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읽기 0072 : 말라기 1장~4장
저자 : 말라기(Malachi)
주요 인물 : 말라기, 종교 지도자들
핵심어 : 십일조, 준비
주요 내용 : 이혼, 잡혼의 금지. 십일조를 잘 지키며 올바른 예배를 할 것. 예수 그리스도와 세례 요한의 도래에 대해 준비, 예비할 것을 이야기하고 있다.
1장 8절
너희는 눈먼 짐승을 제물로 바쳤다. 그것이 잘못된 것이 아니냐? 또 너희는 다리를 절거나 병든 짐승을 제물로 바치기도 했다. 그것이 잘못된 것이 아니냐? 그런 것을 너희 총독에게 바쳐 보아라. 그가 너희를 반갑게 맞이하겠느냐? 너희를 좋아하겠느냐?
2장 8절
너희 제사장들은 바른 길에서 벗어났다. 너희는 그릇되게 가르쳐 많은 사람들이 죄를 짓게 만들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 제사장들, 불경건하고 굽은 제사장들을 꾸짖고 있다.
말라기는 학개, 스가랴, 에스라, 느헤미야와 동시대라는 설도 있고 그 후 100년 정도 지난 시대라는 설도 있어 분명치는 않다. 분명한 것은 이스라엘 민족이 오랜 포로, 유민생활을 마치고 돌아온 후에도 재건된 성전의 제사장들, 예루살렘 백성들은 여전히 불성실하고 안이하였다는 점이다.
말라기는 이런 점을 특유의 논쟁형식의 대화체로 풀어내고 있다. 이러한 질문과 대답을 통한 문답법은 유대인 랍비들의 전통적인 교육방법을 그대로 도입한 것으로 한 문장 한 문장에 힘과 활기가 넘친다.
3장 8절
어찌 사람이 하나님의 것을 훔치겠느냐? 그러나 너희는 나의 것을 훔쳤다. 그러고도 너희는 ‘우리가 언제 주 하나님의 것을 훔쳤습니까?’라고 하였다. 너희가 내게서 훔친 것은 십일조와 예물이다.
10절
너희는 창고에 너희가 거둔 것의 십일조를 가져와 나의 집에 먹을 것이 있게 하여라. 그것으로 나를 시험하여라. 내가 하늘 문을 열고 너희가 쌓을 공간이 넘치도록 너희에게 복을 붓지 않나 보아라.
십일조를 온전히 지킬 것을 강조하는 구절이다.
말라기서는 구약성경 마지막 책으로 말라기 선지자가 십일조를 강조한 책으로만 알고 있다. 많은 사람들이 말라기 인용을 하면서 ‘하나님의 것을 도적질 하는 사람(3:8)’으로 표현하며 십일조를 바칠 것을 독려하는 데 국한하고 있다. 말라기 선지자 선포의 핵심은 십일조가 아니다.
말라기 선지자 시대는 주전 450년경에 활동한 선지자로 유다가 멸망한지 140년여 년 정도 지난 상황으로 강대국 페르시아가 유다를 통치하고 있었다. 유다가 멸망된 후 바벨론 포로시기(주전 587~539년)에는 많은 유다사람들이 정치적 공동체 회복에 대한 간절한 희망을 가졌지만 패망 이후 100년이 흘러 정치적 공동체 회복이 요원하게 보이자 그들의 정체성마저 흔들릴 위협에 처하게 되었다.
이 시대에 기록한 성경인 역대기 상. 하, 에스라, 느헤미야 등이 기록된 당시 지도자들이 불가능해 보이는 정치공동체의 희망을 과감히 버리고 여호와 하나님의 백성임을 강조하고 부여하는 신앙공동체로 유지하려 하였다. 그 이유는 신앙공동체의 존속만이 강대국의 속박 아래서 살아남을 수 있는 유일한 대안이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말라기 선지자가 바라본 유다 공동체는 제사장에서 일반 백성에 이르기까지 신앙공동체 유지와 상관없는 종교적으로 타락한 모습을 보여줬다. 국가라는 울타리가 없는 상황에서 하나님의 백성인 유다공동체마저 무너진다면 이전 앗시리아의 민족 혼합정책으로 인해 역사의 뒤편으로 사라진 북쪽 이스라엘의 전철을 밟아 역사에서 사라질 수밖에 없는 운명이었다.
이로 인해 말라기 선지자는 매우 심각한 위기의 상황에 대한 대안으로 눈먼 것과 저는 짐승을 예물로 바치는 제사장들의 죄를 책망하며 신앙공동체를 선포했고, 일반 백성들을 향하여 무너지는 신앙공동체를 회복시키기 위한 목적에서 온전한 십일조라는 수단으로 온전한 야훼(여호와)사상 회복을 강조했던 것이다.
이러한 정황은 무시한 채 교회재정을 확보하기 위한 목적으로 십일조를 강조하거나 세속적인 목적으로 말라기의 말씀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무작정 인용한다면 하나님의 본질적인 사상에서 벗어나는 것이다.
이종남 목사가 쓴 칼럼의 일부다.(출처 : 청골산 칼럼 제578호 / 말라기에서 언급하는 십일조는)
이 목사의 말에 의하면 당시 정치공동체가 없이 신앙적 민족공동체를 유지하기 위해 온전한 십일조를 강조한 측면이 크다는 것이다. 당시 명목상의 정치적 최고지도자는 총독으로 페르시아 왕에 의해 임명된 관리인에 지나지 않았다. 이런 상황에서 십일조는 유대공동체를 유지하기 위한 세금의 성격까지 포함하고 있었다. 그리고 이를 통해 말라기는 온전한 여호와 사상의 회복을 강조하고 도모했다는 것이다.
물론 십일조가 필요 없다는 것은 아니다. 물질 있는 곳에 마음 있다는 말도 맞다. 감사한 마음을 담아 하나님께 드리고 구제 등 좋은 곳에 쓰인다면 십에 일조가 아니라 오에 일조, 이에 일조도 칭송할 일이요, 아름다운 일이다. 하지만 십일조를 세속적, 기계적, 교조적으로만 접근하는 우를 범해서는 안 된다.
배 곪는 사람에게 쌀 열 톨 중 한 톨을 바치지 않았다고 탓할 수는 없다. 십일조를 넘는 성도를 축복하는 설교로 시작해, 십일조를 내지 않는 성도의 죄를 저주하는 설교로 끝내서는 안 된다. 성도의 성공을 십일조의 공으로만 돌리고, 성도의 간난을 십일조의 죄에서만 찾아서는 안 된다. 대성공을 이루지 못한 사람은 신앙이 부족하거나 거짓된 사람이며, 그 신앙의 척도는 오직 십일조와 헌금이어서는 안 된다.
이러한 주장에 얼마나 동의하는가 상관없이, 말라기서에서 차지하는 십일조의 비중을 어떻게 판단하는가 상관없이 기독교인들의 십일조에 대한 인식이 좀 더 깊어지고 좀 덜 세속적일 필요가 있다. 적어도 ‘대박! 일억을 바쳤더니 십억이 돌아왔다’, ‘십일조를 안 냈더니 수입이 줄고 일이 안 풀리고 근심이 쌓이더라’, ‘사고를 당해 그 돈 그대로 병원비로 나가더라’ 심지어 ‘사기를 당해 차라리 십일조를 내고 복을 받음만 못하더라’ 식의 수입지출, 길흉화복의 말들로 부흥회, 간증회의 단골주제가 되어서는 안 된다.
말라기가 본디 주장하고자 하는 것은 경건하고 올바른 예배와 하나님을 향한 신실한 마음가짐이다. 이에 말라기는 다음과 같이 충고한다.
① 하나님은 하나님을 진심으로 경외하지 않으면서 드리는 제물은 받지 않으신다.
② 하나님의 명령대로 행하지 않고, 그 뜻을 어기는 사람의 제물은 받지 않으신다.
③ 하나님의 법을 백성들에게 올바로 가르치지 않고 임무를 불성실하게 행하는 제사장들의 예배는 받지 않으신다.
④ 회개하고,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가지면서 정결한 제물로 드려진 예배는 기뻐 받으시고 복을 주신다.
4장 5절
나 여호와의 크고 두려운 심판의 날이 이르기 전에, 내가 예언자 엘리야를 너희에게 보내 주겠다.
6절
엘리야가 와서 아버지가 자녀를 사랑하게 하고, 자녀가 아버지를 사랑하게 할 것이다.
예언자 엘리야는 주의 길을 예비한 세례 요한을 이름이다. 그 때에는 굽은 것이 펴지고, 비정상이 정상이 되고, 사랑과 은혜가 넘치고, 의로움이 중천의 해처럼 비출 것이다.
말라기를 끝으로 예언자의 시대가 끝나고 예루살렘은 메시아 예수 그리스도가 오시기 전까지 긴 침묵의 시대로 접어든다.
말라기 끝.
호세아로부터의 소선지서 12권 끝. 이사야로부터의 예언서 17권 끝.
창세기로부터의 구약 39권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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