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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 신앙생활

성경읽기 0086 : 누가복음 10장 (부제 : 선한 사마리아인)

어멍 2011. 7. 27. 23:20
  

    성경읽기 0086 : 누가복음 10장 (부제 : 선한 사마리아인)



10장 30절

“어떤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고 있었다. 그런데 도중에 강도를 만났다. 강도들은 이 사람의 옷을 벗기고 때려서 거의 죽은 채로 버려두고 갔다.

31절

마침 한 제사장이 그 길을 내려가다가 그 사람을 보고는 길 반대편으로 피해서 지나갔다.

32절

어떤 레위인도 그 곳에 와서 그 사람을 보고는 길 반대편으로 피해서 지나갔다.

33절

이번에는 어떤 사마리아 사람이 그 길을 여행하다가 그가 있는 곳에 이르렀다. 사마리아 사람이 그를 보고 불쌍하게 여겼다.

34절

그래서 그 사람에게로 가서 그의 상처에 올리브기름과 포도주를 붓고 붕대로 감쌌다. 그리고 그를 자기의 짐승에 태우고 여관으로 데리고 가서 그를 정성껏 보살펴 주었다.

35절

다음 날, 그는 은화 두 개를 여관 주인에게 주면서 말했다. ‘이 사람을 잘 보살펴 주세요. 만일 돈이 더 들면 내가 돌아올 때 갚겠습니다.’

36절

너는 이 세 사람들 중에 누가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라고 생각하느냐?”

37절

율법학자가 대답했습니다. “그에게 자비를 베풀어 준 사람입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습니다. “가서 똑같이 하여라!”

 



빈센트 반 고호 <선한 사마리아인>
멀리 언덕을 넘어가는 제사장과 가까이 옆을 지나가는 레위인이 보인다.



    ‘선한 사마리아인’, ‘착한 사마리아인’이다.

    이 이야기에서 유래한 ‘선한 사마리아인의 법(The Good Samaritan Law)’이란 것이 있다. 간단히, 거칠게 말하자면 선한 것에 대해 법으로 규정한 조항이다. 그래서 간단치가 않다. 도덕과 법의 중간지대라고 할 수 있어서 규정하기도, 현실에 적용하기도 모호하다.

    한낮 대로변 차안에서 갓난아기가 할딱거리는 것을 보고 창문을 깨고 구해주었는데 차 주인인 아빠가 창문 값을 청구한다면? 설마 그럴 리야!... 그러면 이건 어떤가? 심장이 마비돼 쓰러져있는 이에게 심폐소생술을 하여 살려주었는데 흉골이 골절되었다며 원망을 듣는다면? 아니면 동네 골목에서 성추행당하는 여자를 구해주었는데 그 와중에 소동이 나고 소문이 나서 오히려 성추행범보다 더 원망을 듣는다면? 그도 아니면 지하철 안 여러 승객 앞에서 깡패에게 괴롭힘 당하는 여자를 구해주다가 흠씬 두들겨 맞거나 고속도로에서 고장 난 차를 도와주다가 달려오는 뒤차에 치여 죽는다면?......

    이런 안타깝거나 억울한 예는 우리주위에 넘쳐난다. 그래서 적극적 구호를 권장하기 위해 책임을 면책하거나 처벌을 강제하는 ‘선한 사마리아인의 법’이 얘기된다. 프랑스 등 몇몇 국가는 자신이 위험이나 불이익을 받지 않을 것임을 알면서도 위험에 처한 타인을 자발적으로 돕지 않는 경우에 처벌조항을 둔 법률이 있다. 우리나라도 응급상황에서 응급처치 등을 시행함에 있어 재산상의 손해나 사상(死傷)을 입혔더라도 고의 또는 중대한 과실이 없는 한 민형사상의 책임을 면책한다는 ‘응급의료에 대한 법률(구호자 보호법)’이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 강제규정, 처벌규정이 없는 ‘선한 사마리아인의 법’이라고 할 수 있다.

    조항은 간단명료한 듯하지만 현실에선 대부분 애매모호하여 적용이 어렵다. 어디까지 응급상황으로 볼 것인가? 구호활동을 함에 있어 구호자가 주관적으로 느끼거나 인지할 수 있는 위험의 수준을 어떻게 판단할 것인가? 근본적으로, 선(행)에 대해 법률적으로 규정하고 권장한다는 것 자체에 한계가 있다. 이런 법률이 없느니만 못하다는 무용론을 말함이 아니다. 법률과 도덕, 현실과 이상의 거리를 말함이다.

    선행을 법으로 강제하고, 어겼을 시 처벌한다는 지점에 와서는 그 거리가 더 벌어진다. 처벌은 고사하고 피해만 안 봤으면 좋겠다. 현실은 면책받기도 버거운 것이 사실이다. 선행을 하다가 손해를 보거나 억울함을 당했을 때 보호받기도 간단치 않다.

    의사상자(義死傷者)에 대한 국가의 보호와 돌봄이 턱없이 부족한 현실이다. 선을 권면하는 것도 좋고 필요하면 선을 고의로 회피한 것을 처벌하는 것도 좋다. 하지만 지금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것, 시급한 것은 악인이나 비겁자들에 대한 처벌보다 의인, 용감한 자들에 대한 사회적, 국가적 보호와 돌봄이다. 한순간의 칭송과 허울뿐인 표창장이 아니라 실질적인 충분한 보상이다. 그들이 베푼 선행의 희생보다 다만 한 푼이라도 더 받게 해야 한다. 그들을 후회하며 눈물짓게 만들지 말고 행복하게 웃으며 추억하게 만들어야 한다.

    단순히 일개 법조항만의 문제가 아니라 사회구성원들의 동의가 필요한 제도와 문화의 문제다.


    ‘선한 사마리아인’은 사마리아(사람들)의 명예인가?

    물론 아름다운 이야기다. 칭찬이다. 하지만 역사적, 시대적 배경과 당시의 사회상을 짚어본다면 오히려 불명예다. 즉, 이 이야기는 선하지 않은 사마리아인은 흔하고 선한 사마리아인은 드물다는 전제가 배경에 깔려 있다. 개가 사람을 문 것보다 사람이 개를 문 것이 뉴스가치가 크듯이 같은 선행이라도 사마리아인의 것이 더 돋보인다는 것이다. 이야기가 더 설득력을 갖는다는 것이다.

    이 이야기의 교훈은 응급구호의 필요성에 있지 않다. 예수님은 궁극적으로 이웃에 대한 사랑과 동정, 관심에 대해 말씀하고 계시다. 다만 그것을 위해 비유하여 하신 이야기에 당시의 시대상이 담겨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 비유법은 허위를 극적으로 드러내는 전복을 통한 강조법이다. 사회적으로 존경받는 제사장, 레위인은 불쌍한 사람을 외면하였고 멸시와 천대를 받던 사마리아인은 아무 조건 없이 선행을 행하였다.

    예수님은 항상 비유법으로 말씀하신다. 그 비유는 강한 깨달음을 주기 위해 전복과 과장법을 쓰기도 한다.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지 말고 곱씹어 되새겨야 한다. ‘첫째가 꼴찌 되고, 꼴찌가 첫째 된다.’라는 말씀은 하나님은 중심을 살피시지 겉을 보지 않으신다는 말씀이다. 이 지상에서 지상의 잣대로 줄 세워진 순위는 큰 의미가 없다는 말씀이다.

    ‘부자가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것은 낙타가 바늘구멍에 들어가는 것과 같다.’라는 말씀은 가진 것을 내려놓기가 그만큼 어렵다는 말씀이지, 모든 부자가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낙타가 바늘구멍에 들어가는 것과 같이 어려운 것을 넘어 원천적으로 불가능하다는 의미가 아니다.


    사마리아는 남유다, 북이스라엘의 분열왕국시대에 북이스라엘의 수도였다. BC 722년 앗시리아에 의해 멸망당한 후에는 다수의 이민족들이 이주해와 통혼을 통해 혼혈인들이 출현하였고 종교도 융합되었다. 남쪽 유대인들은 이들을 이민족시하여 배타, 멸시하였는데 서로 식사도 같이하지 않은 것은 물론 그릇도 함께 사용하지 않을 정도로 상종조차 하지 않았다.

    “당신은 사마리아 사람이고, 귀신이 들린 게 분명합니다. 우리가 틀렸습니까?”[요한 8:48]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미친 사람 취급하며 비난했던 말이다. 이렇듯 당시 유대 땅에서 '사마리아 사람'이란 말은 그 자체로 욕이었다. 본래 같은 민족이었으나 어느덧 극한 민족적, 종교적, 문화적 갈등관계에 놓인 것이다.

    모든 갈등 중에서 가장 첨예한 갈등이다. 민족갈등, 종교갈등은 이념갈등, 계급갈등에 비할 바가 아니다.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 열쇠는 보편성이다! 그 보편성의 키워드는 ‘사랑’이다! 기독교와 기독교인들은 끊임없이 ‘보편적 사랑’을 주장, 전파해야 한다. 실재로도 기독교는 보편종교로서의 길을 계속 확장해왔다. 가톨릭(Catholic)이란 말 자체가 보편적이란 뜻의 그리스어 Katholikos에서 나온 말이다.

    사람들이 기독교를 비판하는 이야기의 대부분도 이것이다. 심지어 유대 땅 사막의 신을 왜 믿느냐며 한심해하는 사람들도 있다. 이왕이면 우리 신 믿지 하필이면 멀고도 먼 이민족의 신을 믿느냐는 것이다. 편협한 국수주의, 소박한 민족주의 입장의 비난으로 치부하고 넘어갈 일은 아니다. 부정부패야 어느 종교든, 어느 정도든 있는 것이고 독선, 오만의 인상과 더불어 보편성의 문제를 제기하는 것이다.

    그래서 보편성을 추구해야 한다. 사마리아에서 진리면 예루살렘에서도 진리여야 하듯이 유대와 유럽에서 진리면 아시아와 한국에서도 진리다. 보편성을 무시하고 자기만의 우물에 갇힐 때 종교는 타락하고 공동체와 화해하지 못한다. 때로는 갈등의 당사자, 원인이 되어 비극을 불러오기도 한다.

    보편성의 결여에서 갈등이 시작된다. 그 갈등은 오해, 편견, 독선, 오만에 의해 증폭된 후 막연한 미움을 거쳐 무조건적 증오로 폭발한다. 그것은 전통과 관습, 고정관념 속에 은밀히 숨어있기도 하다. 좌우이념에 갇히면 유대인들이 사마리아인 보듯이 남한인들이 북한인들을 보기도 한다. 지역주의에 갇히면 경상도인들이 전라도인들을 홍어 보듯, 전라도인들이 경상도인들을 문딩이 보듯 서로 비하하고 무시하며 미워하기도 한다.

    경상도에서 콩이면 전라도에서도 콩이어야 한다. 그런데 팥이라고 한다. 내내 콩이라고 여기고 있다가도 저쪽에서 콩이라고 하니 돌연 팥이라고 한다. 옳은 길이라도 저쪽이 먼저 가고 있으면, 길 가운데 자리 잡고 있으면, 가던 길을 바꾸어 반대편으로 피해서 지나간다. 만나지 말아야 한다. 어울리지 말아야 한다. 왜? 나와 저들은 다르기 때문이다. 달라야 하기 때문이다.


    무엇이 가치 있는 전통이고 무엇이 가치 없는 관습인가? 무엇이 고유한 내 것이고 무엇이 생소한 네 것인가? 무엇이 우리 종교고 무엇이 남의 종교인가? 가르자면 한도 없다. 나누자면 끝이 없다. 우리 집 전통과 너희 집 전통이 다르고, 윗동네 관습과 아랫동네 관습이 틀리다. 산골에서는 산신령님을 받들고 바닷가에서는 용왕님을 받든다.

    “너희는 하나님의 계명은 무시하고 사람의 전통만 지키는구나.”[마가 7:8] 하나님의 계명, 예수님의 가르침은 윗동네 다르고 아랫동네 다르지 않다. 2000여 년 전, 갈릴리 나사렛에 살고 있던 유대인만의 것이 아니다. 그것은 전통도, 관습도, 법률도 아니다. 지금, 여기, 우리에게도, 해당되는 보편적인 진리이자 가르침이다. 하지만 진리는 보편적이되 그것을 받아들이는 인간은 보편적이지 않다. 사람과 사람이 틀리고, 지역과 지역, 민족과 민족, 대륙과 대륙이 틀리다.


    노르웨이에서 슬프고 참혹한 일이 있었다. 집권 노동당의 다민족, 다문화 정책에 반대하는 한 테러범에 의해 수많은 무고한 사람이 죽었다. 이제 갈등도 한 지역, 한 나라에 국한된 것이 아니라 전 세계적이다. 들리는 얘기로는 범인은 극우 민족주의 기독교인이라고 한다. 정치적 편견과 잘못된 종교적 신념이 결합되면 이렇듯 위험하다. 가공하리만치 참혹한 결과를 초래한다.

    먼 나라의 남의 일만이 아니다. 한 사람의 미치광이, 사이코가 저지른 일일 뿐이라고 무시하고 넘어갈 일이 아니다. 그냥 미치면 한두 사람 다치게 하지만 정치와 종교에 잘못 미치면 수많은 사람을 다치게 한다. 우리나라의 제노포비아(외국인 혐오증), 종교 간의 갈등 역시 마냥 안심하고 있을 수준은 아니다. 더욱이 점점 상승일로다.

    역시 해결책은 보편적 사랑이다. 테러범이 이것을 알았다면 그런 천인공노할 범죄는 저지르지 않았을 것이다. 그는 하나님을 잘못 알고 있다. 예수님을 오해하고 있다.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정면으로 위배하고 있다. 종교적 오독이 얼마나 위험한가! 어떤 종교든 원리주의, 근본주의는 위험하다. 극단으로 치달을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진실로, 하나님이 누구인가, 예수님의 가르침이 무엇인가, 묵상해야 한다. 항상 겸손한 자세와 열린 사고로 보편, 균형, 조화, 중용을 추구해야 한다. 올인하지 말고, 극단으로 치닫지 말고, 폭주하지 말고, 어느 경우든 외통수에 갇히지 말아야 한다.

    이것도 잡고, 저것도 놓지 않는 것이 좋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는 이 모든 극단을 피할 것이다.[전도서 7:18]


    ‘선한 사마리아인’ 이야기는 남쪽 유대인들의 선민의식의 발로라고도 볼 여지가 있다. 유대인이기도 했던 예수님 역시 그러했을까? 사마리아인에 대해 쓰여 있는 다른 신약 구절들을 보면 그렇게 해석할 여지가 있는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예수님은 편협하지 않으시다. 단순한 유대민족주의, 순혈주의자가 아니셨다.

    ‘우리에게 찬성하지 않는 사람은 우리의 적이다.’라고 말씀하지 않으시고 “우리에게 반대하지 않는 사람은 우리 편이다.”[마가 9:40]라고 하셨다. 사마리아인을 비롯한 이방인은 물론 가난하고 병든 사회적 약자까지 포용하시며 보편적인 진리를 말씀하셨다. 민족적 편견, 사회적 편견과 싸우셨다. 예수님 말씀의 핵심은 비유를 통한 차별 없는 사랑, 신분과 민족을 초월한 구별 없는 동정이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이 말씀을 깨닫고 행한다면 여러 갈등을 화해시키는 치유자가 될 수 있다. 사회적으로 존경받고, 하나님께 그 영광을 돌릴 수 있는 신실한 주의 종이자 친절한 이웃이 될 수 있다. 그리 되면 ‘선한 기독교인’이 너무도 당연해서 ‘선한’이라는 수식어를 붙이는 게 어색하고 불필요하게 될 것이다.


    역사적, 시대적 배경을 살피는 것도 필요하지만 말씀이 갖는 본뜻에서 멀어져서는 안 된다. 달을 보려면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부터 봐야 하지만 계속, 오직, 손가락만 보고 있어선 안 된다. 달을 놓치는 우를 범해선 안 된다. 손도 보고, 달도 봐야 하지만 둘 중 하나라면 달을 봐야 한다. 손가락보다 달이 더 중요하다.

    예수님의 말씀은 이것이다. ‘선한 그리스도인’이 되려면 “가서 똑같이 하여라!”

    네가 누구든지... 어떤 신분, 어떤 지방, 어떤 민족, 어떤 종교, 어떤 나라 사람이든지 “가서 똑같이 하여라!”


 

- 이하 내용은 2013/01/09 덧붙임 -


※ 관련 포스팅 : <성경읽기 0052> 중 [이사야 59:15, 16]

※ 참고 자료 : 김성환 목사님의 <코스타 2012 설교 원고(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


    최근 인도에서 결국 죽음에 이르게 된 버스 안 집단 성폭행 사건이 발생해서 선한 사마리아인에 대해 다시금 생각하게 됐다. 링크한 참고 자료는 우연히 검색해 읽게 된 어느 목사님의 설교문인데 내 본문보다 훨씬 깊이가 있고 신앙적으로 주님의 뜻을 더 밝고 올바르게 드러내고 있다. 특히 강도를 당해 죽어가는 사람, 그를 기꺼이 도와준 사마리아인 자신이 곧 예수님이시고 그 안에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을 봐야 한다는 대목은 큰 감동감화와 깨달음을 주는 말씀이었다.

    적어도 주님이 말씀하시려는 바에 조금이라도 다가간 사람이라면 절대 악당, 가해자가 될 수는 없을 것이다. 철두철미하게 주님을 따라 살기로 결심한 자라면 언제 어디서건 주저치 않고 용감하게 선한 사마리아인의 길을 갈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나를 포함한 대부분의 사람들은 주범, 종범이 아닌 냉담한 개인주의자, 이기적 방관주의자, 비겁한 겁쟁이들인 경우가 많다. 주님의 뜻과 가르침은 진리를 담고 있는 소중한 것이지만 법률, 제도로서 이들을 유인하고 때로는 강제할 사회적 역할도 무시할 수 없다.

    현실적으로, 도와주는 것이 외면하는 것보다 행복해질 거라는 사회적 보증, 이타심이 이기심보다 결국엔 나를 포함한 모두에게 실질적 이익을 가져다 줄 거라는, 적어도 나에게 손해를 가져다주진 않을 거라는 사회적 보증이 필요하다. 곤경에 처한 이를 도와주고 정의를 실현하는 것이 신체적, 물질적 피해를 볼 거라는 두려움이나 정신적, 시간적 스트레스를 줄 거라는 귀찮음보다 비용 면에서 더 이익이고 덜 손해라는 믿음과 약속이 있어야 한다. 그것을 모두가 합의해 법과 제도로서 보장해주는 사회가 되어야 한다.

    그래서 주님의 뜻과 공의가 더욱 밝고, 더욱 넓게 드러나는 세계가 되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