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몬, 때론 먹의 향내가 나는 글과 음악 그리고 사람

성경, 신앙생활

성경읽기 0104 : 디모데전서, 후서

어멍 2011. 10. 11. 22:02

    성경읽기 0104 : 디모데전서, 후서



    저자 : 사도 바울(이 써서 디모데에게 보낸 편지)

    주요 인물 : 바울, 디모데

    기록 목적과 대상 : 디모데전서, 후서와 디도서, 빌레몬서 4권은 교회, 목회, 목회자와 관련된 내용으로 바울이 쓴 13권의 서신 중 목회서신으로 분류된다.

    디모데전서는 교회 문제와 교회 내의 다양한 지도층의 자격 요건과 그들이 해야 할 의무 등을 말하고 있다. 바울은 디모데에게 이 모든 일을 함에 있어 항상 다른 이들의 모범이 되라고 당부한다.

    디모데후서는 시련을 잘 견딜 것, 청년의 정욕을 피하고 믿음과 의로움 가운데 생활할 것, 가르침을 계속 이어갈 신실한 자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칠 것 등 젊은 디모데를 격려, 훈계하는 바울의 당부말씀을 그 내용으로 한다.



디모데전서 2장 8절

나는 남자들이 모일 때에 화를 내거나 다투지 않고, 손을 들어 경건하게 기도하기를 바랍니다.

9절

마찬가지로 여자들도 옷을 단정하게 입고, 정숙한 몸가짐과 생각을 하기를 바랍니다. 아름답게 보이려고 머리에 요란한 장식을 달거나 보석과 값비싼 옷으로 치장하지 마십시오.

10절

오히려 선한 일을 해서 아름다움을 가꾸어 가십시오. 하나님을 경외하는 여자는 선한 행실로 자신을 아름답게 꾸며야 합니다.

 

    남자는 힘이요, 여자는 아름다움이다. 남성, 수컷의 호르몬은 치고받고 싸우길 좋아한다. 여성, 암컷의 호르몬은 장식하고 꾸미고 가꾸길 좋아한다. 승부에 집착하고 이기길 좋아하는 것은 남성 쪽이 더 강하다. 특히 호르몬 분비가 강한 젊은 남성들이 강하다. 바울도 비슷한 말로 젊은 디모데를 훈계하고 있다. - ‘젊은 사람들이 빠지기 쉬운 정욕을 멀리하십시오.’[디모데후서 2:22]

    젊은이가 호승심이 과하여 쓸데없는 것, 자잘한 것에 집착하고 승부를 거는 것이 이 때문이다. 한창 혈기왕성한 10대 후반, 20대 초반의 사내놈은 괜히 힘자랑하고 싶은 법이며 주체할 수 없는 힘을 감당치 못해 여기저기 들이받고 뭐라도 때려 부수기 마련이다. 무조건 틀어막고 짓눌러선 안에서 폭발할 수도 있다. 폭발하지 않도록 인위적으로라도 구멍을 내주어 탈출구를 마련해주어야 한다. 넓은 사냥터를 마련해주거나 큰 샌드백이라도 달아주어야 한다.

    그 에너지가 화내고 다투고 술 먹고 남을 때리고 짓밟는데 쓰이느냐, 경건한 기도와 선행과 봉사에 쓰이느냐, 그도 아니면 밤을 새워 괴성을 지르며 나무기둥을 들이받는 데 쓰이느냐의 문제일 뿐 어쨌든 소비되게 마련이다. 그리스도의 그것은 당연히 하나님을 위해 쓰여 져야 한다. 사랑을 베푸는 데 쓰여 져야 한다. 그것을 행하기 위해 자신을 갈고 닦는데 쓰여 져야 한다.


    여자들 역시 호승심이 없는 것은 아니다. 어떤 면에선 남자와 마찬가지로, 남자보다 더 파괴적인 시기, 질투라는 호승심을 갖고 있다. 여자들이 ‘아름답게 보이려고 머리에 요란한 장식을 달거나 보석과 값비싼 옷으로 치장하는 것’ 자체가 다른 여자들을 이겨보고 싶기 때문이다. 과도한 명품선호 역시 마찬가지다. 뭇 남성들의 이목을 더 끌거나 다른 여성의 코를 납작하게 하거나 적어도 타인들로부터 무시, 소외당하지 않기 위함이다.

    단정한 옷차림, 정숙한 몸가짐... 요란하고 화려한 스타일보단 소박하고 단순한 스타일이 더 품위 있다는 차원에 그쳐서는 안 된다. 남자든, 여자든 과도한 욕심, 호승심을 경계해야 한다는 것이다. 강하냐 약하냐, 적극적이냐 소극적이냐, 능동적이냐 수동적이냐의 차이만 있을 뿐 여자든, 남자든 힘, 권력, 돈, 아름다움, 세상의 평판과 명예... 등등 이런 것들에 대한 탐욕이 핵심이다.

    겉은 예쁘지만 머릿속에 든 것은 없는 여자도 대략난감이지만 지기 싫어하고 자기 것만 챙기려하지, 남을 배려하고 양보할 줄 모르는 욕심 많은 여자는 최악이다. 욕심 많은 여자보다 무식한 여자가 훨 낫고, 무식한 여자보다 똑똑한 여자가 훨훨 낫고, 똑똑한 여자보다 착한 여자가 훨훨훨~씬 낫다. 착한 것이 무시당하고 ‘착한 여자’란 말이 코미디의 뉘앙스마저 풍기는 척박한 세상이지만 소위 올바로 배운 똑똑한 ‘개념녀’ 보단 본디 마음이 곱고 순수한 ‘착한 여자’가 백번 낫다. 이것은 남자 역시 마찬가지다.


    드러내지 말고 절제하며 숨기라. 겉을 꾸미지 말고 속을 채워라. 채우되 지식보다는 지혜, 지혜보다는 선함으로 채워라.

    힘을 제어하는 자가 진정한 강자다. 속이 아름다운 자가 진정한 미인이다. 형태나 외양의 아름다움, 지식과 지혜의 깊고 넓고 우아한 아름다움보다 선하고 의롭고 성스러운 마음의 아름다움이야말로 진정한 아름다움이다.



디모데전서 3장 3절

(감독은) 술을 많이 마시지 않으며, 싸움을 좋아하지 않고, 신사답고 평온하게 행하며, 돈을 사랑하지 말아야 합니다.

7절

또한 감독은 교회 밖의 사람들에게서도 존경을 받아야 합니다. 그래야 남에게 비난받지 않고, 마귀의 꾀임에도 빠지지 않을 수 있습니다.

8절

감독과 마찬가지로 집사도 사람들에게 존경받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한 입으로 두 말을 하지 않으며, 술 마시고 흥청대지 아니하고, 남을 속여 자신의 이익을 챙기는 사람이어서는 안 됩니다.

 

    초대 교회에 있었던 직분인 감독과 집사의 자격과 의무에 대해 말하고 있다. 집사보다 감독이 높은 직분이었다.

    ‘감독은 술을 많이 마시며, 싸움을 좋아하고, 왈패처럼 거칠게 행하며, 돈을 사랑해야 하며 교회 밖의 사람들에게서 손가락질을 받아야 합니다. 집사 역시 마찬가지여야 합니다. 한 입으로 두 말을 해야 하며, 술 마시고 흥청대야 하고, 남을 속여 자신의 이익을 챙기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적어도 이 정도는 되어야 감독과 집사의 자격이 있습니다.’

    말씀을 마음에 새기기 위해서 때로는 반대로 써보는 것이 효과가 있다. 현재, 나는 집사다.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한번쯤 묵상하고 뒤돌아봐야 할 구절이다. ‘믿음을 저버린 사람은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보다 더 나쁜 사람입니다.’[디모데전서 5:8]



디모데전서 6장 5절

악한 마음을 품고 다투는 사람들은 이미 진리를 잃어버렸으며, 하나님을 섬기는 일을 돈 버는 수단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6절

지금 가지고 있는 것에 만족하는 것은 경건에 큰 도움이 됩니다.

7절

우리가 세상에 올 때, 아무것도 가지고 오지 않았으므로, 세상을 떠날 때도 아무것도 가져가지 못합니다.

8절

그러므로 먹을 음식과 입을 옷이 있다면 만족할 줄 알아야 합니다.

9절

부자가 되려고 애쓰는 사람은 시험에 들고 함정에 빠지게 됩니다. 어리석은 일을 하다가 결국 자신을 망치는 구덩이에 떨어지는 것입니다.

10절

돈을 사랑하는 것이 모든 악의 뿌리입니다. 돈을 더 많이 얻으려다가 진실한 믿음에서 떠나고, 오히려 더 큰 근심과 고통만 당하게 됩니다.

 

    계속해서 바울은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에게 탐욕을 경계하고 있다.

    만족하는 이에겐 발전이 없다. VS 만족하지 않는 이에겐 평안은 없다. - 무엇이 참 명제일까? 둘 다 어느 정도 참을 내포하고 있는 명제라면 어느 것이 더 강력한 명제일까? 성경은 후자의 손을 들어주고 있다. 왜냐하면 인간이 가진 욕심의 크기는 만족의 크기보다 언제나 한 뼘 정도 크기 때문이다. 그 한 뼘 때문에 언제나 슬퍼하고 불안해하고 초조해하고 화가 나 있는 상태이기 때문이다. 만족하는 것은 평안은 물론 경건에 큰 도움이 된다.

    주님을 믿는 그리스도인들은 믿지 않는 세상 사람들보다 덜 세속적이어야 한다. 덜 사나워야 한다. 그들보다 조금이라도 더 거룩해야 하고, 더 온유해야 하고, 더 성숙해야 한다.


    주님 안에서 항상 기뻐하고 감사하려면 만족할 줄 알아야 한다. 먹을 것은 배를 채우면 족하고 입을 것은 몸을 가리면 족하다. 주님의 기도처럼 지금 이 자리에서 남지도, 모자라지도 않는 ‘일용할 양식’이면 족하다. '욕심은 죄를 낳고, 죄는 점점 자라 죽음을 가져옵니다.'[야고보서 1:15]

    현대의 그리스도인들은 악과 더불어 욕심을 경계해야 한다. 악을 미워하는 것만큼 욕심도 멀리해야 한다. 욕심을 쫓다보면 그 끝에 죄악이 있고 죽음이 있다. 탐욕이란 죄악과 죽음에 이르는 잘 닦인 지름길이다. 권력과 명예까지 돈으로 사고 부릴 수 있는 사회가 되었다. 모든 것이 돈으로 통하는 고도화된 현대자본주의에서는 더욱 더 ‘돈을 사랑하는 것이 모든 악의 뿌리입니다.’

    지금, 여기의 우상은 돈이다.




GREED FALSE IDOL(탐욕이라는 이름의 거짓 우상) - 조롱받는 월가 상징 황소상
2011년 10월 9일 ‘월가를 점령하라’ 시위가 계속되고 있는 미국 뉴욕에서 성직자 단체 소속 회원들이
‘그릇된 우상’의 상징물, 호황장의 상징물인 금으로 된 황소상을 들고 주코티 공원 일대를 행진하고 있다.



디모데전서 6장 12절

믿음을 지키는 것은 달리기 시합과도 같습니다.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되리라는 것을 확신하며, 할 수 있는 한 승리할 때까지 열심히 뛰어가십시오.

18절

선한 일을 하도록 노력하며, 베푸는 가운데 부유함을 누리도록 그들을 가르치십시오. 나눠 주고 베풀 때에 맛볼 수 있는 참기쁨을 말해 주십시오.

 

    ‘우리가 이 세상에 살기는 하지만, 세상이 싸우는 것과 같은 싸움은 하지 않습니다.’[고린도후서 10:3] 그 싸움은 상대와 치고받는 격투기가 아니다. 공을 주고받으며 포인트를 올리는 테니스가 아니다. 상대가 이 수를 쓰면 나는 저 수를 쓰는, 상대에 따라 변하는 전략시뮬레이션 게임이 아니다.

    그것은 승리할 때까지 오직 하나님을 보고 자신과 벌이는 달리기 시합과도 같다. 변치 않고 우직하게 자기 트랙을 달리는 것이다. 달리다 보면 상대도 보이지 않고 승부도 중요해지지 않는다. 어느새 한계에 도전하고 완전함을 추구하는 것이다. 그 끝에는 영원한 생명이신 주님이 계신다.

    악인은 때려눕힐 상대를 보고, 속인은 세상의 구경꾼을 보고, 의인은 오직 하나님을 본다. 고수(高手)가 라이벌의 코를 납작하게 하거나 관객에게 박수받는 공연이 아니라 자신이 납득할 수 있는 연주를 추구하듯이 믿음 깊은 의인의 그것은 속인이나 악인의 그것과 같지 않다. 의인은 의인의 길이 있다. 의인의 방식이 있고 의인의 칼이 있다. 악인이 거침없이 악의 길을 가듯이 의인은 거침없이 의의 길을 간다.

    확신을 가지고 믿음의 길을 열심히 뛰어가십시오. 악인이 마련한 장소에서 악인의 방식으로 싸우지 말고, 의인의 방식으로 의인의 길을 가십시오. ‘악에게 지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십시오.’[로마서 12:21]


    참기쁨은 무엇인가? 나눠 주고 베풀 때에 맛볼 수 있는 기쁨이다. 하지만 누구나 맛볼 수 있는 기쁨은 아니다. 그래서 참기쁨, 귀한 기쁨이기도 하다.

    사람마다 추구하는 기쁨이 다르다. 누구는 모으는 기쁨, 누구는 쓰는 기쁨, 혹 누구는 베푸는 기쁨을 추구하기도 한다. 누구는 검소함을 넘은 인색함을 통해 재화를 늘려나가는 것에서 보람을 찾기도 한다. 타인에게 베풀지 않는 것은 물론이고 자신 역시 못 먹고 못 입어도 통장의 잔고가 늘고 땅과 집의 평수와 숫자가 느는 것에서 기쁨을 느낀다. 자린고비, 구두쇠, 수전노다.

    누구는 통장의 잔고가 비고 마이너스가 되더라도 일단은 쓰고 본다. 생계를 넘어 품위유지를 위해, 체면을 위해, 허영심을 위해 빚을 내서라도, 카드를 돌려쓰더라도 소비를 줄이지 않는다. 인심을 잃거나 무시를 당하진 않겠지만 대책 없는 차입경제다. 결국 파산에 이를 수밖에 없다. 내일 파산하더라도 오늘 쓰는 게 행복하다. 허풍꾼, 배짱이, 쇼핑중독이다.

    극과 극이지만 이 둘은 공통점이 있다. 저축하든 소비하든 자신만을 위한 행위라는 거다. 모두 자기욕심이다. 통장의 잔고든 옷장의 옷이든 형태만 다를 뿐 모두 자기 것이다.


    쓸 덴 쓰고 아낄 덴 아껴야 한다. 너무 인색해도 안 되고 너무 헤퍼도 안 된다. 이런 얘기는 가계부를 뒤적이며 가정경제를 걱정하는 주부들에겐 한가한 얘기일 수도 있다. 합리적 경제생활과 종교적으로 베푸는 삶이 다른 범주의 얘기처럼 들리는 것도 사실이다. 경제와 종교는 가깝지 않은 인상이다. 하지만 재화뿐 아니라 인간의 시간, 노력, 관심까지도 그 안에는 경제적 가치가 내재되어 있다.

    벌면서 쓰기도 하고, 취하면서 베풀기도 한다. 때로는 벌 것인가 쓸 것인가, 취할 것인가 베풀 것인가, 양자택일해야 할 때도 있다. 기회비용이란 것이 있어서 시간을 기도에 쓸 것인가, 장사에 쓸 것인가, 공부하는 데 쓸 것인가, 선택해야 할 때가 있다.

    나는 어떤가? 고백하건데 나누고 베푸는 참기쁨을 아직 알지 못한다. 주님의 가르침을 충실히 따르는데 많이 부족하다. 대책 없는 쇼핑족은 아니지만 베푸는 것보다 쓰는 것에 더 기쁨을 느끼고, 인색한 수전노는 아니지만 쓰는 쪽보다는 모으는 쪽에 더 보람을 느끼는 편이다. 아직 욕심에서 자유롭지 않은 것이다.

    쌓아놓든 써 재끼든 모두 자기를 위한 것이다. 반면 나누고 베푸는 것은 남을 위한 것이다. 주님의 가르침을 따라 이웃을 위해 조건 없는 사랑을 실천하는 것이다. 베푸는 가운데 주님 안에서 부유함과 참기쁨을 맛보는 것이다. 아무나 맛볼 수 없는 기쁨이다. 극히 소수만이 맛보는 기쁨이다.

    그 기쁨을 맛볼 수 있기를 주님께 기도드린다.



디모데후서 4장 3절

사람들이 참된 진리는 들으려고 하지 않고, 오히려 자기들을 즐겁게 해 주며 마음에 드는 말만 하는 선생들을 찾으려는 때가 올 것입니다.

4절

그들은 진리에 귀 기울이기보다는 거짓된 이야기와 가르침을 따를 것입니다.

 

    참된 진리는 듣기에 쓰다. 거짓된 이야기와 가르침은 듣기에 달다. 자기들을 즐겁게 해 주는 마음에 드는 말이다. 이것은 일찍이 ‘눈물의 예언자’ 예레미야가 한탄했던 일이기도 하다. 예레미야는 대중에게 영합하는 거짓 예언자들을 비판하고 그들을 따르는 백성들을 안타까워했다.

    옳고 그름보단 호불호요, 호불호보단 유불리다. 귀에 달고 마음에 흐뭇하다면, 자신에게 이득이 된다면, 진리의 유무는 중요치 않다. 때론 어리석음에 빠져 달콤한 말에 유불리조차 판단하지 못한다. 귀가 얇고 판단력이 흐려서, 자기를 속이는 사람을 옹호하고 자기를 때리는 사람을 존경한다.

    ‘심지어 여러분을 노예로 삼는 사람, 여러분에게 사기치는 사람, 여러분을 이용해 먹는 사람, 여러분의 뺨을 때리는 사람에 대해서도 여러분은 잘도 참아 내고 있습니다.’[고린도후서 11:20]


    지금의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은 어떤가? 들어야 할 말보다 듣기 좋은 말만 하고 있지는 않은가? 참된 진리보다 귀에 솔깃한 아부의 말만 들으려 하지 않는가? 평화가 없는데도 ‘평화, 평화’라고 말하고 있지 않은가?

    진리는 달기보단 쓰다. 편안하기보단 불편하다. 진리를 편안하게 길들이거나 달게 요리할 순 없다. 오직 진리 앞에 겸손할 지어다. 하나님의 은총으로 밝게 분별할 지어다.


    디모데전서, 후서.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