먹는 것에 대하여 - [요리, 먹거리] 카테고리를 추가하며
거창한 것이든 사소한 것이든 세상 모든 것에 대하여 각자 철학들이 있다. 철학까지는 아니더라도 나름대로의 생각들이 있다. 요리, 먹거리를 포함한 입에 들어가는 모든 것에 관하여도 마찬가지! 하다못해 ‘나는 요리는 잼병이고 하기 싫지만 먹는 것만큼은 무엇이든 가리지 않고 게걸스레 맛있게 먹어줄 수 있지’ 혹은 ‘나는 야채보다 고기가 좋아’ 혹은 ‘나는 이상하게 생강은 도저히 못 먹겠는데 마늘은 잘 먹어(아무리생강캐도난마늘 ^.^)’ 하는 거.
그래서 요리, 먹거리 카테고리를 개설하고 글을 올리기 전에 총론식으로 이 주제에 대하여 기존에 내가 갖고 있던 생각들 – 구체적인 요리, 먹거리보다는 먹는 것, 먹는 행위에 관한 기본적인 나의 자세, 생각들을 몇 가지 소주제로 나눠 간단히 짚고 넘어가고자 한다.
◈
1. 먹는 것은 비루한 것이면서도 숭고한 것이다.
밥! 밥은 숭고하면서도 비루하다. 배부른 자가 더 많이, 더 맛있고 귀한 것을 탐할 때의 밥은 죄악의 씨앗이기도 하지만 배 곪는 아이의 주린 배를 채우는 밥, 곰팡이 핀 피부에 뼈만 앙상히 남은 아사직전의 생명을 구하는 밥, 모두가 함께 골고루 행복하게 나누어 먹는 밥은 사랑이다.
생존을 위한 밥, 생명을 잇는 밥이 첫째요 그 다음이 사랑과 행복과 감동이 있는 밥이 둘째다. 그 이외의 밥은 엄밀히 얘기해서 밥이 아니다. 탐욕과 욕망을 위한 밥, 고상한 미각만을 위한 밥, 심지어 과시를 위한 밥은 잉여다. (들어는 봤나? 난 먹어도 봤다!) 없어도 사는 데 지장이 없다. 없어도 그리 불행하지 않다.
그래서 종교적으로도 먹는 것은 성물이고 먹는 것을 나누는 행위는 성스런 의식이다. 유대교, 이슬람교, 힌두교 등 많은 종교에서 먹을 수 있는 것과 먹어선 안 되는 것을 율법에 규정하고 있고 예수님은 자신의 몸과 피를 빵과 포도주에 비유하시기도 했다. 빵은 같은 빵이로되 주기도문에서의 “일용할 양식(daily bread)”은 숭고한 빵이고 “사람이 빵으로만 살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다.”[마태 4:4]에서의 빵은 비루한 빵이다.
사람이 (육의) 빵으로만 살 수 없는 것은 맞다. 하지만 (육의) 빵이 없으면 살 수 없는 것 역시 맞다. 생명을 지탱할 수 없다. (육의) 빵은 하나님이 주시는 (령의) 빵 못지않게 중요하고 신성한 것이다. 입을 것이 없다고, 살 집이 없다고 죽진 않는다. 하지만 사람이 먹지 못하면... 죽는다.
“굶으면 죽는 것은 학~실하다.”
2003년 노무현 대통령 측근비리 특검 쟁취를 위해 단식농성중인 최병렬 한나라당 대표를
친히 왕림하시어 전해주신 김영삼 전 대통령의 진리의 말씀
신은 인간을 포함한 모든 생명을 먹지 않으면 생존할 수 없도록 창조했다. 신은 맛으로 유혹하고 식욕으로 먹도록 인도한 후 쾌락으로서 보상한다. 생존을 위해선 맛, 허기짐(식욕), 쾌락 등은 부차적인 것, 하나의 유인책에 불과할 뿐이다.
그것은 장구한 시간동안 진화된 우리의 유전자 안에 각인되어 있다. 인간이 탄수화물을 단맛으로, 단백질을 감칠맛으로, 지방을 구수한 맛으로, 독을 쓴맛으로 감각하는 것은 그것이 생존에 유리하기 때문이다.
같은 밥이라도 기아를 벗어나 생존을 위한 밥(식량), 건강한 몸을 지키고 유지하기 위한 밥(건강식), 여가와 잉여 속에서 추구하는 미각의 쾌락을 추구하는 밥(산해진미, 별미)이 다 다르다. 미식은 쾌락과 행복을 위한 것이지 건강을 위한 것이 아니고 오히려 너무 탐닉하면 건강을 해칠 확률이 높다. 건강을 위해선 맛도 양도 절제의 미덕을 발휘할 필요가 있다.
먹는 것은 인생에서 큰 즐거움이고 생의 큰 에너지로 작용하기도 하지만 너무 집착하면 안 된다. 감사히 즐기되 비루하게 탐하지 않는 자세가 필요하다.
먹을 것, 입을 것, 자질구레한 것에 초조하게 연연하는 것은 비루한 것이고 큰 부, 권력, 명예를 악착같이 차지하려 하는 것은 악한 것이다. 천리길을 마다않고 달려가 몇 시간을 기다려 먹는 식도락도 나름대로 인생의 행복이고 재미지만 원하는 것을 먹기 위해 안달복달하고 혹 못 먹으면 욕구불만으로 불행하다면 사람이 구차해진다. 먹을 것도, 우리의 입맛도 있다가도 없고 없다가도 있는 것이다.
의식주(衣食住)는 중요한 순으로 말하면 식주의(食住衣)로 고쳐 부르는 게 맞다. 먹을 게 첫째고, 비바람을 피하고 잠을 청할 거처가 둘째고, 몸을 가릴 의복이 셋째다. 하지만 과시를 위해선 의주식(衣住食), 그 순서가 거꾸로 된다. 먹는 것보다 사는 것으로 뻐기기가 쉽고, 사는 것보다 입은 것으로 티내기가 손쉽다.
차가 끼어든다면 의차주식(衣車住食)이 된다. 옷차림, 패션 잡화로 기선을 제압한 후 고급 외제차에 태워서 70평대 아파트로 초대한다. 꽃등심, 케비어는 기본이요 최고급 포도주에 듣보귀(듣도 보도 못한 귀한) 푸아그라까지 온갖 산해진미를 내놓으면 퍼펙트! 자랑질 풀코스 완성이다.
이렇게 먹는 것으로 자랑질하기가 손쉽지 않은 점, 그 자랑질이 왠지 부자연스럽고 거북하게 느껴지는 것은 먹는 것이 갖고 있는 이러한 본질, 즉 생명과 직결된 성스런 속성 때문이다.
무릇 모든 먹는 것은 성스런 것이다.
하지만 사람들은 정도의 차이만 있을 뿐 모두가 맛, 즉 먹는 재미와 행복을 추구한다. 식욕이야말로 인간의 가장 원초적 본능, 최후의 본능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다른 보람이 사라졌을 때 먹는 보람에 집착하고 나이 들어 다른 미련들은 버린대도 먹는 미련만은 버리지 못한다. 하긴 이런 오감이 주는 소소한 행복들이 인생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행복이기는 하다. 공중파와 인터넷에 범람하는 수많은 관련 콘텐츠, 먹방들이 존재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그래서 먹는 것은 비루하기도 하고 숭고하기도 하고, 형이하학적이고도 하고 상학적이기도 하고, 물질적이기도 하고 정신적이기도 하고.... 아무튼 우리 인생에서 여러모로 엄청 중요한 거라서 글도 계속 길어지고 있다는 거다.
2. 금강산도 식후경. 세상만사 식후경.
같은 맥락에서 먹는 것이 그만큼 가장 중요하다는 거다. 애어른 할 것 없이 배가 고프면 모두 기분 나쁘고 한심스러워지는 게 인간이다. 움직이기도 싫고 생각하기도 싫고 짜증만 난다. ‘사흘만 굶으면 남의 집 담을 넘게 된다’는 말도 있고 ‘먹고 죽은 귀신은 때깔도 곱다’라는 말도 있다.
금강산도 식후경(食後景), 호랑이한테 물려가도 식후경 식후사(食後死)다.
죽을 때 죽더라도 먹을 건 먹어야 (고병규 원작)
3. 맛은 객관적이면서도 주관적이다.
쓴맛은 쓴맛이고 단맛은 단맛이다. 하지만 누구는 더 쓰고 더 달게 느끼기도 하고 아예 쓴맛을 더 선호하는 사람도 있다. 맛은 객관적, 물리적이어서 쉽고 납득가능하기도 하지만 주관적, 심미적이기도 해서 어렵고 더욱 더 매력이 있다.
같은 사람이더라도 상황에 따라서, 몸 상태에 따라 같은 맛도 달리 느껴지기도 한다. ‘시장이 반찬’이라고 배고픔이 극심할 때면 이것저것 가리지 않고 닥치는 대로 맛있는 법이다. 갈증이 극심할 때는 맹물도 달게 느껴지고 단백질이 고갈됐다면은 쥐고기라도 맛나게 먹을 수 있다.
똥구멍이 찢어지게 가난하던 시절 동네 친구인 갑과 을은 사시사철, 삼시세끼 보리개떡만 먹었다. 갑은 이후에도 사정이 별반 나아지지 않아 지금도 라면으로 식사를 때우기 일쑤다. 반면 을은 얼마 안 있어 큰 성공을 거둬 스테이크가 주식이요 냉장고엔 산해진미가 썩어나기 일쑤다. 갑은 개떡만 보면 구역질이 나고 을은 지금은 구하기도 힘든 개떡을 일부러 만들어 먹으며 옛 맛을 되새긴다. 똑같은 개떡을 먹어도 누구는 신물이 나오고 누구는 향수에 젖는다. 누구에겐 별미요, 누구에겐 쓰레기다.
밥에도 역시 인간의 주관적인 가치관, 각각의 취향과 개인적인 경험이 작용한다. 하나의 음식에도 서로 다른 사연과 스토리가 얽혀 있는 것이다.
밥풀데기는 이렇게 먹어야 제맛! (고병규 원작)
삼시세끼 갈비를 뜯게 된 흥부도 그 때 그 맛은 잊을 수 없다는.
4. 맛은 1차적으로 혀가 느끼지만 최종적으로 뇌가 인식하는 것이다.
맛이란 1차적으로 혀가 느끼는 미각(味覺)이지만 2차적으로는 이(씹는 질감), 목(목넘김), 코(냄새, 풍미), 귀(소리), 눈(시각적 이미지), 배(포만감, 안온감) 등 감각기관, 감각수용체들이 느끼는 공감각(共感覺)이며 3차적으로는 취향, 가치관, 편견, 추억, 분위기, 현재의 육체적 심리적 컨디션 등이 영향을 미치는 초감각(超感覺)이며 이 모든 것은 최종적으로 뇌가 종합하여 호불호를 인식하고 판단한다.
보기 좋은 떡이 더 맛있는 것, 같은 맛이라도 질기고 딱딱한 것보다 부드럽고 촉촉한 것이 더 맛있는 것, 간절할 때 맛있는 것(여기있던 고기 어디갔냐?), 행복할 때 더 맛있는 것, 처음 보는 음식은 먹기가 꺼려지고 징그럽다는 등의 이유로 미리 혐오의 감정을 갖게 된 음식은 더 좋은 맛이라도 역겨운 맛으로 느껴지는 것 등이 다 이런 이유 때문이다.
비슷한 맥락으로 3번의 주제와 함께 종합해 말하자면 ‘맛이란 객관적, 주관적으로 혀의 말초로부터 뇌의 중추까지 우리 몸 전체가 종합적으로 판단하고 받아들이는 감각’이다. 그러므로 맛에는 무난하고 모범적인 표준 답안은 있지만 모두에게 항상 적용되는 절대적 진리로서의 정답은 없다. 왜냐하면 우리 몸은 각자 다른 ‘자기 몸’이며 이마저도 시시각각 상황에 따라 변하기 때문이다.
5. (현재) 가장 먹고 싶은 것, 가장 맛있는 것이 가장 몸에 좋은 것이다.
임신을 하면 평소 좋아하지 않던 신 것이 땡기기도 하고 보지도 먹지도 못하던 순대나 생간을 먹고 싶기도 하다. 그리고 실지로 먹으면 맛있다. 몸이 필요로 하고 원하기 때문이다. 지금 그것이 산모와 태아에게 가장 필요한 상황인 것이다.
3번 - 상황에 따라 맛도 가변적이란 것, 4번 - 맛은 우리 몸 전체가 느끼고 판단한다는 것을 종합해 볼 때 만약 내가 지금 어떤 맛, 어떤 음식을 가장 먹고 싶고 먹어보니 맛있다면 그 음식이 현재 내 몸과 건강에 가장 필요한 좋은 음식이란 결론에 이르게 된다. 마치 목이 마르면 갈증이 나고 물을 먹으면 갈증이 해소되는 것과 같은 이치다.
단, 이것은 우리 몸이 정상인 상황에서의 생리적 현상에 국한된다. 트라우마(정신적 외상)에 버금갈 정도의 특정 음식에 대한 강한 편견과 혐오, 중독에 버금갈 정도의 고착화되어버린 식습관 등은 예외다. 마약이 땡기고 맛있다고 몸에 좋은 건 아니니까!
6. 재료는 신선할수록, 요리는 방금 한 것일수록 맛있다.
당연한 말이지만 숙성, 발효를 제외한 먹거리는 신선할수록, 방금 요리한 것일수록 맛있고 건강에도 좋다. 시간이 지날수록 원재료가 가진 풍미가 날아가고 식거나 미지근해지거나, 딱딱하게 굳거나 흐물흐물 풀어지거나 하며 변형, 변색, 변질된다. 그러므로 가장 이상적인 식사형태는 과식, 폭식만 하지 않는다면 코스요리처럼 나오는 족족 그 자리에서 먹어치우는 형태다.
가급적 냉동, 냉장하여 오래 보관하지 않도록 하고 1차 가공, 포장되어 나오는 간편식도 되도록 줄이는 것이 좋다. 렌지나 냄비에 데우거나 끓여 곧바로 간편하게 먹을 수 있어 편리하고 표준화된 레시피라서 딱히 흠잡을 맛은 아니지만 간편식에는 분명 뭔가 아쉬운 맛이 있다. 깊고 풍성한 맛이 없어 100% 만족할 수 없다. 이는 이익극대화를 위한 식품회사들의 전략에서 기인하기도 하지만(원재료가 최상품일 수는 없다.) 이미 1차 가공, 조리되어 풍미가 사라진 지 오래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간편식이라도 렌지보다 냄비가 낫고, 간편식보단 배달음식이 낫고, 배달음식보단 식당에 가서 먹는 것이 낫고(배달하는 동안 풍미가 날아가며 변질되므로), 식당밥보단 (여유와 흥미와 실력이 있다면) 직접 해먹는 집밥이 가장 낫다.
이것은 짜장면인가? 짜장떡인가?
7. 다른 것은 남겨도 먹는 것은 남기지 마라. & 다른 것은 간직해도 먹는 것은 간직하지 마라.
먹는 것이 신성하고 중요한 만큼 가급적이면 남기지 말고 알뜰히 먹으란 얘기. & 건강에 관련된 만큼 욕심내어 미련하게 과식하거나 아깝다고 상한 것을 간직하거나 먹지 말란 얘기.
예부터도 일미칠근(一米七斤), 쌀 한 톨에는 농부의 땀 일곱 근(4.2kg)이 들어있다고도 하고 비슷한 맥락으로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맨 밥도 천천히 음미하며 백번을 씹으면 백가지의 맛이 있다고 했다.
사찰에서 스님들이 식사를 할 때(발우공양)나 어르신들이(가끔 젊은 사람 중에서도) 밥을 다 드시고 난 후에 밥그릇에 물을 부어 밑바닥에 붙어있는 밥풀까지 씻어 드시는 것은(이미 설거지의 절반은 끝나 있다) 먹는 것이 생명과 직결된 성스러운 것, 입안에 들어오기까지 숱한 노력이 깃든 소중한 것임을 알기 때문이다. 럭셔리한 레스토랑에 가서도 샐러드에 소스까지 싹싹 비워 먹고 깨끗이 내어주는 것이 좋다. 그것은 없어 보이는 것이 아니라 삶에 충실하고 생에 겸손한 것이다.
배곯던 옛 세대들은 확실히 먹는 것 귀한 줄 알지만 먹는 것이 지천으로 남아도는 신세대들은 상대적으로 먹는 것 귀한 줄 모르는 이가 많다. 그렇다고 미련하게 배부른데도 남은 음식 억지로 다 먹을 필요는 없다. 먹는 것이 고역일 필요도 없고 건강을 해칠 필요는 더더욱 없다.
건강을 위해선 배불리 가득 먹는 것보다는 좀 모자란 듯, 아쉬운 듯 먹는 것이 좋다. 따라서 6번과 같은 맥락에서 좀 번거롭더라도 매 끼 먹을 만큼만 조리하여 그때그때 깨끗이 먹어치우는 것이 좋다. 그것이 맛도 좋고 건강에도 좋고 환경에도 좋고 설거지하기에도 좋다.
8. 물이 100도 되는 순간 끓듯이 포만감은 마지막 한 숟가락으로 찾아온다.
요리를 하던 식당에서 주문을 하던 배가 아주 고프면 이것저것 3인분이고 4인분이고 먹고 싶고 먹을 것 같지만 막상 먹기 시작하면 어느 순간 생각보다 일찍 갑자기 포만감이 찾아올 때가 있다. 장만한 음식, 주문한 음식을 남기기 일쑤다. 이것은 밥통이 99% 찰 때까지 뇌의 시상하부에 있는 식욕중추가 포만감을 느끼지 못하다가 100% 채워지는 순간 느끼기 시작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7번과 같은 맥락으로 아무리 배고프더라도 너무 욕심을 내지 않는 것이 좋다. 좀 부족한 듯 먹는다는 마음으로 시작해서 중간에 여전히 양이 차지 않더라도 이후 먹을 양을 가늠하면서 천천히 주문하고 기다리면서 여유를 갖고 먹는 것이 좋다. 허겁지겁 급하게 먹지 말 것이다.
9. 맛은 궁합이고 균형이고 조화다.
치맥(치킨+맥주), 삼합(홍어 삼합은 삭힌 홍어+돼지고기+묵은 김치, 키조개삼합은 키조개+한우+표고버섯), 돼지수육에 새우젓, 와인에 치즈 등등 한 묶음으로 같이 먹는 음식들이 있다. 서로 궁합이 맞아 맛이 균형과 조화를 이룬다는 거다. 한 가지 요리 안에서 뿐만이 아니라 밥과 반찬, 술과 안주, 음료와 주전부리 사이에도 균형과 조화가 있어야 한다.
콜라라면 코카콜라가 달고 진하고 기름진 음식들과 어울리는 탄산이 강한 맑은 맛이고, 펩시는 덜 달고 덜 기름진 맑은 음식들과 어울리는 탄산이 약한 달고 진한 맛이다. 그래서 눈을 감고 오직 혀끝 감각에만 집중하여(향과 목넘김에 대한 집중도는 감소하거나 배제된다.) 콜라 하나만을 시음하는 블라인드 테스트를 한다면 코카콜라보다 더 달고 진한 펩시가 더 맛있다고 선택받을 확률이 높다.
그러므로 최고의 맛, 최고의 음식은? 없다! 오직 여러 개성 있는 음식, 맛들의 황금비, 적절한 균형과 조화만이 있을 뿐이다. 그것은 하나의 음식 안에서, 여러 음식들 사이에서, 식탁에서 차례대로 맛보는 여러 맛을 지닌 여러 음식들의 잘 짜여진 수순의 콤비네이션에서 찾아질 수 있다.
이렇게 잘 짜여진 밥상 위에 취향에 따른 좋아하는 요소가 강조된다면 금상첨화!, 최고의 맛에 가장 근접하게 된다.
10. 맛은 관계다.
3번 맛은 객관적이면서도 주관적이다. 4번 맛은 (공)감각이면서도 초감각이다. 9번 맛은 궁합이고 균형이고 조화다. - 이상과 같은 맥락에서 맛은 개별 음식이나 맛 자체로 존재하지 않고 다른 조건들과의 관계에서 존재하고 기능한다.
맛은 도구와의 관계에서 존재한다. 망치로 부숴 먹고, 칼로 베어 먹고, 포크로 찍어 먹고, 수저로 떠 먹고, 젓가락으로 집어 먹는다. 정밀하고 강력한 도구가 없으면 깊고 은밀한 곳의 숨은 맛을 끄집어 맛볼 수 없거나 맛보는 것 이상의 비용을 지불해야 하므로 소용이 없다. 따라서 도구가 발달할수록 당연히 식문화도 발달하고 풍성해진다.
맛은 우리 몸과의 관계에서 존재한다. 치아가 부실하면 아무리 맛난 고기라도 먹는 것 자체가 고통이다. 콧수염, 턱수염이 많다면(인도나 중동 지방) 아무리 시원하고 맛있는 탕이나 국요리도 먹기가 불편하다.
맛은 기후, 날씨, 환경과의 관계에서 존재한다. 더운 날엔 시원한 것, 추운 날엔 따끈한 것이 땡긴다. 고온다습하고 물이 탁한 사천성 음식은 맵고 강한 향신료를 특징으로 한다.
11. 가장 중요한 맛은 짠맛이고 가장 중독성 있는 맛은 단맛이다.
맛있다, 맛없다를 결정짓는 가장 핵심적 요소는 짠맛이다. 그러므로 세상에서 가장 맛있는 것은 소금이다. 어느 음식이든 간을 맞추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반면 가장 매력적인 맛, 중독성 있는 것은 설탕이다. 단맛은 우선 입에 달다. 몸과 정신을 안온하고 편안하게 이완시킨다. 한 번에 너무 많이, 너무 자주 먹으면 느끼해지고 물리기도 하지만 가장 중독성 있는 맛이라 할 수 있다. 맛있기로 소문나 장사가 잘 되는 맛집들을 찾아가보면 대개가 좀 짜고 단 편이다.
이것은 각자 주관적인 입맛이 다르기에 일반화할 수 없는 내 개인적인 생각이다.
12. 맛은 추억이고 추억은 맛이다.
대부분의 아름다운 기억, 행복한 추억은 먹는 것과 연관되어 있다.
어릴 적 늦은 밤 졸린 눈을 비비며 제사가 끝나기를 기다려 간신히 얻어먹던 달디단 무지개사탕(옥춘당(玉春糖) 혹은 옥춘이라고 한다) 하나, 대보름이면 한 상에 둘러앉아 큰 쟁반에 원 없이 담아 먹던 고소한 김과 오곡밥, 모락모락 김이 나는 백반 한 수저에 얹어 먹던 콩알 만한 짭조롬한 간고등어 한 점, 처음 맛봤던 짜장면의 황홀한 맛, MT 가서 익기도 전에 모두가 달려들어 코펠 뚜껑에 건져 먹던 라면의 맛, 저녁 바람이 시원한 해변가 언덕 위에서 낙조를 바라보며 어둠 속 불판을 더듬어 집어먹던 삼겹살 한 점...... 모두가 기분이 좋아지며 입맛이 다셔진다.
그래서 먹을 때는 되도록 마음이 편안하고 행복해야 한다. 굳이 너무 짜네, 맵네 투정부릴 필요가 없다. 정 못 먹겠으면 집밥이든 식당밥이든 조용히 일어나면 된다. 먹을 땐 개도 안 건드린다고 되도록 시비걸지 말고 편안하게 해주어야 한다. 심각한 얘기, 부정적 얘기는 피하고 밝고 가볍고 즐거운 얘기만 하는 것이 좋다.
맛은 감각 이상의 것!
2015/07/26 제주도 해변에서 흑돼지 삼겹살을 구워먹으며 바라보았던 낙조
◈
이상으로 총론을 마친다. 이젠 구체적인 각론, 실기다.
라면, 후라이, 밥(짓기)...... 벌써부터 흥미진진하면서도 너무 많고 방대하여 엄두가 안 난다. ^.^
※ 이하는 20211206 추가함.
13. 맛은 기본 보수적이지만 진보를 지향한다.
이것은 먹는 것을 포함한 인간의 모든 활동에서 보여지는 일반적인 행동양식이기도 하다. 다만 내 몸과 관련되어 건강, 생존이 걸린 문제기에 좀 더 극(단)적인 모습으로 나타나는 것이 다를 뿐이다.
익숙한 옛것이 좋다. 안전하다. 새로운 것은 리스크가 있다. 무엇보다 변화가 동반되므로 에너지, 비용이 더 든다. 그렇다고 마냥 옛것, 먹던 것만 먹을 수는 없다. 편식은 건강에도 좋지 않을뿐더러 사정이 마냥 허락지 않는다.
평소에는 상관없지만 먹지 않았던 것, 먹지 못하던 것을 먹어야만 할 때가 있다. 때론 위험을 무릅쓰고 먹지 않을 수 없을 때도 있다. 극단적 경우지만 생존을 위해선 구정물이나 정체불명의 것을 먹어야만 할 때가 있는 것이다.
배가 너무 고픈데 먹을 것이 없다. 어디서 듣도 보도 못한 것이 뚝 떨어졌다. 먹어도 되나, 먹어선 안 되나, 먹을 수 있는 것인가, 없는 것인가? 도무지 알 수 없다. 모두들 냄새만 킁킁 맡을 뿐 먹기를 주저한다. 먹지 않는다. 하지만 뱃가죽이 등가죽에 붙어서 아사직전까지 가면 누군가는 혀로 핥고 입에 넣는다. 너나없이 달려들어 게걸스레 먹어 치운다.
이런 극단적인 상황이 아니더라도 우리는 일상에서 전혀 새로운 재료로 만든 새로운 음식, 새로운 맛을 심심찮게 접하곤 한다. 이미 존재하지만 먹어본 적도 없고 알지도 못하는 식재료나 외국요리, 이제 막 새롭게 선보이는 퓨전요리들도 있다. 이런 생소한 것을 맛볼 때 우리의 반응은 긍정적이기 보다 부정적일 확률이 더 크다. 우리의 유전자가 생존을 위해 새로운 것에는 우선 방어적, 보수적이기 때문이다. 그러면 우리는 항상 안전을 위해, 생존을 위해 먹던 것만 먹어야만 하는가.
생존을 위해 구두를 삶아먹는 모험을 즐겁게 감행하는
진보주의 식도락가 찰리 채플린
먹던 것만 먹는 보수적 식생활이 당장 안전할 수 있고 연명할 수는 있지만 길게 보면 영양, 건강 면에서 우리 몸에 결코 좋지 않다. 흰쌀밥만으로 탄수화물을 채우고 케이크만으로 지방을 채우고 닭가슴살로만 단백질을 채울 순 있어도 우리 몸은 3대 영양소 말고도 아직까지 밝혀지지 않은 많은 미세 물질들을 필요로 한다.
그러므로 우리의 유전자에는 먹는 것에 있어서 보수적 성향과 진보적 성향이 동시에 존재한다고 보아야 한다. 이것은 인간이 생존하고 생활하기 위해 식생활을 비롯한 모든 활동 영역에서 당연히 도달할 수밖에 없는 결론이다. 보수는 당장 생존에 유리하지만 뭐든 극단으로 치달으면 불리해진다. 먹던 것만 먹는 것에서 더 보수로 가면 아무 것도 먹지 않는 것이다. 움직이고 변화하는 것에서 더 더 보수로 가면 아예 죽어 움직이지 않는 것이 최고의 보수다.
삭힌 홍어회
재료, 형태, 맛이 무척 다양하여 못 먹는 것이 없다시피 하고
쓴맛에다 고약한 맛도 많은 한식은 상대적으로 진보다.
하지만 식생활에는 이런 논리적, 과학적 요인 말고도 고려해야할 몇 가지 중요요인이 있다. 바로 맛으로 대표되는 기호, 취향, 욕망, 감성, 문화적 측면이다. 먹는 행위는 허기를 채우기 위해, 생명유지를 위해 단순히 영양물질이 들어오는 과정이 아니다.
인간에게 색욕이 종족번식만을 위한 것이 아닌 것처럼 식욕에는 생존, 안전, 건강, 영양을 떠나 맛을 포함한 먹는 재미 곧 식도락이라는 것이 있다. 크게 보면 무엇이든 새로운 것에는 일단 끌리는 심리, 호기심이란 것도 있다. 안 먹은 것은 모조리 먹어보겠다는 기세로 새로운 맛을 찾아 맛집을 탐방하는 것도 쏠쏠한 재미가 있다.
욕망에는 양면성이 있다. 삶의 에너지가 되기도 하고 생존을 위한 길라잡이로서의 역할도 있다. 색욕(을 통한 오르가즘)이 사랑과 종족번식으로 인도하고 식욕(을 통한 먹는 기쁨)이 건강과 생존으로 우리를 인도하는 것이다. 이것은 유전자가 우리 모르게 우리 몸 안에 설치해 놓은 전략이랄 수 있다. 그런 면에서 색욕도 식욕도 과하면 쾌락, 탐욕이 될 수도 있지만 적당하기만 하다면 삶을 풍성하게 하고 건강에도 유익한 면이 있다.
먹는 것을 포함해 무엇이건 과한 것, 극단으로 치닫는 것은 좋지 않다. 누구든지 다소간에 기호, 나름의 철학이란 게 있겠지만 극단적 편식은 건강에도 좋지 않고 삶도 메마르게 한다. 다른 한편 무엇이든 가리지 않고 닥치는 대로 먹어치울 기세의 가공할 걸신, 10인분이든 20인분이든 끝없이 먹어없애는 마술적 먹방은 메마른 삶과 정신의 또다른 단서다.
양과 종류를 뛰어넘는 극단적 폭식과 마찬가지로 특정 음식을 안 먹거나 못 먹는 것, 비건(채식주의)을 포함한 특정 음식만 먹는 것은 모두 기본에서 건강한 식생활이 아니다. 알러지가 있거나 죽어도 먹기 싫다면 어쩔 수 없지만 (대부분의 편식은 심리에 기인한다) 먹거리에 대해선 열린 자세로 골고루 섭취하고 먹어보는 것이 이상적인 식생활이다.
사정에 맞게 주어진 음식을 과하지 않게 골고루 감사히 먹고 새로운 음식에 대해선 호기심을 갖고 적극적으로 기회를 살려 먹기를 도전하는 자세가 가장 좋다.
'요리, 먹거리' 카테고리의 다른 글
계란 & 계란요리 종류 - 계란요리 시리즈를 시작하며 (0) | 2019.10.20 |
---|---|
Level 2 - 라면 맛있게 끓이는 법 ★★★★★ (0) | 2019.10.09 |
Level 1 - 밥(백미) 짓기 ★★★★★ (0) | 2019.09.21 |
[요리, 먹거리] 카테고리 운영원칙 및 일러두기 (0) | 2019.09.11 |
우리집 식사예절 (0) | 2019.09.0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