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읽기 0090 : 요한복음 19장 (부제 : 예수님의 고난, 그 육체적 고통에 대하여)
19장 12절
유대인들은 소리를 지르며 “만일 당신이 이 사람을 풀어 주면, 당신은 가이사의 지지자가 아닙니다. 자신을 왕이라고 하는 사람은 가이사를 반역하는 자입니다.”라고 외쳤습니다.
15절
그 사람들은 소리를 질렀습니다. “없애 버려라! 없애 버려라! 그를 십자가에 못박아라!” 빌라도가 그들에게 물었습니다. “당신들의 왕을 나더러 십자가에 못박으란 말이오?” 대제사장들이 대답했습니다. “우리에게 가이사 외에는 왕이 없소!”
당시 총독이던 빌라도가 예수님을 풀어주려 하자 대제사장과 바리새파 사람들, 그리고 이들의 사주를 받은 군중들이 반발한다. 만일 무죄 방면한다면 빌라도를 가이사(로마황제)에 반역한 자를 옹호한 죄로 로마에 고변할 기세다.
본래 바리새파 사람들은 유대주의에 편협하리만치 충실하여 로마의 지배를 거부하는 입장이었다. 그런 그들이, 언제부터 이렇게 가이사를 절대적으로 떠받드는 제국의 충직한 백성이 되었나? 그들의 충성심이 하나님도 부정할 기세다.
그들은 하나님의 뜻에 충실했던 것이 아니다. 유대민족주의에 충실했던 것도 아니다. 물론, 로마황제에 대한 충성심으로 가득한 순하고 착한 백성 역시 아니었다. 그저, 오직, 자신들의 정치적 이익에 충실했을 뿐이다. 그들은 분명 종교인이 아니라 정치인이었다.
19장 30절
예수님께서는 신 포도주를 맛보신 다음 “다 이루었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을 하신 후 고개를 아래로 떨구시고 운명하셨습니다.
31절
이 날은 예비일이었고, 다음 날은 안식일이었습니다. 유대인들은 안식일에 시신을 십자가에 그대로 두고 싶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빌라도에게 시신의 다리를 부러뜨리고, 그 시신을 십자가에서 내려 달라고 부탁했습니다.
32절
군인들이 가서 예수님과 함께 못박힌 첫 번째 사람의 다리와 또 다른 사람의 다리를 부러뜨렸습니다.
33절
그러나 군인들이 예수님께 갔을 때에 그들은 예수님께서 이미 돌아가신 것을 알고는 그분의 다리를 부러뜨리지 않고,
34절
창으로 예수님의 옆구리를 찔렀습니다. 바로 피와 물이 쏟아져 나왔습니다.
36절
이런 일이 일어난 것은 “그의 뼈가 하나도 부러지지 않을 것이다”라고 쓰여진 성경 말씀을 이루기 위해서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형(十字架刑)이다. 성경은 이에 대해 비교적 간단한 설명으로 그치고 있다. 아마도 세세히 묘사한다는 것 자체가 너무 잔인한 그림이 될 수 있기 때문일 것이다. 아니면 당시에는 보기 힘든 진풍경이 아닌, 대중에게 공개된 형벌이었기에 누구나 알고 있는 상식이 아니었을까? 즉, 굳이 쓰지 않아도 될 쓸데없는 설명은 생략했다고도 볼 수 있다. 컴퓨터를 켜고 끄는 것이 이제는 너무도 당연한 상식이라서 누구도 자세히 설명해주지 않는 것처럼 말이다.
이제 이것을 설명해보려고 한다. 예수님이 겪으신 고통에 대해서는 이미 <성경읽기 0083>에서 다뤄본 바 있다. 그 고통에 대해 좀 더 자세히, 세밀히 묘사해보려 한다. 혹 누군가 이 글을 읽는다면, 그 누군가가 임산부와 어린이라면, 여기서 글을 접기를 당부 드린다. 19금이 아니라 전 연령 관람불가의 잔혹물이기 때문이다. 성인이라도 진저리가 쳐지는 장면들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적어보려 하는 것은 예수님이 겪으신 고통을 알고자 함이다. 조금이나마 느껴보기 위함이다. 항상 십자가를 보고, 예수님의 고난을 들으면서도 우리는 그것을 덤덤하게 받아들이고 있지는 않은가? 나 역시 점차 익숙해지고 무디어져서 남의 일같이 바라볼 때가 많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인간에게 극한의 공포와 고통을 줄 수 있는 잔인한 형벌과 기상천외한 고문은 차고 넘친다. 동양에서는 사지(四肢)를 묶어 수레에 연결한 후 말이나 소로 끌게 하여 찢어 죽이는 거열형(車裂刑)이란 것도 있고 벌겋게 달군 쇠막대 위를 맨몸으로 걷게 하는 사형법도 있었다고 한다.
에스더서에서 장대에 매달아 죽였다는 하만은 또 어떤가. 밧줄로 묶어서 매달았는지 꿰어서 매달았는지, 꿰었다면 어디서 어디로 꿰어서 매달았는지는 각자 상상에 맡겨둘 수밖에 없다. 모두가 상상하기도 싫은, 모골이 송연해지고 눈이 질끈 감기는 잔인한 장면이다. 십자가형 역시 이러한 극형 가운데 하나였다.
극형의 조건은 첫째 고통의 강도가 강해야 한다. 둘째 일정한 시간동안 고통이 지속돼야 한다. 셋째 대중에게 두려움을 주는 전시효과가 있어야 한다. 넷째 이를 통해 명예와 존엄을 짓밟아 수치심을 불러일으키거나, 종국엔 수치심을 박탈하여 인간이하의 존재로 추락시켜야 한다. 그 존재란 할딱이는 짐승이 될 수도 있고, 꿈틀대는 벌레가 될 수도 있고, 아무런 반응이 없는 나무토막이나 상자가 될 수도 있다.
십자가형은 이런 조건을 모두 갖춘 극형 가운데 하나였다. 도망치려던 노예나 흉악범, 중죄인에게만 적용되던 극형이었다. 이에 비해 돌로 때려죽이는 것은 싱겁다. 목을 베어 죽이는 것은 자비롭다. 십자가형은 한순간에 죽여주는 자비로운 사형법이 아니었다.
예수님은 십자가형 이전부터 육체적 고통을 받으셨다. 그 시작은 겟세마네의 기도에서부터 시작된다. 바로 혈한(血汗, 곧 피땀)이다. 드물기는 해도 인간이 극한의 고뇌와 스트레스를 받으면 땀샘 주위의 모세혈관이 터져 땀과 피가 섞여 분비되는 병리적 현상이다. 아마도 온 몸을 수천 개의 바늘로 찌르는 고통을 느끼셨을 것이다.
유대 공의회에 끌려온 예수님은 그 곳에서 눈이 가려진 채 뺨을 맞는다. 여럿이 돌아가며 때린 후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면 누가 때렸는지 알아맞혀 보라며 조롱을 당하신다. 분명 손바닥이 아닌 주먹이었을 것이다. 눈을 가리면 어디서 주먹이 날아올지 알 수 없다. 본능적인 반사 신경을 사용할 수 없어 충격은 배 이상이다.
빌라도에게 끌려온 예수님은 채찍질을 당하신다. 단순한 채찍이 아니다. 여러 가닥의 가죽 끝에 납 뭉치, 짐승의 날카로운 뼈를 매단 무시무시한 흉기다. 몇 번만 맞아도 몸이 너덜너덜 리본 모양 걸레가 된다. 피부를 찢은 후 상처를 후비고 내부조직을 끊어놓는다. 신경과 뼈와 내장을 노출시킨다. 대부분의 죄수가 미치거나 까무러치거나 도중에 죽는다. 예수님 역시 혼절한 상태에서 태형이 중단됐을 것이다.
채찍질이 끝난 후 로마 군병들에게 끌려온 예수님은 그들에게 둘러싸여 조롱을 당하신다. 찢겨진 몸에 왕을 상징하는 자색 옷을 입히고 가시면류관을 씌운 후 왕의 홀 대신 갈대를 쥐어준다. 그리곤 ‘유대 왕 만세’라고 외친다. 두부(頭部)는 인체 중에 혈관이 가장 많은 곳 중에 하나다. 군병들은 그 곳에 가시관을 고정시키고자 갈대 등으로 때리거나 짓눌렀을 것이다. 머리와 얼굴에 선혈이 낭자했을 것이다. 잔인한 조롱극이 싫증이 나자 군병들은 혈병(피떡)과 달라붙은 자색 옷을 잡아채어 벗긴다. 살점이 뜯어지며 아물던 상처에서 다량의 피가 다시 흘러나왔을 것이다.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시고 골고다 언덕까지 걸어가신 '고난의 길'(비아 돌로로사)은 약 600m였다고 한다. 보통 십자가의 세로대는 형장에 세워져있고 가로대만 지고 가게 하였다는데 그 무게만도 50㎏ 내외였다고 한다. 이미 심한 고초를 겪으신 예수님은 어깨에 지고 올라갈 수 없으셨을 것이다. 분명 심한 출혈과 상처로 체력이 소진되고 정신이 몽롱해져 발걸음을 떼기도, 서 있기도 힘든 빈사상태셨을 것이다. 그래서 군병들은 구레네 출신 시몬이란 사람에게 예수님의 십자가를 강제로 지고 올라가게 한다.
형장에 도착하신 예수님은 곧바로 십자가에 못박히신다. 그 못은 길이 18㎝ 정도의 쇠로 된 대못으로 몸을 뚫고 나무에 박힌다. 먼저 가로대에 손이 박혔는데 아마도 손바닥이 아니라 손목 부근이었을 것이다. 손바닥이라면 몸의 무게를 지탱하지 못하고 찢어졌을 것이기 때문이다. 예상컨대 손바닥과 손목이 만나는 지점의 횡문(橫紋) 중앙의 오목한 부근, 요골과 척골의 중앙(1)이거나 작은 공기돌 모양의 여러 수근골(手根骨)들 사이 어디쯤(2)이지 않았을까 추측된다.
보통의 성상, 성화와 달리 1, 2의 위치가 아니었을까!
한 손이 박히고 좀 움직일 수 있게 느슨한 자세로 나머지 손이 박힌다. 다음에는 세로대에 설치된 지지대 위에, 무릎을 약간 굽힌 자세로 두 발을 포개어 못을 박는다. 발가락을 아래로 향하여 발 중앙 둘째와 셋째 뼈 사이에 박는다. 이렇게 느슨하게 위치를 잡는 것은 고통을 감수하고 호흡을 감행하게 만들기 위함이다. 즉, 팔을 잡아당기고 무릎을 펼 수 있도록, 팽팽히 잡아당겨 못박지 않은 것이다.
손과 발의 주신경이 끊기는 고통이다. 손과 발이 잘리는 고통이다. 하지만 고통의 시작에 불과할 뿐이다. 십자가에 달리게 되면 체중에 의해 어깨가 탈골되고 조직이 위아래로 이격되어 양팔이 15㎝ 정도 늘어난다고 한다. 흉곽은 물을 채워 매단 무거운 물풍선처럼 중력에 의해 아래로 쳐지며 입구가 좁아진다. 공기가 유입은 되나 내뿜을 수는 없다.
이 상태가 장시간 지속되면 근육이 경련, 마비되어 숨을 쉬기 위해 팔을 잡아당기기가 고통스럽다. 무릎을 세워 가슴을 들어 올릴 때마다 못박힌 발등에 몸 전체의 체중이 실려 고통스럽다. 단 한 번의 날숨을 쉬기 위해 손발이 찢어지는 고통, 찢긴 등과 거친 나무기둥이 마찰하면서 생기는 고통을 감수해야 한다. 필사(必死) 혹은 필생(必生)의 시도를 감행해야 한다.
십자가형은 이렇듯 죽기 전까지 고통이 에스컬레이터처럼 가중되는, 매 순간순간이 인간의 한계를 넘나드는 고통의 연속이다. 하지만 불행하게도 고통만으로 사람이 죽진 않는다. 죽음이란 뇌사를 제외하곤 심장과 폐가 정지되는 것을 의미한다. 죄수들은 십자가에 못박혀 배고픔과 목마름으로 죽을 때까지 이 같은 고통을 느껴야만 했다. 지쳐서 더 이상 숨을 쉴 힘이 남아있지 않을 때까지 그들에겐 죽음이 허락되지 않는다.
예수님은 이미 체력이 바닥나 있다. 십자가 이전에 못 먹고, 못 자고, 많은 상처와 다량의 출혈로 이미 쇼크상태, 빈사상태셨을 것이다. 저혈량성 쇼크 때 나타나는 증상 중 하나가 극심한 목마름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내가 목마르다”[요한 19:28] 하시고, 군인들이 해면을 신 포도주에 흠뻑 적셔서, 우슬초 막대기에 매달아 예수님의 입으로 가져가니[29절] 이를 맛보신 후 “다 이루었다”[30절]고 말씀하신 후 운명하신 것이다. 꺼지기 전의 마지막 불꽃처럼, 이 최후의 말씀은 주위 사람들이 모두 알아들을 수 있을 정도로 컸을 것이다.
다음날이 안식일이었다. 유대인들도 빨리 마무리하고 싶었고 로마 군병들도 빨리 끝내고 퇴근하고 싶었다. 그래서 예수님과 함께 못박힌 두 죄수의 다리를 부러뜨렸다. 이것은 무릎 아래를 나무망치로 부러뜨려 더 이상 흉곽을 들지 못하게 함으로서 호흡을 중단시키고 고통을 단축시키는 자비로운 처사였다.
하지만 예수님은 이미 운명하셨기에 그럴 필요가 없었다. 두 죄수에 비해 이전부터 체력이 소진되어 움직이지 못하셨던 것이다. 두 죄수와 달리 이미 미동도 없이 움직임이 없으셨던 것이다. 결국 예수님의 최종사인은 질식사이거나, 그 전에 과도한 출혈과 이에 따른 과부하로 인한 심장의 정지였을 것이다.
하지만 로마 군병들은 죽음을 재차 확인한다. 군병들이 예수님의 갈비뼈 사이 옆구리를 창으로 찌르자 피와 물이 쏟아져 나온다. 극한 고통 속에서, 심장과 폐의 과부하에 의해 흉곽 안에 고인 피와 삼출물들이다. 이들이 이처럼 철저한 것은 사형수가 도망치면 대신 자신들의 목숨을 내놓아야 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이로서 “그의 뼈가 하나도 부러지지 않을 것이다”라고 쓰여진 성경 말씀이 이루어졌다. 곧, 시편 34장 20절을 이름이다. 이로서 예수님의 십자가의 고난, 그 육체적인 고통은 대단원의 막을 내리게 된다.
다 이루시고 고통을 끝내시다.
아프다. 슬프다. 주님의 발자취를 따라가며 주님의 모습을 마주하기가 힘들다. 자세히 적고 묘사하기가 힘에 부친다. 얼마나 아프셨을까? 얼마나 힘드셨을까? 얼마나 고통스러우셨을까?
우리가 죄인이다! 내가 죄인이다!
주님! 저희를 용서하여 주시옵소서! 저희를 부디 불쌍히 여겨 주시옵소서!
요한복음 끝.
마태, 마가, 누가, 요한. 4대 복음서 끝.
※ 상기 내용 중 많은 부분을 영화 <패션 오브 크라이스트>, 김정민님의 게시물 <현대의학으로 본 예수 그리스도의 고통 - 1,2 / 트루먼 데이비스>에서 참조 인용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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