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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 신앙생활

성경읽기 0078 : 마태복음 12장~13장 (부제 : 성화, 성상에 대해서)

어멍 2011. 6. 25. 00:09
  

    성경읽기 0078 : 마태복음 12장~13장 (부제 : 성화, 성상에 대해서)



12장 1절

안식일에 예수님께서 밀밭 사이를 걸어가셨습니다. 제자들이 너무 배가 고파서 밀 이삭을 잘라 먹기 시작했습니다.

2절

바리새파 사람들이 이것을 보고 예수님께 말했습니다. “보시오! 당신의 제자들이 안식일에 금지된 일을 하고 있습니다.”

4절

다윗은 하나님의 전에 들어가 자신도 먹을 수 없고 그 부하들도 먹을 수 없으며, 오직 제사장만이 먹을 수 있는 진설병을 먹었다.

7절

‘나는 희생 제물보다 자비를 원한다.’라고 하신 말씀이 무슨 뜻인지 너희가 알았더라면, 죄 없는 사람들을 죄인으로 단정하지 않았을 것이다.

8절

인자는 안식일의 주인이다.

 

    예수님은 계속해서 세상과 부딪힌다. 그리고 그 대부분은 바리새파 율법주의자들이었다. 율법 이외에 별다른 성문법이 없었으니 율법을 장악한 바리새인들은 지금으로 치면 종교지도자들이면서도 법을 적용하고 해석하는 검사, 판사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다. 그런데 그것이 너무 틀에 박힌 듯 형식적이고 일방적이고 위선적이라는 거다. 긴 술을 늘어뜨리고 근엄한 표정으로 율법과 하나님의 뜻을 읊조리면서도 마음속은 온갖 악하고 음험한 생각으로 가득 차 있다는 거다.

    이 부딪힘과 대립은 단순히 마음에 들지 않는 수준이 아니라 서로 저주하고 증오하는 수준이다. 예수님은 독사의 자식, 회칠한 무덤이라고 그들을 꾸짖으며 저주했고, 그들 역시 예수님을 바알세불(귀신의 우두머리)이라고까지 모독했다. 그들은 절치부심 시기와 증오를 키워가며 예수님을 없애기 위해 이심전심 서로 모의하였다.


    바리새파 사람들이 이의를 제기한 이유는 남의 밀 이삭을 함부로 서리해 먹어서가 아니다. 바로 그 날이 안식일이라는 이유 때문이다. 철저히 율법주의, 형식주의 주장이다. 그들의 율법에 의하면 안식일에는 악한 일은 물론이고 일체의 일을 해서는 안 된다. 바늘 한 땀이라도 꿰어서는 안 된다. 실지로 율법을 생명같이 여긴 유대인들은 전쟁이 나도 그 날이 안식일이라면 나가 싸우지 않았다. 적들은 이것을 알고 일부러 안식일을 택해 침입해오기도 했다.

    이런 바리새인들에게 예수님은 다윗의 예를 들어 반박하신다. 그들은 안식일엔 배가 고파도 먹지 말고, 적이 쳐들어와도 나가 싸우지 말라고 말한다. 하물며 오직 제사장들만 먹을 수 있는 진설병을 성전에 들어가 먹는다는 것은 그들에겐 상상할 수도 없는 일이다.


    법이 너무 엄격하고 형식적이면 죄 없는 사람들을 죄인으로 단정지을 수도 있다. 쓸데없이 너무 세세하고 많으면 법 없이 살 수 있는 사람도 구석에 몰려 법망에 걸려들 수도 있다. 죄 없는 사람들을 죄인으로 단정하는 너희 바리새파 사람들, “너희 율법학자들에게 화가 있을 것이다. 너희는 견디기 힘든 짐을 사람들에게 지우고 있다. 그러면서 너희 자신들은 손가락 하나도 그 짐에 대려고 하지 않는다.”[누가 11:46]

    지키기 힘든 (율)법, 가혹한 (율)법은 견디기 힘든 짐, 고통스런 멍에다. 그 자체로 판관들이 쥐고 있는 채찍, 형구(刑具)다. 당시의 유대율법은 이런 성격을 다분히 내포하고 있었다. 그리고 바리새인들은 권위와 형식만 따질 뿐 스스로 이 무거운 짐을 지려고 하지 않았다. 이 짐을 자청하여 지려 한 자들은 에세네인들이었다.


    일상까지 파고드는 수천, 수만 가지 까다롭고 세세한 법규가 있을 때, 무엇을 해도 거기서 벗어날 수 없고, 어떤 행위도 그것에 위배되지 않았다고 확신할 수 없을 때, 우리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은 ‘아무 것도 안하는 일’이다. 철저히 세속을 떠나 은둔하는 것이다. 먹는 것도 최소한, 싸는 것도 최소한. 아침부터 저녁까지 오직 묵상하며 기도하는 것이다.

    ‘성스러운 자들’이란 의미의 에세네인들이 바로 그런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의도적으로 ‘삶이라는 행위’에 대해 절제하며 금욕적인 생활을 하는 은둔자들이었다. 예수님의 죽음에 있어서, 그들의 역할 역시 미미했다. 그들은 언제나 최소한의 행위를 하였고, 밖에서 보기에 그것은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처럼 보였다.


    생활인과 수도자적인 성직자의 중간 어디쯤에 있는 이런 에세네인들을 제외하곤 율법은 일반 백성들에게 ‘견디기 힘든 무거운 짐’의 성격이 다분했다. 끊임없이 종교적 죄의식을 건드리는, 사람을 얽어매는 스트레스로 다가왔다. 다윗은 (형식적인) 율법을 어기고 자신과 굶주린 군사들에게 신성한 진설병을 먹였다. 하물며 성전보다 더 큰 예수님, (율)법을 초월한 하나님의 독생자 예수님, 안식일의 주인이신 예수님에게, 지금 바리새인들은 자기들만의 잣대로 율법을 들이대려 하고 있다.

    안식일은 사람을 위해 생긴 것이지, 사람이 안식일을 위해 생긴 것이 아니다.[마가 2:27] 율법은 모든 백성들을 위해 있는 것이지, 일부 제사장들을 위해 있는 것이 아니다. 율법이 사람을 위해 있는 것이지, 사람이 율법을 위해 있는 것이 아니다. 율법은 하나님의 영광과 의로움을 드러내기 위해 있는 것이지, 율법 그 자체를 위해 있는 것이 아니다.



12장 43절

더러운 영이 어떤 사람에게서 나와 쉴 곳을 찾아 물이 없는 곳에서 헤맸으나 찾지 못하고,

44절

이렇게 말했다. ‘내가 나왔던 집으로 다시 돌아가야겠다.’ 돌아와 보니 그 집이 여전히 비어 있을 뿐만 아니라, 깨끗이 청소되고 정리되어 있는 것을 알았다.

45절

그 때, 그 더러운 영이 나가서 자기보다 훨씬 더 악한 일곱 영을 데리고 왔다. 그 영들 모두 그 사람에게 들어가 살게 되어, 그 사람의 나중 상태가 처음보다 훨씬 더 나쁘게 되었다. 이 악한 세대도 이렇게 될 것이다.

 

    더러운 영, 악한 영혼, 악령이다. 예수님은 이야기의 비유로서 점점 악으로 가득 찰 세상을 말씀하시고 있다.


    어느 국회의원이 선거법 위반으로 유죄선고가 확정적이자 의원직 박탈 전에 모양새 좋게 자진사퇴하고 자국에서 타국으로 나와 연고도, 보람도 없는 곳에서 잠시 헤매며 쉬다가 이렇게 말했다. ‘내가 나왔던 내 나라로 다시 돌아가야겠다.’ 돌아와 보니 내 나라는 여전히 관대할 뿐 아니라, 자신이 정착하는데 방해됨 없이 깨끗이 청소되고 잘 정리되어 있는 것을 알았다. 그 때, 그 못된 정치인이 나가서 자기보다 훨씬 더 못된 일곱 사람을 데리고 왔다. 그 사람들 모두 그 나라에서 내로라하는 한자리씩 차지하며 살게 되어, 그 나라는 나중 상태가 처음보다 훨씬 나쁘게 되었다. 이 악한 세대와 백성들도 이렇게 될 것이다.

    그 국회의원이 누군가? 그 정치인이 데리고 온 일곱(많은) 사람, 그를 따라 그 나라를 장악한 무리들이 누군가?... 정치, 시사에 조금만 관심 있는 사람은 어느 나라의 누구를 가리키는지, 무엇을 말하려는지 알 것이다.


    재벌로부터 뇌물 먹은 공무원이 여론에 밀려 잠시 재미없는 한직으로 물러나 쉬고 있다가 이렇게 말했다. ‘내가 물러났던 물 좋은 곳으로 다시 돌아가야겠다.’ 돌아와 보니 그 자리가 여전히 비어 있을 뿐만 아니라, 나를 기다렸다는 듯 깨끗이 청소되고 정리되어 있는 것을 알았다. 그 때, 그 부패 공무원이 나가서 자기보다 훨씬 더 부패한 일곱 명의 동료 공무원을 데리고 왔다. 그 공무원들 모두 나라의 중요 직책에 임명되어 공직사회는 나중 상태가 처음보다 훨씬 더 나쁘게 되었다. 이 악한 세대도 이렇게 될 것이다.

    그 공무원(들)이 누군가? 끼리끼리 덮어주고 끌어주는 그 무리들이 누군가?... 사회, 시사에 조금만 관심 있는 사람이라면 어느 재벌과 어느 공무원들 사이에 벌어졌던 일을 말하려는지 알 것이다.


    12장 43절부터 45절까지는 전 삼성그룹 법무팀장이었던 김용철 변호사가 폭로한 ‘삼성 이건희 일가 뇌물비리사건’에 대해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이 2008년 3월 5일 발표했던 제 5차 기자회견문의 초두에 인용됐던 성경구절이다. 당시 벌어졌던 삼성특검은 티가 날 정도로 미온적, 소극적이었고 이명박 정부는 이에 아랑곳하지 않고 삼성과 관련된 인사들을 중책에 잇따라 기용하고 있었다. 상황이 성경구절과 정확히 겹치고 있음을 사제단은 회견문에서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삼성과 심각한 유착관계에 있고, 정기적 뇌물공여대상이던 사람이 새 정부 사정의 핵심직책을 맡거나 국가정보기관의 수장이 되고, 과거 금융 비리의 책임자가 국가 금융 감독 및 법령제정의 책임을 맡는 사태가 닥쳤기 때문입니다. 삼성 비리가 채 밝혀지기도 전에 삼성 쪽 인사가 더 큰 책임을 맡게 되는 이 상황은 마치 집이 깨끗해진 것을 보고 악령이 자기보다 더 흉측한 악령 일곱을 불러 함께 자리 잡더라는 성경말씀과 똑같은 이야기입니다.”


    2011년 6월 현재 그 인물들이 여전히 그 자리에 남아 있다. 검사, 공무원들의 비리소식이 끊이지 않고, 저축은행 사건으로 원성이 높고, 예전 미국에서 인맥을 쌓으며 쉬고 돌아와 화려하게 컴백한 그 정치인의 인기는 급전직하중이다.

    하지만 이건희 회장님만큼은 건재하시다. 얼마 전엔 삼성의 깨끗한(?) 조직문화가 무너졌다며 조직 내 부정부패 일소를 주장하셨다고 하던데...... 크윽.크윽.크윽.(이건 웃는 것도 아니고 우는 것도 아니다.) 과연 킹왕짱이다.


    악은 악을 초대하고, 선은 선을 초대한다. 나쁜 나무는 나쁜 열매를 맺고, 좋은 나무는 좋은 열매를 맺는다. 악을 초대하는 악을 내쫓고, 나쁜 열매를 맺는 나쁜 나무를 베어버려야 한다. 근원적인 악, 나쁜 열매를 맺히게 하는 뿌리를 냅두고 창궐하는 악, 나쁜 열매만 탓해서는 안 된다.

    악한 령을 내쫓는 것만으론 49% 부족하다. 많이 부족하다. 집을 비워두지 말고 선한 령을 들여놓아 악한 령이 다시는 발을 들여놓지 못하게 해야 한다. 악한 령들은 본질에서는 같지만 겉모습은 각기 다 다르다. 똑같은 얼굴로 두 번 오지 않는다. 나쁜 뿌리에서 나는 열매는 해마다 조금씩 다른듯 하지만 나쁜 열매인 것은 한가지다.

    무엇이 뿌리이고 무엇이 열매인가? 분별하여 뿌리를 뽑아버려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나쁜 열매, 악한 령이 하나가 일곱을 초대하고, 그 일곱이 다시 일곱을 초대하여 종국에는 우리 세대도 이렇게 악으로 가득 차게 될 것이다.



13장 10절

제자들이 예수님께 와서 물었습니다. “왜 사람들에게 비유로 가르치십니까?”

13절

내가 비유로 사람들에게 말한다. 그들은 보아도 보지 못하고, 들어도 듣지 못하고, 이해하지도 못한다.

14절

따라서 이사야의 예언이 이 사람들에게 이루어지는 것이다. ‘너희는 들어도 깨닫지 못할 것이고, 보아도 알아보지 못할 것이다.

15절

이 백성들의 마음이 둔해졌고, 귀는 듣지 못하고, 눈은 감겨 있다. 그들이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닫고 돌아와, 내가 그들을 고치는 일이 없게 하려 함이다.’

 

    예수님이 ‘농부가 뿌린 씨’의 비유를 말씀하시자. 제자들이 묻는다. “왜 예수님은 (항상) 비유로서 말씀하십니까?”

    첫째, 그것이 깨달음에 이르는 효과적인 방법이기 때문이다. 밖에서 억지로 넣어주는 것이 아니라 강한 암시를 통해 스스로 ‘아~하’ 무릎은 치며 발견하고 ‘으~음’ 눈을 감고 음미하며 깨닫게 된다.

    둘째, 비유가 아니라 알아듣기 쉽게 직접적으로 말하더라도 마음이 둔하고 완악한 자는 어차피 알아듣지 못하는 것은 매한가지라는 거다. 굳이 직접화법을 쓸 이유가 없다. 숟가락으로 떠먹여줘도 입을 벌리지 않고, 스피커를 귀청에다 대고 정답을 말해줘도 알아듣지 못하면, 속에서 열불만 난다.

    셋째, 하늘나라의 비밀은 그 자체로 거룩하고 귀한 것이다. 아무나 주기엔 아까운 것이다. 때론 위험할 수도 있다. 거룩한 것을 개에게 주지 마라. 진주를 돼지 앞에 던지지 마라. 개나 돼지는 그것을 짓밟고, 뒤돌아서서 너희를 물어 버릴 것이다.[마태 7:6]

    14,15절 말씀은 이사야 6장 9,10절 말씀이다. 밖에서 넣어주는 것은 한계가 있다. 남이 고쳐주는 것은 오래가지 못한다. ‘내가 비유로서 말하는 것은 스스로 깨닫게 하여 내가 그들을 고치는 일이 없게 하려 함이다.’ 간절함에 구함이 있고, 스스로 얻는 것에 권능이 있다.


    직접적으로 말해도 알아듣지 못하는 사람이 있고, 넌지시 비유로 말해도 재깍 알아듣는 사람이 있다. 열을 가르쳐주면 하나만 아는 사람이 있고, 하나만 가르쳐주어도 미루어 열을 아는 사람이 있다. 비유로서 자기 얘기를 하는데도 덩달아 흥분하며 욕하는 아둔한 사람이 있는 반면에 그 얘기를 듣고 타산지석으로 삼아 스스로 배우고 조심하는 지혜로운 사람도 있다. 단순한 눈치, 잔머리, 지능을 얘기하는 것이 아니다. 밝은 눈, 열린 귀, 온유하고 겸손한 마음을 말함이다.

    예언자 나단은 부하를 죽게 하고 그 아내를 빼앗은 다윗 왕에게 가난한 자의 양을 빼앗은 욕심 많은 부자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현명하고 신실한 다윗마저 처음엔 깨닫지 못하고 덩달아 흥분하며 그 부자를 욕한다. 하지만 그는 곧 그 의미를 깨닫고 자신의 죄를 뉘우치며 고백한다.[사무엘하 12:1~13]

    지혜로운 사람은 비유로서 말한다. 지혜롭고 겸손한 사람은 비유로서 듣고 깨닫는다.



13장 31절

하늘나라는 마치 겨자씨와 같다. 어떤 사람이 겨자씨를 가져다가 자기 밭에 심었다.

32절

이 씨는 다른 어떤 씨보다도 작다. 그런데 이것이 완전히 자라면, 다른 어떤 풀보다도 더 큰 식물이 된다. 그러면 하늘의 새들이 와서, 그 가지에 둥지를 틀 수 있게 된다.

 

    겨자씨의 비유다. 예수님은 항상 비유로 말씀하시고 비유가 아니면 아무것도 말씀하지 않으셨다. 그리고 그 비유는 대개 농사, 씨앗, 누룩, 물고기, 소금, 불, 물, 나무, 열매, 동물 등 쉽고 친근한 것이었다.



13장 55절

“이 사람은 목수의 아들이 아니냐? 그의 어머니는 마리아이고, 동생들은 야고보, 요셉, 시몬 그리고 유다가 아니냐?

56절

그리고 그의 누이들도 우리와 함께 있지 않은가? 그런데 이 사람이 이런 모든 것들을 어디서 터득했을까?”

57절

그들은 예수님을 믿으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예언자는 자기 고향이나 자기 집에서는 존경을 받지 못하나, 거기 외에는 어디서나 존경을 받는다.”

58절

사람들이 믿지 않았기 때문에, 예수님께서는 그 곳에서 기적을 많이 베풀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고향 나사렛에 가셔서 유대인의 회당에서 사람들을 가르칠 때 사람들-일찍이 예수님과 예수님의 가족들을 알고 지내던 이웃사람들이 예수님에 대해 하는 말이다.

    믿지 않는다. 믿기 힘들다. 왜? 너무 잘 알기 때문이다. 목수인 아버지 요셉을 따라 내 집에 와서 식탁을 손보는 것을 돕던 소년, 혹은 냇가에서 빨개 벗고 뛰놀던 꼬맹이가 기적을 일으켰단다. 회당에서 지혜를 가르친단다. 인간 예수의 모습만 알고 있고, 아직도 그의 형제, 누이들과 함께 생활하는 이웃 사람들이 보기에 도저히 납득이 안 간다. 이 사람이 이런 모든 것들을 어디서 터득했을까? 사실이라면 분명 운 좋게 주웠거나 어쩌면 훔친 것일 것이다. 그가 본래 하나님의 유일한 아들이신 메시아라고???...... 어이구! 그러셔요!


    예수님께서는 굳이 그들을 설득하려고 안 하신다. 기적을 보여 증명하려고 안 하신다. 왜? 보여 봤자 납득시키기 힘들기 때문이다. 납득해 봤자 한순간, 그때뿐이기 때문이다. 현재 예수님의 기적은 잠시지만 예전의 나사렛 예수에 대한 기억은 머릿속 깊이 오랫동안 각인돼 있다. 어릴 적 키를 쓰고 소금을 받으러 오던 오줌싸개가 출세하여 고을원님으로 오면 인정하기가 쉽지 않다. 하물며 모든 백성을 구원하실 그리스도 메시아라니...

    처음엔 웃고 무시하겠지만 계속 메시아임을 주장한다면 화가 나고 오기가 발동해선 예수님을 윽박지르고 패대기칠 것이다. 예수님을 십자가가 못박은 것이 그것이다. 적들은 예수가 보통 인간임을 자인하고 십자가를 내려놓고 집에 돌아가 따뜻한 물에 발 닦고 달콤한 숙면을 취하기를 바랬다.


    그래서 예언자, 큰 인물들은 밖에서는 존경을 받아도 고향에서는 존경을 받지 못한다. 남에게는 인정을 받아도 친지, 가족, 이웃들에게는 인정을 받지 못한다. 도리어 잘난 체 한다고 시기하고 미워한다. 남한테만 잘해주고 자기 가족은 푸대접하며 생고생만 시킨다고 원망한다. 예수와 마찬가지로, 짱구였던 공자(孔子) 구(丘, 언덕 구, 짱구라는 의미가 있다.) 역시 자기 나라에서 인정받지 못하고 여러 나라를 떠돌아 다녔다.

    그들은 (나사렛) 예수를 너무 잘 안다. (짱구였던) 공자를 너무 많이 봐왔다. 하지만 그것이 곧 예수(님)를 정확히 아는 것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오히려 너무도 왜곡되고 편벽되게 알고 있는 것이다. 예수님을 만난 사람보다 만나지 않은 사람이 예수님을 더 잘 알 수도 있다. 예수님을 보지 않은 사람이 본 사람보다 예수님의 가르침에 더 충실할 수도 있다.


    서울의 일부만 가보고 큰소리치는 사람보다 아예 가보지 않고 방안에서 공부한 사람이 서울에 대해 더 잘 알 수도 있다. 사람의 감각, 인식, 경험이 불완전하고 한계가 있기 때문이다. 길고 짧은 것, 굽은 것과 곧은 것... 보이는 모든 것, 들리는 모든 것은 정확하지도, 절대적이지도 않다. 가까이서 너무 자세히 보려하면 미로에 빠지거나 착시현상이 나타나기도 한다. 때로는 보이고, 들리는 모든 것을 무시하고 눈을 감고, 귀를 닫고 자신의 마음속 내면만을 응시하고 거기에 귀 기울이는 것이 정확할 때도 있다.

   내가 가까이서 봤단 말이여! 내가 직접 겪어봤단 말이여! - 인식의 함정, 경험의 함정이다. 같은 사건을 목격하고도 서로 진술을 달리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다룬 구로사와 아키라 감독의 <라쇼몽(羅生門)>같이 똑같은 장소에서 똑같은 것을 보고도 다르게 받아들이는 것이 사람의 감각과 인식이다.

    (갑자기 이 대통령의 ‘나도 한때는...’ 시리즈가 생각나네. ‘이명박은 안 해본 게 없고, 박근혜는 해본 게 없고, 북한은 못하는 게 없고, 언론은 알려주는 게 없고, 국민은 모르는 게 없다.’는 우스갯소리! ^.^)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기 전에는 / 그는 다만 /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 그는 나에게로 와서 / 꽃이 되었다.

     김춘수의 시 <꽃>의 일부다. 시인에겐 ‘하나의 몸짓’은 모호하고 의미 없는 것이다. '꽃'은 구체적이고 소중한 것이다. 하지만 때로는 이름 이전의 ‘하나의 몸짓’이 더 많은 것을 내포할 수가 있다. 이름으로 내게 온 것은 왜소하고 불완전한 ‘꽃’에 지나지 않게 될 때도 있다.     

    사랑이란 말은 너무 너무 흔해, 너에게만은 쓰고 싶지 않지만은,

    달리 말을 찾으려 해도 마땅한 말이 없어, 쓰고 싶지 않지만은 어쩔 수가 없어.

     임병수의 노래 <사랑이란 말은 너무너무 흔해> 가사 중 일부다. 자신의 감정을 ‘사랑’ 그 이상의 말로 표현하고 싶은데 마땅한 말이 떠오르지 않는, 사랑에 푹 빠진 연인의 들뜬 감정, 하지만 답답한 감정을 노래하고 있다.

    무언가를 이름붙이는 순간 그것은 규정되는 동시에 외연이 차단되며 의미가 축소된다. 사랑은 ‘사랑’이란 속삭임 속에 있는 것이 아니라 머릿결과 어깨위로 쏟아지는 따스한 봄볕 속에 있다. ‘바르르 떠는 손이 놓여진 팔의 설레임’ 속에 있고 ‘둘이서 넘기는, 그러나 읽지는 않는 책 페이지의 갈피’ 속에 있다.(작은 따옴표 부분은 쉴리 프뤼돔의 시 <사랑의 가장 좋은 순간>에서 인용) 터질듯 말듯한 입술, 고동치는 심장, 주고받는 시선 속에 있다.

    사랑은 수줍은 듯 봉긋이 솟은 꽃봉오리처럼 따스함으로 부풀어 오르는 설레이는 가슴 속에 있고, 일순간 앞 다투어 터지는 백만 송이 들꽃처럼 마음이 오고가는 순간의 환희 속에 있다. 그 교감의 순간, 귓가에 울리는 천 마리 벌떼의 웅웅거림 속에 있고, 5월의 훈풍을 안고 천길 절벽에서 떨어져 내리는 아득함 속에 있다. - ‘성경읽기’ 포스팅이 갑자기 삼천포로 빠져 로맨틱 연애편지 풍으로! ^.^

    굳이 현미경을 들이대어 리얼한 모습을 살필 필요는 없다. 굳이 이름붙여 설명할 필요는 없다. 때로는 멀찍히 떨어져 마음으로 바라볼 때 전체적인 진상이 드러나기도 한다. 가까이 잡아당겨 '꽃'이라고 부르며 취하기보다 멀리 두고 '하나의 몸짓' 그대로 놔두는 것이 좋을 때가 있다. ‘꽃’보다 ‘하나의 몸짓’이 더 많은 것을 설명할 수도 있고, 때로는 ‘하나의 몸짓’보다 ‘.’이 본질에 가까울 수도 있다. 일체의 표현, 어떠한 말도 필요 없을 때가 있다. 침묵이 이 모든 것을 합친 것보다 많은 것을 말할 때가 있다.


    노자 도덕경은 ‘도가도 비상도, 명가명 비상명(道可道 非常道, 名可名 非常名)’이란 유명한 말로 시작하고 있다. 나름 번역하자면 ‘도라고 하는 도는 진정 도가 아니고, 이름이라 하는 이름은 진정 이름이 아니다’ 정도 될 것이다. 관념, 인식을 탈피하여 단지 문자, 그림을 해석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으로 보고 느끼는 것의 중요함을 말하는 것이리라.

    내가 너무 멀리 온 것일까? 쓸데없이 너무 많이 나간 것일까?... 여기엔 이유가 있다. 그들이 예수님을 믿지 않은 것, 믿을 수 없었던 것은 예수님을 ‘목수의 아들 예수’, ‘요셉과 마리아의 아들 예수’, ‘야고보의 형 예수’로 규정하고 보았기 때문이다. 그들이 익히 보아왔던 예수, 알고있던 예수의 모습과 그들이 생각하고 그려왔던 메시아, 그리스도의 모습과는 너무 동떨어진 것이었다. 이것은 내가 성화, 성상을 보면서 오랫동안 줄곧 고민해왔던 문제이기도 하다.

    예수님은 과연 저런 모습이셨을까? 저 키에, 저 머리에, 저 얼굴을 하고 계셨을까?? 예수님을 형상화하여 그린다는 것이 과연 정확하고 올바른 것일까? 실지로 교회가 로마제국에서 공인되고 유럽을 중심으로 퍼져나간 탓에 예수님의 모습은 유대인이라기보다는 로마인, 이탈리아인, 유럽인의 모습에 더 가깝다.




이탈리아인이든 유럽인이든 예수님은 언제나 멋지고 매력적인 미남형이다.



    로마제국을 거쳐 중세, 근대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화가에 의해 그려진 숱한 성화에서 나타나는 예수님의 모습은 제각기 조금씩 달라도 이 같은 공통점이 있다. 예수님은 160도 아니고 짱구도, 주걱턱도 아니다. 단추 구멍 두 눈에 들창코 추남이 아니다. 언제나 기품이 있고 단정하며, 온화하면서도 빛나는 서글서글한 눈매를 하고 있다. 이런 예수님을 아무리 채찍에 맞고 창에 찔리고 피를 흘렸더라도 리얼리티를 살리자고 만신창이로 그릴 수는 없는 노릇이다. 인간에겐 감각과 인식체계, 종교적 감수성이 있기 때문이다.




너무 깨끗한 혹은 처참한 예수님.
카라바조 <보라. 이 사람이로다.>중에서, 영화 <패션 오브 크라이스트>중에서



    깨끗한 것은 거룩한 것이다. 더러운 것은 비천한 것이다. 이것이 예수님의 전율이 이는 상처에서 우리가 1차적으로 받는 무의식적 인상이다. 더럽고 비천한 것을 떠나 똑바로 올라다보기가 괴롭다. 영광, 축복, 은총, 거룩... 좋은 것들은 끼어들 겨를이 없다. 그것을 극복하자고 말하려는 것이 아니다. 리얼리티의 극한을 추구하자는 것이 아니다. 대체 도(道)가 무엇이고, 명(名)이 무엇이며, 리얼이 무엇인가! 모든 이름, 모든 형상, 모든 이미지들이 갖고 있는 근원적인 한계를 말하려 함이다.

    이것은 고전적인 성화만의 문제가 아니다. 기독교가 팔레스타인을 거쳐 로마, 유럽, 그리고 세계에 퍼지면서 보편화되는 과정은 현지화되며 분화되는 과정이기도 했다. 바로 갓 쓴 동양인 예수님, 레게머리를 한 흑인 예수님이다. 황인종은 황인 예수님을 갖고, 흑인종은 흑인 예수님을 갖는 것이 옳은 것일까? 아니면 백인종만이 아름답고 희고 선한 미남형 백인 예수님을 독점하는 것이 옳은 것인가?




백인 예수님 & 흑인 예수님
표정과 분위기는 비슷해도 우리의 마음은 하나로 받아들이기 쉽지 않다.
왼쪽은 수르바란(Zurbaran)의 <구세주의 축복>중에서



그리고 갓 쓴 황인 예수님



운보 김기창의 시리즈 작품 《예수의 일생》중 <최후의 만찬>



    운보는 《예수의 일생》에서 마귀를 도깨비로 그리고 있다. 마귀는 악하고 간교하기만 하지만 도깨비는 귀엽고 재밌고 모자란 구석도 있다. 도깨비 입장에선 억울한 일이다. <최후의 만찬>에 모인 예수님과 제자들은 모두 도포에 갓을 쓰고 있다. 하지만 당시 유대사회가 조선의 양반제 사회는 아니었다. 예수님을 비롯한 열두 제자가 모두 뼈대 있는 가문의 도령, 지체 높은 양반님네 자제들은 아니었다. 운보는 일가를 이룬 화가이기는 했지만 예수님의 본 모습, 예수님이 하신 말씀의 본질을 흐리고 있다. 자칫 기독교를 귀족종교로 오해받게 할 소지가 있다. 예수님을 양반들만의 메시아로 묶어놓을 소지가 있다.

    예수님은 계급을 초월해 있다. 이웃, 친지는 물론 형제자매와 부모까지 초월해 있다. 예수님이 대중에게 말씀하고 계실 때 누군가 예수님의 어머니와 형제들이 밖에서 기다리고 있다고 전해준다. 그러자 예수님이 제자들을 가리키면서 말씀하신다. “누가 나의 어머니이고, 누가 나의 형제들이냐? 보아라! 내 어머니와 내 형제들이다. 누구든지 하늘에 계신 나의 아버지의 뜻을 행하는 사람이 내 형제요, 자매요, 어머니이다.”[마태 12:48~50]

    보통의 가정에서도 자녀가 장성하면 어엿한 성인으로 대접해주어야 한다. 언제까지고 품안에 품고 쓰다듬을 수는 없다. 성경에는 예수님이 마리아를 ‘어머니’(Mother)라고 부르는 곳이 없는 것으로 알고 있다.(정확하지는 않다. 아직까지는 없다.) 오히려 ‘여자(여)’(Woman)라고 부른 곳은 있는 것으로 안다. 마리아 역시 예수님을 자기 아들이라고 막 부르지 않는다. 예수님은 이미 장성했을뿐더러 하나님의 유일한 아들이신 메시아시기 때문이다. 마마보이 예수는 상상할 수 없다.

    어머니마저 젖을 빨던 자식의 표정, 오줌싸개 아들의 모습을 극복해야 할 때가 있다. 인식은 경험과 기억의 축적이고 그 기억은 주로 형상과 이미지들로 구성되어 있다.


    인간의 인식체계는 믿을 수 없다. 눈, 코, 입, 귀, 인간의 감각기관은 더 믿을 수 없다. 형상은 실재가 아님을 알면서도 부지불식간에 우리의 마음에 이미지로 각인된다. 그 각인이 깊고 반복적일수록 형상은 어느새 실재, 혹은 실재 그 이상으로 여겨지기도 한다.

    뽀로로는 안경에 모자를 써야 뽀로로다. 슈퍼맨은 바지위에 팬티를 입어야 폼이 난다. 하지만 안경과 모자가 뽀로로 자체는 아니고, 팬티와 망토가 슈퍼맨 자체는 아니다. 성화, 성상을 봄에 있어서도 유념하고 조심해야 할 점이다. <수태고지>에 등장하는 천사의 손에 백합이 들려있지 않다고 성모의 순결성, 처녀성이 부정되는 것은 아니다.




안경 하나 벗었을 뿐인데... 같지만 다른 뽀로로



    천주교의 십자가에 못박힌 예수님의 형상을 보노라면 속에서 울컥하니 감정이 복받치며 눈시울이 뜨거워진다. 반면 개신교의 십자가에는 예수님이 없다. 옳고 그름, 맞고 틀림을 굳이 가를 필요야 없겠지만, 그래도 개신교의 십자가가 더 적합하지 않을까 싶다. 감동도 덜하고 구체적이지 않고 밋밋하지만 더 보편적이고 많은 것을 담을 수 있지 않을까!

    반면 개신교의 (한분뿐이어서) '하나님'보다는 천주교의 (하늘에 계셔서) '하느님'이 더 맞지 않을까 싶다. 하나에 님을 붙인다면 둘에도, 셋에도 붙일 수 있기 때문이고 이는 왠지 어색하다.(둘님, 셋님...) 이름이 하나님의 본성을 가릴 수야 없지만 천주교와 개신교가 같은 하느님을 달리 부른다는 것은 어쩌면 인간의 어리석은 고집이 부른 비극이자 희극이다. - 개인적으로 개신교도이며 익숙하기도 하여 앞으로도 ‘하나님’으로 부르기로 한다.


    이 예수가 맞다, 저 예수가 맞다하며 티격태격 싸울 일이 아니다. 내 예수만 진짜 예수라며 고집할 것이 아니다. 유대의 예수교로부터 시작하여 로마의 가톨릭, 그리스 정교, 유럽과 신대륙의 개신교, 제 3세계의 해방신학까지... 예수님은 인간에 의해 때에 따라 다른 모습, 곳에 따라 다른 말씀을 강조하시는 예수님이다. 하지만 그 본질인 사랑의 가르침을 잊어서는 안 된다.

    나사렛의 진지하지만 쾌활했던 소년 예수, 겟세마네에서 슬픈 고뇌에 괴로워하던 예수님, 골고다에서 스스로 피 흘리는 희생양이 되셨던 예수님은 결국 모두 같은 예수님이다. 사랑을 말씀하시고 실천하셨던 예수님이다.

    백인, 황인, 흑인... 인종마다 각기 다른 예수님을 갖고 있다. 100명이면 각자 그린 자신만의 100명의 예수님을 갖고 있다. 성부, 성자, 성령은 그림 속에 있지 않다. 자신만의 예수님을 지우고 참 예수님, 오직 유일하시고 영원하신 하나님의 본 모습에 다가가야 한다.


 


나무 십자가



    저 십자가는 예수님이 달린 십자가이기도 했지만 우리가 졌어야 할 십자가이기도 했다. 이제 바로 내가 짊어질 십자가이기도 하다.

    믿음은 형상에 있지 않다. 십자가는 마음속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