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읽기 0054 : 예레미야 20장~37장
20장 8절
저는 말할 때마다 폭력과 멸망을 외쳤습니다. 여호와의 말씀을 백성들에게 전했지만 그 때문에 저는 모욕만 당했습니다. 백성은 하루 종일 저를 비웃습니다.
14절
내가 태어난 날이 저주받기를! 내 어머니가 나를 낳으신 날에 복이 없기를!
계속해서 왕따 당하고 미움 받고 비웃음 당하는 예레미야의 처지를 말하고 있다. 백성들 입장에서는 자신들을 돌아보기는커녕 흉한 얘기만 일삼는 예레미야는 저주를 퍼붓고 유언비어를 유포하는 불평분자로 비춰졌을 것이다.
그래서 예레미야는 슬프다. 괴롭다. 지치고 견딜 수 없어 ‘여호와를 잊어버리겠다.’[렘 20:9]라고까지 다짐하며 하나님께 하소연해보지만 그의 안에서는 이미 하나님의 말씀이 타오르는 불길같이 그의 뼛속 깊은 곳까지 태우고 있다. 결국 예레미야는 자신의 존재, 자신의 생일까지 저주한다. 욥기 3장 3절 이하 자신의 생일을 저주한 욥을 연상시킨다.(☞ 성경읽기 0031 참조)
26장 16절
유다의 지도자들과 모든 백성이 제사장들과 예언자들에게 말했습니다. “예레미야를 죽여서는 안 됩니다. 예레미야가 우리에게 한 말은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서 주신 말씀입니다.”
28장 4절
유다 왕 여호야김의 아들 여호야긴과 포로가 되어 바빌론으로 끌려갔던 유다 백성들도 내가 다시 이곳으로 데려오겠다. 내가 바빌로니아 왕이 유다에게 메게 한 멍에를 꺾어 버리겠다. 여호와의 말씀이다.
15절
하나냐여, 들으시오. 여호와께서는 당신을 보내지 않으셨소. 그런데도 당신은 이 백성들이 거짓말을 믿게 만들었소.
26장 16절은 예레미야의 두 번째 성전설교 후 벌어진 상황이다. 예레미야는 앞선 7장에서도 예루살렘의 멸망을 예언하고 백성들에게 회개를 요구하는 첫 번째 성전설교를 한 적이 있다. 자신들 앞마당에서 자신들과 다른 흉한 예언을 하는 예레미야를 보고 뭇 제사장들과 예언자들은 노발대발한다. 그들은 다수고 예레미야는 소수다. 혼자다. 그들은 주류 강자들이고 예레미야는 비주류 약자다.
28장 4절은 그들 중 한명인 하나냐의 거짓예언이고 15절은 그런 하나냐를 반박하는 예레미야의 말이다. 하나냐도 예언자고 예레미야도 예언자다. 모두다 예언자라고 주장하고 자신의 말이 틀림없는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주장한다. 듣는 백성 헷갈린다. 하지만 끝내 백성들은 거짓예언자의 말에 솔깃하다. 귀에 거슬리지 않기 때문이다. 복을 빌어주며 안심시켜주기 때문이다.
하나냐 말고도 본 편에서는 예레미야와 대립하는 거짓예언자들이 다수 나온다. 예레미야는 그들을 끈질기게 저주하고 혐오한다. 예레미야는 참이고 그들은 거짓이다. 같은 제사장, 예언자의 직분으로서 예레미야의 가장 강한 혐오의 대상이다. 그들 역시 예레미야를 가장 증오한다. 죽이지 못해 안달이다. 서로가 서로에게 가장 강한 경쟁상대, 앙숙이다.
성전설교 후에 지도자들과 백성들은 예레미야를 살리자 주장하지만 제사장들과 예언자들은 죽이자고 주장한다. 진짜와 가짜, 참예언자와 거짓예언자, 정통과 이단을 둘러싼 종교지도자들, 분파간의 극한 대립과 전쟁이 연상된다. 신앙심이 깊지 않고 눈 밝지 않은 어린 양에 불과한 평신도들은 판단하기가 어려운 일이다.
종교지도자들이 바로 서야 한다. 복음을 전해 남을 구원하기 전에 하나님의 말씀에 충실하여 먼저 스스로 구원받아야 한다. 대중 앞에 서기 전에 스스로에게 더욱 엄격하고 하나님 앞에 더욱 겸손하고 정직해야 한다.
예레미야는 지도자들과 백성들의 반대로 결국 목숨을 건진다. 그러나 좋아할 일만은 아니다. 그들이 예레미야의 말을 전적으로 받아들여 살리려 한 것은 아니다. 예레미야가 하나님의 이름으로 자신을 죽이는 것은 죄 없는 이를 죽이는 죄임을 경고했기 때문이다. 회개까지 이르지 못하고 단지 두려워서, 혹시라도 화를 당할까 염려해서 말린 것뿐이다.
그들은 아직도, 여전히 어두운 백성들이다. 앞으로도 상당기간 죄를 돌이켜 회개치 못할 백성들이다. 비록 귀가 뚫리고 눈이 뜨여 예레미야를 통한 하나님의 말씀에 깨닫는 이가 있더라도 그들은 여전히 (극)소수일 뿐이다. 예루살렘의 멸망은 현재진행형이고 예레미야는 여전히 슬프다.
36장 23절
(여호야김) 왕은 두루마리 전체를 난롯불에 넣어 태워 버렸습니다.
24절
왕과 그의 신하들은 두루마리에 적힌 모든 말씀을 듣고도 놀라지 않았고 슬퍼하는 표시로 자기들의 옷을 찢지도 않았습니다.
37장 16절
예레미야는 지하 감옥에 끌려가 여러 날 동안 갇혀 있었습니다.
17절
그 후에 시드기야 왕이 사람을 보내어 예레미야를 왕궁으로 불러들이더니 몰래 그에게 물었습니다. “혹시 여호와께서 무슨 말씀을 하신 것이 없소?” 예레미야가 대답했습니다. “있습니다. 시드기야 왕이여. 왕은 바빌로니아 왕의 손에 넘겨질 것입니다.”
바빌로니아에 의한 예루살렘의 멸망을 예언한 예레미야의 글이 적힌 두루마리가 여호야김 왕의 손에 들어가자 왕은 귀담아 듣기는커녕 두루마리를 불쏘시개로 쓴다. 왕과 그의 신하들의 반응은 두려움도 슬픔도 아닌 분노와 무시다. 한마디로 콧방귀를 뀌며 비웃는 태도다.
왕은 예레미야와 그의 글을 받아 적은 바룩을 잡아들이라 명령하지만 하나님께서 예레미야와 바룩을 숨겨주셔서 그들은 왕에게 잡혀가지 않게 된다. 그들은 새로운 두루마리, 전에 것보다 더 많은 말씀이 적힌 두루마리를 만든다.
시드기야 왕 때, 예루살렘 성을 포위하고 있던 바빌로니아 군대가 유다 쪽으로 행진해 오고 있는 이집트 군대의 소식을 듣고 일시 철수하였을 때, 예레미야는 마침 고향을 들르러 성을 나서게 된다. 성문을 지키던 문지기는 이를 예루살렘을 배반하고 바빌로니아에게 항복하기 위해 탈출하는 것으로 오인하여 그를 왕의 신하들 앞으로 끌고 간다. 예레미야는 결국 지하 감옥에 갇혀 생사를 장담할 수 없게 된다.
왕은 사람을 보내 예레미야를 왕궁으로 불러들이고 몰래 물어본다. 결국 왕은 그를 경호대 뜰에 갇혀 지내게 하고 음식을 제공해준다. 어찌됐든 빛도 공기도 들지 않는 지하 감옥에서 목숨을 구한 것이다.
여호야김 왕은 아버지 요시야 왕이 이집트 느고 왕과의 전쟁에서 패해 전사한 후 느고에 의해 세워진 왕이다. 시드기야 왕은 여호야김 왕의 아들인 여호야긴 왕을 바빌로니아가 볼모로 잡아간 후 이름까지 바빌로니아에 의해 맛다니야에서 시드기야로 바뀌어 세워진 왕이다.(열왕기하 24:17 ☞ 성경읽기 0024 참조) 그는 여호야김 왕의 형제, 여호야긴 왕의 삼촌이다.
태생적으로 여호야김은 이집트에게서 자유로울 수 없고, 시드기야는 바빌로니아에게서 자유로울 수 없다. 그래서 여호야김은 예레미야를 무시하고, 시드기야는 예레미야를 무시하지 못한다. 하지만 시드기야 왕마저 눈치를 보며 몰래 물어보는 것으로 비추어 볼 때 신하, 귀족들은 여전히 친 이집트 세력이 강한 듯하다. 거의 실권이 없는 허수아비 왕이지 않았을까?!
이미 북왕국 이스라엘은 멸망한 상태지만 (남왕국) 유다의 처지는 현재의 한국(남한)과 비슷하다. 정치, 지정학적 위치가 북쪽의 앗시리아, 동쪽의 바빌로니아, 남쪽의 이집트의 세 강대국의 한가운데 위치해 있는 약소국이다. 당시는 앗시리아와 이집트가 지고 바빌로니아가 새롭게 발흥하던 시대다.
예레미야는 이런 국제정세를 누구보다 정확히 보고 있었다고 생각된다. 예루살렘은 이런 국제정세에 어두운 채 명에서 청으로 넘어가던 때 조선이 친명 기득권세력의 어리석은 사대정책으로 전쟁의 참화와 굴욕을 당했던 상황과 흡사하다.
그럼 지금, 우리는 어떤가?
한민족이 부흥하려면 통일이 필수다. 생존하려면 남북화해, 평화가 필수다. 하지만 주지하다시피 지난 4년간의 이명박 정권은 후퇴만을 거듭했다. 남북관계에서 이미 남북한 모두 주도권을 잃었다. 이제는 미국과 중국에 떠밀려 회담장에 나오는 모양새다. 특히 남한은 고기냄새 피우고 동전이나 짤랑대다가 된통 얻어맞고선 ‘울며 겨자 먹기’식으로 억지로 끌려나오는 모양새다. 체면이 구겨지고 우스워졌다.
이제 완전히 민족문제가 아닌 국제문제가 되어버렸다. 내 집 안마당에서 주인이 아닌 손님이 되어버렸다. 남북한의 물리적 거리는 38선을 사이에 두고 예나 지금이나 다름이 없지만 정치적, 정서적 거리는 까마득하니 멀어졌다. 남한은 미국의 태평양에 붙었고 북한은 중국 대륙에 훨씬 가까워졌다. 정서적으로는 수 킬로에 불과한 비무장지대의 거리가 수천 킬로에 달하는 태평양보다 더 멀다. 붙어있으되 가랑이가 찢어질 지경이다. 누구 책임인가?
북한, 예나 지금이나 호전적이고 예측 불가능한 것은 마찬가지다. 미국, 민주당 오바마 이후 기대와는 다르게 별다른 대담한 접근법을 보이지 않고 있기는 마찬가지다. 북핵을 둘러싼 북미간의 갈등구조는 별반 다르지 않다. 중국, 러시아, 일본의 스탠스 역시 바뀌지 않았다. 바뀐 것은 오직 남한뿐이다.
햇볕정책에서 비핵개방3000(이라 쓰고 방치정책, 북한붕괴희망정책이라고 읽는다.-달리 ‘정책’이라 부르기도 뭣하지만)으로 바뀌었다. 북미간의 중재자에서 북미간의 훼방꾼으로 바뀌었다. 전진하지도 후퇴하지도 않은 오바마의 대북정책으로 볼 때 점증하는 남북갈등은 미국을 북한으로부터 떼어놓고 밀어내려는 이명박 정권에 더 책임이 크다.
위키리크스가 폭로한 남한당국자들의 확신에 가까운 북한붕괴 발언으로 볼 때 미국으로 하여금 같은 확신 또는 인상을 갖게 하여 대북접촉이나 협상을 무의미하게 여기도록 하려는 의도가 읽힌다. 한마디로 남북화해도 북미화해도 달갑지 않다는 거다. 손도 잡기 싫고, 말도 섞기 싫고, 조만간 북한은 기필코 붕괴될 테니 세월아 네월아 기다리기만 하면 된다는 거다. 뒷수습 할 능력도 없으면서... 이대로 북한이 붕괴한다면 남한에게도 대재앙이 될 것이다. 한민족에게 돌이킬 수 없는 후회를 남길 것이다.
한쪽 다리가 썩어 고통스럽다고 잘라낼 텐가? 생명을 위협한다면 잘라내야겠지만 1%의 가능성만 있대도 치료해야 한다. 잘라낸다면 영영 걸을 수 없다. 하물며 다리가 아닌 몸의 반쪽이라면 걷는 게 아니라 일어설 수도 없다. 그래도 정 잘라내고 싶다면 평생 그렇게 살 각오를 먼저 해야 한다. 어떻게 살 것인가? 한민족의 비전은 무엇인가?
한 가지 분명한 건.
한국이 미국 같은 한 강대국에 올인, 의지하는 모험(!)을 통해 생존과 이익을 도모하거나 보장받는 기생, 위성국이 되지 않을 바에는...
형세에 따라 주변 4강을 이리저리 왔다 갔다 하며 줄타기를 하는 기회주의적이고 비루한 종속변수, 때론 비참하게 이리 치이고 저리 치이는 신세에 머물지 않을 바에는...
스위스나 싱가폴 같은 왜소하지만 잘 사는 강소국을 국가비전, 모델로 삼지 않을 바에는(한국이 유럽 한복판이나 남아시아에 위치해 있다면 강소국으로도 충분할 것이다.)...
미국, 중국, 러시아 같은 강대국은 못되더라도 미, 중, 러, 일의 네 마리 호랑이의 한복판에서 생존을 도모하고, 누구도 함부로 깐볼 수 없는 어느 정도의 자주적 발언권을 확보하고, 적어도 일본과 견줄 수 있는 강중국이 되려면 통일은 반드시 필요하다는 거다.
허리 잘린 사람은 온전히 홀로 설 수 없다.
저 철조망 뒤에는 김정일, 인민군, 빨갱이만 있는 게 아니다.(강조를 위한 적대적, 냉전적 표현이다.) 우리가 결코 남에게 양보할 수도 없고, 포기하거나 방치할 수도 없는, 해서도 안 되는 남한의 절반에 육박하는 2300만 명의 동포와, 1.23배에 이르는 12만 2762㎢의 강토가 있다.
그것은 변할 수도, 옮길 수도 없는 엄연한 물리적 현실이다. 아무리 누군가 정치적 이득을 위해 증오바이러스를 퍼뜨린대도 회피할 수 없는 한민족의 운명이다.
이집트가 지고 바빌로니아가 떴다. 명이 지고 청이 떴다. 이제 세계 초강대국인 미국에 견주어 중국이 일어서고 있다. 이미 중국과의 교역액이 미국을 훨씬 앞서는 등 경제적으로는 중국의 영향력이 더 커졌다. 성한 것은 쇠하고, 쇠한 것은 성한다. 하늘 아래 새로운 것이 없듯이 하늘 아래 영원한 것은 없다. 아무리 선한 사람도 완전히 의로울 수 없는데 하물며 냉엄한 국제사회에서 완전히 의로운 나라가 어디 있겠는가!
미국이 각별한 인연과 우정을 나눈 친구의 나라일수는 있어도 일부 국민들이 바라보듯 은혜의 나라, 천사의 나라, 하나님의 나라는 아니다. 국력에 상응한 발언권은 현실적으로 인정하고 존중해야겠지만 아들이 아빠 믿듯, 동생이 형님 따라다니듯 의지해서는 안 된다.
고 노무현 대통령 말처럼 미군 뺀다고 바짓가랑이 붙잡고 와들와들 사시나무 떨듯 떨어선 안 된다. 버림받은 아이처럼 무슨 재앙이라도 만난 듯 까무러쳐선 안 된다. 스스로 주눅 들어 굽히고 들어가는 이런 심리적 의존상태부터 극복해야 한다. 이런 상태에서는 외교도, 국방도 말빨이 안 선다. 이미 국익을 다툴 수도, 논할 수도 없다.
친미(親美), 반미(反美), 공미(恐美), 애미(愛美)가 아닌 평등호혜의 원칙아래 용미(用美), 존미(尊美)해야 한다. 경외하거나 선망하거나 미워하지 말고 다만 존중해야 한다. 미국뿐만이 아니라 중국, 러시아, 일본 등 모든 만국(萬國)이 다 마찬가지다.
또다시 정치얘기, 잡다한 생각이 길어졌다. 하지만 예레미야 역시 조국과 동포의 멸망과 재앙을 안타까이 바라보며 슬퍼했던 애국자, 온전한 유대공동체의 복원을 간절히 바랬던 민족주의자의 면모를 보였다. 그 슬픔을 하나님께 호소했고, 그 말씀을 하나님의 입을 빌어 경고하고 예언했다.
북 이스라엘과 남 유다는 결국 통일하지 못하고 순차적으로 멸망하고 말았다. 북한과 남한도 마찬가지다. 멸망과 쇠퇴로 가지 않도록 하루빨리 통일의 단초를 마련해야 한다. 그 통일은 무력통일이 아니라 평화통일이어야 한다. 국익과 국토의 심각한 멸실을 불러올수도 있는 갑작스런 하드랜딩 흡수통일이 아니라 서로의 체면을 세워주고 존중하며 점진적, 우호적으로 이루어지는 소프트라이징 대동(大同)통일이어야 한다.
2500여년전 성경의 말씀은 이미 우리에게 이같은 교훈을 똑똑히 가르쳐주고 있다. 멸망과 재앙, 소멸과 쇠퇴를 피하는 길을 명확히 제시해주고 있다. 그러기 위해선 다윗과 솔로몬처럼 믿음 깊고 지혜로운 지도자가 필요하다. 그런 지도자를 분별해내고 따르는 신실하고 도덕적인 시민들이 필요하다.
오늘 이명박 대통령이 TV 좌담회에서 또 한 말씀 하신 모양이다. 물론 보지 않았다. 사람이 사람을 지레 판단하고 미워하면 안 되는데 이제 보기만 해도 스트레스가 쌓여서... 듣기로는 과학비즈니스벨트 충청권 유치공약을 뒤엎었다고 하던데...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스스로 표 좀 얻자고 했던 공약이라고 실토했다던데... 대통령으로 인해 신뢰의 값어치가 땅에 떨어졌다. 광장 한복판에서 엉덩이를 까고 볼일을 보는 것을 목격한 것처럼 되레 국민들이 자괴감에 부끄럽다. - 하나님! 정녕 이 사람이 우리가 뽑은 우리의 대통령이 맞사옵니까!
어떻게 대통령이란 인사가 대놓고 거짓말을 하고, 대놓고 거짓말임을 공표할 수가 있는가! 국민들을 우습게 알기도 유분수지! 거짓말쟁이임을 알고도 뽑은 국민들이 감수해야할 고통이라고 하기엔 너무 화가 난다. BBK에, 747공약에, 행복도시, 거짓 원전수주 홍보, 과학벨트까지... 이제 감당할 수 있는 한계를 벗어났다.
내용과 형식면에서 최악이다. 거짓을 꾸미고 거짓을 드러내는 코스가 최악이다. 공약으로 한 번 우려먹고, 뒤엎는 것으로 또 한 번 우려먹으려 한다. 비열하면서도 대담하고, 음험하면서도 그 의도가 노골적이어서 오히려 정직하다. 도덕파탄! 신용파탄! 이웃이라면 말을 섞기 싫고 구멍가게라면 발길을 끊는다. 정이 안 간다.
종편선정을 미끼로 조중동을 길들인 것처럼 과학벨트를 미끼로 또 한 번 권력 앞에 줄을 세워보겠다는 거다. 한 놈을 상처 내어 굶주린 나머지 동료들에게 뜯어먹게 하려는 것과 같다. 신뢰고 나발이고 체면이야 어찌됐든 권력의 단맛을 끝물까지 쪽쪽 빨아먹고야 말겠다는 탐욕이자, 아등바등 권력을 틀어쥐고 놓치지 않으려는 처절한 몸부림이기도 하다.
하지만... 이래도 속아 넘어가줄 국민들이 아직도 있다는 것이 슬프다. 이래도 이 대통령과 한나라당을 지지할 국민들이 있다는 것이 안타깝다.
예언자들은 거짓을 말하고, 제사장들은 제멋대로 권력을 휘두르고, 내 백성은 그런 제사장들을 좋게 여기니 마지막 때가 오면 너희가 어떻게 하려느냐?[렘 5:31] 작은 사람에서부터 큰 사람에 이르기까지 누구나 돈에 욕심내고 있다. 예언자들과 제사장들까지 모두 거짓말을 하고 있다.[렘 6:13] 그들은 역겨운 짓을 하고도 부끄러워할 줄 모른다. 수치를 알지도 못하고, 얼굴을 붉힐 줄도 모른다.[렘 6:15] 그래서 예루살렘은 하나님의 심판을 받고 멸망했다.
가짜가 진짜를 능멸하고 거짓지도자가 어리석은 국민들을 농락하지 않기를, 가짜가 물러가고 진짜가 대접받고, 깨어있는 도덕적 시민들이 거짓지도자를 따르지 않기를 기도한다. 하나님의 참뜻을 따르는 진실한 사람들이 이 나라에 넘쳐나기를, 이 나라에 하나님의 뜻과 정의와 축복이 임하기를 기도한다. 그래서 이 땅이 멸망과 쇠퇴를 면하고, 평화와 번영을 구가하기를 기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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