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몬, 때론 먹의 향내가 나는 글과 음악 그리고 사람

성경, 신앙생활

성경읽기 0087 : 누가복음 11장~15장

어멍 2011. 8. 3. 22:06
 

    성경읽기 0087 : 누가복음 11장~15장



11장 43절

“너희 바리새파 사람들에게 화가 있을 것이다. 너희는 회당의 앞자리를 좋아하고, 시장터에서 인사받기를 좋아한다.”

52절

“너희 율법학자들에게 화가 있을 것이다. 너희는 지식의 열쇠를 가로챘다. 그러면서 너희 자신들도 들어가려고 하지 않고, 들어가려고 하는 다름 사람들도 막았다.”

 

    예수님이 가장 비판했던 자들, 예수님을 가장 견제했던 자들은 ‘바리새파’와 ‘율법학자’들이었다. 전형적으로는 ‘바리새파 율법학자’라고 말할 수도 있지만 예수님은 따로 떼어 말씀하시고 계시다. 그 둘이 의미 있는 차이가 있기 때문이다.

    바리새파는 실세, 실력자다. 오만한, 하지만 은밀한 권력자들이다. 굳이 얼굴을 드러내고 예수님과 맞서지 않는다. 토론이든 대화든 말을 섞으려 하지 않는다. 피곤하기도 하고 혹 창피를 당하여 체면과 권위를 구길 것을 염려해서다. 예수님과 진리, 지혜, 지식, 율법에 대해서 논리적으로 맞서는 사람은 따로 있다. 그 역할은 다른 사람 몫이다.

    율법학자는 이론가, 전문가다. 말과 글로 먹고 사는 파생지식인들이다. 미술이 있고 미술평론가가 있다. 음악이 있고 음악평론가가 있다. 영화가 있고 영화평론가가 있다. 토목이 있고 토목학자가 있다. 모두 미술, 음악, 영화, 토목 등에서 파생되어 ‘그것’에 봉사하기 마련이다. ‘그것’은 대개 각 부문에서 이미 권력을 차지한 구체제의 유지와 이익이다.

    그래서 자칭 전문가, 이론가, 학자들은 항상 매문(賣文), 곡학아세(曲學阿世)의 유혹에 노출되어 있다. 그들은 지식과 지혜와 진리에 대해 다루고 있지만, 그것은 단지 그들에게 수단일 뿐이다. 그들은 그것에 이르는 열쇠를 가지고 있지만 그 문을 열어 안을 보여주지 않는다. 중간에서 열쇠를 가로채고, 자신들도 들어가려고 하지 않고, 들어가려고 하는 다른 사람들도 막는다.

    바리새파 제사장들을 위해 예수를 함정에 빠트리려고 어렵고 곤란한 질문을 퍼붓는다. 정부의 연구기관평가를 좋게 받으려고 정권의 입맛에 맞는 거짓보고서를 내놓는다. 재벌과의 연구용역 재계약을 위해 재벌에게 불리한 데이터를 교묘히 감추고 짜깁기한다. 출세하여 한자리 차지하려고 비전과 도덕성은 부족하나 수완은 좋은 정치인에게 전문지식을 제공하며 그의 브레인으로 활동한다. 모두 굽은 지식인, 사이비 지식인들의 몫이다.

    악한 권력자의 결말도 비참하겠지만 굽은 지식인의 결말도 대략 좋지 않다.


    “국회의원을 데려다 놓고 이런 경우가 어디 있느냐, 말 한마디 못하게 하고 박수만 치고 가게 하느냐.” 2005년도에 있은 한 지역행사에서 한나라당 박계동 의원이 1부 내빈축사를 2부로 미루자 이에 항의하며 주최 측 인사 얼굴에 맥주잔을 끼얹으며 항의한 말이다.

    각종 행사마다 맨 앞자리에 앉아 맨 먼저 축사를 했던 박 의원, 가는 곳마다 사람들이 먼저 알아보고 공손히 인사를 건네던 박 의원이 느끼기에 너무도 부당한 처사였던 것이다. 그는 회당의 앞자리를 좋아하고, 시장터에서 인사받기를 좋아했던 국회의원이었다. 하지만 그는 오만하였지만 은밀하지는 않았다. 거만하였지만 치밀하지는 않았다. 오히려 화끈하고 정직한 구석까지 있다. 그는 막후의 진짜 실력자, 최고위의 실질 권력자는 아니다.

    ‘외교는 의전에서 시작해서 의전에서 끝난다.’라는 말이 있다. 그만큼 손님을 대접하는 절차와 형식이 중요하다는 말이다. 때론 작은 것 하나에 기분이 상하고 일을 그르치기도 한다. 하지만 나는 국회의원입네, 나는 장관입네, 권위를 내세우며 특별대접을 바라는 것은 보기 흉하다. 모두 시민들에게 봉사하는 자리다. 스스로 시민들에게 자리를 양보하고 말석을 자청해야 할 것이다.

    결혼 잔치에 초대받았을 때 윗자리에 앉지 마라.[누가 14:8] 내 자리는 여기네, 니 자리는 여기네, 실갱이하며 필요이상으로 시간을 허비하지마라. 자리다툼, 감투싸움으로 눈살을 찌푸리게 하지마라. 자신을 높이는 사람은 낮아지고, 자신을 낮추는 사람은 높아질 것이다.[누가 14:11]

    손님맞이를 소홀히 하는 것도 예의가 아니지만 특별한 대접을 받으려 하는 것 역시 대략 좋지 않다.



12장 47절

“주인의 뜻을 알고도 그 뜻에 따라 준비하지도, 행하지도 않는 종은 많이 맞을 것이다.

48절

그러나 알지 못하고 매 맞을 짓을 한 사람은 적게 맞을 것이다. 많이 받은 사람에게는 많은 책임이 요구되고, 많은 것이 맡겨진 사람에게는 많은 것이 요청된다.”

 

    알고도 행하지 않는 자는 지식인이면서도 배운 지식을 행하지 않는 자이다. 많이 받은 사람은 많이 가진 자다. 이들에겐 더 많은 책임이 요구된다. 더 많이 배우고, 더 많이 가지고 있으면서도 하나님의 공의와 사랑을 준비하지도, 행하지도 않는 종은 많이 맞을 것이다. 더 많이 갖고 있는 것만큼 더 많이 맞을 것이다.

    한편, 알지 못하고 매 맞을 짓을 한 사람은 적게 맞을 것이다. 깊은 잠에 빠져 불충한 종은 적게 맞을 것이나 깨어있으면서도 불충한 종은 많이 맞을 것이다. 게으른 종은 적게 맞을 것이나 악한 종은 많이 맞을 것이다. 모르고서 행하지 않는 종은 적게 맞을 것이나 알면서도 행하지 않는 종은 많이 맞을 것이다.

    단테의 <신곡>을 보면 무지해서, 비겁해서 혹은 흐리멍텅해서, 선과 악 사이에서 어버버버 하다가 올바른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방관한 사람들은 지옥도 천국도 아닌, 그저 지옥으로 가는 강가 앞에서 카론(charon)이 젓는 배에 타지도 못한 채 똥파리 떼에 둘러싸여 여전히 에베베베 하고 있다.

    물론 지옥의 유황불은 악인들 차지다. 모르고서 악을 행한 악인은 1,000도다. 알면서도 악을 행한 악인은 10,000도다. 이도 저도 아닌 방관자, 비겁자, 몽매한 자들은 저승의 가장 비루하고 더러운 곳에서 똥파리, 벌레 떼에 둘러싸인 채 영원토록 쓸쓸이 떠돌 뿐이다. 모르고서 선을 행하지 않은 자에겐 1,000마리다. 알면서도 선을 행하지 않은 자에겐 10,000마리다.

    알면서 선을 행하지 않는 것도 잘못이지만 모르고서 행하지 않는 것도 대략 좋지 않다.

    악인 줄 알면서 행하는 것도 죄이지만 모르고서 범하는 것, 알면서도 악에 대해 침묵하는 것 역시 대략 좋지 않다.



14장 12절

“너는 점심이나 저녁을 차려 놓고 네 친구들, 형제들, 친척들, 그리고 부유한 이웃들을 초대하지 마라. 이들은 너를 도로 초대하여 보답을 한다.

13절

오히려 잔치를 베풀 때는 가난한 사람들, 걷지 못하는 사람들과 다리를 저는 사람들과 보지 못하는 사람들을 초대하여라.

14절

그러면 너희에게 복이 있을 것이다. 그들은 네게 되갚을 것이 없다.”

 

    자선을 베풀 때에는 네 오른손이 하는 일을 네 왼손이 모르게 하여라.[마태 6:3]처럼 행하기가 참으로 어려운 일이다.

    알리지 않고 선을 행하기가 참으로 어렵다. 되받을 것을 생각지 않고 무언가를 주기가 참으로 어렵다. 하다못해 점심을 사더라도 이번엔 나, 다음엔 너다. 모두가 암묵적으로 동의하는 ‘기브 앤 테이크’의 법칙이다. 받아먹으려고만 한다면 파렴치범인 것은 당근이고 주기만 하려고 하는 인사 역시 뭔가 미심쩍은 눈길로 별종 취급한다.

    하긴, 받은 만큼 정직하게 주기만 해도 기본은 한다. 대부분 주는 것보다 더 많이 받기를 바라며 주는 것마저 사람 봐가며, 다음을 기약하며 주니까... 상대가 부자고 배경이 좋으면 급! 친절하며 상냥해진다. 하다못해 환한 미소라도 주며 생색내려고 하는 것이 보통인간들의 처세술이다.

    그런데! 가난한 사람들, 걷지 못하는 사람들과 다리를 저는 사람들과 보지 못하는 사람들을 초대하라니! 그들은 내게 되갚을 것이 없다. 내 삶에 도움 될 것이 없다. 보람도 없고, 영양가도 없다. 오! 주여~ ㅠ.ㅠ 더럽고 냄새가 나서 가까이 가기조차 싫다. 예수님의 주문은 결코 간단치 않다.

    조건없이 주는 것, 아낌없이 주는 것은 인간이라면 어버이만이 할 수 있다. 부모가 자식에게만 할 수 있다. 스스로 낮은 곳에 임하는 것, 스스로 그들과 함께하며 그들의 짐을 대신 지고 고생을 자처하는 것은 성인(聖人)만이 할 수 있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은 이 모든 것을 할 수 있지만 인간은 극히 적은 수만이, 극히 일부분의 일만을 할 수 있다.



15장 31절

“아버지가 그에게 말했다. ‘아들아, 너는 언제나 나와 함께 있었으니 내가 가진 모든 것이 네 것이 아니냐?

32절

네 동생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고, 잃었다가 다시 찾았으니 우리가 즐거워하고 기뻐해야 하지 않겠느냐?’”

 

    예수님이 들려주시는 비유의 말씀인 ‘돌아온 탕자’ 이야기다.

    동생이 방탕한 생활 끝에 회개한 후 거지꼴로 돌아오니 아버지는 크게 기뻐하며 살진 송아지를 잡고 큰 잔치를 베푼다. 이에 형이 자신은 항상 아버지 곁에서 아버지의 명을 어기지 않고 아버지를 섬겨왔는데 살진 송아지는 고사하고 염소 새끼 한 마리도 친구들과 즐기라고 주신 일이 없었다며 서운함을 항의하자 아버지가 큰 아들을 달래며 하는 말이다.




렘브란트 <돌아온 탕자>



    줄거리이자 하이라이트인 탕자와 아버지의 재회 장면도 중요하지만 교훈이 되는 결론은 큰 아들을 달래는 대목이다. 바로 잃어버린 한 마리 양과 상통한다. 똑같은 품삯을 받은 일꾼의 이야기, 불평하는 요나의 이야기와 상통한다.(☞ 성경읽기 0080 참조)

    아버지는 큰 아들을 꾸짖기보단 설득한다. ‘달래며’ 말한다. 큰 아들이 삐진 이유에는 타당한 면이 있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인간의 부정적 본성인 시기, 질투, 경쟁심, 상대적 박탈감을 인정하신다. 다만 인정만 할뿐 긍정하지는 않으신다. 계속 삐진 채 심보를 나쁘게 먹고 있다면 화를 내실 것이다.

    지금은 그렇게 하자. 우리가 이와 같이 하여 모든 의를 이루는 것이 옳다.[마태 3:15] 지금은 이렇게 하자. 우리가 이와 같이 하여 사랑과 축복을 베푸는 것이 옳다.

    예수님은 굽은 것을 회복시키려고 오셨다. 인자는 잃어버린 사람을 찾아 구원하러 왔다.[누가 19:10]


    누가복음 끝.

    마태, 마가, 누가. 세 공관복음서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