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몬, 때론 먹의 향내가 나는 글과 음악 그리고 사람

성경, 신앙생활

성경읽기 0088 : 요한복음 1장~10장

어멍 2011. 8. 10. 23:37
 

    성경읽기 0088 : 요한복음 1장~10장



    저자 : ‘예수님께서 사랑하시던 제자’[요한 13:23, 21:20]로 불려진 요한. 곧 예수님의 열두 제자 중 최측근 3인 중 한 명인 요한(John)이다.

    주요 인물 : 예수님, 세례 요한, 니고데모, 나사로, 마리아, 빌라도, 예수님의 제자들.

    기록 목적과 대상 : 모든 기독교인들에게 예수님이 그리스도이시며 하나님의 아들임을 증거하기 위해 기록된 복음서로 앞서의 세 공관복음서보다 신학적인 성격을 띠고 있다.



1장 1절

태초에 말씀이 계셨습니다. 그 말씀은 하나님과 함께 계셨는데, 그 말씀은 곧 하나님이셨습니다.

2절

그분은 세상이 창조되기도 전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습니다.

4절

그분 안에는 생명이 있습니다. 그 생명은 세상 사람들을 비추는 빛이었습니다.

5절

그 빛이 어둠 속에서 빛을 발했지만, 어두움은 그 빛을 깨닫지 못했습니다.

14절

말씀이 사람이 되셔서, 우리 가운데에서 사셨습니다.


17절

그것은 율법이 모세를 통해 주어졌지만, 은혜와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왔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예수님) = (말씀=빛=그분)

    예수님은 하나님의 현현(顯現)이다. 상속자이자 독생자다. 예수님은 태초부터 하나님과 같이 계셨다. 그분은 곧 말씀이요, 빛이시다. 그 말씀이 사람이 되셔서 우리 가운데 함께 하셨다. 친근히 우리 곁으로 내려오셔서 울고 웃고, 먹고 자며 함께 사셨다. 하지만 인간은 빛을 깨닫지 못하고, 말씀을 새기지 못하고, 왕을 알아보지 못하고, 예수님을 십자가에 매달았다. 예수님은 인간의 육체가 감당할 수 없는 극한의 고통을 느끼며 십자가에서 죽으셨다.

    그러므로 예언이 성취되었다. 하나님의 말씀이 이루어졌다. 예수님을 통해 우리가 구원의 은혜를 받고 진리에 눈뜨게 됐다. 율법은 모세를 통해 주어졌지만, 은혜와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왔다.

    (예수님=은혜와 진리) ≠ (모세=율법)


    태초... 말씀... 시작부터 요한복음은 구약 창세기를 연상시킨다. 창조, 생명, 빛..., 스케일이 크며 서사적이다. 뜻이 깊고 심오하며 문장이 정연하다. 신약의 창세기라고나 할까. 분명 저자의 학식이 높았으리라 추측된다.

    말씀은 신학적으로 로고스(logos)와 레마(rhema)로 나눌 수 있다. 로고스는 우리 밖의 객관적인 말씀, 곧 문자화된 성경이다. 레마는 그것이 내 안으로 들어와 깨달아진 말씀이다. 내 안에서 살아 꿈틀거리며 좀 더 구체적인 의미를 띠는 말씀이다. 나를 두고 하신 것 같은 말씀, 나를 찾아오신 듯 갑자기 크게 들리는 말씀이다. 때로는 감동감화를 받고, 방언을 하고, 특이한 체험을 하기도 한다. 그럼 우리는 레마를 구하여야 하는가. 레마가 로고스보다 위에 있는가.

    이 문제는 신학적으로 복잡하고 좀 위험하다. 레마는 우리의 주관이 섞이기 때문에 오류의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다는 것이다. 레마의 깨달음이 성령의 도우심으로 주어지지만 여전히 우리의 죄성으로 인해 왜곡될 가능성이 상존한다는 것이다. 하나님과 예수님은 말씀이며 빛이시지만 그 말씀은 때로는 왜곡되고 그 빛은 심심찮게 굴절되고 변색되기도 한다.

    로고스와 레마는 내 능력을 벗어난 너무 어렵고 복잡한 신학적 주제라서 여기서 줄인다.


    자신할 수는 없지만 저자에 대한 나름대로의 추측을 좀 더 이어가보자.

    저자는 예수님과 함께 했고, 예수님을 따랐던 제자로서 예수님을 죽음으로 몰고 간 유대인들에 대해 원망의 감정이 깊었지 않았나 싶다. 앞서의 세 복음서와 달리 ‘유대인(들),Jew(s)’이란 표현을 곳곳에서 부정적으로 사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유대인들은 더더욱 예수님을 죽이려고 안달하였습니다.’[요한 5:18]처럼 대상을 특정하지 않고 뭉뚱그려 ‘유대인’으로 말하는 식이다. 이는 예수님의 죽음의 책임을 유대민족(전체)에게 묻는 느낌, 저자 자신은 유대인이 아니라는 암묵적 주장을 하고 있다는 오해를 살 정도다.

    4대 복음서 중 저작연대가 가장 늦은 주후 80~90년경으로 추측되는 것으로 봐서는, 예수님의 십자가 고난 이후에도 여전히 계속되고 심화되어온 유대교와 예수교의 갈등이 이것을 설명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뒤이은 사도행전(저작연대는 주후 61~63년경으로 추측되어 요한복음보다 오히려 빠르다.)에서도 보이듯이 모세의 제자들임을 자처하는 유대교와 예수님의 제자들임을 자처하는 그리스도교와의 갈등은 여전히 진행형이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이방과 고국에서 모두 박해를 받는 처지였다. 어쩌면 저자는 여전히 건재한 유대교 제사장, 율법학자, 바리새파 사람들을 볼 때마다 예수님을 떠올리며 분노를 느꼈을 수도 있다. 여전히 박해받는 자신의 처지를 떠올리며 울분을 느꼈을 수도 있다. 그렇다면 저자가 이 책을 쓴 목적과 대상의 무게중심은 이미 이방인으로 이동하여 있지 않았을까?!

    실재로 기독교(예수교)는 유대교의 소 종파에 불과했으나 주후 90년 유대교에서 나사렛 사람들을 저주하는 기도문을 발표하면서 나사렛 도당으로 불리던 기독교는 유대교 소 종파로서의 성격을 잃게 된다. 역설적이게도 이것을 기회로 기독교는 로마제국내의 비 유대인 사이에 전파되기 시작해 보편종교, 세계종교로서의 획기적인 전환점을 맞게 된다.

    지금도 유대교는 기독교와 다르다. 예수님을 단지 예언자 중의 한 사람으로 여기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 신약은 구약에 뿌리를 둔 것이나 생각보다 그 거리는 멀다. 양자택일의 문제는 아니나 성경의 정수는 신약, 신약의 정수는 복음서다. 옛 계약(구약)과 새 계약(신약)이 있다면 새 계약이 우선이다. 성경은 구약에서 신약으로 넘어오면서 종교적으로 일신하다. 도약한다. 저자는 구약 창세기를 거울삼아 요한복음을 기록함으로서 이것을 말하고 싶었던 것이 아닐까?!

    율법이 모세를 통해 주어졌지만, 은혜와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왔다.[17절] 율법이 중한가, 은혜와 진리가 중한가? 모세가 위대한가, 예수 그리스도가 위대한가? 묻지 않아도 자명하다!



2장 3절

포도주가 바닥났을 때, 예수님의 어머니가 예수님께 “이 집의 포도주가 다 떨어졌구나.”라고 말해 주었습니다.

4절

예수님께서는 “어머니, 왜 저에게 이런 부탁을 하십니까? 저의 때가 아직 오지 않았습니다.”라고 대답하셨습니다.

 

    갈릴리 가나에서 있은 결혼잔치에 예수님과 예수님의 어머니, 제자들이 초대받는다. 잔치 중에 포도주가 떨어지자 예수님의 어머니와 예수님이 주고받는 대화다.

    예수님은 돌 항아리에 물을 채운 후 그것을 손님들에게 퍼다 주라고 하신다. 손님들이 그것을 맛보았을 때, 그 물은 포도주가 되어 있었다. 예수님이 행하신 첫 번째 표적이다.




베로네세 <가나의 결혼잔치> - 1563, 파리, 루브르 박물관



    4절에서 <쉬운 성경>은 예수님이 마리아를 ‘어머니’라고 부르는 것으로 번역하고 있다. 하지만 NIV, KJV, ASV 영어성경 모두 ‘mother’가 아닌 ‘woman’이다. 다른 곳에 예수님이 마리아를 ‘mother’라고 부른 구절이 있는지는 모르겠다. 무엇이 맞는지, 어떤 말이 가장 적합한지 결정하기 힘든, 번역의 어렵고 미묘한 지점이다.

    신학적으로, 영어로는 ‘woman’이 맞겠지만 실생활, 국어로는 왠지 어색하다.(여자여, 왜 저에게 이런 부탁을 하십니까?) 국어로는 ‘어머니’가 ‘여자여’보다 자연스럽다. 더욱이 아직 본격적으로 공생애를 시작하기 전이시다.(저의 때가 아직 오지 않았습니다.)

    여기서 ‘때’란 공생애를 본격적으로 시작하시어 이적의 표적을 보여주신 ‘영광의 때’이기도 하지만 인자가 사람들의 손에 넘겨져 십자가에 매달리는 ‘고난의 때’이기도 하다. 그래서 예수님은 처음에는 사양하시는 뜻 하지만 어머니의 부탁이고 잔치에 초대된 손님들을 위해, 신랑신부측 체면을 위해, 결국 첫 이적을 행하신다.



10장 11절

나는 선한 목자다. 선한 목자는 양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내놓는다.

18절

아무도 내게서 목숨을 빼앗을 사람이 없고, 다만 내 스스로 생명을 내놓는 것이다. 나는 목숨을 내놓을 권세도 있고, 그것을 다시 찾을 권세도 있다. 나는 이 계명을 내 아버지에게서 받았다.

30절

아버지와 나는 하나다.

33절

당신은 사람에 지나지 않는데도 자신을 하나님이라고 주장하고 있소!

37절

만일 내가 내 아버지의 일을 하지 않는다면, 그 때에는 나를 믿지 마라.

38절

하지만 만일 내가 내 아버지의 일을 한다면, 나는 믿지 않는다 하더라도, 내가 하는 일은 믿어라.

 

    예수님과 예수님을 믿지 않고 핍박하려는 유대인 사이에서 벌어지는 논쟁이다.

    나는 선한 목자다. 너희는 아니다. 너희가 나를 죽이려 하여도 아무도 내게서 목숨을 빼앗을 사람이 없고, 다만 내 스스로 생명을 내놓는 것이다. - 유대인들의 미움에 기름을 붓는 말씀이다. ‘오냐! 내가 너를 죽이나 못 죽이나 어디 한번 보자’며 오기가 발동하고 미움은 광기어린 증오로 변한다.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귀신들렸다고 하고, 미친 사람 취급하며 돌을 집어 예수님께 던지려고 한다.

    예수님은 그들에게 말씀하신다. “너희가 나를 믿지 못하겠거든, 내 말을 믿지 못하겠거든, 내가 하는 일을 보고 판단하여라. 만일 내가 내 아버지의 일을 한다면, 나는 믿지 않는다 하더라도, 내가 하는 일은 믿어라.” - “나를 믿지 못하겠으면, 내가 행한 표적 그것만이라도 믿어라.”[요한 14:11]

    말을 믿지 못하겠거든 행동을 보라는 말씀이다. 귀로 들리지 않는다면 눈으로 보라는 말씀이다. 하지만 그들은 이미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고,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한다. 왜냐하면 그들의 마음이 닫혀있기 때문이다. 결국 듣는 것, 보는 것은 귀와 눈이 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이 하는 것이다.


    어두운 밤길, 뒤에서 다가오는 기다리던 연인의 발걸음 소리는 반갑다. 앞에서 다가오는 낯모를 행인의 발걸음 소리는 무섭다. 그가 백인이라면 좀 마음이 놓이지만 흑인이라면 가슴이 콩딱콩딱, 그 자리를 빨리 벗어나고만 싶다. 같은 발걸음 소리라도 다른 소리다. 우리 마음속에 이미 선입관, 잘못된 편견 등이 자리 잡고 있기 때문이다. 반가움과 무서움이 준비되어 있기 때문이다.

    같은 행동이라도 미운 놈이 하는 것과 이쁜 놈이 하는 것이 다르다. 착한 일도 미운 놈이 하면 꼴 뵈기 싫고, 나쁜 일도 이쁜 놈이 하면 용서가 된다. 대상에 따라 잣대가 바뀐다. 우리의 마음속엔 무엇이 있나. 우리의 종교관, 가치관은 올바른가. 우리가 타인들에게 들이대는 잣대는 곧은가. 점검할 필요가 있다.

    굽은 잣대마저 기분 따라 늘렸다 줄였다하지 않는가. 상황 따라 꺼냈다 접었다하지 않는가. 예수님을 반대하는 바리새파 유대인들, 제사장과 율법학자의 마음은 위선과 거짓으로 가득 차 있다. 그들의 잣대는 굽어 있다. 그들은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고,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한다. 그들은 귀 있는 귀머거리, 눈 있는 소경이다.

    예수님은 어떠한 잘못, 어떠한 죄도 범하지 않으셨다. 오히려 이적을 행하고 불쌍한 자들을 구원하심으로 하나님의 위대하심을 보이셨다. 하지만 그들은 막무가내다. 보지 않으려 한다. ‘싫어, 싫어! 몰라, 몰라! 이미 결정했어! 예수는 죄인이고 반드시 죽어야 해!’ 이제는 마음이 완고히 닫혀있어 귀가 있어도 듣지 않으려 하고, 눈이 있어도 보지 않으려 하는 거부의 단계다.


    예수님은 완악하고 흥분한 군중들을 피해 몸을 보전하신다. 하지만 때가 다가오고 있다. 인자가 사람들의 손에 넘겨져 십자가의 고난을 받음으로서 선지자들의 예언과 하나님의 뜻을 성취할 예수님의 때가 다가오고 있다.

    선한 목자가 그가 돌보는 양들에 의해 거부당한다. 무서워 흩어진 양들이 멀찍이 떨어져 지켜보는 가운데 흉악한 늑대 떼에게 죽임 당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