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몬, 때론 먹의 향내가 나는 글과 음악 그리고 사람

성경, 신앙생활

성경읽기 0075 : 마태복음 5장 (부제 : 산상수훈과 팔복)

어멍 2011. 6. 12. 01:01
 

    성경읽기 0075 : 마태복음 5장 (부제 : 산상수훈과 팔복)



5장 1절

예수님께서 사람들을 보시고 산으로 올라가 앉으셨습니다. 그러자 제자들이 예수님께 다가왔습니다.

3절

“마음이 가난한 사람은 복이 있다. 하늘나라가 그들의 것이다.

4절

슬퍼하는 사람은 복이 있다. 그들이 위로를 받을 것이다.

5절

마음이 온유한 사람은 복이 있다. 그들이 땅을 상속받을 것이다.

6절

의를 위해 주리고 목마른 사람은 복이 있다. 그들이 배부를 것이다.

7절

자비로운 사람은 복이 있다. 그들이 하나님의 자비를 입을 것이다.

8절

마음을 깨끗이 한 사람은 복이 있다. 그들이 하나님을 볼 것이다.

9절

평화를 위해 일하는 사람은 복이 있다.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불릴 것이다.

10절

의롭게 살려고 하다가, 박해를 받는 사람은 복이 있다. 하늘나라가 그들의 것이다.

11절

사람들이 나 때문에 너희를 모욕하고 박해하고 온갖 나쁜 말을 할 때, 너희에게 복이 있다.

12절

기뻐하고 즐거워하여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크다. 너희보다 먼저 살았던 예언자들도 이처럼 박해를 받았다.”

 

    5장부터 7장까지는 그 유명한 예수님의 산상수훈, 산상설교다. 예수님의 가르침이 집대성된 정수요 엣센스다.

    산상수훈은 팔복(八福)으로 시작된다. 3절부터 11절까지 아홉 번의 “복이 있다” 구절이 나와 구복(九福)이라고도 하는데 10절 “의롭게 살려고 하다가”와 11절 “사람들이 나 때문에”를 같은 의미로 보고 팔복으로 정의해도 되니 큰 논란거리는 아니다.

    온유한 사람은 땅을 상속받을 것이요, 자비로운 사람은 자비를 입을 것이요, 마음을 깨끗이 한 사람은 하나님을 볼 것이요, 평화를 위해 일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불릴 것이다. - 이상 사복(四福)은 칭찬이요, 선물이다.

    (마음이) 가난한 사람은 하늘나라의 주인이 될 것이요, 슬퍼하는 사람은 위로를 받을 것이요, 주리고 목마른 사람은 배부를 것이요, 박해받는 사람은 큰 상이 있을 것이다. - 이상 사복은 위로요, 보상이다.




예수님의 산상수훈(山上垂訓) - 1890, 칼 하인리히 블로흐



    마음이 가난하다함은 무엇인가. 자신의 무력함, 불완전함을 깨닫고 오직 하나님만 믿고 의지함을 말함이다. 넓게 보면 하나님 앞에 교만치 않고 겸손하고, 성품이 온유하며 담백함을 이르는 것일 것이다. 일부 학자들은 팔복과 산상수훈과 관련해 누가복음에 기재되어있는 “가난한 사람은 복이 있다.”는 구절[누가 6:20]에 근거해 마태오교회 신자들이 경제적으로 풍족했기 때문에 일부러 “마음이 가난한 사람은 복이 있다.”로 추가 표기했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하여튼 물질적 부유함과 가난함 자체만으로 선과 악, 복과 흉을 판단하기는 힘들어도(부자라고 다 죄인은 아니니까.) 마음이 가난치 않고 교만하고 탐욕스런 것은 분명 악하고 흉한 것임에는 틀림없다.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 천국의 미래를 약속하시며 제자들에게 올바른 삶과 믿음을 설교하고 계시다. 칭찬과 선물, 위로와 보상을 말씀하고 계시다. 여기서 분명한 것은 그것이 당장의 세속적 성공이 아니라 다가올 천국의 보상이라는 것이다. 돈을 벌고, 출세하고, 권세를 부리고, 남의 부러움과 칭송을 받고... 한마디로 잘 먹고, 잘 입고, 잘 살며 해피한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이 땅 위에서 못 먹고, 못 입고, 못 살며 이리 치이고 저리 치이며 땀과 피와 눈물만 쏟았던, 전혀 해피하지 않았던 이들에겐 놀라운 복음이다. 이렇듯 예수님의 가르침은 힘 있고 권세 있는 부자, 권력자들을 위한 가르침이 아니라 가난하고 소외받는 약한 자, 고통 받고 핍박받는 의롭고 순박한 백성들을 위한 가르침이었다. 그러한 백성들은 예수님의 말씀에서 큰 위안과 감동을 얻고 메시아적 희망을 봤을 것이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팔복은 세속적 길흉화복의 복이 아니라 다가올 천국의 궁극적 복이다. 기브 앤 테이크 식으로, 그리하면 이리해 주겠다는 의미보다는 하나님의 자녀들, 예수의 제자들로서 마땅히 지키고 품어야 할 삶의 태도와 믿음을 강조한 설교로 보아야 한다.



5장 13절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다. 만일 소금이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짠맛을 내겠느냐? 맛을 잃은 소금은 아무 쓸모가 없게 되어 밖에 버려져 사람들에게 밟힐 뿐이다.

14절

너희는 세상의 빛이다. 산 위에 있는 도시는 숨겨질 수 없다.

15절

등불을 됫박 안에 두지 않고 등잔대 위에 놓는다. 그래야 등불이 그 집에 있는 모든 사람에게 빛을 비추게 될 것이다.

16절

이와 같이 너희 빛을 사람들에게 비춰라. 그래서 사람들이 너희의 선한 행동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여라.”

 

    빛과 소금이다. 예수님의 말씀과 비유는 이처럼 쉽고 단순하다. 이해하기 쉽다.

    소금은 짜야 하고 빛은 밝아야 한다. 그래야 맛을 내고 부패를 막을 수 있다. 어둠을 밝히고 일을 할 수 있다. 소금이 짜지 않다면... 뭥미? 허무희극이다! 석회가루 같이 소금 아닌 것, 소금 비슷한 것이 소금인 양 소금 속에 다량 섞여 있다면... 우웩! 리얼참극이다!

    교회와 기독교도들이 공동체 안에서 그 본연의 ‘빛과 소금’ 역할을 충실히 수행하고 있는가? 혹 우리의 선한 행동으로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 영광이 돌아가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악한 행동으로 아버지께 모독과 치욕을 끼치고 있지는 않은가? 겸손히 돌아봐야 한다.



5장 17절

“내가 모세의 율법이나 예언자들의 말씀을 깨뜨리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마라. 나는 그들의 말씀을 깨뜨리러 온 것이 아니라 완성하러 왔다.

20절

내가 말한다. 너희 의가 율법학자들이나 바리새파 사람보다 훨씬 낫지 않으면, 하늘나라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

 

    나 예수가 형식에 얽매이지 않는다고, 기존 권위에 도전하는 듯 보인다고 해서, 혹 율법을 완전히 무시하고 깨뜨린다고 생각하지 말라는 거다. 오해하지 말라는 거다.

    율법의 파괴를 위해 온 것이 아니라 완성을 위해 온 것이다. 껍데기뿐인 형식적인 율법이 아니라 율법의 참뜻을 밝히고 실천하기 위해 온 것이다. 그러니 나 예수를 따르는 너희 제자들은 (형식적이고 가식적인 저 회칠한 무덤 같은 형식주의자, 위선자,) 율법학자, 바리새파 사람들보다 반드시 훨씬 의롭고 낫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5장 34절

결코 맹세하지 마라. 하늘을 두고 맹세하지 마라.

37절

너희는 ‘그렇다’라고 할 때만 ‘예’ 하고, 아닐 때는 ‘아니오’라고 말해라. ‘예’나 ‘아니오’ 이상의 말은 악한 생각에서 나오는 것이다.

 

    약하고 불완전한 속인들이 약속을 남용한다. 악하고 대담한 악인들이 맹세를 악용한다. 양심을 걸고 맹세하고, 부모님 이름을 팔며 맹세하고, 하늘에 맹세하고, 땅에 맹세하고, 하나님 앞에 맹세하고, 목숨을 걸고 맹세한다. 하지만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인간의 약속, 맹세라는 것들이 얼마나 허약하였나! 대담한 악인들이 순박한 의인들을 속이는 데 얼마나 악용하였나!

    진정한 약속이고 결단이라면 굳이 뭔가를 거창하게 걸 필요는 없다. 지킨다 말하고, 지키면 그뿐이다. 예수님 말씀은 아예 그것마저 하지 말라는 것이다. 인간은 약하고 미래는 장담할 수 없으니 가급적 약속이나 맹세는 하지 말라는 것이다.


    말이 길어지면 실수할 수가 있고, 긴 말은 실속 없이 진실하지 않을 때가 많다. ‘참기름’을 ‘원 헌드레드 퍼센트 퓨어 순 진짜 참기름’이라고 해서 그 참기름이 더 고소해지는 것은 아니다. 언어의 낭비다. 괜히 북 치고 장구 치며 떠들썩하게 이름붙인 것이 가짜일 확률이 더 높다.

    말은 단순하고 담백할수록 진실이다. 짧은 문장일수록 뒤끝이 깔끔하고 이해가 쉽다. 그런데 이것이 기술적으로도, 심정적으로도 쉽지는 않다. 이제까지의 성경읽기 포스팅도 그렇고, 지금 이 글도 그렇고, 그렇게 깔끔하지 않고 길고 어지럽다.

    사과할 때도 마찬가지다. 잘못했다, 미안하다 하면 될 것을 이것저것 설명하고 변명하기 일쑤다. 말도 깔끔하게, 사과도 깔끔하게 하는 게 좋다. 정 사정을 설명하고 싶으면 다음에 기회를 봐서 하는 게 오히려 낫다. 지각 있는 상대라면 이미 그 진심을 알고 그 사정까지 살필 것이다.

    한 가지 주의할 점은, 이것은 자신이 갖추어야할 덕목이지 남에게 강압적으로, 무차별적으로 적용할 덕목은 아니라는 거다. 다짜고짜 윽박지르며 빨리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고 이실직고 사죄하고 끝내라는 식이면 곤란하다. 말허리를 자르고, 언로를 막는 식이면 곤란하다. 어린 자녀의 경우라면 “아빠는 알지도 못하면서...ㅠ.ㅠ” 으엉~엉~엉~ 흐느껴 울거나 아예 말문을 닫고 말을 섞지 않는다.

    적게 말하고 많이 들어라. 인정한 후 사과하고 납득시킨 후 사과를 받아라.


    판타스틱, 슈퍼, 울트라, 어메이징, 언빌리버빌... 바야흐로 레토닉, 수식어의 홍수 속에 살고 있다. 폭풍감동, 폭풍간지, 폭풍눈물... 아무것에나 ‘폭풍’을 붙여댄다. 국민가수, 국민배우, 국민여동생, 국민아버지... 아무에다 대고 ‘국민’을 붙여댄다. 상향평준화를 지향하는 이상적인 평등세상이 이루어진 것인가?...

    첫째, 가짜와 아류가 많기 때문이다. 둘째, 치열한 경쟁으로 인한 자극의 홍수 속에 점점 역치가 높아졌기 때문이다. 너도 나도 수식어를 붙여가며 자신이 진짜라고 주장한다. 무엇이 진짜 진짜인지 헷갈리고 피곤하다. 이제 웬만한 어메이징에는 서프라이즈하지 않다. 아무리 판타스틱하다 해도 심드렁하니 졸린 눈을 뜨게 하기 쉽지 않다. 가수 아닌 가수가 많아서인지 이제는 '나는 가수다'처럼 단순한 주장이 오히려 강력하고 참신하게 느껴질 지경이다.

    거짓말쟁이가 하나님의 이름을 걸고 진실을 논하고, 악인이 하늘을 두고 정의를 맹세하는 것은 언어의 악용이요, 전도(顚倒)다. 쓸데없이 말이 많고 길어지는 것은 언어의 남용이요, 낭비다. 언어의 값어치를 떨어뜨려 그 속에 담긴 진실성의 빛을 흐리게 한다.

    진실한 마음으로 필요한 말만 무겁고 간단히 말하라. 그리하면 그 말이 존중받을 것이다. 따.다.다.다. 노홍철은 방송용 케릭터로 재미있고 유용할 뿐이지 그것이 현실로 튀어나온다면 아무도 그의 말을 존중하지 않을 것이다. 일상에서 매일 듣다보면 귀찮고 짜증나는 소음일 뿐이다.


    ‘그렇다’라고 할 때만 ‘예’하고, 아닐 때는 ‘아니오’라고 말해라. 미안할 때만 ‘미안하다’하고, 미안하지 않을 때는 ‘미안하지 않다’고 말해라. ‘예’나 ‘아니오’ 이상의 말은 악한 생각에서 나오는 것이다. ‘미안하다’, ‘잘못했다’ 이상의 말은 쓸데없는 생각에서 나오는 것이다.



5장 38절

너희는 ‘눈에는 눈으로, 이에는 이로’라는 말을 들었다.

39절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나쁜 사람과 맞서지 마라. 만일 누가 네 오른쪽 뺨을 때리거든 다른 뺨도 돌려 대라.

41절

만일 누가 너를 강제로 약 1.5킬로미터를 가게 하거든 그와 함께 약 3킬로미터를 가주어라.


5장 43절

너희는 ‘네 이웃을 사랑하고 원수를 미워하라’고 말하는 것을 들었다.

44절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의 원수를 사랑하여라. 너희를 박해하는 사람들을 위해 기도하여라.

45절

그러면 너희가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아들이 될 것이다. 너희 아버지는 악한 사람이나 선한 사람 모두에게 햇빛을 비추시고, 의인과 죄인에게 비를 내려주신다.

46절

만일 너희를 사랑하는 사람만 사랑한다면, 무슨 상을 받을 수 있겠느냐? 심지어 세리도 그만큼은 하지 않느냐?

48절

그러므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가 완전하신 것처럼 너희도 완전하도록 하여라.

 

    보복하지 말라고 하신다. 거기에 그치지 않고 원수까지도 사랑하라고 가르치신다. 창세기 이하 모세오경의 율법서에 나오는 고대율법과는 사뭇 다르다. 단순한 과거의 답습이 아니라 새로운 해석이요 재창조다.

    악을 악으로 갚고 선을 선으로 갚는 것, 자신을 미워하는 사람을 미워하고 자신을 예뻐하는 사람을 예뻐하는 것은 쉽다. 자신을 해코지 하는 사람, 나쁜 사람과 맞서지 않기도... 쉽다. 똥 밟았다 생각하고 외면하고 피하면 그뿐이다. 오른쪽 뺨을 때렸는데 왼쪽 뺨을 돌려 대주기도 쉽지만은 않지만... 뭐 한번쯤은 해줄 수도 있다. 감수할 수 있다. 하지만 진정 어려운 것은 그와 1.5킬로, 3킬로 동행하는 것이다. 지속적으로, 끝까지, 항상 그와 함께해 주는 것이다. 보기 싫은 얼굴, 듣기 싫은 목소리를 항상 보고 들으며 그 곁에서 사랑과 관심을 쏟는 것이다.

    상대가 나를 할퀴고 때리는데도 달려들어 끌어안는 것이다. 구박하고 밀어내더라도 팔을 벌려 품어안는 것이다. 내 얼굴에 침을 뱉고 더러운 욕을 퍼붓더라도 끝까지 상대를 존중하는 것이다. 내 손과 내 심장에 대못을 박더라도, 내가 그것으로 피를 흘리며 비명을 지르더라도 상대를 사랑하고 축복하는 것이다. 이것이 완전한 사랑이다. 예수님의 사랑이다.


   ‘악한 사람이나 선한 사람 모두에게 햇빛을 비추시고, 의인과 죄인에게 비를 내려주시는’ 한없이 깊고 넓은 무차별적인 하나님의 사랑을 약하고 불완전한 인간에게 주문하시다니!...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가 완전하신 것처럼 너희도 완전하도록 하여라’고 불완전한 인간에게 완전을 요구하고 계시다. 약한 인간이 듣기에 과도한 주문, 가혹한 요구다. 지레 포기하고 되는 대로 살고 싶다. 그렇게 사는 게 편하다. - “그냥 우리 이대로 살게 해주세요!”

    이것이 약하고 속된 것에서 자유롭지 않은 나의 솔직한 심정이다. 뺨을 맞으면 울그락붉그락 쌍욕을 내뱉고 흥분하며 상대의 얼굴에 주먹을 날리는 것이 보통사람들의 행동방식이다. 보복치 않고 넘어간 데도 대개가 비겁한 굴복으로 두고두고 화병이 되거나, 허약한 정신승리법으로 자기만족인 경우가 대다수다. 상대가 약자라면 뺨을 맞은 후 뼈를 꺽으려 달려들기도 하고, 강자라면 괜히 지나가는 강아지 옆구리를 걷어차기가 일쑤다.

    나는 어디까지 할 수 있을까. 당장 미워하는 사람 미워하지 않기도 힘들다. 미워하는 사람을 위해 기도는 해보겠지만 축복하지는 못한다. 마음 같아선 당장이라도 상대가 꼬꾸라졌으면 좋겠다. 미워하고 싫어하는 사람을 사랑하기는커녕 일분일초라도 같이 있기가 싫고, 말을 섞고 시선을 주고받는 것이 견디기 힘들다. 혹 이것은 선악의 문제가 아니라 취향의 문제, 호불호의 문제, 개성의 문제에 불과한 것은 아닐까. 내가 너무 넉살이 없고 까탈스러운 것일까. 하긴 넉살좋은 정치인들은 낮에 편을 갈라 욕을 퍼붓고 멱살을 잡으며 싸우고 증오하다가도 밤에는 술잔을 기울이며 서로 형님아우, 선배후배 껄껄껄 사랑한다고도 하드만...

    분명한 것은 나는 아직도 하나님 앞에 너무도 부족하고 약하고 불완전한 인간에 불과할 뿐이라는 거다. 예수님은 너무 높고 나는 너무 낮아서 그 사랑은 내가 올려다보기에 까마득하니 보이지 않을 정도로 너무도 높고 지극하시다는 거다.


    사랑을 베푸는 것은 강한 사람만이 할 수 있다. 의롭고 선하고 온화한 사람이 강한 사람이다. 의로움과 강함과 완전함은 같다. 지극하면 서로 통한다. 의롭고 강한 사람만이 완전함을 요구하는 예수님의 주문을 소화할 수 있다. 그 위대한 사랑을 실천할 수 있다.

    그런 사람만이 인간의 아들에서 하나님의 아들로 승화되어 아직 인간의 아들에 머물고 있는 약하고 악하고 불완전한 사람들을 품어 안을 수 있다. 약하고 악하고 불완전한 인간, 이들이 바로 예수님이 말한 잃어버린 한 마리 양의 의미다. 못난 아들, 돌아온 탕아를 더 긍휼이 여기는 어버이의 마음이다.

    약하면 비뚤어지고 비뚤어지면 악해진다. 악한 사람은 본질적으로 약한 사람이고 불완전한 사람이다. 악은 몰아내고 단죄돼야 하지만 악에 빠진 인간에게는 최소한의 구원의 기회는 주워져야 한다. 이것이 죄를 미워하되 사람은 미워하지 말라는 의미일 것이다.

    좋은 환경, 부유하고 건전한 분위기에서 자란 탁월한 능력과 훌륭한 인품의 소유자를 칭송하기 전에 나쁜 환경, 가난하고 어두운 분위기에서 자란 못난이와 비뚤어진 인품의 소유자를 더 긍휼히 여겨야 한다. 많이 배워 교양있고, 깔끔하니 향기가 나는 사람에게 끌리기보단 배우지 못해 입이 거칠고, 씻지도 못해 더럽고 냄새나는 사람에게 먼저 다가가야 한다.

    세상의 부와 권세를 좇는 비루한 인간, 쾌락과 편안함에 끌리는 불완전하고 약한 인간에겐 결코 쉽지 않은 일이다. 도리어 뭐 하나 얻어먹을 것 없나 헤헤거리며 주위를 서성이기도 하고, 징그런 벌레 보듯 눈살을 찌푸리며 도망다니기도 한다. 하지만 예수님은 다르시다. 완전하신 예수님은 이러한 곤궁한 자들, 과부, 고아, 가난한 자, 병든 자들에게 더 신경을 쓰셨다. 자기를 박해하는 악인들에게까지 축복을 베푸셨다.

    배부른 자에게는 빵을 더하여 줄 이유가 없다. 스스로 강하여 선을 베푸는 자를 칭송할지언정 굳이 배려하고 도와줄 필요성은 적다. 신경 쓰지 않는다고 섭섭해 하지 않는다. 멀리서 응원하는 것만으로도 이심전심 고마워한다. 배고픈 자에게 빵을 주고, 목마른 자에게 물을 주고, 헐벗은 자에게 옷을 주어야 한다.


    ‘자신에게 잘해 주는 사람에게 잘해 주어라. 자신에게 못되게 구는 사람에게는 더 잘해 주어라.’

    ‘자신을 사랑하는 사람을 사랑하라. 자신을 미워하는 사람은 더 사랑하라.’

    이것이 예수님이 가르쳐주시는 사랑의 역설이다. 의롭고 강한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을 닮은 사람만이 행할 수 있는 완전한 사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