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읽기 0084 : 마가복음 5장, 10장
저자 : 마가(Mark). 요한 마가라고도 불리며 예수님의 직계 제자가 아닌 베드로의 제자로서 바울, 바나바와 같이 전도 여행을 한 바 있다.
주요 인물 : 예수님, 세례 요한, 예수님의 제자들.
기록 목적과 대상 : 모든 이방 기독교인들을 대상으로 쓰여졌지만 특별히 로마에 있는 기독교인들을 위해 쓰여졌다. 가장 오래된 복음서로 세례, 고난, 부활 등 예수님의 행적과 말씀을 적고 있다. 내용의 94%, 거의 대부분이 마태복음과 겹친다.
5장 24절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에워싸고 밀며 따라왔습니다.
25절
그 중에는 십이 년 동안, 혈루증을 앓아 온 여자가 있었습니다.
27절
(그 여자는) 예수님에 대한 소문을 듣고, 사람들 틈에 끼어 예수님을 따라가다가 예수님의 옷에 손을 대었습니다.
28절
그 여자는 ‘옷에 손을 대기만 하여도 내가 나을 거야’ 하고 생각했습니다.
29절
그 즉시, 피가 흐르는 것이 멈췄습니다. 그녀는 자신의 병이 나은 것을 몸으로 느꼈습니다.
30절
바로 그 때, 예수님께서 자신에게서 능력이 나가는 것을 느끼셨습니다. 그래서 돌아서서 물으셨습니다. “누가 내 옷을 만졌느냐?”
33절
여자는 자기에게 일어난 일을 알고서 두려워 떨었습니다. 여자는 예수님의 발 앞에 엎드려 절하며 모든 사실을 말씀드렸습니다.
34절
예수님께서 여자에게 “딸아, 네 믿음이 너를 낫게 하였다. 안심하고 가거라. 그리고 건강하게 지내라”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마태복음 9장 20절 이하에도 같은 내용이 나오지만 마가복음이 더 자세하다.
예수님 주위로 벌떼처럼 모여, 서로 밀치며 에워싸고 가고 있다. 이미 예수님에 대한 소문이 퍼진 상태에서 예수님은 지금 야이로라고 하는 어떤 회당장의 죽어가는 딸을 고치러 가는 중이시다. 여자는 옷깃에 손을 대기만 해도, 닿기만 해도 나을 것이라 생각하고 그 인파속에서 어렵게, 어렵게 예수님께 다가가 손을 뻗친다.
바로 그 때, 그녀의 병은 낫는다. 바로 그 때, 예수님은 자신에게서 능력이 나가는 것을 느끼시곤 “누가 내 옷을 만졌느냐?”고 말씀하신다.(마태복음에는 없는 구절이다.)
성경에는 예수님을 비롯한 많은 기적과 이적에 대한 이야기들이 나오지만 많이 다루진 않았다. 그 이유에 대해선 이미 [성경읽기 0073]에서 적은 바 있다. 이 이야기를 따로 옮기는 것은 바로 ‘능력이 나가는 것’과 “누가 내 옷을 만졌느냐?” 두 구절 때문이다. 다시 말해 ‘성령이 임하는 매 순간마다 예수님이나 하나님은 능력이 나가는 것을 인지하실까?’, ‘꼭 물리적으로 만져야만, 접촉해야만 성령은 임하게 되는 것일까?’하는 의문이다. 더 나아가 ‘믿음이란 과연 무엇일까?’하는 의문이다.
‘어떻게든 옷깃만 만져도 나을 거야’하는 믿음, ‘어떻게든 그 분 앞에 나타나 그 분을 만나기만 해도 나을 거야’하는 믿음, ‘대신 말을 전하며 축복을 받아오기만 해도 나을 거야’하는 믿음은 위대하다. 그래서 그들은 몰려든 인파 때문에 문으로 들어갈 수 없어 지붕을 뜯어 중풍병자가 누운 침상을 집안으로 내려 보내기도 했다.[마가 2:4 이하] 예수님을 찾아온 백부장은 귀하신 분을 번거롭게 할 필요가 없고, 말씀만으로 충분하다며 자신의 아픈 종을 낫게 해주시길 간구한다. 예수님은 놀라시며 “나는 지금까지 이스라엘에서 이같이 큰 믿음을 가진 사람을 본 적이 없다.”[마태 8:10]고 하신다.
예수님은 이들의 믿음을 보시고 이들을 낫게 하신다. 능력이 나가게 하셔서 낫는 것을 허락하신다. 과연 예수님의 인지, 허락을 득해야만 그 능력의 은혜를 받을 수 있는 것일까? 어느 조건을 충족해야만 그 은혜를 받을 수 있는 것일까? 만져야만, 만나야만, 인편으로 말을 전해야만 그 조건을 만족시킬 수 있는 것일까? 아니면 강력한 텔레파시만으로도 가능한 것일까? 물론 이 모든 것이 위대한 믿음, 간절한 기도를 의미함을 모르지는 않다. 단순유치하게 ‘만졌다, 못 만졌다’의 문제가 아니라는 걸 안다. 하지만 다시 의문이다. 얼마나 큰 믿음이어야 하는가? 얼마나 간절한 기도여야 하는가?
영화 <넘버3>에서 조폭 넘버3인 태주(한석규 분)는 그의 아내 현지(이미연 분)가 ‘자신을 얼마나 믿느냐?’고 묻자 ‘51% 믿는다.’고 말한다. 실망한 현지에게 태주는 ‘자신에게 51% 믿는다는 것은 다 믿는 것이고, 49% 믿는다는 것은 하나도 안 믿는 것이다.’라고 설명한다.
믿음을 측정할 수 있을까? 수치로 나타낼 수 있을까? 몇 퍼센트에 도달해야지 예수님을 믿는다고 말할 수 있을까? 어느 선을 통과해야 기적의 은총을 받을 수 있을까? 얼마만큼 길게, 얼마만큼 간절하게 기도해야 이 기도에 응답하여 주실까?
엉뚱한 생각이지만 공인된 기준선, 합격선이 있으면 편리할 것이다. 거기까지! 100일 철야기도 후 101일째 해방이다. 날아갈 듯 홀가분하게 이제 응답만 기다리면 된다. 한마디로 난센스다. 믿음과 기도는 측정할 수 없다. 상대적 기준, 상대적 잣대는 있어도 절대적 기준, 절대적 잣대는 없다. 있어도 보기 힘들고 잡기 힘들다.
혈루병 여인의 믿음은 몇 프로였나? 중풍병 환자의 믿음은 몇 프로였나? “마음이 가난한 사람은 복이 있다.”하셨으니 시비할 일은 아니지만 혹 그들은 독생자 예수님에 대한 믿음보다 질병의 고통으로부터 벗어나고픈 간절함이 더하지 않았을까? 예수님을 믿은 것이 아니라 단지 믿고 싶었던 것은 아닐까? 믿는 것과 믿고 싶은 것은 또 무슨 차이가 있는 걸까?
물론 시작부터 완전할 순 없다. ‘구하라. 그러면 얻을 것이다’라고 하셨으니 ‘믿고 싶어 하는 것’을 통해 올바른 믿음의 길로 들어설 수도 있다. 그것을 계기로 완전한 믿음에 도달할 수도 있다. 하지만 ‘믿는 것’과 ‘믿고 싶어 하는 것’은 엄연히 다른 것이다.
영화 <넘버3>의 태주와 현지
남편이 아내를, 아내가 남편을 믿고 싶은 데, 정말 믿고 싶은 데...
자꾸 의심만 간다면 얼마나 불행하겠는가!
차라리 ‘얼마만큼 믿느냐’보다 ‘무엇을 믿느냐’, ‘무엇이 믿음인가’ 하는 근원적인 묵상이 더 필요하다. ‘어떻게 믿어야 하는가.’ 고민하는 실천적인 묵상이 더 필요하다.
신념(信念)은 강하다. 자기 안에 있어 강한 것이 신념이다. 하지만 신앙(信仰)은 도리어 부드러워야 한다. 밖에 있는 것, 나 아닌 다른 것에 대해 떠받들고 섬기는 겸손한 자세가 신앙이다. 따라서 신앙인은 온유하여 사납지 않아야 한다. 자신의 이익만을 고집하지 말고, 자신의 생각만을 주장해선 안 된다. 항상 자신이 잘못 생각하고 있을 수도 있다는 가능성, 자신의 판단이 틀릴 수도 있다는 겸허한 삶의 자세 속에서 살아야 한다. 그러면서도 마음속에 흔들리지 않는 단단한 중심을 간직하고 있는 사람이 신앙인이다.
그 중심은 단단할수록 좋다. 작을수록 좋다. 뚝뚝 부러지는 흑연이 아니라 잘 연마된 강철처럼, 최고밀도의 다이아몬드처럼, 선명한 태풍의 눈처럼, 하나의 중심이 무한대의 주위를 잡고 나가야 한다. 태풍이라면 슈퍼태풍이다. 연필의 심이라면 평생을 쓸 수 있고 건물의 기둥이라면 100층, 200층을 쌓을 수 있다. 뼈는 안에 있어 굳고 단단해야 하고 피부는 밖에 있어 부드럽고 유연해야 한다. 내유외강(內柔外剛)이 아닌 외유내강(外柔內剛)이어야 한다.
신념은 자신을 지키는 것이고 신앙은 자신을 버리는 것이다. 불교에서도 탐진치(貪嗔癡) 삼독(三毒)을 말하고 있다. 욕심과 성냄과 어리석음이다. 탐은 끌어당기는 것이다. 진은 밀어내는 것이다. 치는 분별력이 없이 어두운 것이다. 욕심이 없어야 불순물이 없이 순도와 밀도를 높일 수 있다. 성냄이 없어야 많은 것을 포용할 수 있다. 어리석음이 없어야 높은 뜻을 헤아릴 수 있다. 모든 것이 어려운 일이나 욕심 없기가 가장 어렵다.
나는 어떤가? 가지려고만 하지 주려고 하지 않는다. 지키려고만 하지 버리려고 하지 않는다. 채우려고만 하지 비우려고 하지 않는다. 주장하려고만 하지 들으려고 하지 않는다. 장황하게 드러내려고만 하지 조용히 묵상하지 않는다. 신념이 강할 진 몰라도 신앙은 한참 모자라다. 내 언어가 하나님을 희롱하지 않기를, 예수님을 욕되지 않기를 기도드린다. 내 채움이 장차 비움을 위한 채움이 되기를 소망한다.
자신의 중심은 부단히 갈고 닦아 더욱더 작게, 강하게 만들어야 한다. 자신의 외연은 부단히 돌아보아 더욱더 크게, 부드럽게 만들어야 한다.
‘무엇을 믿느냐’, ‘무엇이 믿음인가’ 하는 문제는 더 어렵다. 예수님의 기적을 믿느냐? 예수님의 사랑을 믿느냐? 예수님의 부활을 믿느냐? 예수님의 십자가를 믿느냐? 예수님의 권능을 믿느냐? 그 가르침을 믿느냐? 서로 대립항도 아니고 양자택일의 문제도 아니지만 한번쯤 생각해 볼 문제다.
혹 우리가 예수님을 오해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혹 그 분의 일면만을 바라보고 있는 것은 아닌가?
예수님의 공생애는 예루살렘 입성 전까지 기적과 이적의 연속이었다. 물을 포도주로 바꾸는 것부터 시작해서, 오병이어로 오천 명을 먹이시고, 물 위를 걸으시고, 폭풍우를 잠잠케 하셨다. 특히 문둥병, 중풍병, 혈루병을 치료하시고 귀신들린 자, 앞 못 보는 자, 듣지 못하는 자, 말 못하는 자, 걷지 못하는 자를 낫게 하시고 죽은 자마저 살려 내셨다. 화타가 명함도 못 내밀 신의(神醫)의 승승장구의 여정이었다.
인간의 근본적인 걱정, 한계는 무엇인가. 바로 병(病)이다. 건강하지 않은 상태, 고통스런 상태다. 생로병사(生老病死) 중 생(生)을 뺀 로병사(老病死)는 병(病)으로 대표할 수 있다. (탄)생 자체도 지루한 과정과 극심한 산고를 통과하여만 얻을 수 있는 것이고, 탄생하는 순간 이미 로병사(老病死)의 운명이 예약된 것이다. 새 것은 낡아가고, 난 것은 병들어 간다. 그리고 결국 죽는다. 그 누구도 여기서 예외일 수 없다. 천하를 호령했던 진시황도 마찬가지였다.
사람이 온 세상을 다 얻고도 자기의 생명을 잃는다면, 무슨 유익이 있겠는가! 영원한 생명을 준다면 암 투병 중인 스티브 잡스는 몇 십조 원을 주겠고, 대륙의 통치자였던 징기스칸은 권좌를 내줄 것이다. 하지만 세상 끝까지 뒤지더라도 이 지상엔 불로초(不老草), 영생환(永生丸)은 없다.
병이란 인간의 근원적인 고민이기에 예로부터 그것을 다루는 것을 특별하게, 신성하게 여겨왔다. 한자 의(醫)와 의(毉)는 같은 자다. 즉 의사(醫師)와 무당(巫堂)은 본래 하나의 직업이었다. 지금도 건강은 모두의 관심사다. 삼삼오오 모여 자신의 아픈 곳을 설명하고 실력 있는 의사를 무슨 신통하고 신기한 점쟁이 얘기하듯 한다.
당시 대중들에게 즐겨 얘기되는 소문도 열에 아홉은 이런 것이었을 것이다. 여기저기서 구름처럼 몰려든 사람, 병자들은 예수님을 신통한 의사로 오해하지는 않았을까. 귀신들린 사람에게서 귀신을 내쫓는 것을 보고 일부 사람들은 무당, 마법사로 오해하기도 했을 것이고, 심지어 바리새파 같은 정적들은 이것을 갖고 예수님을 바알세불(마귀의 우두머리)이라고 칭하며 미친 사람 취급하기도 했었다.
실지로 예수님은 당시에 일부 사람들에 의해 정치적 인물로 오해받기도 했다. 오병이어의 이적을 행하여 오천 명을 먹이신 후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이 와서 자기를 강제로 데려다가 그들의 왕으로 세우려 한다는 것을 아셨습니다. 그래서 다시 그 곳을 떠나 혼자 산으로 올라가셨습니다.’[요한 6:15] 예수님은 세속의 왕이 아니시다. 선정을 베풀어 백성들을 정치경제적으로 행복하게 만들기 위해 오신 것이 아니다.
얘기인즉슨 예수님을 의사, 정치인, 마법사 등으로 오해하지 말자는 거다. 우리의 시각에서, 우리의 필요에 따라, 무엇이든 해결해주는 해결사, 만능키로 사용해선 안 된다는 거다.
엘 그레코(El Greco) <눈 먼 자를 고치는 그리스도(Christ Healing the Blind Man)>
안과의사 예수님? 만병통치 예수님?
“믿음이 적은 사람아, 왜 의심하느냐?”[마태 14:31]
믿음이 적으면 의심과 의문이 생긴다. 의심과 의문은 믿음을 약하게 한다. 때로는 순수한 믿음, 앞뒤 안 재고 믿는 소박한 믿음이 강력한 파워를 발산한다. 나의 글은 의심과 의문인가? 그냥 암 소리 안하고 겸손하게 믿으면 될 걸, 사사건건 토를 달고, 이리 재고 저리 재며 꼬치꼬치 따지자는 것인가? 하나님의 일보다 사람의 일에 골몰하는 불순종, 불성실한 교만한 글인가? 쓸데없이 길기만 하지, 하나님의 영광을 흐리고 예수님을 욕되게 하는 발칙한 글인가?...
알고 믿자는 것이다. 단순한 지식이나 교리를 말함이 아니다. 최소한의 교양과 상식, 분별력을 말함이다. 누군가 예수님의 가르침이 뭐냐고 묻는다면 ‘사랑’이라고 답할 정도는 되자는 것이다. 누군가 기독교를 욕한다면 왜, 무슨 이유로 비판하는지는 알고 이해할 정도는 되자는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했던 말 또 하고, 했던 말 또 하고... 웅얼웅얼 알맹이 없는 일방적 내용의 반복일 뿐이다. 고함, 고성, 우격다짐, 막무가내 우기기의 단순한 구호의 반복일 뿐이다.
내가 교계의 사정에 아쉬워하는 점이 이것이다. 기독교가 본래 자신의 마음을 닦고 수양하는 점이 타 종교보다 미흡한 인상이긴 해도 자신을 돌아보고 남을 이해하는 데 있어 무척 인색하다는 느낌을 받을 때가 많다. 예수님도 남의 눈에 있는 티끌을 지적하기보다 제 눈의 들보부터 뽑으라 하시지 않았던가. 한마디로 제 몸부터 점검하고 수준 좀 높이자는 말이다.
힘써 기도함은 좋다. 하지만 스스로 마음을 닦는 수양도 게을리 해서는 안 된다. 겸손함과 무개념은 엄연히 다르다. 온전히 믿고 의지함과 무책임하게 모든 걸 하나님께 떠넘기는 것은 엄연히 다르다.
우리는 예수님의 무엇을 믿어야 하고 무엇을 본받고 받아들여야 할까? 하나님의 참된 모습, 예수님의 본 모습은 과연 무엇일까? 무엇이 올바른 믿음이고, 무엇이 잘못된 믿음인가? 무엇이 맹신이고, 무엇이 확신이고, 무엇이 신실한 믿음인가?
무엇을 본받고 무엇을 믿어야 한다니?! 온전한 예수님 전체를 다 믿고, 다 본받아야 한다고 답한다면 딱히 할 말은 없다. 하지만 예수님은 회칠한 무덤, 독사의 자식이라고 저주를 퍼부으며 채찍을 휘두르고 분노하기도 하셨고, 자신을 십자가에 매단 이들을 위해 용서를 기도하기도 하셨다. 물 위를 걷고 폭풍우를 잠재우는 등 거침없는 기적을 행하기도 하셨고, 연약한 어린 양같이 매 맞고 피 흘리기도 하셨다.
과연 우리는 이러한 온전한 예수님을 온전히 믿고 따르고 있는가? 우리는 이런 여러 예수님을 한 분 안에 하나로 통합하여 온전히 받아들이고 있는가? 어느 일면만 받아들여선 안 된다. 특히 기적의 하나님, 능력의 예수님만 강조해선 안 된다. ‘능치 못함이 없으시니’ 이것도 해주시고, 저것도 해주소서. - 이 수준에 그친다면 풍요와 다산의 신 바알숭배, 기복신앙과 다를 바 없다. 정화수(井華水) 떠다놓고 천지신명께 싹싹 비는 소박한 민간신앙만 못하다.
예수님을 믿는 것과 예수님을 따르는 것을 따로 말할 수는 없다. 예수님을 믿지 않으면 따라갈 수 없다. 예수님을 따르지 않는 믿음은 거짓 믿음이다. 하지만 굳이 말한다면 예수님의 이적을 믿는 것보다 예수님의 말씀을 따르는 것이 더 중하다. 예수님의 기적을 철썩 같이 믿는 것보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사랑과 정의’를 행함이 더 중하다.
“나에게 ‘주님, 주님’이라고 말하는 사람 모두가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것은 아니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사람만이 하늘나라에 들어갈 것이다.”[마태 7:21] “너희는 나에게 ‘주여, 주여’하면서 왜 내가 말한 것은 행하지 않느냐?”[누가 6:46]
10장 35절
세베대의 두 아들인 야고보와 요한이 예수님께 와서 말했습니다. “선생님, 우리의 소원을 들어 주시기 원합니다.
37절
저희가 주의 영광스러운 나라에서 선생님의 오른쪽과 왼쪽에 앉게 허락해 주십시오.”
38절
예수님께서 대답하셨습니다. “너희가 요구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지 못하는구나. 너희는 내가 마시는 잔을 마실 수 있느냐? 그리고 내가 받는 세례를 받을 수 있느냐?”
41절
이 말을 듣고, 나머지 열 명의 제자들이 야고보와 요한에게 화를 내기 시작했습니다.
42절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부르시고 말씀하셨습니다. “너희가 아는 것처럼 이방 사람들의 통치자라는 사람들은 사람들을 지배하려고 한다. 고관들도 사람들에게 세도를 부린다.
43절
그러나 너희는 그래서는 안 된다. 누구든지 너희 중에서 높아지려거든 종이 되어야 한다.
44절
누구든지 너희 중에서 첫째가 되려거든 모든 사람의 종이 되어야 한다.
45절
인자도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다. 인자는 자기 생명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고 왔다.”
마태복음(20장 20절 이하)에는 야고보와 요한 두 형제의 어머니가 아들들을 데리고 와서 직접 예수님께 요구하는 것으로 나온다. 그리고 38절에서 말하는 ‘잔’만 있고 ‘세례’는 없다.
잔과 세례는 구약에서 자주 사용하던 시적 용어로서 잔은 고통과 고난을, 세례는 슬픔을 상징한다. 특별히 초대교회의 교부(덕망 있는 성직자)들은 예수님의 세례를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받으신 ‘피의 세례’라고 불렀다.
야고보와 요한이 자리 욕심을 내자 나머지 제자들이 그들에게 화를 내고, 예수님께서 그들을 불러 진정시키시며 하시는 말씀이다.
너희가 요구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지 못하는구나. 너희는 내가 마시는 잔을 마실 수 있느냐? 그리고 내가 받는 세례를 받을 수 있느냐? 그 잔이 무슨 잔인지 아느냐? 그 세례가 무슨 세례인지나 아느냐? 너희는 통치자들처럼 지배하고, 고관들처럼 세도를 부려서는 안 된다. 서로 내가 잘 났네 니가 잘 났네, 내가 더 높네 니가 더 높네 싸우지들 말거라.
누구든지 너희 중에서 첫째가 되려거든 모든 사람의 종이 되어야 한다. 인자도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다. 인자는 자기 생명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고 왔다.
예수님의 제자들마저 욕심을 버리지 못하고 서로 싸우고 있다. 그들마저 예수님을 오해하고 있다. 37절에서 야고보와 요한이 말한 ‘주의 영광스러운 나라’는 하늘의 나라인가, 지상의 왕국인가? 그들은 예수님이 큰 성공을 거둬 나라를 세우거나 왕좌를 차지하면 그 옆에서 한자리 차지하여 권세를 부리면서 부귀영화를 누리려는 욕심이 있었던 것은 아니었을까?
야고보와 요한이 누군가? 베드로와 함께 항상 예수님을 수행했던 예수님의 최측근 제자들이 아닌가! 그런 그들마저 예수님의 진면목을 보지 못하고 정치적 인물로 오해하고 있다. 자신들의 꿈을 이루기 위한 도구로서 바라보고 있다.
현실에서도 이런 예는 많다. 악한 추종자는 아니더라도 불성실한 추종자들이다. 인기 연예인은 말할 것도 없고 명성 높은 학자, 유망한 정치인 역시 마찬가지다. 존경해서, 흠모해서, 가치를 함께 해서 추종하거나 같이 하는 것이 아니다. 단지 내게 이익이 되고, 떨어지는 것이 있어서다. 바라는 것이 있어서다. 이해하고 못하고는 중요치 않다. 단지 한 다리 걸치고 이름만 빌리면 된다.
이명박 대통령은 어떨까? 노무현 대통령은 어떨까? 많고 적고의 차이지 마찬가지다. 가치를 함께 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이익을 바라고 그 곁에 모여든 사람도, 분위기에 휩쓸려 구경나와 주위로 몰려든 사람도 있을 것이다. 이득이 없자 배반한 사람도 있겠고, 유행처럼 가볍게 지지했다가 유행처럼 서운해 토라져서 잊은 사람도 있을 것이다. 등 뒤에 비수를 꽂은 사람도 있겠고, 높은 곳에 올려놓고는 성에 안 찬다고, 재미있다고 흔들어 댄 사람도 있을 것이다. 두 대통령에게 어떤 부류가 더 많았을까? 더 많이 남아있을까?...
추종자라면 성실한 추종자가 되어야 한다. 지도자라면 신중하고 겸손한 지도자가 되어야 한다. 아첨, 아부에 으허허!, 혹하여 눈이 멀고, 주위에서 모두 그렇다고 하니 세상은 모두 그런지 아는 어리석음과 교만을 경계해야 한다. 세상 사람들이 모두 그런 것이 아니라 그런 사람만이 주위로 모여들기 때문이다. 힘 있을 땐 모두 굽신굽신하지만 힘 떨어졌을 땐 찬밥신세다. 자칫하면 그들의 호구, 총알받이, 인질이 될 수도 있다.
하나님께 뭘 바라는가? 예수님의 뭘 보고 그 분을 따르는가? 하나님, 예수님을 믿으면 나에게 뭐가 떨어지는가?
떨어지는 거 없다. 세속적 부귀영화는 계약서 상에 없다. 고통과 고난의 잔, 슬픔의 세례만 안 떨어져도 다행이다. 무겁고 고통스런 십자가만 지라고 하지 않으시면 다행이다.
떨어지는 거 있다. 하나님의 은혜와 예수님의 사랑, 그 진리의 말씀을 얻을 수 있다. 용서받고 용서하는 삶, 사랑받고 사랑하는 삶을 살 수 있다. 옳은 삶에서 진정한 행복을 느낄 수 있다. 그것을 통해 천국에 이르는 비밀을 얻을 수 있다. 하나님의 존재 자체가 복음이요, 예수님의 말씀 자체가 복음이다.
마가복음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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