 위안을 얻으려 하지만 신통치 않다. 교회마저도 복을 빌고 죄 사함 받고 인맥을 형성하려는 세속적 수요를 공급하는 기관으로서 기능하고 있지는 않은가 돌아봐야 한다. 성경에서 멀어진 교회가 자초한 일이긴 하지만 전체적인 사회분위기의 조류가 밀려든 측면도 있다. 세속화, 물신화뿐 아니라 서로 존중하고 성찰하는 것이 아닌 따로따로 떨어져 냉소하고 무시하는 분위기다. 심지어 조롱하고 적대하는 분위기다.

    음주가무, 육두문자는 날라리요 패션잡화, 피부성형은 된장녀요 아파트, 연봉은 속물이다. 예술, 문학은 고학력 실업자일 뿐이고 철학, 역사는 먹물이나 고대인(古代人)이다. 정치, 사회는 복학생, 꼰대, 노인정이요 윤리, 도덕은 담탱이, 샌님이요 종교, 양심은 성인(聖人), 성녀(聖女)다. 현실에 얽매이면 똥돼지요 충실치 않으면 도인, 신선 심지어 광인, 폐인이다. - 이 글 역시 인생 다 산 영감, 앉아서 천리를 보는 현자(賢者)의 건방진 훈장질이라고 여기기 딱 좋지 아니한가. ‘참~ 잘났어요.’ 비아냥 받기 딱 좋지 아니한가.

    너무 극단적이고 신랄한 비유인가. 전문성, 고유한 가치, 개성, 경계가 실종되고 극단적 실용이 대세인 효율만능주의, 경제지상주의다. 가치상실의 시대, 도덕무용의 시대, 인간위기의 시대다. 잘난 놈은 잘난 대로 살고 못난 놈은 못난 대로 사는 고독하고 덧없는 세상이다.




(요즘 어떻게 지내냐는 친구의 말에) 그랜저로 대답했습니다.
(그러자 배아픈 친구가 얄밉게 되물었습니다.) 너 자동차 세일즈하니?
자본주의 소시민들의 물욕과 경쟁심을 노골적으로 자극하는 현대자동차 광고



    이런 세상에서 기독교는 제 역할을 하고 있는가? 빛과 소금은 과욕이요 세상에 상처받고 지친 이들을 위로, 위안해 줄 수나 있을까. 평화와 화해의 중재자가 아닌 갈등과 분쟁의 당사자로 이익집단화되지는 않았는가.

    이런 세상에서 우리는 무엇을 추구할 것인가? 가치는 혼란스럽고, 재물은 눈에 보이고 확실하긴 하나 갈증은 끝이 없고 종국엔 덧없는 것이다. 물론 이거냐 저거냐 양자택일의 문제는 아니다. 성별(聖別)된 성직자도 아니고 평범한 신자이자 속인인 내가 성스러움만을 추구할 순 없다.

    성과 속, 신성과 인간성, 가치와 물질, 영원과 순간을 조화시키고 그 사이에서 균형을 잡는 것이 필요하다. 성스러운 속됨, 속된 거룩함, 인간을 소외시키지 않고 함께 어울리는 ‘하나님을 닮은 인간’이 필요하다.


    주님! 주님은 영원부터 영원까지, 우주에서 우주까지 계십니다. 천개의 옷자락으로 어느 곳에든 계시며 만개의 눈으로 모든 것을 보십니다. 하지만 저희들은 발도 두 개요 눈도 두 개뿐입니다. 불완전한 저희로 하여금 순간에서 영원을 살며 영원에서 순간의 소중함을 깨닫도록 하옵소서. 저희 안에서, 저희를 둘러싼 모든 것에서 하나님의 뜻을 발견하고 그를 좇아 사는 저희가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