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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 신앙생활

성경읽기 0018 : 사무엘상 6장~18장

어멍 2010. 7. 25. 01:21


    [사무엘]은 선지자 사무엘의 이름을 딴 책으로 그가 처음으로 왕으로 세운 사울과 두 번째 왕인 다윗이 통일왕국을 세우기까지의 역사 이야기로 사울 왕 시대에서 다윗 왕 시대로 넘어가는 시점을 기준으로 [사무엘상]과 [사무엘하]로 나뉜다.


    [사무엘상]의 주요 인물은 엘리, 사무엘, 사울, 요나단, 다윗.

    핵심어는 ‘시기’, ‘마음’이다. 곧 이스라엘은 이웃 나라들에게 왕이 있는 것을 보고 그것을 시기하였으며 사울은 다윗의 승리를 시기하였다. 하지만 하나님은 사람의 마음을 감찰하시기 때문에 인간들이 생각하는 방식대로 하나님의 사람을 선택하시지는 않으신다.



6장 19절

벧세메스 백성 중 여호와의 궤를 들여다 본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러자 여호와께서는 그들을 쳐 칠십 명을 죽이셨습니다.

 

    어떤 다른 사본에는 ‘오만 칠십 명’이 죽었다고 표기되어 있다.

    원래 실로에 있던 언약궤를 블레셋과의 전투에서 승리를 얻기 위해 에벤에셀로 옮겨왔으나 도리어 블레셋 군에게 빼앗긴다. 그 후로 여러 군데로 옮겨 다니나 매번 재앙이 내린다. 벧세메스는 그 중 한 곳. 결국 다윗이 최종적으로 예루살렘으로 옮기기 전까지 언약궤는 기럇여아림에 20년간 머무른다.




영화 <레이더스> 중 언약궤가 열려 죽음의 재앙이 내리는 장면.
오른쪽에 기둥에 묶인 인디애나 존스가 보이고 아래쪽에 언약궤의 그룹이 보인다.



    언약궤는 처음부터 지극히 성스러운 성물로서 지성소 안에서 대제사장만이 볼 수 있었다. 언뜻 열지 말아야 할 판도라의 상자를 연상시키기도 한다. 판도라의 상자가 인간의 원초적 본능인 호기심에 대한 경계를 말한다면 성궤 이야기는 보다 차원 높은 인간과 하나님, 성과 속의 이야기다.

    자기의 분에 맞지 않은 성스런 물건, 보물을 탐하여 해를 자초하는 이야기는 동서고금에 많다. 무협지에서 시장의 왈패가 우연히 보검을 손에 넣은 후 남도 죽이고 자신도 그 칼에 베이는 이야기는 흔하다. 우리 주위에서도 단지 운이 좋아 벼락부자가 되거나 연줄을 타고 고관대작의 벼슬에 오른 경우를 심심찮게 볼 수 있다. 그리고 그 끝은 대부분 좋지 않다. 자기의 분에 맞지 않고 자기 손으로 이룬 자기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단지 걸친 옷, 쓴 감투에 지레 주눅이 들다가도 그 정체를 알면 실망이 이만저만이 아닌 경우가 많다. 반대로 초야에 묻혀서도 반짝반짝 빛이 나는 실력과 존경심이 우러나는 고매한 인품을 소유한 인물들도 있다. 이런 인물들이 걸 맞는 위치에서 책임 있는 중책을 맡아주는, 공공의 이익을 위해 복무해주는 사회가 좋은 사회이다. 소인배는 악착같이 달려들더라도 솎아내야 하고 대인배는 두번세번 사양한다고 해도 밀어 올려 써먹어야 한다. 소인배는 뒤로 물러나고 대인배는 앞으로 나와야 한다.

    지금 우리 사회는 어떤가. 책임 있는 유명인들, 공인들의 됨됨이, 퀄리티는 어떤가. 말하자면 입만 아프다. 만족스럽지 않다. 단지 내 자의적인 판단, 평가일 뿐일까. 부디 사무엘, 다윗과 같은 충직하고 신실한 주의 종을 우리에게 주시기를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한다.



8장 5절

장로들이 사무엘에게 말했습니다. “이제 당신은 늙었고 당신의 아들들은 당신처럼 살지 않습니다. 우리에게도 다른 나라들처럼 우리를 다스릴 왕을 세워 주십시오.”

7절

여호와께서 사무엘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백성들이 너에게 말하는 것을 다 들어 주어라. 백성들이 너를 버린 것이 아니라 나를 버려 내가 그들의 왕이 되지 못하게 하려는 것이다.

8절

백성들이 하는 일은 언제나 똑같다. 내가 그들을 이집트에서 데리고 나올 때부터 오늘날까지 그들은 나를 버렸고 다른 신들을 섬겼다. 그런데 그들은 똑같은 일을 너에게도 하고 있다.”

11절

사무엘이 말했습니다. “왕은 여러분의 아들을 빼앗아 갈 것이고, 그 아들을 데려다가 자기 전차와 말을 몰게 할 것이오. 여러분의 아들은 왕의 전차 앞에서 달리게 될 것이오.

13절

왕은 여러분의 딸도 빼앗아 갈 것이오. 왕은 여러분의 딸에게 향료를 만들게 하거나 자기가 먹을 음식을 요리하게 할 것이오.

14절

왕은 여러분의 제일 좋은 밭과 포도원과 올리브 나무 밭을 빼앗아 자기 신하들에게 줄 것이오.

17절

여러분 스스로는 왕의 종이 될 것이오.

18절

그 때, 여러분은 여러분이 뽑은 왕 때문에 울부짖게 될 것이오.”

 

    왕을 세운 주변국들이 강성해지자 장로들이 모여 사무엘에게 왕을 세워줄 것을 요청하고 이에 사무엘이 세워질 왕이 어떤 일을 할지를 알려줌으로서 그들의 어리석음을 꾸짖는 구절이다. 그러면 왕을 세우지 말았어야 했을까. 하나님은 왜 그것을 허락하셨을까. 잠깐 박스해설을 보자.

성경 속의 궁금증 : 왕을 구하는 것이 왜 잘못인가요?

왕을 구하는 동기가 잘못되었기 때문. 그것은 하나님의 통치권을 부정하고 강력한 정치 지도자를 세움으로서 인간 스스로 다스리겠다는 교만한 태도였습니다. 그럼에도 그것을 허락한 것은 왕의 통치 아래서 그들이 겪을 어려움을 통해 진정한 왕은 하나님뿐임을 깨닫게 하려는 데 있었습니다.

    결국 인간이 하는 일은 언제나 똑같다. 끊임없이 믿음과 은혜를 배반하면서도 한편으론 끊임없이 새로운 힘과 권위를 찾아 그 밑에서 이익과 생존을 구한다. 그 교만과 어리석음과 비루함은 하나님도 배반케 하고 그들의 지도자인 사무엘도 배반케 한다. 유일신 하나님도 끊임없이 배반했는데 이미 늙은 사무엘을 배반하는 게 뭐 그리 어려운 일이겠는가.


    하나님, 예수 그리스도만이 왕 중의 왕(King of Kings), 하늘의 왕, 진정한 왕이시다. 앞의 King은 유일하고 절대적이며 뒤의 Kings는 잡다하고 세속적이다. 앞은 긍정적인 뉘앙스, 뒤는 부정적인 뉘앙스를 띠고 있다. 하지만 땅 위의 인간은 저마다 땅 위의 왕, 인간들의 왕을 원하며 세우려 한다. 그래서 그들은, 우리들은 사무엘이 예언한 것에서 한 치의 벗어남도 없이 이 땅의 통치자들로 인하여 고통을 받게 된다.

    선거로 뽑히는 대통령, 총리 등 왕정이 아닌 민주화된 현대의 정치제도 역시 본질적으로 다르지 않다. 국가란 것이 혹 착취를 위한 도구, 권력층이 권력을 향유하고 유지하는 틀일 뿐이지 않나 의심이 들기도 한다. 권력자들은 그들만의 그룹을 만들며 시민들은 그들에게 착취당하고 그들의 이익을 위해 대신 죽기도 하며 심지어 스스로 권력자의 종이 되려고도 한다. 그들은 그들이 뽑은 왕 때문에, 우리는 우리가 선출한 권력자 때문에 울부짖게 될 것이다.

    이미 많은 평범한 국민들이 후회하며 피눈물을 쏟았다. 용산참사 등 몇몇은 죽음에 이르기도 했다. 유불리 이전에 스트레스가 장난이 아니다. 정치란 그런 것이다. 모두가 죽을 길로 가자고 결정하면 따를 수밖에. 우리가 우리 손으로 뽑은 대통령, 스스로 자초한 결과다. 땅에 속해 정치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 구성원으로서 일정정도 책임을 나눠가져야 하는 인간으로서 어쩔 수 없다. 우리 모두의 책임이다.

    이것이 땅에 속한 인간이 피할 수 없는 숙명인가......... 안타깝지만 그렇다. 땅 위에서 천국의 왕을 모시고 천국의 삶을 영위한다면 모를까 거친 풍파에 서로 부대끼며 살아갈 수밖에 없는 인간의 숙명이다. 집단을 이루고 사회를 이뤄 살아가는 한 정치에서 벗어날 수 없다. 인간과 문명의 손길이 닿지 않은 곳은 이 땅위에 없다. 망국으로 인해 수양산으로 들어가 고사리만 먹다가 굶어죽은 백이, 숙제도 결국은 정치적 이유로 죽은 것이다.

    가족, 씨족, 부족, 민족, 국가, (유럽공동체 같은) 연합 등 정치집단의 범위와 수준은 계속 넓어지고 고도화되어 왔다. 여기에 속하지 않거나 뒤처지면 곧바로 멸망이었다. 연대하거나 적대하며 끊임없이 정치적 합종연횡으로 생존을 도모해왔다. 하지만 거기까지다. 한계가 있다. 땅 위의 법, 세속의 인간에 기대어서는 실망할 수밖에 없다.

    인간을 사랑하되 인간을 바라보지 말고 하나님을 바라보라. 법 위에 정치 있고 정치 위에 하나님이 있다. 예수 그리스도는 정치적 이유로 십자가에 못 박혔지만 결국 정치를 초월하여 하늘로 승천하셨다. 오직 하나님만을 믿고 두려워하라. 우리를 자유케 하는 것, 구원하는 것은 인간이 아니라 하나님이다. 그 분을 향한 신실한 믿음이다.

 

하나님은 사람이 아니시니, 거짓말을 하지 않으신다. 하나님은 인간이 아니시니, 마음을 바꾸지 않으신다. 하나님은 말씀하신 것은 이루시며, 약속하신 것은 지키신다. [민수기 23 : 19]



17장 49절

다윗은 자기 주머니에서 돌 하나를 꺼내어 물매에 올려놓은 다음, 물매로 돌을 던졌습니다. 돌이 날아가 블레셋 사람의 이마를 맞혔습니다. 골리앗은 앞으로 꼬꾸라졌습니다.

51절

다윗은 골리앗의 칼을 그의 칼집에서 꺼내어 그것으로 골리앗을 죽였습니다.

 

    유명한 다윗과 골리앗 이야기.

    사무엘에 의해 사울이 이스라엘의 최초의 왕으로 세워진 이후 사울은 교만에 빠져 죄를 쌓게 되고 결국 하나님은 사울에게서 축복의 영을 거두시고 그를 괴롭게 하는 나쁜 영을 내리신다. 그 때에 다윗이 사무엘의 기름부음으로 하나님의 축복의 영을 받게 된다.




크하하하! 다윗을 보고 코웃음치는 골리앗과 블레셋 병사들
독일 화가 Osmar Schindler의 1888년작



    다윗은 사울 왕을 섬기다가 블레셋과의 전쟁에 참전해 골리앗과 대적하게 된다. 골리앗은 칼과 창과 방패로 무장한, 키가 3m나 되는 거구의 백전의 장수였지만 다윗은 전쟁경험이 없는 앳된 모습으로 사울이 준 갑옷과 투구도 거추장스러워 벗어버린 채 맨몸으로 골리앗에게 다가가 물매로 돌을 던져 골리앗을 쓰러뜨린다. 통쾌하다. 다윗은 신실하고 겸손한 사람으로서 오직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으로 골리앗 앞에 용감히 나선다.

    믿음의 힘이며 하나님의 역사하심이다.



18장 7절

“사울이 죽인 적은 천천이요, 다윗이 죽인 적은 만만이라네.”

8절

여자들의 노래는 사울의 기분을 상하게 만들었습니다. 그는 크게 화가 났습니다. 사울이 생각했습니다. ‘여자들은 다윗이 수만 명을 죽이고, 나는 수천 명밖에 죽이지 않았다고 말하는구나. 이대로 가다가는 다윗이 나라를 차지하고 말겠구나.’

 

    다윗이 골리앗을 죽이고 블레셋과의 전투에서 승리한 후 사울 왕과 함께 개선하자 이들을 맞이하는 여자들이 기뻐 부른 노래. 사울이 다윗을 시기질투하고 두려워하게 된 결정적인 계기다.

    인간의 행동을 결정짓는 것은 이 같은 시기, 질투, 부러움, 열등감, 두려움 등 의외로 단순하고 일차원적인 감정이다. 50분 이성적으로 숙고하더라도 5분 감정이 동한 후 결정을 내리는 것이 인간이다. 더구나 권력을 위협하는 위기 앞엔 이성이 끼어들 여지가 더욱 없다. 아무리 아끼고 사랑하던 부하라도, 심지어 부모자식지간이라도 권력의 생리가 작동한다. 결국 사울은 이후에 다윗을 죽일 궁리를 하게 된다.

    권력을 공고히 강화하는 가장 고전적이고도 확실한 방법은 무엇인가. 하늘 아래 두 개의 태양이 있어선 안 되듯이 가장 위협적인 정적을 제거하는 것이다. 살아있는 정적은 죽이고 죽은 정적은 격하하거나 부관참시까지 했다. 권력이 취약할수록, 위기를 맞을수록 더욱 악착같다. 역사를 보면 숱하게 나온다. 이명박 정권하에서 노무현 전 대통령이 받은 핍박과 자결도 이런 맥락이다. 이명박 대통령 자신도 여기서 자유롭지 않다. 이미 많은 실정을 해서라기보단 그가 최고권력자인 대통령의 신분이었기에 감당해야만 하는 숙명이다. 권력을 함부로 휘둘러서는 안 된다. 권력이란 꿀처럼 달콤하기도 하지만 칼처럼 위험하기도 하다. 배 속에 비수가 박혀있는 듯, 등 뒤에 폭탄을 짊어진 듯 항상 경계해야 한다. 이명박 대통령은 어떠한가. 불안불안, 조마조마하다. 점입가경, 볼수록 가관이다.


    서울에선 청와대로 향하는 촛불시위대를 명박산성으로 막아서고 있는데 봉하에선 제 발로 수많은 사람들이 손 한번 잡아보겠다고, 얼굴 한번 보겠다고 전임 대통령 주위로 모여든다. 배알이 뒤틀리고 안절부절 초조하다. 쪽팔리고 체면이 말이 아니다. 누가 진정한 최고권력자인지조차 헷갈린다. 왕관을 쓴 쥐, 밀짚모자를 쓴 대통령 꼴이다. 미래가 두렵다. 이대로 두면 위험하다. 태풍의 핵이요 또 다른 태양이다. 미워 죽겠다. 없어져 줬으면 좋겠다. 눈치를 줬는지 눈치를 챘는지 아랫것들이 이쁘게도 알아서 척척 해준다. 짐짓 모른 채 먼 산 바라보며 딴전피우기만 하면 된다. 덜컥 자결하니 잠시 놀라지만 곧 앓던 이가 빠진 듯이 시원하고 속이 편안해진다. 그 와중에 연로하신 김대중 전 대통령까지 속앓이를 하다가 사라져주니 망외의 소득, 꿩 먹고 알 먹고다. 곧이어 촛불집회, 추모열기도 잦아들고 권력은 안정되어 공고해진다. 석세스! 만사여의다. 슬슬 자신감이 붙는다.

    감옥이든 봉하든 노무현 전 대통령이 아직까지 생존해 있다면 현 상황이 어땠을까. 이명박 대통령과 이 정권에 부역하는 한나라당 세력에겐 상상하기도 싫은 괴멸적 결과일 것이다. 그가 없기에 숱한 실정에도 불구하고 그럭저럭 버티고 있다. 비교대상, 대안이 있고 없고는 엄청난 차이다. 김구의 죽음으로 친일청산, 민족화해는 물건너간다. 노무현의 죽음으로 역사는 또한번 크게 좌절하고 후퇴했다. 우리에겐 크나큰 손실이다.

    이명박 대통령의 통치행태, 정책들을 살펴보면 ABR(Anything But Roh)이다. 노무현의 것만 아니면, 그것의 반대이기만 하면 어느 것이든 OK다. 이명박 대통령의 마음속엔 노무현 전 대통령에 대한 근원적인 시기, 질투, 열등감, 두려움이 깊이 자리잡고 있다. 우리들의 마음속엔 무엇이 있나. 축복대신 시기가, 하나님에 대한 믿음 대신 세속적 욕망만이 자리잡고 있지는 않은가?


    주여 노무현 대통령을 불쌍히 여기소서. 그의 영혼에 안식을 주소서. 이명박 대통령이 옳은 길을 가게 하소서. 그에게 합당한 주의 뜻이 임하게 하소서.

    저희로 하여금 주님만을 믿고 바라보며 두려워하게 하시옵고 저희를 도우사 이 땅에 하나님의 공의가 드러나고 하나님의 축복과 평화만이 가득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