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읽기 0077 : 마태복음 7장~10장
7장 24절
내 말을 듣고, 그대로 행하는 사람은 바위 위에 집을 지은 지혜로운 사람과 같다.
25절
비가 내리고, 홍수가 나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몰아쳐도 그 집은 무너지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 집은 바위 위에 지어졌기 때문이다.
28절
예수님께서 이 모든 말씀을 마치셨습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의 가르침에 놀랐습니다.
29절
그것은 율법학자들과는 달리 예수님께서 권위를 지닌 분처럼 가르치셨기 때문입니다.
반석 위에 지어진 집(믿음)을 말씀하시며 5장에서 7장까지 이어진 예수님의 산상수훈이 끝난다.
7장 24절 이전에 예수님은 개나 돼지에게 주워진 거룩한 것의 쓸모없음을 말씀하신다.(거룩한 것을 개에게 주지 마라. 진주를 돼지 앞에 던지지 마라. 7:6) 간절함에 구함이 있고, 구함에 얻음이 있음을 말씀하신다.(구하라, 그러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다. 7:7)
‘좁은 문’을 말씀하시고(좁은 문으로 들어가거라. 멸망으로 가는 문은 넓고 그 길이 쉬워, 많은 사람들이 그 곳으로 간다. 7:13) 좋은 나무와 나쁜 나무를 말씀하신다.(좋은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을 수 없고, 나쁜 나무가 좋은 열매를 맺을 수 없다. 7:18)
하나님을 말로서가 아닌 행하는 것으로 따라야 함을 말씀하신다.(나에게 ‘주님, 주님’이라고 말하는 사람 모두가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것은 아니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사람만이 하늘나라에 들어갈 것이다. 7:21)
모두 인구에 많이 회자되는 깊은 뜻을 품고 있는 구절들이다.
예수님이 말씀을 다 마치셨을 때 사람들은 그 가르침에 놀란다. 그 내용이 심오하고 그 말씀에 권위가 있었기 때문이다. 단순히 옛적부터 전해 내려오는 율법책을 펼치고 문장 한 줄, 단어 하나 엄격히, 하지만 지극히 형식적으로 번역, 해석하는 수준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예수님이 다른 그 무엇과도 구별되는 ‘진짜’였기 때문이다. 독생자(獨生子)! 하나님의 성령이 임하신 하나님의 유일한 아들이셨기 때문이다.
산상수훈을 마치고 산에서 내려오신 예수님은 이후 병든 자, 귀신들린 자들을 낫게 하시는 등 수많은 이적을 보이시며 백성들 사이에서 본격적인 공생애를 시작하신다.
9장 15절
결혼식에 참석한 사람들이 신랑과 함께 있을 때, 슬퍼할 수 있느냐? 그러나 신랑을 빼앗길 날이 올 텐데, 그 때는 금식할 것이다.
17절
그 누구도 새 포도주를 낡은 가죽 부대에 담지 않는다. 새 포도주는 새 가죽 부대에 넣어야 한다. 그래야 둘 다 보존할 수 있다.
요한의 제자들이 “우리들과 바리새파 사람들은 자주 금식을 하는데, 왜 선생님의 제자들은 전혀 금식을 하지 않습니까?”[9:14]하고 묻자 예수님이 하신 말씀이다. 사람이 때와 장소에 따라 알맞게 처신해야 함을 이르고 있다.
공자도 예(禮)란 ‘때에 맞게 처신하는 것’이란 비슷한 말씀을 하신 것으로 알고 있다. 상갓집에선 크게 웃으면 안 되고, 잔칫집에서 크게 울어선 안 된다. 예수님도 일용할 양식만으로 감사하는 검약한 분이셨으나 결혼식 잔치에는 물을 포도주로 바꾸셔서 자리에 온 손님들이 부족함 없이 마시게 하셨다. 잔치에 초대해놓고 과음, 과식하지 말며 만족함을 알고 그만 일어서라고 강요할 순 없는 노릇이다.
절대적으로 선하고 옳은 것은 인간에겐 없다. 오직 하나님의 사랑과 의로우심만이 영원불변하며 절대적이다. 잘못된 것은 물론이요, 그 어떤 것도 옛것을 무조건적으로 고집해선 안 된다. 각주구검(刻舟求劍), 어리석고 고루하고 게으른 것이다. 기득권을 지키려는 욕심이 끼어든다면 이기적이고 위선적이고 악한 것이 될 때도 있다.
‘성공의 실패학’이란 것이 있다. 예전에 매번 크게 성공했던 방식을 맹신, 고집하다가 실패하는 경우다. 시대가 바뀌었기 때문이다. 환경이 바뀌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인간의 방식이기 때문이다. 경험에서 배우는 학습능력이 인간의 장점이긴 하지만 때로는 그것이 함정이 되기도 한다. 인간의 수명은 기껏해야 100년, 살더라도 모든 때, 모든 곳에 있을 수 없다. 모든 것을 경험할 순 없다.
아무리 지고지순한 것이라도 모든 것을 내려놓아야 할 때가 있다. 겸허하게 일체의 고집을 버리고 모든 것의 기준을 인간이 아닌 하나님께 맞추어야 한다. 아무리 박정희 대통령을 존경하더라도, 아무리 노무현 대통령 때문에 눈물을 뿌렸더라도, 옛것은 뒤로 하고 새 술은 새 부대에 담아야 할 경우가 있다. 정치, 경제, 사회, 문화 어느 것이든 인간세상의 일이다.
1년이 가는 가치가 있고, 10년, 100년이 가는 가치가 있다. 하지만 인간의 것은 1000년, 2000년을 갈 수가 없다. 오직 하나님의 것만이 수천 년을 넘어 영원할 수 있다.
10장 2절
열두 제자의 이름은 이렇습니다. 베드로라고 불리는 시몬과 그의 동생 안드레,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과 그의 동생 요한,
3절
빌립과 바돌로매, 도마와 세리 출신인 마태,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 다대오,
4절
가나안 출신 시몬과 가룟 출신 유다입니다.
9절
금이나, 은이나, 동전을 네 허리의 돈 주머니에 넣어 두지 마라.
10절
여행용 가방도 가지지 말고, 옷 두 벌이나, 신발이나, 지팡이도 가지지 마라. 일꾼은 자기 생활비를 받는 것이 당연하다.
1.시몬 2.안드레 3.야고보 4.요한 5.빌립 6.바돌로매 7.도마 8.마태 9.야고보 10.다대오 11.시몬 12.유다 - 열두 제자다. 1의 시몬은 베드로라고도 불리는 시몬이고, 11의 시몬은 가나안 출신 시몬이다. 3의 야고보는 세베대의 아들이고, 9의 야고보는 알패오의 아들이다. 시몬(1)과 안드레(2), 야고보(3)와 요한(4)은 형제다. 마태(8)는 마태복음의 저자이고, 요한(4)은 요한복음의 저자로서 세례 요한과는 구별된다.
열두 제자 중 예수님은 첫 제자인 베드로(1.시몬)와 야고보(3), 요한(4) 세 사람을 중히 여기셔서 가까이 두시고 왠만한 곳은 항상 수행토록 하신다. 열두 제자의 출신성분, 성품, 행적 등은 너무 복잡하고 방대한 주제라서 생략한다.
9, 10절 말씀은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재물을 탐하거나 안온을 구하지 말고 검소하고 금욕적인 생활을 당부하신 말씀이다. 오늘날 사역을 담당하는 주의 목자들은 새겨들어야 할 것이다. 물론 일부러 헐벗고 굶주리며 궁핍한 생활을 할 필요야 없지만 필요이상으로 재물을 탐하고 권위를 세우기 위해 모양새에 신경 쓰지 않는가는 돌아보아야 한다.
목자는 섬김을 받는 자리인가, 섬기는 자리인가. 예수님이 스스로 “인자는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들을 위하여 주려고 왔다.”[마태 20:28]고 말씀하셨듯이 목자들 역시 섬기는 자리다. 하나님뿐만 아니라 백성들까지 섬기는 자리다. 백성들, 성도들 위해 군림하는 자리가 아니다.
자기 생활비를 받는 것이 당연한 것은 성도들보다 더 많은 권위와 권력을 갖고 있기 때문이 아니다. 혹 하나님의 권위를 손상할까 봐 좋은 옷을 입고 좋은 차를 타기 위함이 아니다. 예수님의 말씀에 따라 금이나, 은이나, 동전을 허리의 돈 주머니에 넣어 두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여행용 가방도 가지지 말고, 옷 두 벌이나, 신발이나, 지팡이도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검소함을 넘어 수도자적인 금욕을 주문하신다. 나를 따라오려면 네가 가진 일체의 것을 주저함 없이 당장 버리고 길을 나서라고 주문하신다. 이 세상에 이것저것 메인 것 많은 인간에겐 가혹한 주문이다. 하지만 예수님의 주문은 여기서 그치지 않으신다.
10장 16절
들어라! 내가 너희를 보내는 것이 마치 늑대 무리 속으로 양을 보내는 것과 같다. 그러므로 뱀처럼 지혜롭고 비둘기처럼 순결하여라.
17절
사람들을 조심하여라. 그들은 너희를 법정에 넘기고, 회당에서 채찍질할 것이다.
18절
나 때문에 너희는 총독들과 왕들 앞에 끌려갈 것이다. 너희는 그들과 이방 사람들에게 증언하게 될 것이다.
22절
내 이름 때문에 너희가 미움을 받을 것이다. 그러나 끝까지 견디는 사람은 구원을 얻을 것이다.
예수님은 자신을 따라나서라면서 부와 권력을 약속치 않으시고 도리어 자신 때문에 박해받을 것이라 말씀하신다. 그러한 각오가 선 자만 따라나서라고 말씀하신다. 예수님 역시 이것이 간단치 않은 주문이란 것을 아시는 듯하다. 제자들을 걱정하시며 뱀처럼 지혜롭고 비둘기처럼 순결하라고 당부하신다.
예수님은 끝까지 견디는 사람에게 구원을 약속하시지만 그 구원은 이 세상의 것이라기 보단 저 천국의 궁극의 구원에 가깝다. ‘그래서 오래오래 행복하게 잘 살았습니다.’로 끝나는 동화 속 해피엔딩의 약속이 아니다. 하나님의 뜻과 예수님의 의를 끝까지 지켜 저 천국에서 받는 영혼의 구원에 가깝다. 실지로 열두 제자의 대부분은 예수님의 가르침을 실천하다가 힘 있는 권력자들에게 죽임을 당하는 순교로 그 생을 마감하였다고 한다.
<십자가에 달리는 베드로> 카라바조, 1600
베드로는 로마에서 십자가에 거꾸로 매달려 순교하기까지 주를 위해 산 사도가 되었다.
집사인 나는 물론이거니와 어떤 목자 분들도 이 정도까지 순종할 수 있다고 장담할 순 없으리라. 가룟 유다는 예수님을 팔아넘겼고, 베드로는 예수님을 세 번이나 부인하였다. 나머지 제자들 역시 예수님 앞에서 호언장담한 것처럼 그 믿음을 보여주진 못했다.
주의 종이신 목자 분들에게 순교를 요구하는 것은 아니다. 주머니에 동전 한 닢도 넣고 다니지 마시고 여행용 가방도, 옷 두벌도, 신발도, 지팡이도 갖지 마시라 주문하는 것은 아니다. 생활비를 주는 신도로서, 받은 생활비 감사히 여기시고 성도들 지극정성으로 섬기시라는 말씀이 아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되새기시고 최소한의 소명의식을 가지시길 감히 부탁드리는 것이다.
몇몇 대형교회를 제외하고는 교회사정이 그리 넉넉지 못하다. 열악한 환경 속에서 대부분의 목자님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자기희생을 감수하며 선포하고 계시다. 그 분들에게 더 이상의 희생을 요구한다는 것은 송구하고 염치없는 일이다. 목자님들 역시 자본주의 사회에서 최소한의 안정적 생활은 하셔야한다. 하지만 그 이상을 바라셔선 안 된다.
일개 성도로서 주제넘은 얘기일 진 몰라도, 듣는 목자님들 서운하실 진 몰라도, 그 이상 세상의 권세와 부를 탐하셔서는 안 된다. 이것이 예수님의 제자에게 예수님이 하신 주문이다. 다른 이, 다른 직종은 몰라도 주의 종을 자청하신 목자님들만큼은 달라야 한다. 최소한의 소명의식이 없으시다면, 혹 열악한 환경에 고생만 한다며 스스로 불행하다고 느끼신다면 당장 직을 내려놓고 자리에서 물러나시는 것이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냄에도, 자신을 위해서도 낫다.
이것은 과하고 매정한 주문이 아니라 성직에 몸담으신 분들의 숙명 같은 것이다. 성직이 부와 권세를 얻기 위한 입신양명이나 치부의 수단도 아닐뿐더러 단순한 호구지책일수야 없지 않은가!
성직은 축복의 길이기도 하지만 고난의 길이기도 하다. 섬김을 받는 귀한 자리이기도 하지만 섬겨야 하는 낮은 자리이기도 하다. 성도는 목자를 섬기고 목자는 성도를 섬기며 세상의 것에 경도되지 않고 합심하여 하나님의 뜻을 받들어 그 영광을 드러내야 한다.
직분을 막론하고 “누구든지 너희 중에서 높아지려면, 먼저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한다.”[마태 20:26] 너희 중에 가장 낮은 자가 가장 높은 사람이며 “너희 중에 가장 작은 자가 가장 큰 사람이다.”[누가 9:48]
10장 34절
내가 세상에 평화를 주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마라. 평화가 아니라 칼을 주러 왔다.
예수님은 자신의 등장으로 인해 기존 질서와 큰 갈등을 겪고, 결국 박해를 받아 십자가에 못박히시는 고난과 죽음을 예감하신 것일까? 자신으로 인하여 많은 사람이 시험을 당하고 갈등을 격고 결국 순교하리라는 것을 예감하신 것일까? 제자들에게까지 그것을 감당하고 각오하라고 당부하시는 것일까?...
[누가복음 12:51]에는 “내가 세상에 평화를 주러 왔다고 생각하느냐?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그렇지 않다! 오히려 분열을 일으키러 왔다.”로 되어있다. 예수님은 평화와 화합이 아닌 칼, 다툼, 분열을 말씀하신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평화는 거짓 평화다. 예레미야가 “내 백성이 큰 상처를 입었는데도 그들은 아무렇지도 않게 여긴다. 평화가 없는데도 ‘평화, 평화’하고 말한다.”[예레미야 6:14, 8:11]라고 말한 평화이기도 하다.(☞ 성경읽기 0053 참조) 이웃과 단절되고 공동체와 단절되고 하나님과 단절된 자기만의 평화다.
진정한 평화는 무엇인가. 모두의 평화다. 완전한 평화다. ‘하나님 나라’ 안에서의 참된 평화다. 진정한 평화가 오려면 거짓 평화는 깨어질 수밖에 없다. 칼, 다툼, 분열은 피할 수 없다. 거짓 평화가 물러난 자리에 진정한 평화가 온다.
빛이 들지 않는 깊은 어둠의 심연에 살고 있는 물고기들은 눈이 퇴화되어 있거나 없다. 그들에겐 조그마한 빛도 고통을 주는 자극이다. 작살에 꽂힌 것처럼 괴로워하며 발광(發狂)을 한다. 빛을 피해 어둠 속으로 날쌔게 도망친다. 예수님은 그런 빛이었다. 어둠속에 있는 자들에게 결코 환영받지 못하는 빛이었다.
권세를 누리며 율법과 권위의 거짓 평화에 안주해있던 왕과 귀족, 제사장, 서기관 등의 권력자들에겐 자신들의 거짓과 위선을 비추는 빛이었다. 쾌락과 욕망만을 추구하며 비루한 평화에 빠져있던 어리석은 백성들에겐 자신들의 더러움과 부박함을 드러내는 빛이었다. 그들은 하나같이 예수님을 외면하고 핍박하였다.
빛이 밝으면 어둠은 스스로 물러난다. 진짜가 나타나면 가짜들은 스스로 정체가 드러난다. 좋은 게 좋은 거라며 가짜들 사이에서 유지되던 암묵적 평화는 깨진다. 저들끼리 수시로 늘리고 줄이며 들이대던 잣대를, 진짜가 갖고 있는 불변의 정확한 잣대로 바꾸어 들이대면 베겨내질 못한다. 종국에는 잣대를 빼앗고 진짜를 죽인다.
하지만, 죽일 수는 있어도 빼앗을 수 없는 것이 있다. 가치, 진리, 영혼, 사랑은 빼앗을 수 없다. 빼앗을 수 없는 잣대, 없앨 수 없는 빛... 그것이 예수님의 사랑의 가르침이다. 아무리 어둠이 몰려오고 비바람이 몰아친대도 저 구름 위에는 찬란한 태양이 이글거리고 있다.
이 지상은 때때로 어둡고 밝아지며 명암이 교차하지만 하나님의 눈부신 사랑의 빛은 언제나 하늘에서 찬란히 빛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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