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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 신앙생활

성경읽기 0050 : 이사야 3장~9장

어멍 2011. 1. 2. 22:41

     성경읽기 0050 : 이사야 3장~9장



3장 9절

그들이 소돔 백성처럼 자기들의 죄를 드러내 놓고 말하며, 감추지 아니한다.

16절

여호와께서 말씀하신다. “시온의 여자들은 교만하다. 그들은 목을 꼿꼿이 세우고 다니며, 홀리는 눈으로 쳐다본다. 점잔 빼며 걷기도 하고, 발목에서 소리를 내며 다니기도 한다.”

 

    문화와 풍속의 타락상을 말하며 하나님께서 유다와 예루살렘을 심판하실 것을 예언하고 있다. 천민자본주의가 팽배하고 극단적 개인주의, 이기주의가 판을 치는 지금의 현실에 비추어 볼 때 경계할 일이다. 모두가 공공의 윤리, 타인의 아픔에 무관심하다. 정도보다 권도에 머리 숙이고 대의보다 대세를 따른다.


    된장녀, 신상녀, 거리낌 없이 성형하고 거리낌 없이 그것을 떠벌리는 가벼운 문화가 대세다. 냉소를 쿨하다고 여기며 초연함과 구별치 못하고, 천박함을 솔직하다고 여기며 진솔함과 구별치 못하고, 비루한 부러움을 겸손이라 여기며 존경과 구별치 못한다.

    TV, 연예, 광고 등 빠르고 가벼운 대량소비문화, 감성문화가 지배하는 청소년들뿐만 아니라 경제제일주의, 물질만능주의에 경도된 기성세대 역시 마찬가지다. 16절 말씀이 여성에게 치우친 것 같아 불공정한 느낌이 있지만 남성 역시 예외가 아니다. 20대 남성의 가장 존경하는 인물이 이건희라는 어느 설문조사의 결과는 이것을 압축해서 보여주고 있다.


    사회가 너무 남성화 되었다. 소통과 나눔, 베품과 돌봄은 없고 거칠고 삭막하고 일방적이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무엇인가. 여성성이다. 단테와 괴테가 말한 그 여성성! 실망과 두려움에 모두가 예수를 버리고 떠났을 때 끝까지 남아 예수의 마지막을 지킨 이들도 여인들 아니었던가!

    약자를 돕고 아픈 자를 돌보고 슬픔에 빠진 자를 품어 안는 것이 여성성이다. 때론 거악에 의연히 맞서고 용기 있게 희생하는 것이 여성성이다. 한없이 약하지만 한없이 강할 수 있는 자, 사랑하는 이를 위해 고민 없이 몸을 내던질 수 있는 이는 남성이 아니라 여성이다. 아빠가 아니라 엄마다.




미켈란젤로(Michelangelo)의 <피에타(Pieta)> : 1499 성베드로 대성당

십자가에 못박혀 죽은 예수를 안고 슬픔에 잠긴 성모 마리아

우리를 눈물짓게 하고 숙연하게 하는 이것이야말로 여성성의 진수다.

감당할 수 없는 이 슬픔을 기꺼이 감당하려는 희생과 사랑이야말로 여성성의 위대함이다.

※ 피에타는 이탈리아어로 슬픔, 비탄을 뜻함.



    영원히 여성적인 것이 우리를 이끌어 올리도다. - 괴테 <파우스트>

    그 여성성은 당연히 단순한 외모의 아름다움을 얘기한 것이 아니다. 깊고 우아한 정신적 내면의 숭고함, 아름다움을 얘기한 것이다. 하지만 현대의 여성은 어떻게 작용하고 있는가. 소비와 꼴림을 유발하는 섹시한 상품으로서 더 많이 기능하고 있다. 치마를 둘렀다고, 슴가가 나왔다고 그것이 우리를 구원할 ‘여성성’을 표시한진 않는다. 그건 단지 생물학적 ‘여성’을 표시할 뿐이다.

    '여성'은 섹시할지라도 '여성성'은 숭고하다. '여성'은 한없이 약할지라도 '여성성'은 한없이 강하다.


    남성들은 또 어떤가. 지조, 절개, 양심, 원칙, 신실함은 이 거친 세상을 살아가기엔 거추장스러울 뿐이다. 끼리끼리 무리를 지어 누구 라인이네, 누구 인맥이네 가볍게 떠벌리며 호가호위를 일삼는다. 권력에 유약하고 일상에 얽매이기가 여염집 아낙보다도 더하다. 대외적으로 원칙과 정의를 부르짖는다고 해도 모두가 공식 멘트, 레토닉이란 것을 모두가 암묵적으로 안다.

    철부지 조폭이 얼마나 무자비한지 서로 떠벌리는 것처럼, 도적 무리들이 얼마나 크게 털어 먹었는지 서로 자랑하는 것처럼 저들끼리 모이면 얼마나 비열하고 교묘한 수를 써서 담대하게 사기와 악행을 성공시켰는지 히히덕거릴 게 뻔하다. 소돔 백성처럼 자기들의 죄를 드러내 놓고 말하며, 감추지 아니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5장 8절

오호라, 다른 사람들이 집과 밭을 차지할 수 없도록 집에 집을 더하고 밭에 밭을 더하여, 이 땅 가운데 홀로 살려 한 너희에게 재앙이 닥칠 것이다.

 

    악한 권세, 권력의 본질은 독점과 차별이다. 악인에겐 <혼자만 잘 살면 무슨 재민겨-전우익 저>가 아니라 <다같이 잘 살믄 무슨 재민겨>다. 집에 집을 더하고 밭에 밭을 더하여 혼자서만 잘 살려 한다.

    권력이 소수에게 집중된 근대이전에는 부의 불평등 역시 크게 주목받지 못하고 어쩌면 자연스런 현상이었으나 투표를 통한 보통선거로 권력이 획기적으로 확산된 현대 민주주의에서는 부의 불평등이 수용 가능한 한계선을 넘어서면 그 사회는 불안정해지고 위험해진다. 그래서 민주주의가 고도화될수록 세금, 복지 등 경제정책이 중요한 이슈가 된다.

    곧 경제민주화다. 선거, 3권 분립 등 형식적 민주주의가 완성된 뒤에는 이러한 실질적 내용들이 채워져야 민주주의가 심화, 성숙되고 지속가능해질 수 있다. 그래서 서구 민주주의에서는 관념적 이념보단 징벌적 손해배상제 같은 시장주도권이 중요 이슈고, 세율 1%를 갖고 올리냐 내리냐로 싸우고 그것으로 집권세력이 판가름 나기도 한다.


    한국의 불평등의 본질 역시 부의 불평등, 빈부격차다. 권력으로 부를 쟁취하고 그 부로 권력을 유지하고 재창출한다. 내용을 보면 수입의 차이보다 자산의 차이가 상대적으로 더 크다. 그만큼 기존에 쌓아놓은 부의 차이가 더 크다는 거다. 아직까진 일단 파이를 키우자는 성장제일주의와 재벌과 부자가 잘 살아야(잘 살게 된 연후라야) 서민도 잘 살게 된다는 낙수효과이론이 먹혀들고 있다.

    아직은 나눠 먹을 때가 아니고 키워 먹을 때라는 거다. 일단 한번 믿어보고 화끈하게 밀어주면 밖에 나가 돈 벌어서 나눠주겠다는 거다. 빈부격차가 아직은 임계점에 이른 것이 아니어서 그럭저럭 사회가 유지되며 먹혀들고 있지만 영원토록 먹힌다는 보장이 없다. 한계가 있다.

    빈부격차가 계속 악화되면 사회가 흉악해지고 살벌해지고 위험해질 것이다. 빈자는 부자를 증오하고 부자는 빈자를 멸시하게 될 것이다. 빈자는 인간의 위엄을 내버리고 눈이 뻘개지고 부자는 담장을 높이고 불안한 눈빛에 초조해 할 것이다.

    성장지상주의는 위험하다. 성장이냐 분배(곧 복지)냐 양자택일하라는 설문조사는 한편으론 우매하고 한편으로 교활한 술수다. 양자택일의 문제가 아니라 균형과 조화의 문제다. 성장만 하다보면 어느 시점에 이르러 복지를 돌봐야 할 지점에 이른다. 분배(복지)를 해야 지속가능한 성장을 보장할 수 있는 지점이 있다. 지금이던지 조만간 이를 것이다.


    이명박 정권 내내 큰 이슈가 되고 있는 4대강 사업 역시 마찬가지다. 100% 성장몰입정책이다. 환경? 그냥 빈말이고... 물류 등 기타 정권 측에서 주장했던 효과와 목적을 일일이 반박하기엔 시간낭비이니 생략하고 성장과 복지 측면에서만 접근하자면 철저한 성장위주정책이다. 복지개념과 유사한 일자리로 놓고 볼 때도 극히 미미한 수준이니 무시하자. 같은 비용으로 다른 곳에 투자하는 것이 오히려 일자리를 늘리는 데 훨씬 효과적이다. 이는 고용창출효과를 상호 비교한 것에서 이미 입증되었다.

    더 큰 문제, 문제의 핵심은 성장도 일부에 국한된 성장이라는 것이다. 바로 일부 건설회사 몇몇의 성장이다. 그 외에 주변 개발지 땅 소유자들이 이득을 볼 것이다. 서민들, 국민 모두가 모아 낸 세금이 재벌 금고에 쌓이는 것이다. 투기꾼, 땅부자 소유의 땅값을 올리는 것이다. 부의 재분배에 기여하는 정책이 아니라 철저히 부의 집중, 부익부 빈익빈을 가속시키는 정책이다.

    4대강의 목적은 간단하다. 지지세력에겐 금전적인 이득을 주고 국민대중에겐 놀거리, 볼거리를 주는 것이다. 이명박 정권이 언듯 말했던 ‘선진국일수록 수상레저(곧 물놀이)를 즐긴다.’는 말의 의미가 이것이다. 이제까지 나왔던 발언 중 가장 진심어린 그럴듯한 멘트다.

    실속이 없다. 먹을 것이 없는데 옷을 사고, 입을 것이 없는데 인테리어를 하는 격이다. 앞뒤가 바뀌었다. 선진국이어서 수상레저를 즐길 여유가 생긴 것이 아니라 수상레저를 즐겨 선진국 흉내를 내는 것이다. 여유가 생겨 사치품을 구입하는 것이 아니라 사치품을 사서 부유층 흉내를 내보자는 것이다. 하긴 4대강이 완성돼 배라도 띄울 수 있게 된다면 부유층은 아담한 요트라도 눈치안보고 탈 수 있게 될 것이다.

    서민들, 보통 국민들이 혜택을 볼 것은 가끔 나들이 갈만한 곳, 눈요기할 만한 곳이 몇 군데 더 생긴다는 것. 그것도 삐까번쩍 새롭게 완성된 후 노후되지 않고, 잘 관리될 때까지 만이다. 계속 즐기고 싶다면 그만큼 세금 계속내면 된다. 이 밖에 여러 가지 문제로 두고두고 후환이 될 것이다. 이명박 한나라당 정권에 단단히 코가 꿰인 형국이다.




경기도 여주군 강천면 이호대교에서 바라 본 남한강

4대강은 생명과 평화라는 기독교의 보편진리에 위배되며 길어야 칠팔십을 사는 유한한 인간이

하나님이 지으신 무한한 자연을 함부로 개조하려는 것 자체가 교만이고 죄다.



    집에 집을 더하고 밭에 밭을 더하여 - 모두 부동산이다. 예전에는 부동산만이 재산의 전부이다시피 했다. 하지만 현대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금융이 새롭게 부상했다. 경제를 돌아가게 하는 핵심을 이루는 두 축이다. 부의 불평등을 이루는 두 축이기도 하다. 따라서 사회가 타락하고 인심과 풍속이 문란해지는 단초도 이 둘에서 찾을 수 있다.

    부동산이 소수에 집중될수록, 좋게 말하면 마술과도 같이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첨단 금융기법, 나쁘게 말하면 숫자놀음과도 같은 사기에 비견할 부도덕한 불로소득이 득세할수록 사회는 불건전해진다. 땀 흘리지 않고, 정당한 노력을 지불하려 하지 않고, 시세차익을 노리고 아파트 청약현장에 밤을 새워 줄을 서는 인파가 인산인해를 이루는 것. 로또나 주식청약에 돈이 과도하게 몰리는 것은 위험한 신호다.


    땅은 원래 나(하나님)의 것이므로 너희는 땅을 아주 팔지는 못할 것이다. 너희는 내 땅에서 잠시 동안 사는 외국인이요, 나그네일 뿐이다.[레위기 25:23] 토지공개념을 연상시키는 레위기의 말씀이다. 오십년마다 ‘기쁨의 해’, 곧 ‘희년’이란 거룩한 해를 정하여 모든 땅과 백성에게 자유를 선포하였다. 땅을 팔고 샀더라도 소유권을 원래 주인에게 돌려주어야 하며 종들에게도 자유를 주어야 했다.(☞ 성경읽기 0010 참조)

    땅, 자연, 지구는 하나님에게서 우리 인간이 잠시 빌린 것일 뿐이다. 땅과 재물, 권세를 포함한 속세의 것 일체에 대한 탐욕과 과도한 집착은 그 자체로 죄다.



5장 19절

그들은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분을 비웃기까지 한다. “빨리 아무 일이라도 행하세요! 당신께서 하실 수 있는 일을 어서 우리에게 나타내 보이세요. 우리는 당신의 계획을 보기 원해요.”

20절

오호라, 악한 것을 선하다고 하고, 선한 것을 악하다고 하는 사람에게 재앙이 닥친다. 어둠을 빛이라 하고 빛을 어둠이라 하는 사람, 쓴 것을 달다고 하고 단 것을 쓰다고 하는 사람에게 재앙이 닥친다.

21절

오호라, 스스로 지혜롭다고 하고, 스스로 똑똑하다고 하는 사람에게 재앙이 닥친다.

23절

그들은 뇌물을 받고 악인을 의롭다 하며, 의로운 사람을 공평하게 재판하지 않는다.

24절

그러므로 불꽃이 지푸라기를 삼키고, 마른 풀이 불에 타 오그라들듯이, 그들의 뿌리는 썩고, 꽃은 말라 죽어 티끌처럼 흩날려 올라갈 것이다. 그들은 만군의 여호와의 가르침을 따르지 않았고,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하나님의 말씀을 멸시하였다.


9장 18절

악은 불과 같이 타오른다. 그 불은, 처음에는 잡초와 가시를 태우다가, 끝내는 숲의 나무들을 태운다. 그것들이 연기 기둥이 되어 하늘로 올라간다.

 

    죄악은 탐욕에서 시작되고 악행은 교만으로 더해진다.


    거룩하신 분을 비웃고 성전에서 악행을 모의하고 실행한다. 사탄이 하나님의 말씀을 인용해 예수를 설득하려 했듯이 간밤에 거짓말과 악행을 저지르고 다음날 성경을 끼고 강단에 올라 성경구절을 읊으며 자신의 신실함을 과시하고 신도들과 백성들을 현혹한다. 곧바로 뒤돌아서선 어김없이 악행을 반복한다. 강도들의 집은 형통하고, 하나님을 분노케 하는 자들은 평안하기 때문에 저들은 하나님을 자기 멋대로 주무른다고 생각한다.[욥기 12:6]

    그의 악행은 하나님을 시험하기 위해서고 그의 기도는 그의 악행을 가리기 위함이다. 그의 악행은 회개거리를 마련하기 위함이고 그의 회개는 새로운 악행을 위해 기존의 악행을 삭제하기 위함이다. 리셋하기 위함이다.

    하룻강아지가 호랑이 앞에서 멋모르고 깐죽거리는 것과 같이 있으시다면 나타나 보이고 없으시다면 침묵하라는 거다. 아무 일이라도 (실지로) 행해 보라는 거다. 계획이라는 것이 있다면 나타내 보이라는 거다. - 어이쿠! 그러셨어요?그러시다면 조용히 있지만 말고 빨랑 한번 보여주시라니깐요. 내가 원한다니깐요.

    만약 나타내 보이신다면... 불같은 심판을 내리시려 하신다면... 아마도 자신은 많은 악행에도 불구하고 교회에 다녔고, 성경을 읽었고, 회개를 했었고, 하나님을 믿었던 주의 종이라고... 긍휼히 여겨주시라고 눈물을 철철 흘리면서 납작 엎드려 손금이 닳도록 용서와 자비를 간구할지도... 그 때에는 가장 악한 자가 가장 약한 척 할 것이고, 가장 교만한 자가 가장 순종적인 척 할 것이다.


    믿음 깊지 않은 소박한 속인들이야 위로를 받기 위해, 복을 빌기 위해 교회에 나온다지만 악인들이 성전에 나와 기도를 드리는 이유는 이것일 것이다. 실지로 하나님을 믿지 않으면서도 하나님의 이름을 이용하기 위해, 하나님을 시험하기 위해, 비웃기 위해, 또 후일을 기약하기 위해... 일종의 보험이다. 그래서 그들의 기도는 듣기에 간절하다. 보기에 진짜 같다. 한편으론 죄를 짓고 있기에, 죄를 지을 것이기에 오히려 더 간절하다. 죄 많은 인간의 진짜 기도일 수도 있다. 때로는 어느 선지자, 예언자보다 열정적이고 권세 있다.

    불완전하고 나약한 인간이 죄에서 자유로울 수는 없다. 하지만 내 알기에 거짓말을 일삼는 하나님의 사람은 없다. 악행 후 기도하고, 기도 후 악행하는 하나님의 사람은 없다. 단지 믿음이 깊지 못해서, 하나님을 제대로 알지 못해서라는 것은 변명이 안 된다. 성경을 하루만 조용히, 제대로, 진심으로 묵상하고 음미한다면 그럴 수는 없다.


    성스러움과 선함도 그 끝을 가늠할 수 없듯이 비루함과 악함도 그 끝을 가늠할 수 없다. 악이 치성하여 천지사방에 악인들이 득세하면 ‘소돔 백성처럼 자기들의 죄를 드러내 놓고 말하며, 감추지 아니한다.’ ‘악한 것을 선하다고 하고 선한 것을 악하다고 하고, 어둠을 빛이라 하고 빛을 어둠이라 하고, 쓴 것을 달다고 하고 단 것을 쓰다고 한다.’ ‘악인을 의롭다 하며, 의로운 사람을 공평하게 재판하지 않는다.’

    전도(顚倒)현상이다. 악인이 의인 행세를 하고 선행이 죄가 된다. 박정희씨가 민주주의를 말하고 전두환씨가 정의사회를 말하고 이명박 대통령이 공정사회를 말한다. 독재자가 민주를 말하니 도적이 양심을 말하고 거짓말쟁이가 정직을 말하고 파괴자가 회복을 말하고 조폭이 의리를 말한다. 경찰이 도둑에게 쫓기고 사기꾼이 의로운 자를 심판하고 소인배가 대인배에게 명령을 내린다. 무식하고 천박한 자가 지혜를 말하고 교만한 자가 겸손을 말한다. 하루살이가 인생을 가르치고 파리가 새라고 주장한다. 전후좌우상하, 모든 것이 뒤집혀 혼란스럽고 환멸을 일으킨다.

    아무리 권세로 억누르고 언론을 장악해 정보를 통제, 조작한대도 그런 사회가 오래갈 리 없다. 대로변에서 악행을 저지르면서 ‘이것이 정의다’라고 외친들 공허할 뿐이다. 대중의 침묵은 두려움과 귀찮음 때문이지 동의하기 때문은 아니다. 가치관, 믿음의 혼란과 전도현상은 패망과 종말의 전조(前兆)다.


    심판의 날이 가까워왔다. 멀지 않아 죄악이 쌓이면 하나님께서 앗시리아를 도끼로 써서 이스라엘을 찍어내시고 바빌로니아를 몽둥이로 써서 유다를 때리실 것이다.

    악은 불과 같이 타오른다. 그 불은, 처음에는 잡초와 가시를 태우다가, 끝내는 숲의 나무들을 태운다. 그것들이 연기 기둥이 되어 하늘로 올라간다. 주위를 태우고 그들 자신 역시 마른 풀이 불에 타 오그라들듯이, 그들의 뿌리는 썩고, 꽃은 말라 죽어 티끌처럼 흩날려 올라갈 것이다. 모두가 거룩하신 하나님의 말씀을 멸시하였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