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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 신앙생활

성경읽기 0107 : 야고보서 1장~5장

어멍 2011. 10. 17. 19:39

    성경읽기 0107 : 야고보서 1장~5장



    저자 : 야고보(가 쓴 편지)

    주요 인물 : 야고보, 유대 그리스도인, 아브라함, 라합, 욥, 엘리야

    기록 목적과 대상 : 영어로는 ‘(The epistle of) James’라고 하며 ‘Jakobus서’라고도 한다. 저자인 야고보는 예수님의 동생으로 여러 야고보 중 따로 ‘St James’라고 불린다.

    많은 시련 속에 놓인 유대 그리스도인들을 격려하고 잘못된 신앙 자세를 고칠 것을 권면하며 ‘믿음’으로서만이 아니라 ‘행함’으로 완전해지는 그리스도인들의 삶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1장 27절

하나님께서 받으시는 경건은, 어려운 처지에 있는 고아와 과부를 돌보고, 세상의 악에 물들지 않도록 자신을 잘 지키는 것입니다.

2장 6절

그런데 여러분은 가난한 사람들을 멸시하고 있습니다. 사실 여러분의 생명을 위협하고 법정으로 끌고 가는 사람들은 부자들인데도 말입니다.

 

    “우리가 싸우는 건 세상을 바꾸기 위해서가 아니라, 세상이 우리를 바꾸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예요.” - 실화를 바탕으로 쓴 공지영의 동명소설을 영화화 한 <도가니>에 나오는 인상 깊은 명대사다. 세상과의 한판 승부에 도전하기도 전에 용기를 잃은, 너무 소극적이고 나약한 태도인가?

    다 덤벼! - 세상의 중심에서 호기롭게 나를 외친다. 청춘의 기상과 불같은 정의감으로 뚜벅뚜벅 나가 세상에 도전한다. 하지만 세상은 만만치 않다. 사방이 꽉 막힌 절벽이고 위험한 가시밭이다. 적들은 여우처럼 교활하고 늑대처럼 흉포하다.

    선생님들도 썩었고 공무원들도 썩었고 변호사, 판사, 검사, 목사, 다 썩었다. 위 대사는 이러한 상황에서 절망하고 포기하고픈 주인공에게 함께 부패와 부조리에 맞서고 있던 동료가 하는 대사다. 나약하다기 보단 오히려 결연한 대사다.




세상에 알리지만 세상은 알아 주지 않는다. 알려고 하지 않는다.
무관심에 냉담했던 우리를 뜨겁게 달구고 있는 영화 <도가니>



    열정과 정의감은 충분하다. 하지만 아직 치기가 걷히지 않았다. 곧 깨지고 넘어지고 짓밟히며 세상의 정체를 알아간다. 그 맨 얼굴과 속살을 본다. 그 얼굴은 무서우면서도 징그럽다. 철갑처럼 육중해 숨이 턱턱 막히면서도 종이장처럼 천박해 경멸을 자아낸다. 무서운 얼굴이 몽둥이를 든다. 경멸적인 얼굴이 나를 비웃는다. 세상은 이런 거라고... 너는 의인이 아닌, 단지 철부지일 뿐이라고...

    성숙해지거나 비겁해지거나... 어찌할 것인가?... 절망할 것인가, 극복할 것인가? 세상의 품에 안겨 나를 포기할 것인가, 세상으로부터 나를 지킬 것인가? 그도 아니면 신경 끄고 도망치거나 서로 적당히 타협할 것인가? 근묵자흑(近墨者黑), 근주자적(近朱者赤)인데 하물며 이 뜨거운 부패의 도가니, 죄악의 도가니 안에서 녹지 않고 자신을 지킬 수 있을까?

    분명한 것은 세상을 바꾸기 위해선 세상을 알아야 한다는 거다. 보호막을 걷고 세상 밖으로 나가봐야 한다는 거다. 노출될 수밖에 없다. 시험당할 수밖에 없다. 그것은 일회성이 아니라 쭈~욱 계속된다. 비슷한 듯 다른 듯 끊임없이 반복된다. 자지 않는 보초병처럼 항상 경계해야 한다.


    설득할 것인가, 설득당할 것인가? 설득하려면 설득당하지 않는 것이 먼저다. 내가 세상을 바꿀 것인가, 세상이 나를 바꿀 것인가? 세상을 바꾸기 위해선 내가 세상에 의해 바뀌지 않는 게 먼저다. 호승심, 자만심, 공명심만으로는 쉽게 넘어진다. 때론 절망하고, 때론 타락한다.

    수신제가치국평천하(修身齊家治國平天下)란 말도 있다. 반드시 ‘수신’을 완성한 이후에야 ‘제가치국평천하’할 수 있다는 말은 아니지만 수신이 먼저인 것은 당연하다. 먼저 세상이 우리를 바꾸지 못하게 자신을 지키는 것에 힘써야 한다. 항상 세상의 악한 것에 물들지 않도록 스스로 경계해야 한다.

    안을 지키는 것이 50.5%라면 밖을 공격하는 것은 49.5%다. 단 1%라도 많아야 한다. 그래야 지금 무릎 꿇지 않을 수 있다. 나중에 도전할 수 있다.


    ‘그런데 여러분은 가난한 사람들을 멸시하고 있습니다.’ 고아, 과부, 영세민, 장애인 같은 가난하고 힘없는 사람들을 돕기는커녕 나 몰라라 하거나 멸시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선을 행하지 않고 악에 물들어 있습니다. 무감각하게 악에 길들여져 있습니다. 아무렇지도 않게 악과 벗하며 친근하게 말을 주고받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가난해지기 싫어서 가난한 자를 멸시합니다. 약해지기 싫어서 약한 자들을 멀리합니다. 여러분이 추구하는 것은 의로움이 아니라 강함입니다.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 세상의 부귀영화입니다. 그것을 위해선 사탄과의 거래도 마다치 않습니다. 사실 여러분을 죄짓게 하고 사망에 이르게 하는 것이 사탄인데도 말입니다. ‘사실 여러분의 생명을 위협하고 법정으로 끌고 가는 사람들은 부자들인데도 말입니다.’

    ‘부자들이여, 잘 들으십시오. 여러분에게 고난이 닥칠 것이니 소리 높여 슬프게 우십시오. 여러분의 재물은 썩었고, 여러분의 옷은 좀먹었습니다. 그것이 불같이 여러분의 몸을 갉아먹을 것입니다.’[야고보서 5:1~3]


    야고보는 부자에 대해 뭔 억하심정이 이렇게 쌓인 것일까? 야고보는 부자들을 매우 부정적으로 그리고 있다. 정치적으로는 자유보다 평등을 중시하는 진보좌파, 종교적으로는 민중해방을 주장하는 해방신학의 느낌마저 든다.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은 낙타가 바늘구멍에 들어가는 것보다 더 어렵다.’[마태 19:24] 예수님 역시 비슷한 취지의 말씀을 많이 하셨다. 야고보가 예수님을 지척에서 모셨던 예수님의 동생이어서 그런지, 뒤이은 야고보서 2장 14절 이하 말씀인 행함을 강조한 구절이나, 5장 12절 말씀인 맹세하지 말라는 당부나 예수님의 말씀과 야고보서의 내용은 많은 부분이 겹친다.



2장 14절

만일 누군가가 믿음이 있다고 하면서 아무 일도 하지 않는다면 그 믿음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그 믿음이 그를 구원할 수 있겠습니까?

15절

그리스도 안에서 한 형제자매 된 사람이 옷이나 먹을 것이 필요할 때,

16절

“하나님께서 은혜를 베푸시기를! 몸을 따뜻하게 하고 먹을 것을 좀 많이 드십시오.”라고 말하고, 그 사람에게 필요한 것을 주지 않는다면, 그런 말은 아무 도움이 되지 않을 것입니다.

17절

믿음도 마찬가지입니다. 행동이 따르지 않는 믿음은 죽은 믿음입니다.

24절

그러므로 사람이 행동으로 의롭다 함을 받을 수 있으며 믿음만으로는 의롭다 함을 받을 수 없습니다.

26

영혼이 없는 몸이 죽은 것같이, 믿음도 행함이 없으면 죽은 것입니다.

 

    “나에게 ‘주님, 주님’이라고 말하는 사람 모두가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것은 아니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사람만이 하늘나라에 들어갈 것이다.”[마태 7:21] 역시 예수님이 하신 비슷한 취지의 말씀이다.

    무언가 간절히 필요한 사람에게 필요한 것을 주지 않으면서 말로만 축복하고 때우려 한다면 그런 말은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 약 올리는 것도 아니고, 오히려 화만 돋울 뿐이다. 안 하니만 못하다.

    은혜를 베푼다는 것은 무엇인가? 선을 행한다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멀찍이 떨어져 팔짱낀 채, 상대가 다가와 절을 하며 청하길 기다리는 것이 아니다. 댓가를 바라고 주는 만큼 돌아올 것을 기약하는 것. 적선 받은 거지와 같이 연신 허리를 굽히며 머리를 조아리는 것을 바라는 것. 침을 튀기며 큰 소리로 칭송하고 감사하며 동네방네 소문낼 것을 바라는 것은 은혜를 베푸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적극적, 능동적인 것이어야 한다. 또한 겸손하고 세심해야 한다. 드러나기 전에 살펴야 하고, 청하기 전에 주어야 한다. 자존심까지 살펴서 주기 좋게 주는 것이 아니라, 받기 좋게 주어야 한다. “사람이 선한 일을 행할 줄 알면서도 행치 않는다면 그것이 바로 죄입니다.”[야고보서 4:17]


    하박국, 로마서, 히브리서는 ‘믿음’을 강조하는 느낌이고 야고보서는 ‘행함’을 강조하는 느낌이다. 로마서의 주제인 이신칭의(以信稱義), 곧 ‘오직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을 의롭다 칭한다.’와 ‘믿음만으로는 의롭다 함을 받을 수 없습니다.’[2:24]는 뉘앙스가 사뭇 다르다. 하지만, 당연히, ‘믿음’과 ‘행함’을 대립적인 관계로 따로 나눌 수는 없다. 올바른 믿음, 참된 믿음은 행함을 전제로 한다. ‘믿음’은 이미 그 안에 ‘행함’을 내포한 개념으로 봐야 한다.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다. 이때의 ‘행함’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바로 주님의 가르침인 ‘사랑과 공의’다. 할례나 십일조 같은 율법적이고 형식적인 협소한 개념이 아니다. ‘네 이웃을 네 몸같이 사랑하라. 하나님의 공의를 굳건히 지켜라.’ 이것을 행하는 믿음이 살아있는 믿음이다. 참되고 올바른 믿음이다. 구원에 이를 수 있는 믿음이다.



3장 1절

사랑하는 형제 여러분, 다들 선생이 되려고 하지 마십시오. 선생된 우리가 더 엄히 심판받을 줄 여러분도 알고 있을 것입니다.

6절

혀는 곧 불입니다. 혀는 우리 몸 가운데 악의 세계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몸을 더럽히고, 우리 인생의 전 여정에 불을 지르며, 나중에는 혀도 불에 의해 살라집니다.

9절

우리는 우리의 혀로 우리 주님과 하늘에 계신 아버지를 찬양합니다. 그러나 이것으로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사람들을 저주하기도 합니다.

10절

찬송과 저주가 한 입에서 나오고 있습니다.

 

    선생이란 교사다. 가르치는 사람이다. 여기선 ‘악의 세계인 혀’와 결부되어 남을 말로서 가르치는 ‘선생’이 긍정적이라기 보단 부정적인 의미로 쓰이고 있다.

    바르게 가르치면 바르게 된다. 그르게 가르치면 그르게 된다. 어리고 순수한 사람을 바르게 가르치는 것은 지극히 선하고 가치 있는 일이고, 그르게 가르치는 것은 지극히 악하고 죄를 쌓는 일이다. 그만큼 교육이란 중요하다. 그러므로 ‘선생된 우리가 더 엄히 심판받을 줄 여러분도 알고 있을 것입니다.’


    교학상장(敎學相長), 일신우일신(日新又日新), 삼인행필유아사(三人行必有我師)란 말도 있듯이 교만과 우월감에 빠져 일방적으로 가르치려고만 하면 안 된다. 어줍지 않은 훈장질이어서는 안 된다. 권위적인 꼰대처럼 닥치고 받아 적으라고 윽박질러서는 곤란하다. 이미 그런 것은 통하지 않는 시대가 되었다.

    ‘다른 사람의 말은 빨리 듣고, 자신의 말은 천천히 하십시오.’[야고보서 1:19] 말하려고만 말고 귀를 기울여라. 가르치려고만 말고 배우려 하라. 떨어져서 지시하려고만 말고 함께 섞여서 대화하라. 요즘 말하는 소통능력이다. 쌍방향, 다방향 소통이다.

    철모르는 아이도 혼낼 때 혼내더라도 배울만한 점이 있다. 천하의 악인도 징벌할 때 징벌하더라도 취할 장점이 있다. 여행을 하더라도 그 지역의 가장 흉한 것, 못난 것을 볼 것이 아니라 가장 아름답고 훌륭한 것을 먼저 봐야 한다. 어디를 가도 최고 수준의 탑클래스에 눈을 맞추고 교감, 교류해야 한다.

    쪽바리, 짱깨(떼놈), 양키, 로스케 - 일본인, 중국인, 미국인, 러시아인을 비하하고 낮춰 부른다고 해서 우리가 더 높아지거나 훌륭해지는 것은 아니다. 잠시 분을 풀고 자만심을 채우는 못난 짓일 뿐이다.

    훗날 100%의 모든 진상을 파악하더라도 일단은 99%의 못난 점보다 1%의 배울만한 점, 훌륭한 점부터 봐야 한다. 항상 욕할 점보다 칭찬할 점부터, 비판할 것보다 배울만한 것부터 먼저 보라.

    그것이 자신에게 이롭다. 그리하면 실수하지 않을 수 있다. 마음의 평안을 누릴 수 있고, 부끄러움을 당하지 않을 수 있고, 일신우일신할 수 있다.


    혀(舌)와 말(言)에 관한 경구와 속담은 많다. 혀는 몸을 태우는 불, 자신을 베는 칼이라는 비유도 있다. 하지만 엄밀히 얘기해서 혀와 입은 스피커일 뿐이다. 그것이 울려나오는 앰프는 머리(두뇌)와 마음(심성)이다.

    나쁜 마음에서 나쁜 말이 나오고 좋은 마음에서 좋은 말이 나온다. 그것은 단순히 육두문자, 비속어의 천박함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비록 품위 있고 고상하더라도 사람을 해하고 정의를 배반하는 거짓말, 궤변을 의미하는 것이다. 거짓과 모순과 위선을 통해서 악을 변호하는 모든 언어를 의미한다. 그만큼 사람의 혀는 요물이다. 사람의 마음은 간교하다.

    찬양과 저주가 한 입에서 나온다. 하나님을 찬양하면서도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사람들을 저주하기도 한다. 일찍이 하나님은 찬양하면서도 예수님은 저주하며 박해하기도 했다. 한 입으로 두 말하는 모순이다. 인간, 인간의 입은 복잡하다. 모순투성이다. 하지만 인간이 사는 이 세상도 복잡하기는 마찬가지다.


    찬양과 축복과 감사만 있으면 얼마나 좋겠는가. 입장을 달리해 주장을 펼치는 모든 토론이 서로 상대방을 치켜세우기 위해 경쟁하는 칭찬릴레이라면 얼마나 좋을까. 상대의 일방적인 칭송에 화를 내며 스스로 자리를 양보하는 아름다운 모습은 동화 속에서나 가능한 일이다.

    물론 종교(적 축복)와 정치(적 토론)를 같이 놓고 말할 수는 없다. 세상을 살다보면 때론 심하다 싶을 정도로 시시비비를 가려야 할 때가 있다. 좋은 게 좋은 거라며 하하호호 거짓평화에 숨어서도 안 되고, 선을 사랑하는 만큼 악에 분노해야 하는 것도 맞는 말이다.

    하지만 아쉽다. 세상이 하도 험하고 뒤틀려서인지, 내가 너무 예민해서 지쳐있는지, 감사와 축복과 칭찬만이 가득한 동화 속 이상향이 그립고 아쉽다. 그리고 이것은 내가 많이 부족한 면이기도 하다. 하나님께 더욱 기도하고 성찰해야 할 점이기도 하다.


    3장 말씀은 내게 많은 고민거리를 주고 있다. 나를 뜨끔하게 만드는 내게 해당되는 말씀이다. 나의 성경읽기가 밝고 긍정적이지만은 않다. 찬양과 영광, 감사와 기도, 환희, 기쁨, 축복, 은혜, 사랑, 덕담들로만 채워져 있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 울분과 비탄, 슬픔과 분노, 미움, 저주, 시기, 질투, 정죄, 비판, 악담에 가까운 것들도 많다.

    나는 이런 나의 주장을 펼치기 위해 나의 생각과 습관을 고집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나님 말씀을 가슴으로 읽지 않고 머리로만 읽으며, 가슴으로 전하지 않고 머리로만 풀어 쓰고 있는 것은 아닌가? 주님의 말씀을 듣고 배우려 하기 보단 내 얘기를 말하고 가르치려고만 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주님을 향한 믿음이 과연 내 안에서 꿈틀꿈틀 살아 움직이며 내 가슴을 뜨겁게 달구고 있는가? 주님께 고백하건데 그 믿음이 머리를 거쳐 아직 내 가슴속에 완전히 들어오지 않았다.

    아직 갈 길이 멀다. 내가 길 잃은 어린 양이 되지 않고 주님께 곧게 나아갈 수 있기를... 그것을 위해 오직 성령님의 도움심이 내게 임하기를... 갈망하고 기도드린다.



5장 12절

내 형제 여러분, 맹세하지 마십시오. 하늘이나 땅이나 혹은 그 밖에 다른 것의 이름을 들어 여러분의 말을 증명하려 들지 마십시오. 맞는 것은 그냥 “맞다”라고 말하고, 아닌 것은 그냥 “아니다”라고 말하여 하나님의 심판을 피하시기 바랍니다.

 

    “결코 맹세하지 마라. 하늘을 두고 맹세하지 마라.”[마태 5:34] “너희는 ‘그렇다’라고 할 때만 ‘예’하고, 아닐 때는 ‘아니오’라고 말해라. ‘예’나 ‘아니오’ 이상의 말은 악한 생각에서 나오는 것이다.”[마태 5:37] <성경읽기 0075>에서 나왔던 예수님의 말씀과 상통한다.

    하나님을 믿고 예수님을 따르는 그리스도인들은 믿지 않는 세상 사람들보다 더욱 주님의 이름을 함부로 입에 담아서는 안 된다. 함부로 하나님 앞에 맹세하고, 예수님의 이름을 걸고 맹세해서는 안 된다.


    야고보서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