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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 신앙생활

성경읽기 0057 : 에스겔 1장~18장

어멍 2011. 2. 15. 00:27

    성경읽기 0057 : 에스겔 1장~18장



    저자 : 에스겔

    주요 인물 : 에스겔, 시드기야, 느부갓네살

    핵심어 : 환상, 파수꾼

    주요 내용 : 제사장 겸 예언자인 에스겔의 환상과 예언으로 1인칭으로 서술되어 있다. 하나님의 계획에 대한 환상을 본 에스겔은 그에 충실해 백성들을 권면하고 때로 경고하기도 함으로서 하나님의 파수꾼 역할을 잘 감당한다.



1장 4절

나는 북쪽에서 폭풍이 불어오는 것을 보았다. 번개가 번쩍거리고 환한 빛으로 둘러싸인 커다란 구름이 밀려오고 있었는데, 불 한가운데에는 쇠붙이 같은 것이 빛나고 있었다.

5절

불 속에는 살아 있는 네 생물의 모양이 보였는데, 겉으로 보면 모두 사람의 형체 같았다.

10절

생물들의 얼굴은, 앞쪽은 사람의 얼굴, 오른쪽은 사자의 얼굴, 왼쪽은 황소의 얼굴, 뒤쪽은 독수리의 얼굴이었다.

26절

창공 너머로 청옥으로 만든 보좌 같은 것이 있었고, 보좌 위에는 사람과 같은 형체가 보였다.

27절

그의 허리 위쪽은 속이 환히 들여다보이는 불에 달군 쇠같이 보였고, 허리 아래쪽으로는 사방으로 비취는 불처럼 보였다. 이처럼 밝은 빛이 그를 둘러싸고 있었다.

 

    에스겔이 본 환상을 묘사하고 있다. 말 그대로 환상적이고 회화적이다. 여기서 에스겔은 주님의 목소리를 듣고 그 명령에 따라 파수꾼, 곧 그 말씀을 백성들에게 전하는 예언자의 소임을 다하게 된다.


    10절의 네 생물의 네 얼굴에 대한 해석은 아래 표와 같다.

 

첫 번째 해석

두 번째 해석

세 번째 해석

사람

인간

지혜

인간으로 오신 예수님

사자

야생동물

왕으로 오신 예수님

가축

충성

종으로 오신 예수님

독수리

민첩함

하나님의 아들로 오신 예수님


    첫 번째 해석은 하나님이 창조하신 피조물 가운데 대표적인 것을 상징한다. 두 번째 해석은 능력, 덕성을 상징한다. 세 번째 해석은 앞으로 오실 메시아 예수님의 의미를 상징한다. 개인적으로 첫 번째보다는 두 번째와 세 번째 해석에 더 맘이 간다.



예언하는 에스겔 - Gustave Dore



13장 19절

너희는 보리쌀 한 움큼과 빵 한 조각을 벌기 위해 내 백성 가운데서 나를 욕되게 했다. 너희는 거짓말을 곧이듣는 내 백성에게 거짓말을 하여, 죽어서는 안 될 사람들을 죽이고 죽어야 할 사람들을 살렸다.

 

    하나님이 에스겔의 입을 빌어 예루살렘과 이스라엘의 죄를 꾸짖고 있다. 백성들 역시 그 죄에서 자유롭지 않으나 하나님은 백성들을 잘못된 길로 인도한 예언자, 제사장들을 더욱 호되게 꾸짖고 있다. 에스겔과 거짓예언자들과의 대립관계, 적대관계는 예레미야와 그 외의 거짓예언자들과의 관계와 동일하다.

    거짓예언자들은 악하다. 탐욕에 빠져 하나님의 이름을 함부로 부르고 이용하여 하나님을 욕되게 한다. 그들의 예언과 말에 현혹되어 그들을 믿고 따르는 백성들은 무지하고 어리석다. 선한 것은 아니되 악하기보단 약하다. 의로운 것은 아니되 고약하기보단 어리석다. 성스러운 것은 아니되 비루하기보단 소박하다.


    일단 어떤 이의 무슨 말이든 곧이듣는다. 믿고 본다. 그 말이 달콤하고 편안하고 입맛에 맞는 말이라면 더욱 믿음이 간다. 갓 태어난 연약하고 순진무구한 새끼 오리가 처음으로 눈을 뜨고 맞추는 대상을 어미로 알고 평생 따라다니듯 그 백지상태의 영혼에 각인되면 그 믿음은 무조건적 맹신이 된다.

    한편으론 교언영색, 감언이설로 아부하고 한편으론 겁을 주며 증오바이러스, 잘못된 생각의 씨앗을 퍼뜨린다. 그들은 아부와 사교성이 능하고 시기, 질투, 공포, 불안, 증오, 탐욕 같은 인간의 어둡고 얄팍한 심리를 이용하는데 일가견이 있다. 그들은 똑똑한데다가 사악하기까지 하다. 푸근한데다가 부지런하기까지 하다.

    일단 같은 편임을 무의식에 심어놓고 자신의 이익을 방해하는 적을 같이 미워하게 한다. 이렇게 그들로 인하여 맑고 어린 순박한 영혼들, 젊고 건강한 빛나는 선남선녀들이 잘못된 길로 들어서게 된다. 유혹에 약한 존재인 인간이 이렇게 약한 것에서 악한 것으로, 어리석은 것에서 고약한 것으로, 소박한 것에서 비루한 것으로 타락한다.


    그래서 큰 악인은 작은 악인들을 거느리고, 작은 악인들은 그를 추종하는 아직 성숙되지 않은 더 작은 악인들에게서 힘을 얻는다. 유유상종! 한통속이 되어 어울리고 세력을 이루어 어둠이 빛을 좀먹듯 하나님의 공의와 선을 잠식한다.

    의인은 악인의 회중에서 버텨낼 수 없고 악인 역시 의인의 회중에서 버텨낼 수 없다. 의인의 회중은 악인을 용납할 수 없고 악인의 회중 역시 의인을 용납할 수 없다. 그래서 죽어서는 안 될 사람들을 죽이고 죽어야 할 사람들을 살린다.

    의인들은 쫓겨나 도망다니거나 결국은 제거되어 이 지상에서 자취를 감춘다. 종국에는 악인들만 남는다. 악인의 권세만 판치는 세상이 된다. 가짜가 진짜를 몰아내고, 악화가 양화를 구축하는 악순환이다.


    무엇이 참이고 무엇이 거짓인가? 무엇이 선이고 무엇이 악인가? 누가 하나님의 신실한 진짜 예언자이고 누가 하나님을 모욕하는 가짜 예언자인가? 무엇이 진짜 간증이고 무엇이 가짜 환상인가? 어렵다! 약하고 어리석은 불완전한 인간, 영성의 눈을 뜨지 못한 평범한 신자에게 이것을 구별하기는 너무도 어려운 일이다!

    우선 탐욕에서부터 벗어나야 한다. 불교에서도 인간이 벗어던져야할 세 가지로 탐진치(貪嗔癡)를 든다고 한다. 곧 ‘욕심’과 ‘성냄’과 ‘어리석음’으로 인간의 마음을 상하게 하는 세 가지 독이라 해서 삼독심(三毒心)이라고 한다. 모든 죄악이 여기서부터 비롯되므로 이것은 하나님의 말씀과도 상통한다. 욕심을 버리고, 성내지 않고 언제나 온화하기를 힘쓰며, 어리석음을 경계하여 항상 자신을 돌아보고 부단히 깨어있어야 한다.

    다음으로 하나님만 바라봐야 한다. 예언자, 선지자, 성인들을 흠모하고 배우고 따라야 하나 그 근본은 하나님이다. 아무리 선하고 의롭고 성스러워도 인간으로서 가지는 한계가 있다. 불완전한 인간인 내가 불완전인 인간인 타인을 바라본다는 것은 시작부터 많은 실수와 오해의 가능성을 내재하고 있다.

    인간을 존중하고 서로 간에 겸손하라.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그 앞에 엎드려 경배하라.



18장 20절

죄를 짓는 바로 그 사람이 죽을 것이다. 아버지의 죄 때문에 아들이 벌을 받는 일은 없을 것이다. 또 아들의 죄 때문에 아버지가 벌을 받는 일도 없을 것이다. 이는 의로운 사람의 의는 그 사람의 것이며, 악한 사람의 악도 자기의 몫이기 때문이다.

23절

나는 악한 사람이 죽는 것을 즐거워하지 않는다. 나 주 여호와의 말이다. 나는 그가 그 악한 길에서 돌아서서 살기를 바란다.

32절

나는 누구든 죽는 것을 즐거워하지 않는다. 회개하여라. 그러면 살 수 있다.

 

    성경은 연좌제를 인정하지 않는다. 이것을 뒤집어보면 의(義)와 공(功) 역시 각자 자기 몫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부모의 죄를 자식에게 물을 수 없듯이 부모의 공이 곧 자식의 공이 되는 것은 아니다. 핏줄을 타고 이어지는 독특한 유전적 형질이 있고, 고유한 가풍이 있는 것은 참고해야겠지만 무조건적인 부의 상속과 권력의 세습은 하나님의 말씀에도 맞지 않는 것이다.

    개인의 책임을 강조하는 이러한 (당시 고대에는) 독특한 가르침은 윤리적으로, 집단적 범죄가 개인의 범죄에 대한 변명이나 이유가 될 수 없음을 분명하게 천명하고 있다. 사회가 썩었다고, 세상이 타락했다고 자신의 죄가 정당화되는 것은 아니다. 전후좌우 사방에서 깨고 부수고, 괴성을 지르며 짓고 까분다고 거기에 부화뇌동해서는 안 된다. 누구는 몇백억을 해 먹는데 고작 몇십만원 해 먹은 것이 무슨 죄냐고 항변할 수 없다. 모든 사람은 자기의 죄에 대해서 스스로 책임을 져야만 하고 자기가 세운 공에 대해서 보상받아야만 한다.


    이것을 정치사회적으로 좀 더 확장해서 해석한다면 출생에 따라 신분이 정해지는 봉건제와 카스트 제도를 뿌리째 뒤흔드는 위험한 생각, 혁명의 단초가 될 수도 있다. 진(秦)나라 때 최초로 반란을 일으킨 진승과 오광이 내세운 명분도 "왕후장상의 씨가 어디 따로 있더냐!"였다. 지금은 삼족을 멸하고, 구족을 멸하지도 않고 갓 태어난 애기씨를 옥좌에 앉히고 문무백관이 엎드려 절하지도 않지만 그 흔적이 남아있는 것이 사실이다.

    군대, 법원, 경찰에 불려 가면 "아버지 뭐하시냐?"란 말을 가장 먼저 듣기도 한다고 한다. 골품제, 사농공상의 신분제 등 유교사상의 부정적인 면과 전근대적인 봉건사상이 아직도 우리에겐 은연중에 많이 남아있다. 당사자를 보지 않고 그를 둘러싼 뒷배경, 출신성분을 먼저 따지는 식이다.

    가끔 연로한 옛 어르신들이 버릇없는 젊은이를 꾸짖으며 "사람의 근본은 속일 수 없다"고 혀를 끌끌 차시는 것도 그 흔적의 일부분이다. 이 때의 근본이란 곧 핏줄, 가문, 족보를 뜻하는 출신성분인 것이다. 그런 면에서 2500여년 전의 성경말씀은 생각보다 진보적이다. 앞서 있다. 당시에는 과격하고 혁명적이기까지 하다.


    의로운 선지자이자 명철한 판관이었던 사무엘의 자식들은 모두 못나고 부도덕했다. 그래서 백성들은 사무엘이 늙고 쇠약해져 죽을 때가 가까워지자 사무엘에게 아예 왕을 세워달라고 요구한다. 아무리 의롭고 유능하고 신실한 주의 종이라도 자식농사만큼은 제 맘처럼 되지 않는가보다.

    이런 비슷한 예는 역사에서, 우리 주위에서 숱하게 볼 수 있다. 연개소문의 아들이 그랬고 안중근의 아들이 그랬다. 이미 전에 다루었던 이야기들이다. 반대로 악인에게서 의인이 나오고, 평범한 부모에게서 비범한 영웅이 나온 경우도 숱하게 많다.


    의로움도 악함도 각자 자신의 몫이다. 심판을 받든 축복을 받든 자기 하기 나름이다. 하지만 하나님이 궁극적으로 원하시는 것은 죽음이 아니라 생명이다. 파괴가 아니라 회복이다. 어둠이 아니라 빛이다. 저주가 아니라 축복이다. 다만 인간이 이를 거부하고 어리석게 죄와 어둠의 길을 자초하는 것이다. 심지어 악마라도 회개하여 의로운 길로 들어선다면 죽음을 면하여 다시 살아가기를 바라신다.

    어떻게 그럴 수 있을까? 쉽게 수긍하기 힘든 일이다. 하지만 여기서의 회개는 불완전한 회개, 부분적인 회개, 일시적인 회개, 거짓 회개가 아니다. 완전한 회개, 전적인 회개, 거듭되는 회개, 참 회개다. 한마디로 완전히 거듭나는 것이다. 회개를 준비하고 죄를 짓는 나태한 회개, 유치한 회개 역시 물론 아니다. 그런 용서받기 위한 알리바이, 변명거리에 그치는 회개는 거짓 회개이다. 참 회개란 길게 죄 짓고 짧게 회개하는 것이 아니라 짧게 죄 짓고 길게 회개하는 것, 거듭 참회하고 완전히 속죄하는 것이다. 날로 먹는 것이 아니다.


    인간이 완전한 존재, 영원한 존재는 아니니 죄 짓고 회개하고, 회개하고 죄 지을 수는 있다. 완전한 의인이 없으니 완전한 악인 역시 있을 수 없다. 하지만 선한 사람이 악인이 되면 심판받고 악인이 선한 사람이 되면 용서받듯이, 죄 짓고 회개하면 살고 회개하고 죄 지으면 죽을 것이다. 누가 판단하는가? 인간도 판단하고 하나님도 판단한다.

    인간사회의 법과 제도는 인간의 판단과 선택에 의해 돌아간다. 유무죄와 형량의 판단도 인간이 하고 대통령, 국회의원 역시 우리가 판단하여 우리 손으로 뽑는다. 법에서도 죄질, 상습범 등을 고려하여 가중처벌하기도 하고 기왕의 공(功)과 사회적 기여, 전후사정을 고려하여 정상을 참작하기도 한다. 하지만 모든 판정이 완벽하고 공의로운 것은 아니며 선출된 모든 지도자들이 선하고 의로운 것도 아니다. 판단하는 인간, 선택하는 우리가 완전하지 않기 때문이다.

    결국은 궁극적인 판단은 하나님의 몫이다. 그 분의 권능이다.


    나는 누구든 죽는 것을 즐거워하지 않는다. 회개하여라. 그러면 살 수 있다. 하지만 회개를 면죄부로 알고 함부로 죄를 짓고 쌓는다면 죽을 것이다. 나는 누구든 죽는 것을 즐거워하지 않지만 이런 간악한 악인, 거짓 백성들만은 예외이다. 이는 알고도 죄를 범한 것이기 때문이다. 나를 너희의 악행에 이용했기 때문이다. 내 심판을 면치 못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