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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 신앙생활

성경읽기 0015 : 사사기 3장~7장

어멍 2010. 7. 15. 23:39


    사사기(士師記, Judges)는 드보라, 기드온, 삼손 등 여러 사사들의 이야기로 판관기(判官記)라고도 불린다. 사사(士師)란 ①구약시대, 유대민족이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부터 왕이 세워지기 전까지 그들을 다스리던 제정일치의 통치자. ②고대 중국에서, 법령과 형벌에 관한 일을 맡아보던 재판관.

    Judge 역시 법관, 재판관을 뜻하므로 사법, 입법, 행정, 군사 등 중요사항 일체를 관장하던 지도자, 통치자, 선지자 등의 의미를 갖는다. 히브리어로는 ‘판결하는 사람’, ‘다스리는 사람’이란 뜻을 갖고 있어 정치, 군사적 지도자로 활동하였으며 그 직업과 신분은 매우 다양하였다.

    개인적으로는 레위인과 같은 성직자, 종교인과는 달리 여러 지파들 사이에 두드러지는 실력자, 특히 지략, 정치력, 무력 등이 뛰어난 정치, 군사적 실력자나 무사(武士)류에 가깝다고 여겨진다. 가나안을 차지했지만 불완전한 정복으로 여러 다른 민족, 또 그들의 여러 신과 섞여 살고 있었고 아직 왕이 세워지기 전의 과도기적 상황이었으므로 믿음, 리더십이 강한 걸출한 인물의 출몰에 따라 통합과 분열, 전쟁과 평화가 반복되는 불안하고 어지러운 시대였으리라.

    핵심어는 불순종, 심판, 회개, 자비. 주요 내용은 불완전한 정복과 배교, 압제와 구원, 종교적, 도덕적 무질서.



3장 21절

에훗은 오른쪽 허벅지에 차고 있던 칼을 왼손으로 빼서 왕의 배를 깊이 찔렀습니다.

31절

삼갈은 소를 모는 데 쓰는 막대기로 블레셋 사람 육백 명을 죽여 이스라엘을 구원하였습니다.

 


    사사 에훗은 허벅지 옷 속에 칼을 숨긴 채 이스라엘이 바칠 물건을 가지고 모압 왕 에글론을 찾아간다. 에훗은 왕이 신하들을 물리치게 한 후 암살하고, 이로서 이스라엘은 18년 동안의 모압 지배에서 벗어나 이후 80년 동안의 평화를 누리게 된다.

    에훗의 뒤를 이은 사사 삼갈의 이야기. 나귀의 턱뼈로 천 명이나 죽였다는 사사 삼손[사사기 15:15]에 버금가는 괴력, 놀라운 힘이다.



4장 8절

그러자 바락이 드보라에게 말했습니다. “당신이 나와 함께 가면, 나도 가겠습니다. 그러나 당신이 나와 함께 가지 않는다면, 나도 가지 않겠습니다.”

 


    이스라엘을 지배하고 있던 가나안 왕 야빈의 장군 시스라와의 싸움을 앞두고 소심하고 믿음이 없어 두려워하는 이스라엘 장군 바락이 사사 드보라에게 동행해 줄 것을 간청하는 장면. 드보라는 유일한 여자 사사로서 ‘여예언자’라고 불렸다. 물리적 힘은 장군 바락에겐 미치지 못하였겠지만 장군 바락까지 졸라대고 칭얼댈 정도로 대단한 리더십과 카리스마를 지닌 여장부, 여사제였던 모양이다.

    대패하여 도망친 시스라는 간신히 야엘이라는 여인의 장막으로 숨어드는데 야엘은 우유를 주고 안심시켜 재운 후 곤히 자는 시스라를 손수 죽인다. 결국 결정적으로 두 여인에 의해 이스라엘은 가나안 왕 야빈을 완전히 무찌르게 된다. 4장은 여인천하!

    창세기 이후 이제까지의 성경구절 중에 여성이 가장 전면에 도드라지게 등장하는 구절이다. 개인적으로는 교회에서의 여성의 역할, 여권이 신장되었으면 좋겠다. 여성 장로, 여성 목사 등도 많이 등장하고 직책뿐 아니라 대표기도 등 교회내의 다양한 중추적, 주도적 역할도 여성에게 더 많이 돌아갔으면 좋겠다.



7장 3절

“그러니 이제 이스라엘 백성에게 이렇게 명령하여라. ‘누구든지 두려운 사람은 길르앗 산을 떠나 집으로 돌아가도 좋다.’” 그래서 이만 이천 명이 집으로 돌아갔지만, 아직 만 명이 남아 있었습니다.

5절

그래서 기드온은 사람들을 물가로 데리고 갔습니다. 그 때, 여호와께서 기드온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사람들을 두 편으로 나누어라. 개처럼 혀로 물을 핥아먹는 사람과 무릎을 꿇고 물을 먹는 사람을 구별하여 각각 다른 편에 두어라.”

 


    여호와가 미디안 사람들과의 전투에 앞서 사사 기드온에게 하시는 말씀.

    전투에서는 한 사람의 병력도 아쉬운데 3절에서는 삼만 이천 명에서 만 명으로, 5절에서는 최종적으로 만 명에서 다시 삼백 명만 남게 된다. 즉 (32,000-22,000=10,000) (10,000-9,700=300)이다. 반면에 미디안 사람들의 병력은 정확한 기재는 없으나 메뚜기 떼처럼 많았다고 표현되어 있다. 기드온은 한밤중에 횃불을 들고 나팔을 불며 항아리를 깨뜨려 적들을 놀라 달아나게 하고 여호와께서는 미디안 사람들끼리 서로 뒤엉켜 서로의 칼을 가지고 싸우게 함으로서 대승을 거둔다. 300명 대 100만의 대승이라는 영화 <300>을 연상시키는 엄청난 승리다. 기드온의 이스라엘군은 하나님의 믿음으로 무장된 일당백 소수정예였지만 미디안의 군대는 숫자만 많았지 모두가 오합지졸들이었기 때문이다.


    3절의 장면은 영화나 드라마에서 자주 보아온 익숙한 장면이다. 두려운 사람, 무서운 사람은 집으로 돌아가는 것이 좋다. 방해되고 거추장스러울 뿐이다. 하지만 이것만으론 부족하다. 명예가 있고 절제가 있고 품위가 있어야 한다.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있어야 한다. 쌈질이야 왈패, 덩치, 천둥벌거숭이들도 할 수 있다. 진정한 용기란 과용이나 호기가 아니다. 참된 용기란 두려움이 없거나 모르는 것이 아니라 두려움을 아는 것, 두려움을 극복하고 다루는 것이다.

    물을 손에 담아 가지고 핥아먹는 300명과 헐레벌떡 물가에 무릎을 꿇고 꿀꺽꿀꺽 물을 들이키는 9,700명은 무엇이 다른가. 명예다. 절제다. 군기다. 병사들의 숫자, 무기보다 중요한 게 군기다. 그래서 군인들은 자세에 절도가 있고 의복에도 각이 잡혀있다. 군기가 밖으로 드러나는 징표이기 때문이다. 현역과 민방위의 가장 큰 차이도 바로 이 군기다. 복장만 봐도 알 수 있다.


    <맹자(孟子)> 공손축하(公孫丑下)편에 “천시불여지리 지리불여인화(天時不如地利 地利不如人和)”라는 말이 있다. 인화가 으뜸이요 지리가 버금이요 천시가 다음이란 얘기다. 하지만 내 생각은 반대다. 모두가 어느 하나 버릴 수 없는 꼭 필요한 것이나 ‘천시가 으뜸이요 지리가 버금이요 인화가 다음’이란 생각이다. 정치, 인간경영, 땅의 이치를 중시하는 유가(儒家)의 맹자께선 인화가 으뜸이겠지만 실전에서는 반대인 경우가 많다. 전술, 전략을 다루는 병가(兵家)는 물론 하늘의 이치, 하나님과 우주에 대한 종교적 입장에서는 천시>지리>인화가 옳다는 생각이다. 동양에서는 하늘 또는 상제(上帝)에 대한 순종과 차별 없는 보편적 사랑을 주장한 묵가(墨家)가 가장 유사하다고 볼 수 있다. 실지로도 묵가는 맹자 등의 유가들로부터 극렬한 공격을 받기도 하였다.

    인화란 무엇인가. 군기다. 규율이고 정신이고 믿음이다. 상관은 부하를 보호하고 부하는 상관을 위해 목숨을 바친다. 품행이 방정하고 동작에 절도가 있으며 눈이 살아있다. 이것이 없으면 수십, 수백만이라도 허수아비일 뿐이다. 허수아비야 허장성세의 속임수로 쓰일 수나 있지 이건 나머지 군기마저 무너뜨리는 내부의 적이 될 수도 있다. 아무리 힘이 세고 덩치가 커도 전의를 상실하면 없느니만 못하다. 하나님이 기드온의 군대를 32,000에서 300으로 줄인 것이 이것이다.

    지리란 무엇인가. 땅의 이치, 지형의 이점이다. 험준한 절벽, 깊은 연못, 어두운 밀림이다. 장비가 장판교에서 혼자 조조의 100만 대군을 상대한 것도 그 곳이 폭이 좁은 다리 위였기 때문에 가능했다. 공성(攻城)이 수성(守成)보다 어려운 이치도 마찬가지다. 공성은 수성보다, 원정은 방어보다 보통 3배 이상의 병력이 있어야 해볼만 하다고 한다. 보급의 어려움은 물론이고 먼 원정길에 육체적 심리적으로 지쳐 풍토병에 시달리고 사면(四面)에서 고향의 구슬픈 초가(楚歌)가 들려오면 자멸하기 일쑤고 적의 매복과 함정에 빠지면 괴멸하기 십상이다. 같은 조건이라면 길모퉁이에 뭐가 숨어있는지 손금 보듯 꾀고 있는 적이 절대적으로 유리하다. 인화, 정신이란 측면에서도 보통 뺏으려 하는 자보다 뺏기지 않으려 하는 자가 악착같기 마련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공성이 성공하고 왕왕 대규모 원정, 정복전쟁이 성공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당연한 말이지만 전쟁의 승부를 좌우하는 변수는 단순하지 않기 때문이다. 지리란 염탐으로 충분히 극복 가능한 것이고 최첨단 무기체계를 이룬 현대에 이르러선 별 의미가 없는 변수가 되었다. 원정이란 대개 힘이 축적되어 잉여의 무력, 총체적인 국력이 내부에서 소화되지 못할 정도의 압력으로 작용할 때 일어나는 법이다. 대개 원정자는 강자, 피원정자는 약자다. 그리고 그 약자는 오랜 평화로 나태하여 문약(文弱)해졌거나 풍속이 문란하고 타락하여 국력이 쇠약해졌거나 서로간의 반목과 알력으로 분열 혹은 준내전 상태이다.

    철저한 반전주의자이지만 냉철하게 국익의 입장에서 말해보자. 굳이, 피치 못해 전쟁을 한다면 어떤 전쟁이 우리에게 이익이겠는가. 어떤 전쟁이 최상이고 어떤 전쟁이 최악인가. 최상은 첫째가 남의 땅에서 누군가 우리를 대신해 싸워 이기는 거다. 이보다 더 이득돼는 일은 없다. 둘째가 남의 땅에서 우리가 이기는 거다. 셋째가 우리 땅에서 우리가 이기는 거다. 그 다음이 우리 땅에서 우리가 지는 것이다. 최악은??... 우리 땅에서 남이 남을 이기고 지는 것이다. 저들끼리 지지고 볶는 것이다. 각축장, 놀이터, 연습장, 사냥터다. 때론 이 땅에서 그들을 대신해 서로가 서로를 죽고 죽이기도 한다. 외교와 국방의 기본은 원교근공(遠交近攻)이라지만 절대 자기 땅에서 주도권과 자주권을 내주어선 안 된다. 비유가 좀 거북하지만 최상의 전쟁은 남의 칼을 빌어 적을 죽이는 차도살인(借刀殺人)이요 최악의 전쟁은 남을 대리해서 스스로 자기 이웃과 가족을 죽이는 대타살아(代他殺我)이다.

    엄밀히 얘기하면 남의 땅에서 지는 것이 우리 땅에서 이기는 것보다 낫다. 이기든 지든 남의 땅에서 전쟁을 벌이는 이기적이고도 냉혹한 미국의 기본 군사전략이다. 911이 왜 미국에게 충격이었나. 그것은 예상외의 규모와 양상 때문이기도 하였지만 미 본토가 공격받은 최초의 상징적인 사건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것도 미국이 공격받고 미국이 극복한 사건이다. 더 큰 충격은??... 미국의 한복판 뉴욕과 워싱턴에서 러시아와 중국이 치고 받고 전쟁을 치르는 것이다. 러시아의 지휘를 받는 북군과 중국의 지휘를 받는 남군이 러시아와 중국을 대신해 죽고 죽이는 제2의 남북전쟁을 치르는 것이다. 이쯤돼면 일본, 인도, 유럽, 남미 어쩌면 한국까지도 귀퉁이 한 쪽 뭐 하나 뜯어먹을 게 없나 달려들지 모른다. 팍스 아메리카는 이미 옛날의 영광! 미국이란 나라는 볼짱 다 본 지 오래다.

    우리의 경우 구한말 그랬다. 우리는 구경꾼이거나 용병이었다. 때로는 청국의 용병, 때로는 일제의 용병. 심지어 일제에 의해 듣도 보도 못한 남의 땅에서 해매여 죽어가기도 했다. 비슷한 예로는 우리 땅에 당나라를 불러들여 백제와 고구려를 치고 명나라와 왜가 전쟁을 하기도 했고 냉전의 이념대립 속에서 공산주의와 자본주의의 대리전쟁을 치르기도 했다. 정도의 차이는 있으나 지금도 사정이 그리 다르지 않다. 곧 죽어도 우리가 결정하고 우리가 싸워야 한다. 전쟁을 해도 우리가 하고 깨져도 우리가 깨져야 한다. 맨 주먹으로 싸우더라도 우리가 주도권을 가져야 한다. 명령권, 작전권이다. 언제, 어디서, 누가, 어떻게 전쟁을 벌일지 우리가 주도적으로 결정해야 한다.

    얼마 전 이명박 대통령이 2012년으로 예정된 미국으로부터의 전시작전권 환수를 연기한 바 있다. ‘자주적으로 결정했다’고 한다. 자존심 상하는 부끄러운 일이다. 아무리 안보강화, 즉 살기 위해서라고 변명하더라도 전쟁터에서 도망치는 것만큼이나 비겁한 일이다. 자기 가족의 안전을 옆집 아저씨에게 맡기는 것처럼 아버지가 아버지임을 포기하는 처사다. 자주적으로 결정했다는 괴변을 늘어놓으니 참담함이 더하다. 변명을 하더라도 불가피하거나 역부족이라고 했더라면 마음이라도 이리 아프지 않을 것이다. 비겁하고 궁색하다. 자주적으로 망신살을 뻗치는 무개념의 레토닉이다. 아무리 우리손으로 뽑은 대통령이라도 이렇듯 국격을 떨어뜨리고 국민을 창피하게 만들 권리를 갖고 있지는 않다. 기드온은 칼과 횃불과 나팔과 항아리만 가진 불과 300의 군사로 메뚜기 떼와도 같은 막강한 전력의 미디안 군대를 물리치지 않았던가.




기드온의 문양과 이명박 장로의 대통령 취임식 때 사용됐던 문양
하나님과 기독교를 정치적으로 이용하고 모독하는 고도의 상징조작, 감쪽같은 위장술의 모범



    나머지 얘기를 하자. 천시란 무엇인가. 하늘의 이치다. 아무리 인화가 좋고 지리가 있더라도 적진에 우박, 불벼락, 홍수의 천재지변이 일어난다면 승부는 그것으로 끝이다. 하늘이 우리 편이다. 적진을 향해 돌진하는 기병의 등 뒤에서 갑자기 강한 바람이 불어준다면 일기당천, 천군만마다. 인력으로는 어찌할 수 없다. 단지 운인가? 물론 매번 바랄 수는 없다. 하지만 하늘의 이치를 깨닫고 순응하면 내 편으로 만들 수는 있다. 적벽대전에서 공명이 동남풍을 부른 것은 신통한 도술이었을까, 아니면 단지 우연일 뿐이었을까. 천문, 하늘의 이치를 공부하고 깨달으면 능히 일식, 월식도 알 수 있는 것처럼 아마 예상하고 있지 않았을까!

    믿음 깊은 기드온이 하나님의 능력에 힘입어 대승한 것도 이 천시의 범주로 볼 수 있다. 하늘, 하늘의 이치, 하나님이 지으신 이 세상의 섭리, 운명과도 통한다. 하나님의 뜻이다. 인간이 알 수 없고 할 수 없는 신의 영역이다.


    전쟁에 대해 구구절절 얘기가 길어졌다. 전쟁은 인간이 있어온 후 피할 수 없이 계속되어온 것이지만 아무리 좋은 전쟁도 비참하다. 아름다운 전쟁은 없다. 그래서 간혹 전쟁을 아는 군인보다 전쟁을 모르는 민간인이 더 무모하다. 의자에 앉아 명령을 내리거나 단추를 누르는 이는 무심하지만 전장에서는 피와 살이 튀고 영혼이 파괴된다. 진정한 군인, 진정한 상무정신이라면 절제와 품위를 갖추고 전쟁의 잔혹함을 두려워하고 함부로 나대지 말아야 한다.

    그런 면에서 천안함 사건을 계기로 ‘전쟁을 두려워하지 않지만 원하지 않는다'는 이명박 대통령의 발언은 일견 맞는 말 같지만 경솔하고 무모한 발언이다. 북풍을 일으키고 군 최고 통수권자로서의 권위를 세우는 간지나는 발언이었을지는 몰라도 시기적으로 너무 이르고 민심을 추슬러야 할 대통령의 신분으로는 맞지 않는다. 전쟁이 어느 정도 예상되는 선전포고전의 레드 단계나 굳이 하더라도 참모총장 등 군인의 입에서 나올 법한 발언이다. ’평화를 원하며 더 이상의 분쟁은 원하지 않는다‘ 정도가 적당했을 것이다.

    전쟁도 모르고 총도 한번 잡아본 적 없는 군 면제 민간인 출신들이 외교, 국방 등 나랏일을 주무르고 있다. 시대가 일그러져 군 면제가 능력이라고도 하고 신의 아들이라고 부러움 반 비아냥 반이지만 적어도 이 방면의 외교안보수석, 국방장관, 국정원장 등은 군필자로 가려썼으면 좋겠다. 국무위원들의 대다수가 군 면제자들이고 어제는 집권당인 한나라당 대표까지 군 면제자인 안상수 의원이 선출되었다. 무려 십여 년간 도망쳐 결국은 행방불명 사유로 면제되었다니 비겁자, 소인배의 신출귀몰하는 궁극의 필생기(必生技) 삼십육계 줄행랑이다. 본인이야 그렇다 치고 이런 사람을 당대표로 뽑아대는 한나라당 대의원들은 또 뭔가! 대통령·국무총리·당대표 당·정·청 삼위일체 트리플 크라운, 100% 순수 민간정권이 완성됐다. 국민된 입장에서는 부끄럽고 불안하다.

    직업군인들이라고 해서 믿음직스러운 것도 아니다. 천안함이 쥐도 새도 모르게 격침당했다는 설득력 없는 조사결과를 발표하면서도 분한 기색도 부끄러운 기색도 없다. 내가 당했네 나는 바보네 동네방네 광고하면서도 변명하고 빠져나가기 바쁘다. 대통령의 작전권 환수 연기에 어느 한명 항의하는 장성들이 없다. 부러지되 휘어지지 않는 상무정신으로 무장한 진정한 군인은 없고 자리보전과 승진에만 급급하여 자존감 없이, 군을 욕보이는 대통령에 아부하기 바쁘다. 하긴 어디 군대뿐이겠는가. 정치군인, 정치검사, 정치교육자, 정치관료 만이 득세하는 세상이 됐다.

    안보 뿐 아니라 정치 경제 사회 문화 어디 한 군데 성한 구석이 없다. 하루라도 조용할 날이 없다. 실속은 없이 정신없고 시끄럽기만 하다. 단지, 들뜬 이념과잉에 색깔놀이를 즐겨하는 반북 보수주의 어르신들의 부질없는 승부욕, 헛된 자존심만 만족시켜주는 게 다다. 그것도 말로만! 특별담화에 의도적 뉴스편집에 기획 전쟁드라마에, 이 정도면 여론몰이를 넘어 국민을 상대로 한 또 다른 심리전이다. 전쟁통에 자국 국민들에게 보여주고 들려줬던 선전 선무 활동, 전쟁영화를 연상시키는 B급 반공 환타지다.




천안함 희생장병 46명을 눈물로 호명하는 이명박 대통령 역을 완벽히 소화해내고 있는 MB

울지 말아요! MB! ㅠ.ㅠ  반공우익의 심금을 울리는 '전우의 시체를 넘고 넘어'의 21C 버전



    국방과 군대는 반드시 필요한 것이지만 역설적이게도 쓰임이 없을수록 좋은 것이다. 만약에 전쟁만 영원토록 없다면 군대만큼 쓸모없고 비효율적인 조직도 없다. 영원한 평화와 번영만이 있다면 무위도식의 집단이요 돈 먹는 하마다. 그렇다고 없어서는 안 되고... 싸우지 않고 이기는 것이 상책이요 이기는 군대보다 감히 덤벼들 엄두를 못낼 정도로 강하고 위엄있고 충성스런 군대가 최상의 군대다. 무력뿐 아니라 두려움과 존경을 함께 주는 도덕적이고도 총체적인 국력이라야 한다.

    '평화를 바란다면 전쟁을 준비하라(Si vis pacem, para bellum)'는 언듯 '전쟁을 두려워하지 않지만 원하지 않는다'는 이명박 대통령의 발언을 연상시키는 그럴듯한 라틴어 격언이 있다. 엄밀히 얘기해서 축약되어 비약된 측면이 있는, 다소 호전적 뉘앙스를 풍기는 문구다. 오해되고 과장해석되어 현실에서 작동하기 시작하면 상호간 끝없는 군비경쟁으로 치닫고 긴장을 고조시켜 결국은 하지 않아도 될 파멸적인 전쟁을 유발시킬 수도 있다. 정확하고 절제된 해석은 '평화를 바란다면 전쟁억지력을 보장할 강한 군대, 강하고 도덕적인 나라여야 한다'는 의미다. 군대의 존재이유는 전쟁수행에 있는 것이 아니라 평화의 보장에 있다. '평화를 바란다면 (강하고 충성스런 군대로 하여금 전쟁억지력을 담보하여) 평화를 준비하라.' 평화에 대한 간절함으로 무장된 강한 군대여야 한다.

    군기를 세우고 열심히 닦고 조이고 훈련하라. 전쟁을 두려워하라. 그러나 겁에 질리거나 비겁하게 도망치지 말고 용감히 맞서 싸우라. 용감히 맞서 싸우되 혹여라도 전쟁을 바라거나 전쟁을 즐기는 전쟁광, 괴물은 절대 되지 말아라. 언제나 만반의 태세를 갖추고 준비하되 쓰임이 없기를 기도하라. 평시에는 (하나님의) 평화를 기도하고 전시에는 (하나님의) 승리를 기도하라. 군대는 스스로 쓰임이 없도록 하는 게 본질적인 그 첫번째 임무다. 

    전쟁과 사랑, 살육과 축복의 갈등과 병존, 부조화는 종교를 떠나서 인간이 영원토록 풀어야할 숙제다. 전쟁과 살육이 없고 사랑과 축복만이 넘쳐나는 세상이기를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한다.


PS : 천안함이다 전시작전권이다 한미합동훈련이다... 요즘들어 바짝 시끄럽고 어수선해서 그런지 쓰고보니 하나님 말씀보다 드보라, 기드온 등 사사들과 얽힌 전쟁얘기, 정치얘기가 많고 길어졌다. 하긴 전쟁은 정치의 최대치고 정치는 전쟁의 최소치니까. 예수님도 인간의 몸으로 이 땅에 나면서부터 원치 않게 정치에 얽히기 시작했고 왕을 참칭하고 민심을 흉흉하게 한다는 정치적인 죄목으로, 일종의 정치범으로 반대파에 의해 십자가에 못 박히시지 않으셨던가. 알고보면 인간사 모든 것이 정치에서 완벽하게 자유로운 것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