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홉 번째 주일 대표 기도문 (140914)
사랑과 은혜가 충만하신 하나님.
이렇게 일주일을 보내고 저희 성도들 한자리에 모여 예배를 드리오니 저희를 축복하여 주시옵고 홀로 영광 받아주시옵소서. 저희가 세상에 나가 주님의 뜻과 의를 이루는 통로가 될 수 있도록 항상 저희와 동행하여 주시옵고 저희를 축복하여 주시옵소서.
길 잃은 양같이, 젖 뗀 아기같이 마음이 어리고 육신이 연약한 저희들의 철없고 소박한 기도를 어여삐 여겨 주시옵소서. 돈과 물질을 채워주시되 다만 곤궁치 않게 하여 주시고 바라고 또 바라고, 원하고 또 원하여 저희가 탐욕으로 치닫고 비루함으로 떨어지지 않게 하소서. 저희가 욕심, 시기, 성냄의 어두운 마음을 멀리하고 오직 주님의 밝고 온화한 사랑 안에 거하게 하소서. 헤롯왕의 권세와 주님의 사랑 중에 주저 없이 주님의 사랑을 택할 수 있는 저희들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부자, 권력자, 잘 나가는 자에게 더 이상 마음 쓰지 않게 하시고 저희의 마음이 온전히 가난한 자, 약한 자, 상처받고 아파하는 자와 함께하게 하소서. 배고픈 자에게 빵을 주셨듯 그들의 빈 밥그릇에 저희의 밥을 덜게 하시고, 슬픈 자에게 위로를 주셨듯 그들의 눈물을 저희 손으로 닦게 하소서. 주님을 사랑하듯 정의를 사랑하고 나를 사랑하듯 이러한 이웃들을 사랑하게 하소서. 그들의 아픔이 곧 저희의 아픔이고, 그의 상처가 곧 나의 상처이게 하소서. 저희가 그들을 외면치 않게 하시고 혹여라도 넘어진 자를 짓밟고 상처난 자를 찌르지 않게 하소서.
주님은 선하시며 그 사랑은 영원하십니다. 주님의 마음은 온유하고 겸손하시니 저희의 영혼이 쉼을 얻기에 부족함이 없으십니다. 저희가 주님을 닮아 세상의 상처와 아픔을 위로하고 치유할 수 있도록 하여 주시옵소서. 그러한 주님의 도구가 되고, 주님의 은혜의 통로가 되는 복된 성도와 교회가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주님. 육체의 질병으로 힘들어하고 있는 주님의 자녀들이 있사옵니다. 주님의 권능과 은혜 안에서 그들을 굽어 살펴 주시고 소생시켜 주시옵소서. 주님의 영광을 찬미하는 성가대의 목소리에 은혜 내려 주시옵고 교회 여기저기 숨어서 성심봉사하시는 모든 성도들 축복해 주시옵소서.
주님의 목자이신 △△△ 목사님을 축복하사 항상 강건케 하여 주시옵고 그 목소리를 빌어 주님의 뜻과 말씀을 들려주시옵소서.
한 켤레 신발과 한 벌의 옷으로 모든 이를 섬기는 길을 나섰던 예수님, 결국 섬기다 섬기다 모든 이를 위해 죽으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간절히 기도드렸사옵니다. 아멘
세월호에 대한 직간접적인 언급은 없지만 지난번 여덟 번째 주일 대표 기도문(세월호 참사에 부쳐)에 이어지는 기도문이다. 그 이후 사정이 개선되지 않고 더욱 악화일로로 치닫고만 있어서 답답한 마음에 기도문구가 다소 맵고 강한 면이 있다. - 부디 나의 입으로 주님을 욕되게 하지 않았기를...
슬프다. 화난다. 왜 우리는 우리 스스로 우리 자신의 상처를 치유하지 못하는가! 이웃의 아픔에 왜 이렇듯 무관심하고 무정하고 비정하고 잔인한가! 넘어진 자를 짓밟고 상처난 자를 찌르고 울고 있는 자를 조롱하는가! - 이것밖에 안 되는 우리 사회의 수준에 절망한다. 이런 사회분위기가 지배하는 차갑고 탁한 공기에 숨이 턱턱 막혀 내 영혼이 숨쉬기가 힘들다.
이것은 우리가 주님의 사랑보다 마몬의 영화(榮華)를 추구하기 때문이다. 주님보다 돈, 물질을 더 숭상하기 때문이다. 이제 세월호 유가족들의 당연하고도 소박한 요구마저도 ‘경제 살리기’라는 지상과제를 방해하는 거추장스런 방해물 정도로 여겨질 지경에 이르렀다. 이제 그만 불편한 것은 치워버리고 호의호식하며 행복을 만끽하고 싶은 것이다.
주님도 힘이 세지만 마몬도 힘이 세다. 우리를 끊임없이 탐욕의 꼭대기로 유혹하고 비루함의 바닥으로 끄잡아 내린다. 주님의 사랑과 정의가 없는 자본주의는 이러한 마몬이 활개치는 타락상의 극치다.
TV에 신문에 광고에 서적에 이웃사촌의 소식에 실려 오는 풍문에...... 우리 주위는 우리의 욕망을 자극하는 것들로 넘쳐난다. 그것은 이제 의식적인(혹은 무의식적인) 욕망, 취향, 품성 차원을 벗어나 무시당하지 않기 위해, 어필하기 위해, 살아남기 위한 무의식적인(혹은 의식적인) 생존차원으로 비약, 확장됐다. 의식과 무의식을 넘나들며 전방위적으로 확산되어 일분일초, 이곳저곳에서 우리의 삶을 지배하고 있다.
그것의 지배에서 벗어나기가 만만치 않다. 부자, 권력자, 잘 나가는 자들에게 마음 쓰지 않기가 결코 간단치 않다. 그들의 눈치를 안 볼래야 안 볼 수가 없게 됐고, 광고와 풍문에의 노출을 피할래야 피할 수가 없게 됐다. 그들의 라이프 스타일, 성공 스토리, 취향, 패션까지 배우고 익혀 어설픈 흉내라도 내야 그나마 열패자를 면할 것 같다. 하다못해 손수레를 끌며 액세서리 노점상을 해도 잘 나가는 스타의 아이템, 최신 강남 트렌드를 반영한 신상 짝퉁을 갖춰 놔야 경쟁력이 있다.
더 이상 사람들은 넘어진 사람을 부축할 정도로 시간과 여유가 없다. 보이지 않는 무지개 너머 행복의 파랑새를 찾아 나설 정도로 낭만적이지 않다. 그들은 이제 어수룩하지 않다. 대신 사람들은 멀지만 똑똑히 보이는, 하늘 아래 까마득한 정상에 우뚝 솟은 다이아몬드를 향해 모두가 일제히 질주하고 있다. 쫓기듯 홀린 듯 분주하게 멈춤이 없다. 있는 자는 있는 자대로 없는 자는 없는 자대로 월급통장과 카드명세표, 주가와 부동산 시세를 살피며 눈에 보이고 손에 잡히는 돈을 찾아 나서고 있다.
하지만 눈에 보이고 손에 잡힌다고 모두가 가질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보이지만 잡을 수 없는 것, 잡히지만 가질 수 없는 것들이 우리를 욕심나게 하고 비루하게 한다. 조바심으로 우리의 평안하고 굳건한 마음을 불안 초조하게 어지럽혀 약하게 만든다. 우리를 슬프게 하고 화나게 하고 결국엔 우리를 악하게 하고 황폐하게 만든다.
이것이 자본주의라는 마몬이 우리 인간을 타락하게 하여 악으로 이끄는 경로다. 마몬은 우리에게 한개의 물건에 항상 두개의 욕심을 얹어준다. 그것은 마셔도 마셔도 영원히 풀 수 없는 갈증이다. 이것이 마몬이 우리 인간을 영원한 포로로 만드는 방법이다. 기독교인이라고 예외가 아니다. "예수님을 믿었더니 사는 족족 땅값이 올라가고 집이 서너채가 되었습니다. 할렐루야!" 수준의 기독교인들이 적지 않다.
인간에게 길들여져 야성을 상실한 개로 퇴화된(혹은 진화된) 늑대와 같이 인간은 자본주의에 길들여져 인간성을 상실하고 주님의 진정한 가르침에서 멀어지고 있다.
경계할 일이다. 더욱이 하나님을 믿고 예수님을 따르기로 결심한 기독교인들은 더욱 더, 명심하고 또 명심하여 경계할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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