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읽기 0080 : 마태복음 20장~21장
20장 12절
‘저 사람들은 겨우 한 시간밖에 일하지 않았는데, 하루 종일 뙤약볕 아래서 수고한 우리들과 똑같이 취급하는군요.’
13절
그러자 포도밭 주인이 말했다. ‘친구여, 나는 당신에게 잘못한 것이 없소. 당신들은 한 데나리온을 받기로 나와 약속하지 않았소?
14절
당신 것이나 가지고 돌아가시오. 나는 나중 사람에게도 당신과 똑같이 주고 싶소.
15절
내 것을 가지고 내 뜻대로 하는 것이 무슨 잘못이오? 내가 자비로운 사람이라서 당신의 눈에 거슬리오?’
16절
그러므로 꼴찌가 첫째가 되고, 첫째가 꼴찌가 될 것이다.
오전 9시부터 일한 일꾼이 오후 3시, 5시에 고용된 일꾼과 같은 품삯을 받게 되자, 불평하는 일꾼과 포도밭 주인과의 사이에서 주고받는 대화다. 예수님께선 이야기를 통한 비유로서 하늘나라의 이치에 대해 말씀하신다. 그 이치는 언뜻 합리적으로 보이는 땅의 이치가 아니다.
시급이 있고, 일당이 있고, 월급이 있고, 연봉이 있다. 일한 만큼 받는 것이 당연한 듯하다. 하지만 하늘은 단순히 양만 헤아리지 않는다. 땅은 행위를 보지만 하늘은 마음을 본다. 땅은 과거를 보지만 하늘은 현재와 미래를 본다. 땅은 이전 것에 얽매이지만 하늘은 시간에 얽매이지 않는다.
성경은 예수님의 말씀을 포함해 계약관계, 고용관계, 채권채무관계를 예로 들어 많이 비유하고 있다. 포도밭 주인은 약속(계약)을 어기지 않았다. 딱히 책잡을 수 없다. 계약한대로 주었고 그렇다고 인색하게 적게 일했다고 적게 주지도 않았다. 다만 하루 종일 일한 자들이 상대적으로 불만인 것이다.
누구든지 기대이하면 불만이고 이의를 제기하지만 기대이상이면 꿀 먹은 벙어리다. 감사인사라도 하면 다행이다. 거스름돈이 모자라면 꼭 챙기지만, 남는다면 호주머니에 넣고 잽싸게 자리를 벗어난다. 계약을 지켜라. 어긴다면, 계약한 것 이상이어야 한다.
게으르고 악한 일꾼이라면 주인이 불만이다. 주는 만큼 일하지 못한다고 여긴다. 인색하고 난폭한 주인이라면 일꾼이 불만이다. 일하는 만큼 대우받지 못한다고 여긴다. 조만간 그 계약은 깨질 수밖에 없다. 하지만 그 전이라면 일한 것보다 더 주고, 받은 것보다 더 일하려고 노력하라. 그리하면 일터가 즐거워진다. 포도밭의 열매가 풍성해지고 상점의 매상이 올라간다. 하지만...
이 구절은 계약의 신성함, 주인의 정당함을 말하려는 게 아니다. 그렇다고 한 시간 일한 일꾼과 하루 종일 일한 일꾼이 동등하다고 말하려는 것도 아니다. 물론 한 시간 일한 일꾼이 열배로 열심히 일하여 하루 종일 일한 일꾼과 같은 품삯을 받은 것도 아니다. 그들은 그저 할 일 없는 실업자로 시장에서 빈둥거리며 서 있다가 주인에 의해 오후 3시, 5시에 불려왔을 뿐이다.
예수님 말씀의 핵심은 15절, 16절에 있다.
심순애씨는 딸아들을 둔 평범한 40대 아줌마다. 그녀는 얼마 전 재혼한 옆집 아저씨가 보기만 해도 얄밉다. 10여년 옆집에 살면서 못 입고, 못 먹고 고생하며 살림을 일군 옆집 부인이 이제 어느 정도 가세가 피자 갑자기 병으로 죽은 것이다. 사별한 남편은 몇 년 후 재혼하고, 지금은 예전엔 들리지 않던 웃음소리도 담장너머 들려오는 것이, 부부가 알콩달콩 행복하다. 깨가 쏟아진다. 전 부인이 낳은 자녀도 지극정성 키우고, 여자는 참하니 착한 것 같기는 하다. 하지만 왠지 얄밉다. 왠지 억울하다. 심아주머니는 행복한 그들의 모습이 눈에 거슬린다.
요나는 하나님의 명을 받고 니느웨 성을 하루 종일 걸어 다니면서 “사십 일이 지나면, 니느웨는 멸망한다!”라고 백성들에게 외친다.[요나 3:4] 니느웨는 죄를 돌이켜 회개하고, 하나님은 마음을 바꾸셔서 그들에게 내리기로 작정하셨던 재앙을 내리지 않으신다. 뻘쭘해진 요나는 단단히 삐진다. 해피엔딩인데도 자꾸만 화가 나고 왠지 억울하다. 요나는 회개하고 용서받은 니느웨의 모습이 눈에 거슬린다.
각기 다르지만 결국은 모두 같은 얘기다. 내가 고생했다고 남도 고생할 이유는 없다. 내가 맞았다고 남도 맞아야 된다고 말할 수 없다. 전 부인이 불행했다고 새 부인이 불행할 이유는 없다.
많이 일한 내가 1데나리온 받았다고, 적게 일한 남이 그보다 적게 받기를 바랄 수는 없다. 내 예언 이루자고, 니느웨의 멸망을 바랄 수는 없다. 내 욕심 채우자고, 남 못되는 꼴 보고 싶어 해서는 안 된다.
하나님의 자비로우심은 언뜻 우리가 보기에 불평등하다. 불합리하다. 하지만 부당하지는 않으시다. 그것은 모자란 자비가 아니라 넘치는 자비다. 계약이라면 악의적인 계약위반이 아니라 선의의 계약위반이다. 약속하신 것보다 더 주시면 더 주시지 빼앗지는 않으신다.
물론 한 시간 일하면 1데나리온, 반나절 일하면 2데나리온, 하루 종일 일하면 4데나리온을 얹어 주시면야 좋다. 하지만 그렇지 않다고 원망하고 불평할 수는 없다. 그런 마음으로 자비를 바랄 수는 없다.
친구여... 내가 자비로운 사람이라서 당신의 눈에 거슬리오?
네가 그렇게 화를 내는 것이 과연 옳으냐?[요나 4:4]
포도밭 주인이 불평하는 일꾼에게 하는 말은 사납지 않다. 되물으면서 이해를 구한다고도 볼 수 있다. 하나님이 삐친 요나에게 하시는 말씀은 무섭지 않다. 되물으면서 위로를 건넨다고도 볼 수 있다. 동의하진 않지만 괘씸할 정도는 아니라는 거다. 나름대로 그럴만한 이유가 있다고 여겨지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것은 지상에 있는 인간들의 이유다. 하늘에 계신 하나님의 이유가 될 수 없다.
내가 괴로우니 너도 괴로워야 한다는 억하심정, 저주의 고약한 경우도 있지만 소외감, 상실감, 억울함으로 인해 감정이 상하고 토라지는 경우도 있다. 요나의 불평, 온종일 일한 일꾼의 불평, 심순애 아줌마의 미움에는 나름대로 납득할 만한 이유가 있다. 하지만 거기까지다. 니느웨가 회개치 않고 멸망하기를 바랄 순 없다. 적게 일한 이에게는 적게 주라고 요구할 순 없다. 재혼한 가정이 불행하기를 빌 순 없다. 계속 삐진 채 꽁하니 몽니만 부릴 순 없다. 그 때는 하나님이 화내신다.
각자에겐 각자 짊어져야할 자기만의 십자가가 있다. 각자 받아야 할 하나님의 축복이 있다. 내 십자가가 무거운 것과 같이 남의 십자가가 무겁기를 바랄 순 없다. 남의 축복보다 내 축복이 적다고 불평할 순 없다. 때로는 나보다 못 된 것처럼 보이는 이의 십자가가 더 가벼울 수 있다. 나보다 못난 것처럼 보이는 이의 축복이 더 클 수가 있다.
납득할 수 없을지라도 꼴찌가 첫째가 되고, 첫째가 꼴찌가 되는[마태 20:16] 경우가 있을 수 있다. 건축자가 버린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다. 이것은 주님께서 하신 일이니 우리 눈에 놀라운 일이다.[마태 21:42]
지금 첫째라고 영원히 첫째는 아니다. 첫째라고 교만치 말라. 셋째라고 둘째를 시기치 말며, 넷째를 무시하지 마라. 지금은 그렇게 하자. 우리가 이와 같이 하여 모든 의를 이루는 것이 옳다.[마태 3:15] 지금은 이렇게 하자. 우리가 이와 같이 하여 사랑과 축복을 베푸는 것이 옳다.
하나님의 눈은 인간의 눈과 틀리시다. 하나님은 형식을 보시지 않고 내용을 보신다. 겉을 보시지 않고 속을 보신다. 우리를 감찰하시며 우리의 중심을 살피신다. 모두가 하나님의 뜻이요, 섭리다.
21장 2절
너희는 맞은편 마을로 들어가거라. 그러면 당나귀 한 마리가 새끼와 함께 묶여 있는 것을 발견할 것이다. 그 당나귀를 풀어서 나에게 가져오너라.
4절
이것은 예언자가 말한 것을 이루려고 하는 것이었습니다.
5절
“시온의 딸에게 말하여라. ‘보아라. 네 왕이 네게로 오신다. 그는 겸손하여 당나귀를 탔는데, 어린 당나귀, 곧 나귀 새끼를 타고 오신다.’”
9절
예수님의 앞뒤에서 따라가던 사람들이 소리쳤습니다. “다윗의 아들에게 호산나! 주님의 이름으로 오시는 분이 복되도다! 높은 곳에서 호산나!”
10절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으로 들어가셨을 때, 온 도시는 흥분으로 가득 찼습니다.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이다. 5절의 예언자가 말한 구절은 [스가랴 9:9]다.
풍문으로만 듣던 예언자, 기적을 행한다는 놀라운 자가 이제 막 유대의 중심지이자 성전이 있는 성지에 들어서려 하고 있다.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의 앞뒤로 따라가며 환호하고 축복한다. 온 도시가 흥분과 기쁨으로 가득 찬다.
하지만 인심이란 얼마나 가벼운 것인가! 환영이 저주로 바뀌는 데는 많은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예수님 앞에는 가장 극적이고 치열했던 마지막 일주일의 고통과 비탄의 시간이 기다리고 있다. 예수님은 그곳에서 비웃음, 채찍질을 당하고 십자가에 매달려 죽음을 당하신다.
하지만 그것은 아버지 하나님의 뜻이기도 했다. 성스러운 여정, 숭고한 십자가의 도(道)이기도 했다. 부활, 완전함에 이르기 위한 고난의 길이었다. 결국 예수님은 예루살렘에서 이루고자 했던 모든 것을 다 이루신다.
왕으로 예루살렘에 들어가신 예수님은, 희생양으로 고난을 받지만, 결국 왕으로 하늘나라로 승천하신다.
말이 아닌 당나귀, 힘과 권위가 아닌 온유와 겸손
21장 12절
예수님께서 성전에 들어가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성전에서 사고파는 사람들을 모두 내쫓으시며, 돈 바꾸어주는 사람들의 책상과 비둘기 파는 사람들의 의자를 둘러엎으셨습니다.
13절
그리고 사람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내 집은 기도하는 집이라 불릴 것이다’라고 성경에 기록되어 있는데, 너희는 오히려 ‘강도들의 소굴’로 바꾸어 버렸다.”
예수님은 예루살렘에 들어 가시자마자 성전에 들려 성전을 깨끗이 하신다. 비슷한 대목이 [마가 11:15], [누가 19:45], [요한 2:13] 이하에 적혀있다. 마태, 마가, 누가는 거의 똑같지만 요한은 약간 다르다. 시점은 예수님께서 정식으로 예루살렘에 입성하기 이전, 어느 유월절에 있었던 일로 보이고 묘사는 마태, 마가, 누가 세 공관복음서보다 좀 더 자세하다.
예수님께서는 끈으로 채찍을 만들어 양과 소를 비롯하여 모든 짐승을 성전 뜰에서 쫓아 내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돈 바꾸는 사람들의 상을 뒤엎으시고, 그 사람들의 돈을 흩트리셨습니다. / 그리고 비둘기를 파는 사람들에게 명령하셨습니다. “이것들을 여기서 치워라! 내 아버지의 집을 시장터로 만들지 마라!”[요한 2:15/16]
엘 그레코, <성전정화>
유월절은 유대의 명절로 대부분의 유대인들이 성전이 있는 예루살렘에 들러 희생재물을 바쳤다. 가까이는 예수의 고향 갈릴리 나사렛에서 살고 있던 유대인부터, 멀리로는 옛 바빌로니아와 페르시아 땅에 흩어져 있던 유대민족까지, 모든 유대민족의 종교적 성지였다. 하지만 종교적 관광지기도 했다.
분명 여관, 음식점, 환전상 등 성전을 배경으로 생계를 이어가는 상인, 서비스업, 자영업자들이 주변에 많았으리라. 소와 양과 비둘기를 파는 상인 역시 마찬가지다. 그들로부터 성전세를 받는 성직자, 제사장, 율법학자들 역시 거기에 이해관계가 걸려있음은 마찬가지다.
음메에에, 구구구구... 신실한 예수님에겐 외양간, 시장터, 강도들의 소굴로 보였겠지만 그들에겐 성전인 동시에 업소, 직장이었다. 하나님을 모신 곳인 동시에 세금을 걷고, 재판을 하고, 회의를 하며 자신의 지위와 권력을 창출하고 지켜주는 관할구역이었다.(속된 말로 나와바리)
어느 날 갑자기 촌구석 출신 한 사내가 나타나 난동을 피운다. "나사렛에서 뭐 좋은 것이 나올 수 있겠는가?"[요한 1:46] 할 정도로 예루살렘 사람들이 보기에 벽촌이었다. 다윗의 자손이라지만 목수를 아버지로 둔 지방 출신 예수는 제도권에 있는 엘리트 제사장, 율법학자들이 보기에 어디서 난데 없이 굴러들어온 돌이었다. 철저한 아웃사이더였다.
내 상품(소, 양, 비둘기)한테 채찍을 휘두르고 내 좌판을 엎어버린다. 내 밥줄을 자르려 한다. 게다가 자신이 예언자, 그리스도라고 한다. 기적을 행한다고 하고 허락도 받지 않고 성전에 들어와 가르친다. 내 권력을 빼앗으려 한다. 당연히 화가 난다. 어제 마중 나가 종려나무를 흔들며 ‘호산나, 호산나’ 환영, 환호했는데 오늘은 부득부득 이가 갈린다. 속으로 기회만 노리며 죽일 궁리를 하게 된다.
성전정화에서 나타나는 예수님의 모습은 낯설다. 온화하고 자비로운 모습이 아니다. 분노다. 그것도 과격한 분노! 말보다 행동이 앞서는 열정적인 젊은 사나이다. 예수님은 신성모독에 관해서만큼은 과하리만치 분노하신다. 이 같은 격렬한 부딪힘은 공동의 평화, 기존의 질서를 깨뜨리는 일에 굉장히 민감했던 왕과 귀족, 그리고 제사장과 율법학자들과의 극한 대립을 예고한 것이기도 했다.
예수님은 온유와 겸손을 갖고 계시지만 열정과 분노도 갖고 계셨다. 결코 타협하지 않는 강직함과 순수함. 그것이 독생자로서 하나님에 대한 절대적 믿음과 더불어, 예수님이 기꺼이 십자가를 짊어지실 수 있었던 또 다른 힘의 근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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