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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의 평범성과 선의 편협성(The Banality of Evil & The Intolerance of Good)

어멍 2009. 3. 18. 11:03

 

 

 

 [1]

 

    정치철학자 한나 아렌트(Hannah Arendt)는 수백만명의 유대인 학살을 지휘했던 아돌프 아이히만(Adolf Eichmann)이 너무도 멀쩡하고 평범한 사람이었다는 걸 예로 들면서 악행은 인간의 악마적 속성이 아니라 '사고력의 결여'에서 나온다며 '악의 평범성'(혹은 '악의 진부함')이란 개념을 제시하여 큰 논쟁과 반향을 일으켰다.

    즉 ‘악한 일은 대부분 사악함 때문이 아니라, 스스로 하는 일의 의미를 깊이 생각하지 못한 데서 온다. 평범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이 스스로 인식하지 못한 상태에서 커다란 악을 저지를 수 있다’는 거다. 장난스레 병아리를 내동댕이치며 죽이는 아이들은 과연 사악한가. 그들은 생명의 존엄성과 의미를 알까. 무지가 죄고 사고의 결여, 정지가 죄다.(‘저들을 사하여 주소서, 저들은 자기들이 무슨 일을 하고 있는지 알지 못합니다’[누가 23:34])

    이에 대해 피터 드러커(Peter Drucker)라는 경영학자는 ‘악은 절대로 평범하지 않다. 악행을 하는 사람이 평범할 뿐이다........그렇기에 인간은 어떤 조건으로든 악과 흥정해서는 안 된다. 그 조건은 언제나 악의 조건이지 인간의 조건이 아니기 때문이다’라고 주장했다.

    두 사람의 말이 상반되기도 하고 겹치기도 하면서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한다.

 

괴테, 칸트, 베토벤의 나라의 평범한 시민들과 어린 학생들.

 

 

    아우슈비츠에서 유대인을 학살했던 장교와 병사들은 세계에서 가장 철학적이라는 독일민족, 클래식을 즐겨듣던 친절하고 예의바른 평범한 사람들이었으며, 박정희정권 남산 대공분실에서 고문을 자행하던 수사관들은 현장에서 태연히 자녀들의 학업성적에 대해 걱정어린 대화를 주고받았으며, 강호순은 준수한 외모에 후일 자식의 생계를 걱정하는 한 명의 아버지였다.

    이 엄청난 죄악의 책임은 누구에게, 무엇에게 물어야 하나!

    넓게는 사고의 결여, 죄의식의 부재를 부르는 관료화, 분업화의 구조와 좁게는 한 개인의 성장과정, 환경에도 원인과 책임을 물을 수 있겠지만 성악설, 성선설과 같이 악, 선, 인간에 대한 보다 근본적인 성찰이 있어야 한다.

 

    “죄를 미워하되 사람은 미워하지 말라”

    하지만 <넘버3> 마동팔 검사(최민식 분)는 냉소와 경멸, 분개를 뒤섞어 내뱉는다.

    “죄가 무슨 죄야? 죄지은 놈이 나쁜 XX지!”

 

    국가, 사회, 구조, 주위환경, 성장과정, 악마의 꾀임.........인간은 악마를 비롯하여 죄를 덮어씌우고 면죄부를 받을 수 있는, 심지어 희생양임을 자처할 수 있는 갖가지 핑계를 갖고 있다.(악마에 대한 배신이야. 배...배.배.배.배......배..배신!) 영화 <마이너리티 리포트>가 그리는 과학이 발달한 미래에는 인간의 순수한 자유의지와는 별개인 운명이나 유전자까지 그 핑계의 항목에 추가될 수 있을 것이다. 악의 평범성, 진부함 역시 그 자체로 핑계로 이용될 수 있는 자기변명, 자기방어의 개념으로 쓰이기도 한다.(너도 그렇고 나도 그렇고 예나 지금이나 인간이란, 악이란 원래 이런 존재야. 그러니 나보고 워쩌라고?)

    죄지은 놈보다 나쁜 놈은 핑계대는 놈, 핑계대는 놈보다 더 나쁜 놈은 뉘우치지 않고 오히려 뻔뻔히 대드는 놈이다. 어쩌면 기왕의 죄보다 반성할 줄 모르고, 회개할 줄 모르는 도발적인 비열함이야말로 인간이 갖고 있는 악마성의 진면목일 수도 있다.

 

 

<마이너리티 리포트> 운명을 알게 된 자의 고통과 몸부림.
첨단과학을 빌려 결정된 미래를 예측한다는 아이러니. 과학과 운명론의 모순된 결합.

범죄예방국(PreCrime Department)에 근무하는 존 앤더튼(톰 크루즈 분)은 자신이 저지를
예고된 살인을 피하기 위해 ‘미래를 알고 있다는 사실이 다시 미래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인과관계의 ‘뫼비우스의 띠’에 정면 도전한다.

 

 

    하지만 동시에, 수백 가지 유혹과 이유로 인해 때론 불가항력적으로 무너지고 타락할 수밖에 없는 불완전하고 연약한 존재가 또한 인간이다. 악은 상냥하고 친근하여 붙임성이 좋다. 악의 유혹과 전염성은 생각보다 강력하고, 현실은 생각보다 가혹하고, 인간은 생각보다 나약하다. 인간은 이성적이라기보다 감성적이며, 합리적이라기보다 충동적이다.

    종교적으로는 날 때부터 구원을 받아야 할 원죄를 지닌 자요, 언젠가 해탈에 이르러야 할 불완전한 존재이다.

    붓다가 나자마자 일곱 걸음을 걸은 후 ‘천상천하 유아독존’이라고 외친 것이 인간은 본래 부처로서 위대하다고 외친 실존선언이라지만 모든 인간이 날 때부터 걷고 말하는 것은 아니다. 오직 부처만이 날 때부터 해탈한 자요, 독생자 예수만이 날 때부터 원죄에서 자유로운 자다.

    그러므로 인간은 스스로의 나약함에 겸손해야 한다. 함부로 나대고 덤비고 악마를 얕잡아 보아서는 안 된다. 따라서 무엇이든 안하고 후회하는 것보다 하고 후회하는 것이 낫다는 태도, 모든 책, 모든 정보, 모든 경험이 결국에는 가치 있고 유익할 것이라는 막연한 낙관주의는 재고해 보아야 한다. 가뜩이나 정보가 홍수를 이루고 갖가지 유혹이 주위에 널려있는 현대사회에서는 안이하고 위험하고 심지어 오만한 태도일 수 있다. 좋은 정보, 좋은 신문, 좋은 책, 좋은 경험만 접하려고 노력해야 하고 자칫 나쁜 길로 빠져서 악의 구렁텅이에서 허우적거려서는 안 된다. 인생은 모든 경험을 하기에 짧은 것이 아니라, 좋은 경험만 하기에도 너무 짧고 소중한 것이다.

 

   FBI에서 25년간 강력․흉악 범죄를 수사한 프로파일러 존 더글라스(John Douglas)는 그의 저서 <마음의 사냥꾼(Mindhunter)>에서 말하길 ‘악의 심연을 바라볼 때 항상 조심해야 한다. 악의 심연도 너를 바라본다’라고 했다. 다소 으스스한 드라마틱한 그림이지만 우리가 정말 조심해야 할 것은 악은 특이하지도 않고 그리 드라마틱하지도 않으며 생각보다 가깝고 사소하다는 데에 있다. 그것은 극적이고 파괴적이어서 위험한 것이 아니라 담장 너머, 식탁 위에, 침대 밑에 우리의 일상속에 친근히 숨어 있어 자연스레 우리의 바지에 묻어나고 우리의 머리위에 내려앉는다는 데서 호환마마보다도 무서운 것이다.

    관료화, 분업화되고 정신없이 돌아가는 현대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더욱 의식하고 잡아내기 힘들다. 오히려 사람들은 사유하는 능력, 회의하고 비판하고 의심하고 불복종하는 능력을 점점 거세당하고 있다.

 

    꽃다운 처녀. 정치도 나치도 관심이 없었고 단지 뛰어난 타이핑 실력으로 우연히 히틀러의 비서가 되어 자기 직분만을 충실히 수행했던 트라우들 융에(Traudl Junge). 그녀에게 있어 한 때 화가지망생이었고 조용하고 신체접촉을 싫어했으며 죽은 생물을 싫어해 방에 꽃병을 두지 않았던 히틀러는 친절하고 예의바른 아저씨, 오랫동안 갈망하던 아버지상이었다.

    그녀는 후일 ‘정치적 무지가 면죄부가 될 순 없죠’라며 반성과 사죄를 청하고 평안을 얻는다.

    ‘생각하는 백성이라야 산다’(함석헌 선생) 항상 깨어있어야 하고 어느 순간에도 사유하기를 멈추지 말아야 한다.

 

    하지만 이것만으로는 2% 부족하다.

 

    학살, 전쟁, 독재는 태고이래로 있어왔고 자본주의든 공산주의든 이념, 체제를 떠나 여기서 자유롭지 못했다. 이념, 체제, 법이라는 것이 폭군, 독재자, 기득권 세력 등 통치자들이 권력을 쉽고 효과적으로 통제, 유지하기 위해 차용, 이용한 수단, 껍데기에 불과했던 측면이 강하고 이마저도 자신의 필요에 따라 변형해가며 권력을 강화했다. 사회주의의 변종인 ‘주체사상’, 자유민주주의의 변종인 ‘유신’, ‘한국적 민주주의’는 사실 사회주의도 민주주의도 아닌 한국에서만 있는 독특한 독재 이데올로기로 모두 아버지상, 유교적 가부장의 권위, 권력을 빌려왔다는 점에서 공통점이 있다. 결국 김일성과 박정희는 본질에서는 통한다. 이념도 인간도 독재자, 통치자들의 수단과 도구가 되어서는 안 된다. '민주주의는 보통의 시민을 위해 만들어진 것이지, 민주주의를 위해 시민이 만들어진 것이 아니다'(샤츠슈나이더)

    이념보다는 인간이다. 메마르고 기계적인 관료주의가 아니라 가슴을 울리고 체온을 나누는 휴머니즘이라야 한다. 입새에 이는 바람에도 아파할 필요야 없지만 타인의 아픔에 같이 아파할 수 있는 따뜻한 심장만은 갖고 있어야 한다.

    ‘진실을 인식하는 것은 지능의 문제가 아니라 성품의 문제이다’(에리히 프롬) 이 성품에는 도덕적 감수성, 진실을 향한 열정, 참여와 실천의 용기, 불복종의 결단까지 포함함은 물론이다.

    이런 심성과 성품을 어떻게 함양해야 할까. 결국 키포인트는 단기적으론 언론, 장기적으론 문화와 교육이다.

    신문시장의 70%를 차지하며 매일 아침 우리들의 집 앞에 어김없이 배달되고 뿌려지는 조중동이 무능보다 부패가 낫다느니, 대통령을 뽑는 것이지 성직자를 뽑는 게 아니라느니, 대놓고 사설과 논조로 괴변을 지껄이며 부패․죄악을 관용, 옹호하고 반칙에 의한 성공을 권하는 것이야말로 작금의 도덕성, 정신문화의 타락상과 악의 평범성, 일상성을 웅변하고 있다.

 

 

[2]

 

    Tolerance : 명사. 불어로 똘레랑스, 영어로 타너런스. ‘견디다’, ‘참다’라는 뜻의 라틴어 Tolerare에서 유래. 반대어 Intolerance.

 

    어떤 것에 대하여 강력하게 반대하면서도 용납하는 것. 다양성을 옹호하는 사회적 태도. 보통 관용이라 번역되지만 딱히 완전히 맞아떨어지진 않는다.

    애정의 끈을 놓지 않고 존중하며 서로 독립적으로 지켜본다는 면에서 분리, 방치와도 다르고 이성적, 사회적이란 면에서 감성적, 개인적인 정(情)과도 다르며 무조건적, 무차별적 포용이 아니라는 면에서 종교적 사랑, 용서, 자비와 다르고 상대적이란 면에서 지배자, 권력자의 일방적 은사, 시혜와도 다르고 대중적, 사회적이란 면에서 유교적인 군자의 너그러움, 관대함이나 도교적인 초연함, 호방함과도 다르다.

    비슷한 개념으로는 화이부동(和而不同)을 들 수 있는데 서로 다르지만 서로를 받아들이고 용납한다는 태도로서는 같다. 관용보다 한 발 더 나아가 관용이 통용되는 이상적인 사회상을 그리고 있다.

 

화이부동. 따로 똑같이 : 평화롭고 조화로운 다양성속의 통합.

 

 

    정(情)이 좀 더 뜨겁고 기름지다면 관용은 좀 더 쿨하고 건조하다. 또한 관용은 반칙, 부패, 불관용, 절대악까지 무조건 포용, 용납하지는 않는데 이를 용납한다면 관용 자체가 위협받기 때문이다. ‘관용의 역설‘인데 나치스에 의한 바이마르 공화국의 몰락은 좋은 예이다. (& 조중동에 의한 시민사회, 민주주의의 위기!)

    그럼 우리는 어디까지 관용하여야 할까? 누가, 무엇을 기준으로 선을 그어 선악을 분별하는가?

 

    무언가를 A라고 이름붙인다면 세상은 좁게는 A와 anti-A, 넓게는 A와 not A로 나누어진다. 선과 악, 또는 선한 것과 그렇지 않은 것으로 나누고 급기야 자기 외의 모든 것은 악이요 이단이 되는 절대주의, 근본주의에 빠지기도 한다.

    당연한 말이지만 신의 종교가 아닌 인간의 종교인 이상 모든 종교에는 성․속이 함께 하기 마련이다. 예수 역시 인간의 몸을 빌려 태어난 인간의 아들이자 신의 아들이었지 않은가.

    모든 근본주의와 마찬가지로 기독교 근본주의 역시 속된 것과의 분리, 교제의 단절, 악의 배격을 주장하는데 그 이유 중 하나가 강력한 악의 전염성과 하나님의 명예를 지키기 위함이다. 거룩함, 성스러움을 추구하는 근본주의 입장에서는 미국 기독교 주류이자 부시의 든든한 후원자였던 빌리 그레이엄(Billy Graham) 목사로 대표되는 (신)복음주의는 너무 속되고 대중적이며 너무 실용주의, 상업주의에 빠진 부도덕하고 타락한 이단으로 보이겠지만 진보주의, 리버럴리스트에겐 매우 비타협적이고 편협한 보수주의로 비치기도 한다. 관대함과는 거리가 먼 고집불통, 독불장군, 정치적으로 보수적이며 부도덕하고 동시에 편협한 속된 복음주의자라는 최악의 조합! 누가 떠오르는가?

    부시는 하나님의 이름을 드높였나. 이명박으로 인하여 비기독교, 대중들은 하나님과 기독교에 대해 좀 더 호의를 갖게 되었나.

    ‘기록된 바와 같이 하나님의 이름이 너희로 인하여 이방인 중에서 모독을 받는도다’[로마서 2:24] 적그리스도, 거짓 선지자뿐 아니라 일반 성도들까지 스스로 몸가짐을 삼가야 할 것이다. 재물이라는 마몬의 우상이 맹위를 떨치고 더욱 세속화된 현대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더욱 삼가고 경계해야 할 일이다.

    악에 대해서 불관용하면서도 여전히 관용의 자세를 어떻게 견지할 수 있을까. 어떻게 성스럽되 완고하지 않고 속되되 비루하지 않을 수 있을까. 어려운 문제다!

 

선한 의지, 신앙의 허약함과 인간의 탐욕, 허위의식에 대한 환멸을 불러일으키는 영화 <도그빌>
성찰없이 무지하고 편협한 독선은 허위이며 그 자체로 악이다.

사과(선악과?!)상자 속에 숨어 탈출하려는 그레이스(니콜 키드먼 분)의 계획은 수포로 돌아가고
마을 사람들은 Grace(우아한, 은총)에게 도망치지 못하도록 개목걸이를 채운다.
평범한 작은 마을 도그빌의 평범한 청교도 주민들이 연약한 이방인 그레이스를 유린하기 위해
담합하여 악과 타협하는 장소는 교회이다.
하지만 그들 앞엔 그레이스의 심판이 기다리고 있는데......

 

 

    진리는 하나다. 신도 하나다.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길 수 없듯이‘[마태 6:24, 누가 16:13] 다른 신도 겸하여 섬길 수 없다.

    유일신 하나님의 가르침으로 볼 때 역설적으로 선은 편협하다. 세상에 관용적이면서도 악에 대해 관용하거나 흥정하지 않는다는 ‘관용의 역설‘과 상통하는 ’선의 역설‘로서 선의 편협성이란 말은 부정적으로도 쓰일 수 있고 긍정적으로도 쓰일 수 있다. 긍정적이라기보단 때론 편협한 선만이 선일 수 있고, 때론 편협해질 수밖에 없는 것이 하나님이 지으신 이 지상의 선이라는 묵시론적 숙명이랄까. 세계는 선하지 않고 인간은 원죄를 지닌 구원받아야 할 존재로 보는 한 옳은 길은 좁고 험난하며 현실 역시 대개 그러하다. 선은 소수고 때론 외로이 혼자일 수도 있다.

    하지만 진리, 정의, 종교의 이름으로 인간은 얼마나 많은 오류와 죄악을 저질렀나. 학살, 이념전쟁, 종교전쟁, 인종청소 등의 죄악은 무지한 확신과 편협한 독선의 위험성을 웅변하고 있다. 극단적 근본주의는 때론 현실을 도피하여 산으로 강으로 자신 안으로 숨어들기도 하지만 대개 독선으로 흘러 타자를 적대시하고 분리, 배격, 제거하여 결국에는 폭력, 독재, 전체주의에 이르곤 했다. 선악을 분별하고 사물을 분류하는 능력이야말로 인간을 인간답게 하는 축복인 동시에 죄악을 잉태한 씨앗이기도 하다.

 

    먼저 옳게 분별해야 한다. 분별한 것에 대해서 관용의 태도를 견지해야 하며 내가 동의할 수 없는 것에 대해서 관용할 것과 불관용할 것을 다시 분류해야 한다. 되도록 관용은 최대, 불관용은 최소로 해야함은 물론이다.

    그대는, 나는 반칙, 부패, 불의에 대해 잘 참는가? 아니면 나와 다른 출신, 생김새, 패션, 입맛, 스타일에 잘 참는가? 부패, 불의에 무감각하면서도 나와 다른 취향에 쉽게 분노하고 흥분하고 있지는 않은가? 자신에겐 관대하면서도 타인에겐 가혹하진 않은가? 피해자임만을 주장하는 가해자이진 않은가?

    불관용도 죄이다. 관용이 결여된 선은 애당초 존재치 않으며 그 자체로 악이다. 배고픔에 빵을 훔친 장발장에게 19년형을 선고하는 것도 죄이고, 홀로코스트의 피해자이며 다윗의 자손임을 자처하면서 스스로 골리앗이 되어 가자지구를 천장 없는 감옥, 거대한 공동묘지로 만드는 것도 죄요, 삶의 벼랑에 선 철거민들을 법의 이름을 빌려 토끼 몰듯 막장으로 내몰아 결국 미필적 고의로 죽음에 이르게 한 것도 죄다.

    살인을 사형으로 단죄한다면 강간을 강간으로 단죄할 텐가. 관용은커녕 뺨을 맞으면 팔다리를 부러뜨려 천배만배 되갚으려 하니 인심이 메마르고 정서가 황폐화되었다. ‘원수를 사랑하고[마태 5:44] 누가 오른뺨을 치거든 왼뺨마저 돌려대라’[마태 5:39]고 했다. 최후의 순간까지 회개와 구원의 가능성을 믿는 기독교도라면 적어도 사형제만큼은 반대해야 한다.

 

    우리는 관용이 넘치는 넉넉한 사회에서 점점 멀어지고 있다. 재산도 성적도 모두 숫자로 치환, 계량화될 뿐 정작 인간이 설 자리는 점점 좁아지고 있다. 부모들은 자식들의 지위, 재산을 위해 자녀들은 배우자의 재산 혹은 미모를 위해 인성보다 지식, 우정보다 경쟁에 내몰리고 있다. 사회도 어른들도 우리 아이들에게 영어단어, 수학공식 외에 딱히 가르쳐줄 수 있는 능력과 의지를 상실했다. 그 이상은 교과서를 배반하는 현실을 볼 때 위선이요 비웃음의 대상일 뿐이다. 인성, 우정, 관용, 박애, 평등, 사랑, 도덕과 함께 잠도 빼앗기고 꿈도 빼앗기고, 수줍은 웃음과 맑은 눈동자마저 빼앗긴 우리 아이들은 영어도 선행, 수학도 선행, 천한 세속적 가치관마저 선행학습하며 점점 영악하고 되바라진 애늙은이로 변해가고 있다. ( 참조 http://www.i-rince.com/2512515 )

    학업성취도에 앞서 우리 아이들의 인성성취도는 얼마나 될까? 가르치려고도 않고 신경쓰지도 않으며 그럴 여유도 없다. 있는 집 부모들은 날선 칼에 긴 창을 들려보내며 안심해하고, 없는 집 부모들은 무기는 고사하고 변변한 갑옷하나 입혀 보내지 못하는 게 안타깝고 불안할 뿐이다. 세상은 험하니 도태되고 당하지 않으려면 스스로 살아남기 위해 죽기살기로 공부하고 수단방법도 가리지 말라는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만 있을 뿐이다. 이것이 삶의 경험에서 오는 기성세대의 생생한 가르침이다.

    각박하고 고단한 현실에 인성과 관용을 얘기하기는 너무 한가하다. 현재의 한국은 ‘나도 좀 먹자’의 아귀다툼이요, ‘같이 좀 살자’의 절규의 상황에 접어들고 있다는 것이 내 판단이다.

    민주란 뭔가? 국민이 주인이란 소리다. 공화란 뭔가? 밥 좀 같이 먹자는 거다. 화(和)자를 파자하면 벼(禾)옆에 입(口)이 있으니 모두 배부르게 먹을 수 있다면 얼마나 행복하겠는가. 배부르게 먹지 못하더라도 골고루 먹을 수만 있다면 분란은 없을 것이다. 共和(함께 먹는 것)만이 平和(골고루 먹는 것 곧 Peace)를 담보할 수 있다. 국민이 주인되어 모두 다함께 골고루 밥 좀 같이 먹자는 거다. 그래서 민주공화국이다.

    하지만 지금은 ‘동물공화국, 동물의 왕국이다. 대한민국의 주권은 상위 1%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대통령과 그의 형으로부터 나온다.’ 진보신당 노회찬 대표의 말이다. 이명박 정권이 가는 길이 외롭고 좁고 험난해 보이긴 하지만 옳은 길인 것 같지는 않다.(조중동이 있어 외롭지는 않을라나!)

 

    불관용의 사회. 돌봄은 없고 효율과 경쟁만을 권하는 사회. 만인에 대한 만인의 아귀다툼. 이웃이 이웃을 해하고 부모가 자식을 팔아먹고 자식이 부모를 죽이고 결국에는 자기 이외의 모두를 적대하고 제거하여 이 넓은 우주에 홀로 남겨진 후 종국엔 팔이 다리를 베어내고 이빨이 혀를 씹어먹고야 말 것이다. 유황불이 아니라 이것이야말로 바로 지옥의 모습이다.

 

 

[3]

 

선악과를 먹는 아담과 이브. 미켈란젤로가 시스티나 예배당 천장에 그린 프레스코화.

 

 

    아담과 이브는 선악수의 열매인 선악과를 먹고 부끄러움을 알고 선과 악을 구별했다. 선악수는 영어로 ‘Tree of Good and Evil’, ‘Tree of Knowledge’다. 즉 선악을 아는 것, 지식, 인식, 안다는 것 자체가 곧 죄의 시작이다. 선악은 동전의 양면이니 선을 아는 것은 곧 악을 아는 것이요, 선만 알고 악은 건너 뛸 수는 없는 법이다.

    분별함은 하나님이 신에 버금갈 수 있도록 인간에게 주신 축복의 재능인 동시에 모든 죄악의 근원, 곧 원죄인 것이다.

    함부로 분별하지 말아야 한다. 함부로 단죄해서도, 용서해서도 안 된다. 강한 것, 악한 것에 관용해서는 안 되고 약한 것, 선한 것에 가혹해서는 안 된다. 도덕적 감수성을 유지하고 선이 온 하늘을 뒤덮고 정의가 강물처럼 흐르는 사회를 열망하되 그것이 독선으로 흐르지 않도록 항상 경계하고 함부로 확신하지 말아야 한다. 겸허한 성찰과 치열한 분별은 우리의 오류와 죄를 적게 할 것이다.

 

    ‘확신이란 우둔함의 표현이다. 그래도 우리가 할 수 있는 유일한 것은 조용히 구분하는 이성의 견지이다’-카프카(Kafk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