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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 신앙생활

성경읽기 0010 : 레위기 25장~27장

어멍 2010. 4. 18. 01:28
 

25장 23절

땅은 원래 나의 것이므로 너희는 땅을 아주 팔지는 못할 것이다. 너희는 내 땅에서 잠시 동안 사는 외국인이요, 나그네일 뿐이다.

41절

기쁨의 해가 돌아오면 그(종)를 돌려보내라. 그가 자기 자녀를 데리고, 자기 가족이 있는 조상의 땅으로 돌아가게 하여라.

 

    칠 년째 되는 해에는 땅에게도 안식을 주는 해가 되어 씨를 뿌리거나 포도원을 가꾸는 일을 하지 마라 했다. 칠년을 일곱 번 거친 사십구 년 되는 해의 다음 해인 오십 년째 되는 해는 ‘기쁨의 해’ 곧 ‘희년’으로 거룩한 해이니 모든 땅과 백성에게 자유를 선포하는 해이다. 땅은 팔고 샀더라도 원래 주인에게 돌아가며 종은 자유를 얻는다. 단, 동족인 이스라엘 종에 해당하며 다른 민족 출신 종인 경우에는 영원히 종으로 삼을 수 있다고 했다. 현대 자본주의, 노예제가 폐지된 근대 문명국가에서는 불가능한 제도이고 동족과 타 민족을 차별한 불평등한 율법이기까지 하다. 하지만 땅과 인간에 대해서 각별히 해방의 권리를 언급한 것은 의미심장하다. 그것은 땅의 공공성과 인권의 개념으로도 확장하여 이해할 만하다. 비록 그것이 너희(인간) 것이 아닌 나(하나님)의 것이라는 근거에서 말씀하신 것이라도...

    자본주의 경제의 핵심을 이루는 두 축은 부동산과 동산, 곧 땅과 금융이다. 최첨단을 달리는 미국 중심의 금융기법을 보면 나쁘게 보면 사기와 구별이 어려울 정도고 좋게 말하면 무에서 유를 창조해내는 기적에 버금간다. 땅은 어떤가. 불로소득을 대표한다. 부동산 불패로 대변되는 부동산 재벌은 가장 정통적인 부의 형태이고 마이다스의 손으로 대변되는 신출귀몰하는 금융 재벌은 가장 첨단을 달리는 부의 형태이다. 미국의 서브프라임(모기지) 사태는 이러한 땅과 금융의 결합이란 면에서 가장 파괴적이고 가장 자본주의 모순의 극적인 표출이다. 그러면 땅도 금융도 모두 공공화하여야 하나. 공산주의처럼 사유재산제도를 원천적으로 폐지해야 하나. 이상적이지도 않고 현실적으로도 불가능하다. 성경은 사유재산제도를 부정하지 않는다. 하지만 절대적, 배타적인 영원한 사유재산소유권 역시 인정하지 않는다. 여기에 힌트가 있지 않을까.


    일찍이 공산주의가 아닌 자본주의하에서 이를 극복하려는 연구와 노력들이 있어왔다. 바로 헨리 조지(Henry George)가 그의 저서 <진보와 빈곤>에서 주장했던 토지단일세 제도다. 즉 지주의 불로소득을 조세로 징수하고 그 대신 모든 세금을 폐지하는 것이다. 시장 친화적 토지공개념이라 부를 만하다. 평당 몇 천 만원 하는 명동 땅을 소유하든 몇 십 원 하는 동해안 백사장을 소유하든 자유이나 거기서 발생하는 불로소득 곧 지대에 대해서는 보유세 형식으로 완벽하게 징수하자는 거다.(위치 이외에 명동 땅과 백사장 땅의 가치의 차이를 결정짓는 것은 없다. 물리적 가치로 보자면 백사장의 모래가 더 가치 있다.) 물론 기타의 모든 세금뿐 아니라 거래세, 등록세 등도 폐지됨은 물론이다. 우파 정권이었던 노태우 정권의 토지공개념(물론 살인적인 부동산 폭등에 기인했지만)을 뛰어넘는 혁명적인 발상이나 희년에는 무조건적으로 원래 토지주인에게 땅을 돌려주라는 성경 말씀도 지금의 시각으로 보자면 혁명적이긴 마찬가지다.

    자본주의, 특히 금융이 상대적으로 덜 발달한 한국의 소위 천민자본주의의 핵심은 복부인으로 대표되는 땅, 부동산에 대한 탐욕과 집착에 있다. 박정희씨의 개발독재시대, 강남개발시대에는 고급정보에 밝은 고위관료나 경제인, 권력주의의 정치인들이 이들이었지만 지금은 웬만한 중산층은 이재에 밝지 않더라도 청약을 위해 프리미엄을 노리고 몇 날밤을 새워서라도 줄을 선다. 이렇게 더욱 깊어지고 더욱 넓어진 돈을 향한 질주의 분위기에선 선거하는 족족 대중의 욕망을 교묘히 활용하는 능력을 가진 잘 조직된 기득권이 승리할 수밖에 없다. 지난 총선에서 오세훈 서울시장과 정몽준 한나라당 의원사이에 암암리에 묵인되어 선전한 뉴타운 지정 공약이 대표적이다. 잠깐 <진보와 빈곤>을 인용해보자


부패한 민주 정부에서는 언제나 최악의 인물에게 권력이 돌아간다. (...) 악한 자가 나가면 더 악한 자가 들어선다. 국민성은 권력을 장악하는 자, 그리하여 결국 존경도 받게 되는 자의 특성을 점차 닮게 마련이어서 국민의 도덕성이 타락한다. (...) 부패를 묵인하다가 급기야 부패를 부러워하게 된다. (...) 생명은 죽고 송장만 남으며 나라는 운명이라는 이름의 삽에 의해 땅에 묻혀 사라지고 만다. - <Progress and Poverty> 531~533쪽, 번역문은 유시민의 <청춘의 독서>에서 인용



독실한 기독교 집안에서 태어난 헨리 조지(1839~1897)

“(<진보와 빈곤>) 마지막 페이지를 마쳤을 때 나는 무릎에 몸을 파묻고 어린이처럼 흐느꼈습니다.
그 안식은 주님의 손길 안에 있었습니다.”



    어쩌면 지금 한국의 상황과 이리도 유사한가! 헨리 조지는 ‘모든 지대는 도둑질이다’라고 했다. 불로소득을 누리는 대지주들은 ‘도둑질할 권리를 가진 도둑’들인가? 어제, 그제, 그끄제 도둑을 맞았다고 해서, 그것이 오늘 그리고 내일도 도둑맞아도 좋은 이유가 되는가? 헨리 조지가 주장한 토지단일세는 정말 불가능한 혁명일 뿐일까?



27장 16절

그 밭의 값은 그 밭에 얼마나 많은 씨를 뿌릴 수 있는가에 따라 정해질 것이다.

 

    역시 비슷한 얘기. 아직 토지 가치에 대한 현대자본주의적 개념은 없다.

    물론 고대사회에서 논과 밭의 가치를 결정하는 것은 소출량, 즉 토지의 면적과 비옥함이다. 하지만 그 밭이 강남 한복판에 있다면, 외진 곳에 있더라도 신도시 개발 예정지라면 얘기가 달라진다. 소출량은 농부에게 중요하지 투기꾼에겐 그리 중요하지 않다.

    분명한 것은 땅, 자연, 지구는 하나님에게서 우리 인간이 잠시 빌린 것일 뿐이라는 것. 땅에 대한 탐욕과 과도한 집착은 그 자체로 죄가 될 수도 있다는 것이다.


    레위기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