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망(大望)》 5권 리뷰
아무리 싸움이 일상의 밥 먹듯 되풀이되고 있는 시대지만, 막상 싸움이 벌어지면 그때마다 생명에 관계된다. 그러므로 작전회의의 마지막은 언제나 선동의 교묘함에 달려 있다. 걸핏하면 징조가 좋으니, 재수가 좋으니, 벌써 이겼느니 온갖 현상을 내세워 그것을 암시로 삼아 두려운 마음을 억눌러가는 것이다. 바꾸어 말하면, 이성적으로 계산한 다음 이윽고 이성을 초월한 열광으로 인간을 몰아치지 않으면 안 되기 때문이었다. (333p)
인간은 이성적 존재인가? 비이성적 존재인가? 인간은 위기에서 더 현명해지는가? 더 어리석어지는가? 이성은 무조건 좋은 것인가? 감성은 이성에 비해 열등한 것인가? 인간의 행동을 결정짓는 힘은 어디에서 오는가?
인간이 생각보다 현명하지 않다. 이성적이지 않다. 적지 않은 사람들이 59분 동안 심사숙고하다가 1분 동안 감정이 동하여 결정하곤 한다. 그렇다고 이성이 마냥 좋은 것만도 아니고 이성만으로 살아갈 수 없는 것이 또한 인간이다.
차갑고 메마른 이성, 숨 막힐 듯 박제된 이성은 우리 삶을 얽어매고 황폐화시킨다. 기름진 감성, 들뜬 열정의 불꽃에 우리 삶이 폭주하여 파멸에 이를 수도 있지만 따뜻하고 부드러운 감성은 우리 삶을 윤택하게 하고 풍성하게 하는 원동력임엔 분명하다.
연구에 의하면 위기 때에 인간의 판단력은 평균적으로 흐려지기보단 예민해진다고 한다. 긴장하면 육체도 지능도 정신도 빨라지고 높아지는 이치다. 하지만 자신의 능력과 의지로는 피할 수 없는 막다른 골목, 최후의 순간이 닥치면 도리어 의식적, 무의식적으로 합리적 판단력을 포기하거나 잠시 뒤로 물리기도 한다.
개인이라면 운명, 숙명, 천명이라며 받아들이거나 맞서는 순간이다. 한 집단 안에서는 누군가는 선동이 필요한 순간, 누군가는 암시가 필요한 순간이다. 이때가 바로 가장 위험한 결정적인 순간이다.
평범한 일상에선 인간은 여유롭게 방심하며 살아간다. 취향대로 제멋대로 느긋하게 산다. 위기가 닥쳐오면 생존본능이 발동한다. 이제까지의 자신의 주관, 선입견, 취향을 접어두고 주도면밀하게 자신의 지력과 이성을 총동원하여 최선의 대응책을 모색한다. 그러다 결정적인 파국의 국면으로 접어들면 억지로라도 감성과 열정을 불러낸다.
일상에선 소박하고 부드러운 감성, 위기 시엔 냉철한 이성, 파국 시엔 뜨겁고 강력한 열정이 작동한다. 파국의 순간을 앞두고, 파국 국면 이후에도 끝까지 이성을 포기하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 그래야 생을 보존하여 삶을 유지할 수 있다. 파멸을 피할 수 있다.
북핵, 사드, 개성공단폐쇄... 한반도 정세가 예사롭지 않다. 평범한 시민들까지 슬슬 불안해진다. 어제는(2월 16일) 박근혜 대통령이 대북강경기조를 내용으로 하는 국회연설을 했고 중국은 ‘한반도에서 핵도 반대하지만 전쟁도 반대한다.’에서 한 발 더 나가 ‘전쟁이 일어난대도 두렵지 않다’(환구시보 논평)고 강력경고하고 나섰다.
파국(무력충돌, 전쟁)에 앞서 위기임에 분명하다. 박 대통령의 연설 역시 70년대 냉전시대의 반공연설이나 웅변을 다시 보듯 적대감 고취, 총화단결을 위한 선동일색, 강경일변도였다. 단순화하면 ‘토 달지 말고 나를 따라 북괴를 무찌르자’는 것이다.
70년대와 달리 시민들이 많이 깨어있어 이러한 선동이 먹힐지 안 먹힐지 모르지만 한국사회의 세력지형이 너무 보수화되어있어 걱정이다. 중요포스트를 모두 보수가 차지하고 있고 특히 언론이 모두 그 수족이어서 파급력, 전파력이 막강하기 때문이다.
조그마한 충돌이라도 발생하면 곧바로 파국이다. 난 잘못 없다며 더욱 시끄럽게 떠들어 댈 것이다. 김정은 제거니 통일대박이니 벌써부터 이겼다느니 한민족의 새로운 시대가 열렸다느니 국민들을 열광으로 몰아칠 것이다. 그러면서 국민들을 파멸과 죽음이 예약된 전쟁의 사지로 내몰 것이다.
평상의 소박한 취향을 버리고, 파국시의 열광에 내몰리지도 말고, 끝까지 위기시의 냉철한 이성을 유지해야 한다. 그래야 이 위기를 넘을 수 있다. 우리의 평소 생각을 점검하여 인식의 지평을 넓히면 한걸음 더 발전하여 기회로도 만들 수 있다.
‘설마 전쟁이야 나겠어?’도 위험하고 ‘지긋지긋한 북한 놈들 아예 이참에 전쟁으로 끝장을 보자!’는 더 위험하다. 설마 설마하다 개성공단 폐쇄됐고 설마 설마하다 경제파탄 나고 설마 설마하다 전쟁난다. 원래 불장난하다가 불나는 법! 지금의 위기는 ‘개성공단 노동자 초코파이 못 먹어 불쌍하게 됐다’ 혹은 ‘한번 버르장머리를 고쳐놔야겠다’ 수준으로 접근해선 안 된다.
위기는 기회다. 비온 뒤에 땅이 굳는다. - 반은 맞고 반은 틀린 말이다. 위기는 위기다. 곧바로 파국으로 치닫기도 한다. 비온 뒤의 땅은 질퍽하고 더러울 뿐이다. 다 무너지고 떠내려가기도 한다.
위기가 기회인 이유는 위기가 높아질수록 우리의 대응력도 평소보다 높아지기 때문이다. 더 합리적이고 옳은 판단을 할 가능성이 높아지고 위기를 통해 우리의 생각과 인식이 바뀌어 한 단계 더 도약할 수 있기 때문이다. 위기를 통해 배우고 성장하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선 누군가에게 휘둘리지 말아야 한다. 때로는 눈을 감고 귀를 닫고 내면의 이성의 소리에 귀 기울여야 한다. 밖에 있는 헛된 암시에 기대지 말고 안에 있는 확고한 의지를 견지해야한다.
위기가 기회가 되느냐 파멸이 되느냐는 우리하기 나름이다.
“이에야스를 살려주는 거야!”
히데요시는 눈을 부릅뜨며 무릎을 쳤다.
“나는 큰 욕심을 갖고 있다. 일본을 다 휩쓸고 나면 다음은 명나라까지 평정할 계획이다. 그런 때 이에야스는 쓸모 있는 놈이야. 그렇지, 내가 그걸 잊고 있었군. 왓핫핫핫핫......!” (중략)
이에야스가 철수했다는 걸 알아차리고 뒤늦은 탄식 대신 조선, 명나라 이름까지 들먹이다니......(중략)
히데요시의 발상은 언제나 천진난만했다. 예사 인간들 같으면 어림없는 망상으로 그냥 안개나 구름처럼 사라질 것들을 히데요시는 끈덕지게 다듬어 기어코 살려내는 천부적 재주를 가졌다. (448~450p)
히데요시는 시원시원하다. 대인배까지는 아니더라도 매사에 긍정적이고 사람 좋은 호인이다. 다른 한편으론 변태적일 정도로 집요하다. 예사 인간에겐 허풍, 호언장담, 과대망상으로 비칠 수도 있지만 어려운 일, 불가능할 것 같은 일도 기어코 되게 만드는 신통한 능력과 끈질긴 의지가 있다.
단, 조선과 명을 정벌할 생각을 천진난만하다고 표현한 것은 유감! 한 인간의 천진난만함이 수년간의 처참한 전란으로 이어진 것이다.
실지로 역사에서 보면 이런 예가 간간히 있다. 절대 권력자의 사소한 고집, 망상 심지어 취향이 어마어마한 사건으로 비약하는 경우다. 단순한 호언장담, 거짓선전 심지어 실언이 비탈을 구르는 눈덩이처럼 완성으로 치닫는 경우다.
소설에서는 이에야스를 쫓던 토요토미가 수 싸움에서 져 이에야스를 놓친 후 자존심에 상처를 받아 이런 뛰어난 인재라면 자신의 원대한 포부, 곧 명 정벌 때에 요긴하게 쓸모가 있을 테니 살려주겠노라고 부장(副將)에게 허세를 떠는 것으로 나온다.
하지만 이것이 얼마나 역사적 사실에 부합하는지는 의문이다. 후에 토요토미의 아들이 어려서 죽은 후 실의에 빠진 토요토미가 그것을 달래기 위한 돌파구로 조선출병에 대한 결심을 더욱 확고히 했다는 이야기도 마찬가지!
토요토미가 위와 같은 성정의 인물이었음에는 분명하나 이 같은 개인적인 이유만으로, 이 단 한순간의 판단만으로 명나라를 정벌하려 임진왜란을 일으켰을 리는 없다. 토요토미의 이 같은 야망과 일본내부의 사정이 복합적으로 작용하여(아마도 후자가 더 비중이 클 것) 조선출병을 결정하게 되었다는 것이 더 설득력 있다.
전국(戰國)을 수습한 후 싸울 일은 없어졌는데 무력이 너무 남아돈다. 창검과 조총도 넘치고 할 일 없어진 무사도 넘친다. 배포도 크고 인심도 큰 토요토미가 더 이상 가신, 부장들에게 나누어줄 영지가 없다. 무사계급도 마찬가지였지만 토요토미 자신이 조용히 내치에 힘쓰는 스타일이 아니었고 성격상 일 없이 가만히 있는 것을 누구보다 고통스러워하는 인물, 뒤돌아보지 않고 죽을 때까지 무엇인가 바라보며 계속 걸어가는 사람이었다.
끝없이 일을 벌이고 영역을 넓히는 스타일, 멈추면 쓰러질 것을 두려워하는 스타일이다. 하지만 일본도 이 세상도 한계가 있다. 토요토미의 능력도 그의 운세도 한계가 있다. 노획물을 주려면 노획물을 뺏어야 한다. 쓸 돈이 있으려면 어딘가에서 벌어놔야 한다. 마치 새로운 유입이 없으면 쓰러지고 마는 다단계처럼 정복이 없으면 토요토미의 통치방식은 유지될 수 없다.
그렇게 개인의 야망과 시대의 요구에 따라 토요토미는 조선출병을 감행하고 이를 계기로 내리막길을 걷게 된다. 마치 크게 보이려고 배를 키우다키우다 그것이 터져 죽은 개구리처럼 토요토미의 말년은 그리 아름답거나 행복하지 않았다.
역사의 큰 물줄기를 움직이는 힘은 무엇일까? 시대의 요구인가? 인간의 의지인가? 인간이라면 (절대)권력자의 의지일까? 수많은 민중들의 의지 혹은 염원일까?
섶이 있고 성냥이 있다. 붙이기만 하면 활활 탄다. 하지만 장마철 축축한 섶은 횃불로도 태울 수 없다. 반면 건기 때의 아프리카 초원은 풀과 나무들이 저들끼리 부딪혀 큰 불이 나기도 한다.
역사란 사람이 만들어가는 것이긴 하지만 사람보단 시대적 요구다. 시대적 상황이다. 굳이 내가 성냥을 긋지 않아도 누군가가 다른 무엇으로 불을 붙이는 경우가 많다. 좋은 방향이든 나쁜 방향이든 역사에는 섭리라는 것이 있다.
“대장이란, 존경받고 있는 것 같지만 실은 잘못이 없는지 부하들에게 언제나 탐색당하고 있는 거야. 두려워하는 것 같지만 깔보이고, 친밀한 것 같지만 외면당하고, 좋아하는 것 같지만 미움 받고 있는 거지.” (중략)
“부하란 반하게 하지 않으면 안 돼. 다른 말로 심복이라고도 하는데, 심복은 사리를 초월한 데서 생겨나온다. 감탄시키고 감복시켜 좋아서 어쩔 줄 모르게 만들어야 해.” (561~562p)
- 이에야스가 아들에게 하는 말
대장, 리더는 괴롭다. 자리는 높지만 감시당하고 흔들어댄다. 친한 척 하지만 진정이 아닌 경우가 많고 대개 은따(은근한 왕따)다. 자신의 기대가 어긋나고 욕심이 채워지지 않으면 온순한 양에서 사나운 늑대로 순식간에 발톱을 드러내기도 한다.
존경을 넘어 좋아서 어쩔 줄 모를 정도로 반하게 만드는 것이 간단치 않다. 마법이나 주문을 걸 수도 없고... 그래서 대장에겐 각고의 노력과 절제가 필요하다. 지력도 체력도 참을성도 인품도 근면성실도 일머리도 모든 것에서 가신, 부하, 구성원들을 넘어서야 가까스로 그들을 반하게 하여 떠나가지 않게 할 수 있다.
하지만 이런 것이 아닌 다른 것에 반하는 사람이 있다. 돈과 권세의 세속적 이권, 심지어 잘생긴 외모에 매료되는 사람도 있다. 그것에만 감탄하고 감복하는 사람이 있다.
구성원(부하)도 리더(대장)을 잘 만나야 하지만 리더 역시 구성원들을 잘 만나야 한다.
《대망(大望)》 5권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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