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읽기 0053 : 예레미야 3장~15장
저자 : 예레미야(Jeremiah)가 그의 비서 바룩을 통해 대필로 기록
주요 인물 : 예레미야, 바룩, 요시아, 시드기야, 느부갓네살, 그달리야(=그달랴)
핵심어 : 죄, 비탄
주요 내용 : 하나님의 심판을 유다 민족에게 선포하도록 부름 받은 예레미야의 심판예언과 새 계약사상. ‘눈물의 예언자’라고도 불리는 예레미야는 자신이 핍박을 받을 뿐만 아니라 자기 민족이 당하는 쓰라린 괴로움으로 인해 비통해한다.
시대적 배경 : 유다의 요시아 왕에서부터 유다 최후의 왕인 시드기야까지 유다왕국 최후의 시기다. 즉 북쪽의 앗시리아, 동쪽의 신바빌로니아, 남쪽의 이집트의 세 강대국 사이의 패권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해 개혁을 시도하고 외교술을 펼치기도 했으나 격변기를 거치며 결국 패망해가는 시기다.
3장 10절
이스라엘의 악한 누이 유다는 이 모든 일을 행하고도 진심으로 내게 돌아오지 않았다. 유다는 거짓으로 돌아오는 척만 했다. 나 여호와의 말이다.
12절
돌아와라. 진실하지 못한 이스라엘 백성아. 너를 향한 나의 노여움을 거두겠다. 나는 매우 자비로운 하나님이다.
13절
너는 오직 네 죄를 인정하기만 하면 된다.
18절
그 날에는 유다 집안과 이스라엘 집안이 합쳐질 것이니 그들은 북쪽 땅에서 함께 나와서 내가 그들의 조상에게 준 땅에 이를 것이다.
22절
돌아오너라. 진실하지 못한 자식들아. 내가 진실하지 못한 너희를 구원해 줄 것이다.
이미 북왕국 이스라엘 왕조는 멸망한 때다. 예레미야가 하나님을 통해 듣고 보기에 남왕국 유다 역시 그 전철을 밟을 것만 같다.
이스라엘은 진실하지 않다. 유다는 그런 이스라엘의 악한 누이다. 이스라엘을 반면교사로 삼기는커녕 거짓으로 하나님께 돌아오는 척만 하고 있다. 오히려 이스라엘보다 더한 타락상을 보이고 있다.
10절의 ‘돌아오는 척’이란 문구로 봤을 때 당시 요시아 왕에 의해 수행된 성전재건 등 일련의 개혁정책의 성과에 예레미야 본인이 적지 아니 실망하고 불만이 많았던 듯싶다. 백성들의 풍속을 건전하게 하고 심성을 유순하게 함으로서 국력을 하나로 모으고 도덕적, 신앙적으로 업그레이하여 국가 분위기를 전체적으로 일신하는 데까지 이르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아마도 성전과 같은 눈에 보이는 건축물에 머물렀거나, 제사의 절차, 율법의 형식 등에 그치지 않았을까. 권력 상층부에서 왕권의 보존과 강화만을 위해 말 그대로 정책적, 형식적으로만 수행되었던지, 개혁프로그램이 중간에 왜곡되고 흐지부지 되었던지 하지 않았을까 예상해본다.
예나 지금이나 개혁은 백성들, 국민들, 시민들에게까지 미쳐야 성공한다. 성공했다고 평가할 수 있다. 백성들의 실질적 생활수준을 한 뼘이라도 개선해야 한다. 시민들의 도덕적 사고 수준을 반 보라도 전진시켜야 한다. 그것이 국가와 사회의 진보다. 전체 수준이 업그레이드되는 것이다. 권력자, 상위 몇 퍼센트의 강자들만의 개혁에 머물러서는 한낱 고담준론, 탁상행정 그도 아니면 권력투쟁일 뿐이다.
예레미야 역시 유다에선 강자다. 평범한 백성이 아닌 제사장 가문의 아들이다. 쉽게 귀족과 왕에게 접근하여 의견을 나눌 수 있다. 하지만 내 생각에 그는 하나님 앞에 신실한 종이었을 뿐 아니라 민족을 사랑했고 백성을 끔찍이 걱정하고 불쌍히 여긴 민족주의자, 높은 곳보다 낮은 곳을 지향하여 귀족들보다 백성들과 함께 하려 했던 박애주의자였다.
북왕국 이스라엘과 남왕국 유다는 자매다. 형제다. 예레미야는 먼저 멸망한 이스라엘의 회복, 그리고 유다와의 통일을 통한 완전한 민족공동체의 복원을 갈망하고 있다. 그것을 위해 진실하지 못했던 이스라엘에게 죄를 고백하고 용서를 청하기를 먼저 바라고 있다.
하나님의 마음은 부모님의 마음이다. 불효한 자식이라도 언제나 용서할 준비를 갖추고 있는 아버지처럼, 아무리 패도한 자식이라도 용서하고 싶어 하는 어머니처럼 이스라엘에게 죄를 인정하기만 하면 된다고 하신다. 용서해 줄 테니 제발 죄를 인정하고 뉘우치라고 간청(!)하고 계신다.
하지만 이스라엘도 유다도 결국 멸망하고 만다. 두 팔 벌리고 기다리고 계셨던 하나님을 외면하고 파멸의 길로 스스로 걸어 들어가고 만다. 그 고통과 파멸의 길을 지켜봐야 했던 예레미야의 심정이 얼마나 안타깝고 슬펐을까! 예레미야의 마음이 하나님의 마음, 하나님의 마음이 예레미야의 마음이다.
눈물의 예언자 예레미야, 프레스코(부분) - Michelangelo, 1512, Sistine Chapel, Rome
5장 7절
내가 너희를 어떻게 용서하겠느냐?
9절
이런 짓을 한 유다 백성을 내가 어찌 벌하지 않겠느냐?
29절
이런 짓을 하는 유다 백성을 내가 어찌 벌하지 않을 수 있겠느냐?
9장 9절
이런 짓을 하는 백성에게 내가 어찌 벌을 내리지 않겠느냐? 내가 어찌 이런 민족에게 보복하지 않겠느냐?
5장 11절
이스라엘과 유다 백성들이 나 여호와를 완전히 배반했다.
5장 27절
새들로 가득한 새장처럼 그들의 집에는 속임수가 가득하다. 그렇게 해서 그들은 부자가 되고 힘센 사람이 되었다.
5장 31절
예언자들은 거짓을 말하고, 제사장들은 제멋대로 권력을 휘두르고, 내 백성은 그런 제사장들을 좋게 여기니 마지막 때가 오면 너희가 어떻게 하려느냐?
이해와 글쓰기를 쉽게 하기위해 구절 순서를 뒤섞어 재배치했다. 비슷한 내용의 구절이 5장에만 세 구절이다. 9장 9절에 다시 이어지며 계속되고 있다.
반복을 통한 강조다. (인간의 타락상이) 해도 해도 너무해서, (하나님께서) 참다 참다 못 참으시겠다는 거다. 하나님의 인내심이 바닥났다는 거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길 “나도 내 노여움을 거두어들이기에 지쳤다.”[렘 15:6]
앞서 3장 12절의 ‘매우 자비로우신 하나님’이 수차례에 걸쳐 고백과 회개를 백성들에게 간청(!)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손길을 뿌리치고 미련도 후회도 남김없이 지옥을 향해 조용하고 끈질기게 들어가는 시체처럼 죄악의 길로 걸어갔다는 거다. 먹이를 좇아 달려드는 사냥개처럼 타락의 길로 내달렸다는 거다.
백성들이 나 여호와를 완전히 배반했다. 그 배반의 모습, 죄악과 타락의 모습은 무엇인가. 5장의 마지막 구절이자 결론인 31절을 보면 의외로 평범하다. 소돔과 고모라처럼 살인, 강도, 폭력, 약탈, 방화, 성적 문란이 아니다. 그런 것을 구체적으로 들고 있지 않다. 하지만 여기, 31절에 죄악의 본질, 심판과 축복, 흥망성쇠의 열쇠가 있다.
예언자들, 제사장들, 백성들까지... 모두가 악하고 거짓을 일삼는다는 거다. 맨 위에서부터 맨 아래까지 다 썩었다는 거다. 예레미야는 특별히 왕과 귀족을 언급하지는 않았지만 마찬가지일 것이다. 단, 굳이 뺀 것은 예언자, 제사장들을 강조하려 한 것이 아닐까?! 제사장 가문 출신인 예레미야이기에 더 민감하게 느꼈을 수도 있다. 종교지도자, 종교계의 부패에 더 예민했을 것이다. 실로 백성들을 옳게 인도해야 할 책임은 영적 지도자인 이들에게 있다. 이들의 책임이 더 크다.
추측컨대 예레미야는 ‘눈물의 예언자’, ‘외로운 선지자’였으리라. 모두에게 탄압받고 왕따 당하는 외톨이지 않았을까. 지배계급에겐 탄압받고 백성에겐 외면받았다. 지배계급은 권력위기감에 그를 미워했고 백성들은 이해할 수 없어 그를 멀리했다.
모두에게 죄를 추궁하며 회개를 요구하고 있다. 듣기 싫은 불편한 얘기를 하며 꾸짖고 가르치려 한다. 성전의 파괴, 예루살렘의 멸망 등의 재앙을 예언하여 투옥되기도 했고 우후죽순처럼 번성해 노도처럼 쳐들어오는 신바빌로니아의 실체를 인정해 화친과 항복을 주장했다. 바빌로니아에 의해 유다 땅에 세워진 그달리야 총독이 암살된 후 이집트로 끌려가서 생을 마감한다. 일설에는 그곳에서 동족들의 손에 맞아죽었다는 얘기도 있다.
친이집트 세력에겐 강력한 정적이요, 백성들에겐 비겁자, 심지어 나라와 동족을 팔아먹으려는 매국노로 비쳤을 수도 있다. 다 떠나서 듣기 싫다. 재앙, 죽음, 멸망, 고통... 흉한 얘기는 일단 불편하다. 죄악, 고백, 회개, 반성... 꾸짖는 얘기는 일단 화난다. 듣기 싫대도 자꾸 얘기하고, 외면하는데도 자꾸 쫓아다니면 이상한 사람 취급받는다. 심판, 재앙, 멸망... 이해할 수 없는 말을 계속하면 자칫 미친 놈 취급당한다.
선지자, 예언자는 원래 고통스럽고 외로운 법이지만 예레미야는 유독 더했으리라.
외로운 선지자 예레미야, 유채(부분) - Rembrandt, 1630, 암스테르담 국립미술관
6장 13절 (8장 10절)
작은 사람에서부터 큰 사람에 이르기까지 누구나 돈에 욕심내고 있다. 예언자와 제사장들까지 모두 거짓말을 하고 있다.
6장 14절 (8장 11절)
내 백성이 큰 상처를 입었는데도 그들은 아무렇지도 않게 여긴다. 평화가 없는데도 ‘평화, 평화’하고 말한다.
6장 15절 (8장 12절)
그들은 역겨운 짓을 하고도 부끄러워할 줄 모른다. 수치를 알지도 못하고, 얼굴을 붉힐 줄도 모른다. 그러므로 그들은 쓰러질 것이다. 내가 그들에게 벌을 내릴 때에 그들은 멸망할 것이다. 나 여호와의 말이다.
[6:13~15]와 [8:10~12]가 정확히 겹친다. 접사, 조사 몇 개만 다를 뿐 완전히 같은 말씀이다. 개인적으로 단순한 중복이나 실수라기보다 이 역시 강조를 위한 반복으로 보인다.
‘돈’과 ‘거짓말’을 말하고 있다. 돈은 세속적 부귀영화와 욕심을 충족시켜주는 대명사다. 죄는 탐욕에서 비롯되고 그 탐욕은 돈을 향한 욕망으로 대변된다. 거짓말 역시 그것을 얻고, 지키기 위한 수단이다. 거짓말은 가장 흔하면서도 본질적이고, 가벼우면서도 치명적인 악이다. ‘참과 거짓’만큼 근원적인 화두는 없다.
‘작은 사람’, ‘큰 사람’은 남녀노소를 말할 수도 있고 지위고하를 말할 수도 있다. 어쨌든 모두 다 눈이 뻘개져 돈을 탐한다는 거다. 2500년도 훨씬 지난 까마득한 그 때에도 배금주의, 물신주의가 만연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래서 풍요와 다산, 물질과 재화의 신인 바알과 아세라의 우상을 섬겼다. 예레미야는 본 편에서 반복해서 바알 우상숭배를 비판하고 있다.
지금은 어떤가. 최첨단 자본주의, 신자유주의가 지구촌을 휩쓸고 있는 21C다. 국경을 초월한 전 지구적인 슈퍼자본, 다국적 기업들이 소박한 인간들의 삶을 위협하고 결정짓는 서기 2011년이다. 백성들이 그토록 두려워했던 왕권, 국가폭력마저 농락하고 부리는 지경에 와 있다. 사람들은 민주주의보다 밥을 더 원하고, 하나님 없이 살 수는 있어도 돈 없이는 살 수 없는 듯하다. 강자는 이코노믹 비스트, 약자는 이코노믹 애니멀이 되어 저마다 돈을 향해 질주하고 있다. 배금주의, 물신주의는 더하면 더했지 그때보다 못하지 않다.
자본은 언제 어디서나 있다. 디자인에 있고 뉴스에 있고, 출근길에 있고 잠자리에 있다. 가장 낮은 곳에서 가장 높은 곳까지, 가장 가까운 곳에서 가장 먼 곳까지... 하나님을 찾기는 힘들어도 자본을 찾기는 너무도 쉽다. 가장 먼저 친근하게 얼굴을 들이미는 것도 자본이고, 가장 어두운 장막 뒤에서 모든 것을 조종하는 어둠의 실력자 역시 자본이다.
21C, 지금 이곳의 바알은 자본이다. 돈이다. 경계할 일이다.
평화는 무엇인가. 모두의 평화다. 완전한 평화다. ‘하나님 나라’ 안에서의 참된 평화다. 이것이 이사야와 예레미야가 말한 평화다.
백성이 큰 상처를 입었는데도 ‘평화, 평화’ 외치는 자가 누구인가. 평화가 없는데도 ‘평화, 평화’ 외치는 자가 누구인가. 자기만의 평화에 빠진 자들이다. 이웃의 불행에 관심 없는 자들이다. 모두가 단절되어 거짓평화에 빠져 있다. 무엇과 단절되었나. 이웃과 단절되고 공동체와 단절되고 하나님과 단절되었다.
거짓은 거짓이되 하나는 고급이고 부도덕하다. 하나는 소박하고 비루하다. 전자는 무엇인가. 행복전도사 최효종(개콘)의 럭셔리한 평화다. 무상급식 토론에 나온 한나라당측 패널이 “요새 굶는 아이가 어디 있느냐?”고 반문했다던데, 저녁에 등심을 먹을까 회를 먹을까 고민하는 이는 수돗물로 허기를 채워야 하는 이의 심정은 죽었다 깨나도 모르는 법이다.
“아~ 여러분. 우린 행복한 겁니다. 다들 냉장고에 굴비, 갈비 쟁여놓고 사시잖아요? 상추 비싸면 등심에 상추올린 등심쌈 싸 먹으면 되잖아요. 스테이크는 기본적으로 절반은 남겨줘야지 없어 보이지 않고 뽀대 나잖아요. 어? 표정들이 다들 왜 그래요? 남으면 싸달라고 하는 사람들처럼? 우린 행복한 거예요. 등심 비싸서 돼지갈비 먹는 사람은 쪼금 불행한 거예요. 아~~ 행복하다!!!”
개콘 행복전도사 개그맨 최효종 청와대 행복전도사 대통령 이명박
소박하고 비루한 거짓평화는 무엇인가. 어리석고 어두운 속인들의 평화다. 우물 안 개구리의 평화다. 더러운 진흙 속에 드러누운 배부른 똥돼지의 평화다. 입만 있고 눈이 없는 애벌레, 아침에 태어나 저녁에 가는 하루살이처럼 먹이를 찾아 연신 입질만 해대며 작은 포만감에 만족하는 평화다. 진정한 평화를 맛볼 기회도 없었고 맛볼 의향도 없다.
“인생 뭐 별건가. 잘 먹고 잘 놀다 가는 거지. 하루 벌어 하루 먹으면 그만일 뿐. 제발 좀 나를 좀 냅 둬! 내가 만족한다는데, 행복하다는데 뭔 상관인가? 너나 잘 하세요. 다른 세상에 사는 높은 분들이야 다 지 타고난 팔자! 우리네 인생도 불행하다면 뭐... 그것도 다 지 타고난 팔자! 어차피 남의 인생 나완 상관없지!”
6장 15절은 부끄러움, 수치를 말하고 있다. 양심, 도덕심, 신앙심의 핵심은 부끄러움이다. 부끄러움이 있어야 지켜낼 수 있고 죄를 돌이켜 회개할 수 있다. 대로변에서 엉덩이를 까고 볼 일을 보는, 최소한의 부끄러움도 없다면 인간도 아니다.
심판을 두려워 않는 용감한 심장이나 간교한 머리보다 음험한 마음과 두꺼운 낯짝이 악인에겐 더 필요하다. 악인이 죄를 짓는 것은 두려움이 없기 때문이 아니라 부끄러움이 없기 때문이다. 죄를 짓고도 죄인지 모르고, 죄인지 알고도 부끄러움을 모르기 때문이다.
성경에는 부끄러움에 대한 언급이 많이 나온다. 부끄러움을 당하면 옷을 찢고 재를 뿌리며 머리를 감싸고 슬퍼 괴로워한다. 최상의 불명예, 심판을 ‘부끄러움을 당하는 것’으로 표현하고 있다. 다윗 이전에도 나오지만 다윗과 관련한 사무엘 이하 시편까지 유독 많이 나오는 표현인 듯하다. 다윗은 명예를 소중히 여기는 용사, 진실한 시인, 주 앞에 신실한 종이었다.
부끄러움을 알아야 사람이다. 부끄러움을 알아야 주의 신실한 종이다.
“불끄러온 줄 알아야지!”도 잘 들어야겠지만,
“부끄러운 줄 알아야지!”도 명심해야만 한다.
14장 13절
아! 주 여호와여, 보십시오. 거짓 예언자들이 이 백성에게 이상한 말을 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너희는 적의 칼에 시달리지 않을 것이다. 굶주리는 고통도 당하지 않을 것이다. 주께서 이곳에 진정한 평화를 주실 것이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15장 2절
그들이 너에게 ‘우리가 어디로 나가야 합니까?’하고 묻거든 그들에게 대답하여라. ‘여호와께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죽을 사람은 죽음으로 나아가고, 칼에 죽을 사람은 칼에 죽고, 굶주려 죽을 사람은 굶주려 죽고, 포로로 끌려갈 사람은 포로로 끌려갈 것이다.’
예레미야 시대의 예루살렘은 패망을 앞두고 있다. 재앙을 향해 성큼성큼 나아가고 있다. 그 모습은, 외견상 소돔과 고모라의 불기둥, 창녀와 강도의 웃음, 행인의 비명은 아니다. 그렇게 시끄럽지 않고 오히려 조용하다. 간섭하기도 싫고 간섭받기도 싫은 스쳐가는 인생들이다. 그렇게 뜨겁지 않고 오히려 차갑다. 인적도 없고 풀 한포기 나지 않은 시베리아 벌판같이 냉랭하다. 현대 도시인의 무관심과 소시민적 개인주의에 싸인 허위와 거짓, 위선과 침묵의 분위기에 오히려 가까운 느낌이다.
저마다 기복신앙에 빠져 개인주의, 물신주의가 횡행하는 차갑고 쓸쓸한 세상이다. 집마다 작은 바알 신을 모셔놓고 복을 빌고 있다. 하나님의 성전, 예언자, 제사장까지 이런 시대분위기의 영향을 받고 있다. 입에 발린 좋은 소리만 해주며 복을 빌어주고 있다. 듣고 싶어하는 말만 하고 들어야 할 말은 하지 않는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세상을 일깨우는 것이 아닌 하나님의 말씀으로 세상에 아부하고 있다.
외면 받는 예레미야는 얼마나 외로운가. 패망이 눈에 보이는 그의 마음은 얼마나 비탄에 젖어 있는가. 부끄러움을 모르는 그들에게 하나님이 진노하셨다. 이제 곧 예루살렘에 재앙이 닥칠 것이다. 예레미야의 입을 빌어 하나님이 하시는 말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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