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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 책읽기

<본 투 런(Born To Run)> 리뷰

어멍 2023. 8. 21. 21:04

 

<본 투 런(Born To Run)> 리뷰

 

<본 투 런>

인류가 경험한 가장 위대한 질주

 

    리뷰를 작성하기 전에 잠시 이 글을 어느 카테고리에 올려야 하나 고민했다. [러닝, 마라톤]? 아니면 [문학, 책읽기]? 어느 쪽도 틀린 것은 아니지만 정말 잠시잠깐 고민했을 뿐, 바로 [문학, 책읽기] 카테고리에 넣기로 했다. 이 책은 러닝을 말하지만 러닝 그 이상을 이야기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책은 마라톤 관련 블로그를 둘러보다가 우연히 소개글을 접하고서 처음 알게 되었다. ‘Born To Run’이란 제목에 꽂혀(브루스 스프링스틴이 부른 동명의 명곡도 있다) 읽어보았는데 러너들에겐 이미 꽤 알려진 세계적 베스트셀러였다. 평이 좋아 인터넷 서점에서 검색해보니 예전에 읽은 <New 마라톤 교본>이나 <마라톤에서 지는 법>과는 다르게 [건강, 스포츠], [에세이]가 아닌 [인문, 교양]으로 분류되어 있었다. - 뭐지? 러닝과 인문이란 이 색다른 조합은?!

    확실히 이 책은 달리기책이면서 달리기책이 아니다. 달리기 기술에 대한 책도 아니고 달리기에 대한 가벼운 에세이도 아니다. 넓게는 인류학과 연결되고 깊게는 진화생물학에 대해 말하고 있다. 공간적으로는 아메리카와 아프리카를 넘나들고 시간적으로는 호모에렉투스(직립원인)의 선사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기자, 칼럼니스트이자 울트라러너인 저자 크리스토퍼 맥두걸(Christopher McDougall)의 문장은 탁월하다. 이야기를 엮어가는 솜씨는 소설가 못지않고 표현은 시인에 버금가고 유머와 재치는 코미디언 뺨친다. 다음 코너를 돌면 무슨 풍경이 펼쳐질까 궁금할 정도로 아름다운 마라톤 코스를 뛰는 것처럼 흥미진진하다. 가끔은 웃음짓게 하는 아기자기하고 재미난 풍경을 만나기도 하고 장엄한 풍경이 느닷없이 펼쳐지며 가슴이 웅장해지기도 한다.

    이것은 달리기에 미친 전설적인 울트라러너들의 믿을 수 없는 놀라운 이야기다. 각각의 사연과 장기를 자랑하는 어벤저스의 괴짜 영웅들처럼 흩어졌다 모였다 하며 자신만의 이야기, 그들만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위대한 달리기와 위대한 러너의 만남, 위대한 러너들의 위대한 만남이다!

    만약 이 이야기를 다큐가 아닌 극영화로 만든다면 관객의 이해를 돕기 위해 오프닝 화면에 다음 문구를 올려야 한다. “이 영화 속에 등장하는 인물, 지명은 실존하며 이 영화는 실재 있었던 이야기를 재구성한 것입니다.” 그래야만 관객은 <어벤저스>나 <록키>, <람보> 류의 영화와 구별할 수 있을 것이다.

 

    어떻게 평지도 아닌 가장 높은 산맥과 가장 깊은 협곡을 거쳐 밤낮을 가리지 않고 100여 k를 넘게 달리는 것을 믿을 수 있겠는가? 어떻게 신기루와 환각을 볼 때까지 50도가 넘는 사막의 열기 속을 달릴 수 있을까? 어떻게 96k에서 자신이 흘린 땀과 침 위에 10여 분간 기절한 듯 대자로 뻗었다가 다시 벌떡 일어나 224k 결승선을 1위로 통과할 수 있을까? 어떻게 사슴이 발굽이 닳고 기진맥진해서 쓰러질 때까지 두 다리만으로 추격해 사냥에 성공할 수 있을까? ......

    하지만 이러한 초인적인 능력과 기이한 이야기에서 우리가 느끼고 얻을 수 있는 것은 경탄과 재미만은 아니다. 분명 그 이상이 있다. 그것은 보다 근원적인 질문과 해답들이다. 바로 ‘우리는 어떻게 달려야 하는가’보다 ‘왜 달리는가?’ ‘우리는 어디까지 달릴 수 있느냐’가 아니라 ‘달리기는 우리를 어디로 이끄는가’에 대한 이야기다.

 

    책을 읽고 나면 유일한 정답 혹은 모든 해답의 모음을 얻을 순 없지만 답의 일부 혹은 답에 이를 수 있는 힌트를 얻을 수 있다. 그리고 마라토너든 아니든 지금 당장 뛰쳐나가 바람을 벗 삼아 대지를 뛰고 싶은 욕구에 조바심이 날 것이다.

 

    감상평은 이쯤에서 마치고 책 속으로 들어가 원문(파란색) 몇 대목만 인용해보기로 한다.

 

  앤은 타라우마라 족을 뒤쫓는 대신 위험을 택했다. 타라우마라 족이 자신을 뒤쫓도록 하는 전략을 택했다. 그러면 누가 더 열심히 달리겠는가? 포식자인가 먹이인가? 사자는 먹이를 놓치면 다음에 다시 사냥할 수 있지만 영양의 실수는 한 번뿐이다. 타라우마라 족을 이기기 위해서는 의지력만으로는 안 된다는 것을 앤은 알았다. 두려움이 필요했다. - 128,129p

 

    인간은 언제 가장 빨리, 가장 멀리, 가장 잘 달리는가? 충분히 먹고 꿀잠을 잔 후 최상의 컨디션에서? 10년간 갇혀있다 탈출에 성공해 감옥을 막 벗어난 직후? 이도 가능하지만 생존이 걸렸다면? 필사적일 수밖에 없다!

    이것은 영양도 마찬가지지만 사자도, (원시의) 인간도 마찬가지다. 사자도 매번 사냥에 실패한다면 굶어죽을 수밖에 없고 인간은 쫓든 쫓기든 생존을 위해 뛰지 않을 수 없다. 인간은 영양을 쫓으면서도 사자에게 쫓기고 방긋방긋, 옹알옹알 자신이 먹여 살려야 할 아기들의 귀여움 공격에도 쫓겨야 한다.

    비록 상상속이지만 이렇게 살기 위해 필사적으로 뛰었던 적이 있다.

 

    2019년 전국마라톤협회가 주최한 마라톤대회 하프코스는 남녀 각각 100위까지 트로피를 내걸었다. (☞ 2019 전마협 하프 완주 후기) 난생 처음 트로피를 타내려는 욕심에 엉뚱하고 몹쓸 상상을 하였는데 ......

    바로 여장하고 뛰는 것이다. 하지만 트로피를 따내는데 성공한다 해도 위험을 감수해야했다. 가뜩이나 늘씬한 몸매에다, 45도 발사각의 C컵 뽕브라 위에 섹시한 우물 배꼽이 훤히 드러나는 크롭탑을 입고, 짙은 스모키 화장을 하고 뛴다면 그 미모와 인기를 어떻게 감당할 것인가!!

 

화장 이렇게 하는 남자들 목적?

여장한 채 마라톤에 출전하여 트로피를 타내려고!

 

    전에 알던 내가 아냐! 볼수록 아름답고 신기하구나! - (소름끼치게도) 거뭇거뭇 우람한 수컷들이 미친듯이 거친 숨결에 흙먼지를 일으키며 두-두-두-두- 밀치고 다투며 줄줄이 따라 붙을 기세다. 나를 향한 좋아하는 저 눈빛은 먹음직한 사냥감을 향한 눈빛인가? 아리따운 암컷을 향한 눈빛인가?

    풍만한 젖가슴과 별빛을 담은 눈망울의 이 아름다운 꽃사슴이 기쁜 낯빛에 이빨을 드러내고 달려드는 거친 사자떼에게 쫓기는 이 안타까운 절체절명의 순간! 필요한 것은 살아남기 위한 능력이상의 뜀박질 밖에 없다. 잡히지만 않는다면 트로피는 따 논 당상이고 하프 한국신기록 달성이다!!

    시작은 부정(不正)이지만 결과는 위대하다. 시작은 비겁함이지만 결과는 결연함을 넘어 비장함이다. 바로 나 자신을 죽기를 각오하고 표범과 사자가 우글거리는 사냥터의 사냥감으로 내던지는 거다.

 

    하지만 이것은 예외적인 경우 쓸 수 있는 비상전략이다. 강을 넘기 전엔 배수진(背水陣), 강을 넘은 후엔 파부침주(破釜沈舟, 솥을 부수고 배를 가라앉힘)하는 올인 전략, 벼랑 끝 전략으로 보기엔 멋있지만 성공확률은 낮다.

    실재 경기에서는 처음부터 선두로 치고나가 끝까지 1위로 골인하는 경우보다 페이스를 유지하며 힘을 비축한 후발주자에게 중간 혹은 결승선 얼마 앞두고 추월당하는 경우가 더 흔하다. 결국 마녀라 불린 앤 트레이슨도 타라우마라 족에게 추월을 허용하고 만다.

    선두에 선다는 것은 독기와 자신감이 필요한 행동이다. - 129p 하지만 이것만으론 부족하다. 실력! 그것도 월등한 실력이 뒷받침되어야 한다.

 

  몸에 정신을 집중해야 한다. 자신의 숨소리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등줄기에 땀이 얼마나 흐르는지 의식해야 한다. - 105p

 

    달리기를 하다보면 가끔은 러너스하이 같은 기쁨과 환희의 순간이 오기도 한다. 마라톤을 하다보면 반드시 몇 차례 넘기 힘든 고비, 고통의 순간이 찾아온다. 어떻게 달리기의 기쁨을 오래, 깊게 느끼고 고통의 고비를 가볍고, 슬기롭게 넘길 수 있을까?

    두 가지 방법이 있다. 하나는 정신이 밖으로 외출하는 것, 하나는 정신을 안으로 더욱 집중시키는 것이다.

 

    달리면서 딴 생각, 좋은 생각, 기쁜 생각을 한다. 뙤약볕을 달리면서도 서늘한 풀장 안에 몸을 담그고 과일화채를 먹는 상상을 한다. 길고 가파른 언덕을 오르면서도 결승선의 환호성과 뒤이어 주어지는 달콤한 휴식을 상상한다.

    힘이 난다. 상상력이 풍부한 러너라면 오버 앤 오버, 계속해서 고비를 넘길 수도 있다. 하지만 먼 길을 가려면 턱없이 부족하다. 언젠간 한계가 있기 마련이고 무엇보다 이것은 달리기의 정수가 아니다. 우리가 달릴 때 느끼는 좋은 느낌, 순수한 행복감은 이 순간이 아니다.

 

    이와 반대로 힘들수록 온 몸의 세포가 느끼는 감각에 더욱 집중하는 방법이 있다. 발바닥으로 지면의 부드러움 혹은 탄탄함을 느낀다. 귀로는 자신의 숨소리와 귀밑머리를 가르는 바람소리를 듣는다. 등줄기를 타고 또르르 내려가는 땀방울과 허벅지 털 사이를 간지르는 부드럽고 시원한 바람을 느낀다. .... 하지만 이런 좋은 느낌, 로맨틱한 감각만 있는 것은 아니다.

    고통은 실재다. 피로는 물리다. 탈수, 젖산축적, 혈당저하는 아무리 정신을 집중시켜도 해결되는 문제가 아니다. 하지만 이 경우에도 러너는 정신을 안으로 집중시켜야 한다. 좋을 때도 정신을 집중시키고 힘들 때는 더욱 더 정신을 안으로 집중시킨다. 고통, (극도의) 피로, 환각을 거쳐 정신이 강제로 외출당하지 않는 한 최대한 정신을 집중시킨다. 더 자주, 더 솔직하게 자신의 몸 상태가 어떤지 스스로에게 물어야 한다.

 

언제나 펄떡이며 강물을 거슬러 오르는 힘찬 연어를 꿈꾸지만

어느 순간 타닥타닥 오그라드는 숯불 위의 오징어를 면할 수 없다.

 

    고통에서 달아나지 말아야 한다. 이것은 잔인한 전쟁이 아니라 고통과 벌이는 재미난 게임이다. 고통을 없애거나 굴복시키려 말고 고통을 벗 삼아 익숙해져야한다. 어르고 달래며 고통을 통제해야한다.

    결론은? 순수함과 단순함, 기쁨과 고통까지... 과장하자면 죽을 것 같은 고통의 순간도 이대로 죽어도 좋을 것 같은 환희의 순간도... 러너는 달리기가 주는 모든 것을 있는 그대로 온 몸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달리기에서 아무것도 얻으려고 하지 말라. 그러면 상상한 이상을 얻게 될 것이다. - 144p

 

    그렇다! 중요한 것은 달리기와 하나가 되는 것이다. 그러면 된 것이다. 그것으로 충분하다. 그 외의 것은 모두 부차적인 것이다.

 

    우리는 더 이상 먹기 위해, 먹히지 않기 위해, 짝짓기 위해 달리지 않는다.(쉬는 시간 매점으로 달려가는 중고딩은 예외!) 그러면 우리는 무엇을 위해, 왜 달리는가?

    메달이나 트로피를 얻기 위해? 경쟁에 이기기 위해? 더 빨리, 더 멀리, 자신의 기록을 갱신하기 위해? 55사이즈를 입기 위해? 각종 성인병을 예방하고 건강을 유지하기 위해? 인스타와 블로그에 올릴 간지나는 인증샷을 찍기 위해? 러닝앱이 주는 뱃지를 얻고 옐로우에서 오렌지로 러닝레벨을 높이기 위해? 실력자나 프로라면 나이키와의 계약, 부와 명성을 얻기 위해?

    이런 것들이 좀 더 열심히 뛰게 하고 실력을 늘게 하는 동기부여가 될 수는 있다. 달콤한 잠자리의 이불을 걷어차고 우리를 길 위로 이끄는 고마운 유혹이 될 수는 있다. 하지만 이것이 달리기의 본질은 아니다.

 

    주말이면 나들이보다 낮잠을 청하는 고단한 현대인들에게 40여 k, 100여 k를 뛰며 죽도록 고생하는 마라토너, 울트라러너들은 한가한 부르주아거나 가학과 피학을 동시에 즐기는 변태들이다. <죽도록 즐기기>에도 남아도는 첨단의 오락거리가 지천으로 널려있고 무한정의 재미와 안락을 추구하는 현대 도시문명의 <멋진 신세계>에서 극도로 단순하고 원시적인 달리기의 고생을 사서하는 러너들은 반역자들이다.

    이들은 모두 야만인이자 미치광이다. 하지만 야만인은 문명인이 볼 수 없는 것을 볼 수 있다. 미치광이에겐 평범한 사람에게 보이지 않는 것이 보인다. 그것은 달릴 때 느끼는 원시적 생명력, 순수한 기쁨이다. 달리기와 내가 온전히 하나가 되는 완전한 일체감, 초월의 느낌이다.

    달리기는 자유다. 푸른 바다 속을 유영하는 돌고래, 석양이 물든 황금빛 초원을 질주하는 들소, 쫓는 것도 쫓아오는 것도 없이 깊은 새벽 숲속을 내달리는 원시인에겐 일체의 기대도, 욕심도, 목적도 없다.

 

    아무 이유 없이 좋은 일을 하는 사람이 가장 좋은 사람이다.

    아무 이유 없이 달리는 사람이 가장 위대한 러너다.

 

아르눌포 키마레 & 스콧 주렉

 야만인이 되어 원시인처럼 달려보자.

 

    루이스가 찍은 것은 아르눌포와 스콧의 닮은꼴 폼이 아니라 닮은꼴 웃음이었다. 두 사람은 파도 속에서 유영하는 돌고래처럼 순수하고 벅찬 기쁨에 웃고 있었다. "집에 돌아가 이 사진을 보면 눈물이 날 거예요." - 383,384p

 

 

    ※ 다음은 책 속에 있는 명구들이다.

    고통을 친구로 삼아라. 그러면 절대로 외롭지 않을 것이다. - 88p

    땅 위에서 땅과 함께 달리면 영원히 달릴 수 있다. - 174p

    어떤 것을 진짜 정복하는 유일한 방법은 그것을 사랑하는 것이다. - 189p

    늙었다고 달리기를 멈출 필요는 없다. 달리기를 멈추기 때문에 늙는 것이다. - 306p

    땅은 나의 육신이요, 물은 나의 피요, 공기는 나의 숨결이며, 불은 나의 영혼이다. - 타라우마라 기도문

    여행은 힘들고 어려운 법이다. 그것이 인생이다. 너의 눈길이 가는 곳에 항상 너의 마음을 머물게 하라. - 타라우마라 격언

 

    ※ 다음은 저자인 크리스토퍼 맥두걸의 TED 강연 동영상

      ☞ Are we born to ru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