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몬, 때론 먹의 향내가 나는 글과 음악 그리고 사람

성경, 신앙생활

성경읽기 0016 : 사사기 12장~19장

어멍 2010. 7. 23. 00:57


12장 6절

길르앗 사람들은 그 사람에게 ‘쉽볼렛’이라는 소리를 내 보라고 말했습니다. 에브라임 사람들은 그 단어를 바르게 소리내지 못하였습니다. 만약 ‘십볼렛’이라고 말하면, 길르앗 사람은 나루터에서 그 사람을 죽여 버렸습니다.

 
    쉽볼렛, 십볼렛 이야기.

    사사 입다가 지휘하던 길르앗과 에브라임 사이에 전쟁이 벌어져 길르앗이 승리한 후 패퇴하던 에브라임 사람들을 나루터에서 검문하여 죽이는 장면이다. 언제, 어느 곳에서든 사투리가 있었나보다. 예를 들면 ‘확실히’와 ‘학실히’, ‘쌀’과 ‘살’이라고나 할까. 또 생각나는 우스갯소리.

    ‘아’ 발음을 못하는 경상도 출신 이등병이 있었는데 그 날 밤 암구어는 ‘고구마’였다. 전방 GP 근무교대를 위해 초소에 다다르자, 어둠 저편에서 초병이 소리쳤다. “정지! 손들어. 움직이면 쏜다. 암호?” 이등병은 무심코 자신있게 큰 소리로 대답했다. “고매!” 고매는 고구마의 경상도 사투리다. 어둠 저편에서 즉시 되묻는다. 전보다 더 크고 다급한 목소리다. “암호?” 이등병은 이번엔 심호흡을 하고 신중하게 또박또박 대답한다. “고! 구! 미!” 잠시 정적이 흐른 후 어둠 저편에서 한발의 총성이 울리고 이등병은 쓰러진다. 이등병이 죽어가며 마지막으로 남긴 한마디. “김~진~기~ (감잔가?)”



16장 30절

삼손이 있는 힘을 다해 몸을 굽혀 기둥을 밀어 내자, 신전이 왕들과 그 안에 있던 모든 사람들 위로 무너져 내렸습니다.

 

    <삼손과 데릴라>라는 영화로도 만들어졌던 유명한 이야기다. 맨손으로 사자를 찢어죽이고 나귀의 턱뼈 하나로 천 명을 때려죽이는 삼손의 괴력 이야기, 데릴라의 꼬임에 빠져 머리칼이 잘리고 두 눈이 뽑혀 힘을 잃고 구리 사슬에 묶인 채 감옥에 갇혀 고난을 받는 이야기도 흥미롭지만 역시 이 장면이 하이라이트다.

    <넘버 3>에 나오는 불사파 두목 조필 역의 송강호 대사에 의하면 우리나라에도 예전에 그런 분이 계셨다 한다. 맨손으로 황소뿔을 빠개부수고 덩치큰 코쟁이 로버트 존슨을 작살내신 최영의 선생이시다. 예전 <개그콘서트>에 보면 이와 유사한 코믹케릭터가 있다. 맨손으로 북경오리를 때려잡고 떡볶이를 철근같이 씹어먹으며 달리는 마을 버스 2-1에서 뛰어내리시는 육봉다르르르르~ 선생이시다. 너무 오바해서 코믹으로 나갔나?!

    결론은, 그 무엇이든 삼손의 엄청난 힘에는 미치지 못한다는 거다. 그의 힘은 하나님의 은총에서 온 것이다.




<삼손과 데릴라>

사춘기 때 본 듯한데 삼손의 엄청난 괴력보다 데릴라의 육감적인 미모만이 기억에 남아있다.



    신전을 받들던 거대한 두 기둥을 무너뜨려 그 곳에 있던 3000여명의 블레셋 사람들과 함께 죽음을 맞는다. 그렇게 해서 삼손은 살아있을 때보다 죽을 때, 더 많은 사람을 죽인다. 신전은 블레셋의 민족신인 반인반어(半人半魚)인 다곤을 모신 신전으로 고대중국에서도 이와 비슷한 존재가 있었다고 한다. 옛 이야기, 신화에 심심찮게 등장하는 서양의 인어이야기, 포세이돈, 동양의 용궁과 용왕 등도 비슷한 부류일 것이다.

    삼손의 힘의 비밀은 머리칼이다. 다시 머리칼이 자라난 후 삼손은 다곤 신전을 무너뜨린다. 하지만 삼손이 시금치를 먹어야만 힘이 솟는 뽀빠이처럼 머리칼이 길어야만 힘이 솟는 무슨 특이체질이거나 특이 유전자를 소유한 것은 아닐 것이다. 삼손의 머리칼은 상징이다. 무엇의 상징? 그의 믿음의 상징이다. 머리칼이 잘렸다는 것은 믿음을 잃은 끝에 죄를 범하여 주의 은총에서 멀어졌다는 것이고 머리칼이 자랐다는 것은 신실한 믿음이 자라나서 회복되었다는 것이다. 그는 교만에 빠지고 데릴라의 끈질긴 유혹과 꼬임에 결국 굴복하여 고난을 자초한 후 최후에는 다곤 신전의 기둥을 붙잡고 하나님에게 마지막으로 한 번만 힘을 주시라고 간절히 기도한다.

    그럼 머리칼(hair)은 중요하지 않은가. 아무것도 아닌가. 꼭 그렇지만은 않다. 그 자체로 상징이고 징표이다. 왕이 쓰고 있는 왕관, 법관이 입고 있는 법복, 제사장이 입고 있는 에봇이다. 하다못해 운동선수들이 큰 경기를 앞두고 수염을 깍지 않고 속옷을 갈아입지 않는 등 저마다 갖고 있는 징크스라는 것도 무시할 수는 없다. 본인에겐 마인드 컨트롤, 승리에 대한 확신으로 작용한다. 형식은 내용을 담는 그릇이다. 언어는 생각의 집을 짓는 구조물이다. 흘리지 않고 담으려면 그릇이 있어야 하고 목표한 곳에 도달하려면 수단이 있어야 한다.

    결론은? 내용 못지않게 형식도 중요하다는 것. 그럼에도 내용이 궁극적으로 훨씬 중요하다는 것. 하나님에 대한 신실한 믿음만 있다면 에봇이 아닌 거적을 걸쳐도 권능이 있을 것이며 비록 대머리 삼손이라도 엄청난 힘을 가지게 될 거라는 거!



19장 30절

이스라엘 백성이 이집트에서 나온 후로 이런 일은 한 번도 일어난 적이 없었다. 생각해 보고, 앞으로 어떻게 할 것인가를 말해 보자.

 

    ‘이런 일’은 이스라엘과 베냐민 사이의 전쟁, 즉 유대시민전쟁의 발단이 된 사건을 이름이다. 자세한 내용은 19금 잔혹극이라서 간략하게만 정리하면 한 레위인이 그의 첩과 함께 베냐민 지파에 속한 성읍인 기브아에서 겪었던, 첩의 죽음을 전후로 한 추악하고 엽기적인 사건이다.

    이것으로 이스라엘 각 지파는 같은 유대민족인 베냐민을 상대로 내전에 돌입하게 되고 2번의 패배와 3번째 승리로 베냐민 지파는 600명만 남은 채 멸족의 위기에 처하게 된다. 결국은 이를 염려한 이스라엘 사람들은 평화를 선언하고 이들에게 아내를 얻어주는 것으로 하여 베냐민 지파는 그 자손을 이어가게 된다.

    죄 짓고 회개하고, 죄 짓고 회개하고... 인간의 끊임없는 어리석음과 교만이다. 하나님이 보시기에 지긋지긋하고 신물이 날 지경이다. 아담의 선악과, 카인, 노아의 홍수, 소돔과 고모라 이후 계속 악과의 끈을 끊지 못하고 똑같은 죄와 타락의 반복이다. 사사기의 시대도 별반 다르지 않다.

    17장 10절을 보면 한 레위인이 음식과 의복, 금전을 받고 한 개인의 신전에서 그 가문의 우상에 예배드리는 사설 제사장으로 일하게 되는 구절이 나온다. 일종의 아르바이트, 호구지책이다. 유대시민전쟁의 발단이 된 레위인도 첩을 두는 등 그 행실과 됨됨이가 방정하지 않았고 이기적이고 비겁했다. 모두가 당시에 이미 성직이 타락했었다는 증거이다. 또한 백성, 대중들 역시 성직자를 가벼이 여기고 욕보이고, 원래 보장된 대우도 존중해주지 않는 등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옅어졌다는 것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성직자는 소명의식을 가지고 품위와 본분을 지키며 성도들은 주의 종들을 무겁게 존중하고 존경해야 한다. 지금은 어떤가. 성직자 분들은 하늘의 것보다 세상의 것을 더 탐하고 가까이 두려하고 있지는 않은가. 성도들은 성직자 분들을 배우고 따르려기 보다는 가벼이 여기고 이용하려하고 있지는 않은가. 분업화, 기능화된 시장이 지배하는 자본주의하에서 교회 역시 여기서 자유롭지가 않다. 세상에 아부하지 않고 세상을 일깨우는 교회, 세상에 물들지 않고 세상을 구하는 교회가 되어야 한다. 적어도 성직자 분들만은 기능인이 되어서는 안 된다.

    많은 신학교에서 많은 예비 성직자가 쏟아져 나오고 있다. 성직 인력의 하이퍼 인플레다. 너무 노골적, 세속적인 표현인가. 상기한 사설 제사장 일을 맡은 레위인도 젊은이였다고 한다. 그 시대에도 연륜 높은 레위인만이 대접을 받았던 것일까? 성급한 일반화의 오류일 뿐일까? 알 수 없는 일이다.

    하여튼 사사기의 시대는 왕이 생기지 않은 정치적 혼란, 믿음이 희미해지는 영적 혼란의 시대였던 듯싶다. 현대도, 대한민국도 여기서 자유롭지 않다. 정치, 종교뿐만 아니라 경제, 문화, 도덕적인 혼란의 시기다.

    모든 것이 주의 뜻대로 되게 하소서. 이 땅에 평화와 평강, 정의와 질서가 이루어지게 하소서. 샬롬!


    사사기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