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몬, 때론 먹의 향내가 나는 글과 음악 그리고 사람

러닝, 마라톤

2019 전마협 대전 무료 초청 마라톤 : 두 번째 마라톤 하프코스 완주 후기 (2019/12/29)

어멍 2020. 1. 1. 13:20

 

 

      2019 전마협 대전 무료 초청 마라톤 : 두 번째 마라톤 하프코스 완주 후기 (2019/12/29)

 

 

 

      - 대회 참가 전

 

 

      원래 저번 12월 15일 풀코스를 뛴 것으로 금년 마라톤 시즌을 마무리하려 하였는데 세밑을 앞둔 1229일 하프코스를 한 번 더 뛰기로 한다. 예정에 없던 올해 마지막 번외 경기다. 풀코스 후 14(2) 만의 대회참가지만 하프코스라 그리 부담이 되진 않는다. 저번에 하프코스 두 바퀴(2LAP)를 뛰었다면 이번엔 동일한 코스를 한 바퀴(1LAP)만 뛰는 것이다. (코스도는 2019 전마협 명품마라톤대회)

 

      이렇게 갑자기 참가결정을 하게 된 계기는? 트로피 때문이다! 전마협 홈피를 둘러보는데 올해 마지막 대회로 10k와 하프의 무료대회를 준비한다는 것이 아닌가! 이 말에 혹해서 대회요강을 자세히 살펴보니 여기에 참가비 만원을 입금하는 옵션을 선택하면 100위 안으로 골인하는 자에게 트로피를 준다는 것이다. (고맙게도 여성참가자는 제외한 남자들만의 100위다.)

 

 

 

 

 

      트로피! 내겐 없다. 마라톤은 물론이고 이제까지 살아오면서 상장, 상패는 받아봤어도 종목불문, 분야불문 트로피란 것을 받아본 적은 한 번도 없다. 무료대회란 밑밥에 낚여서 어느새 트로피란 왕건이 미끼에 낚여버렸다. 꽂혀버렸다.

 

      한번 꽂히면 아무리 구하기 어렵고 비싸더라도 사고야 마는 쇼퍼홀릭처럼, 도토리에 낚여 지구 맨틀(mantle)을 뚫고 내핵(inner core)까지 도달해 대지각변동까지 일으킨, 영화 <아이스 에이지>의 다람쥐 스크랫처럼 이제 내 자신도 나를 말릴 수 없다. 전마협의 마케팅 실력, 낚시 솜씨가 보통이 아니다. (전마협은 미끼를 던졌고 나는 그 미끼를 확 물어분 거시여!)

 

 

 

 

도토리를 쫓아 지구 내핵 위를 달리고 있는 스크랫

아시아에서 아프리카와 아메리카가 떨어져 나간 것은 다람쥐 때문이라고...

 

 

      5등 안에 들면 트로피와 함께 25,000원 상당의 전마협 주최 마라톤 대회 참가권도 준다는데 이는 언감생심이고 트로피만 있으면 된다. 처음으로 기록보다는 등수를 목표로 뛰는 대회다. 100위 안에 든다면야 하프 정도는 내일은 없다, 죽어도 좋다라는 각오로 토할 정도로 미친개처럼 폭주할 용의가 있다.

 

 

      하프대회 참가는 이번이 두 번째로 첫 대회의 기록은 201551시간 4716(평균속도 5'05"/km)고 연습시 개인최고기록(PR)2015121시간 3745(4‘38“/km). PR을 갱신한다면 100위 안에 들겠지만 그렇지 않다면 100% 장담할 순 없다.

 

      스피드 훈련을 하지 않은 관계로 PR을 갱신하는 것은 힘들 것이다. 등수가 더 중요하지만 최소한 이전 대회 기록인 1시간 4716초는 단축하는 것으로 목표를 삼는다. 그저 대회참가인원이 적기만을 바랄 뿐이다.

 

 

      최선의 경우는 나를 포함 딱 100명이 달리는 것! 천천히 달려도 완주만 한다면 트로피는 이미 떼 논 당상! 최악의 경우는 의외로 참가자들이 구름같이 몰려 100위 밖으로 한참 밀려나는 것. 하지만 지하 1층 밑에 지하 2! 더 최악의 경우는 나보다 실력이 출중한 정예 마라토너 100명이 출전하는 것이다.

 

      즉 눈 밝으면 한눈에도 셀 수 있는 나를 포함 101명의 사내가 100개의 트로피를 두고 눈동자에 불꽃을 점화한 채 미친 개떼처럼 피 튀기는 레이스를 펼치는 거다.(군대에서 많이 했던 공포의 선착순, 그것도 단판 선착순이다) 내가 아무리 기를 쓰고 달려 토하더라도 101, 꼴찌에 그치고 마는 거다. 세상에 버림받은 가장 불쌍하고 비참한 마라토너다! .

 

 

 

 

나한테 왜 그랬어요?”                       “꼭 그래야만 속이 후련했냐?”

 

단지 자그마한 트로피 하나 바랬을 뿐인데... .

 

 

 

 

    이상의 <오감도> - 행복 버전

 

 

 

    백인의사내가도로를질주하오.

 

    제일의사내가행복하다고그리오.

 

    제이의사내도행복하다고그리오.

 

    • • • • • • • • • • • • • • • •

 

    제백의사내도행복하다고그리오.

 

    백인의사내는행복한사내와행복해하는사내와그렇게뿐이모였소.(다른사정이없는것이참으로다행이오.)

 

    백인의사내가도로를질주하지아니하여도좋소.

 

 

 

 

    이상의 <오감도> - 공포 버전

 

 

 

    백일인의사내가도로를질주하오.

 

    제일의사내가무섭다고그리오.

 

    제이의사내도무섭다고그리오.

 

    • • • • • • • • • • • • • • •

 

    제백일의사내는가장무섭다며공포에질려있오.

 

    백일인의사내는무서운사내와무서워하는사내와그렇게뿐이모였소.(다른사정이없는것이참으로불행하오.)

 

    백일인의사내는끝까지도로를질주하여야만하오.

 

    제백일인의사내가바로나라면차라리악몽이오.

 

 

 

 

      이런 비극을 피하려면? 홈피를 해킹 디도스 공격하여 참가신청을 최대한 줄여야 한다. 그도 안 되면 하늘에 빌어야 한다. 당일날 천둥벼락에 영하 20도 눈보라가 휘몰아치는 거다. 트로피에 눈이 멀어 어둠의 포스가 임하는 건가!

 

      마라톤의 정도(正道)가 아닌 사도(邪道), 어둠의 길에 들어섰다. 어느새 승부보다는 아녀자(아이+여자)나 노획물을 노리는 노총각 오랑캐가 되어 못 타면 훔치고 안 주면 뺏어올 기세다. 저번 고창마라톤에서 얻은 두 개의 닉네임 '미친개에물리고~' '나를묶고가둔다면~' 외에 또 하나의 닉네임을 추가해야겠다.

 

 

 

 

'나는아녀자트로피를노리는거란족노총각오랑캐란다'

 

 

 

      하여튼 토를 마다않고 최선을 다해야 한다. 그래서 에너지젤 없이 급수대도 5k, 10k, 15k 세 곳만 들려 후다닥 마시면서 곧장 뛰기로 한다. 일단은 전반은 5‘05“/km의 페이스로 달려보고 여력이 있다면 후반은 토할 정도로 더 밟아본다. 하지만 전략이든 점수든 큰 의미는 없다. 배점기준이나 옵션도 없는 단판 승부! 기록에 관계없이 트로피를 쟁취하면 성공, 쟁취하지 못하면 실패다.

 

 

 

 

    D-14/ 1215일 일요일 / 42.195k 전마협 명품마라톤대회 풀코스 3:58:36 평균속도 5‘38“/km

 

    D-13,12/ 1216,17일 월,화요일 / 휴식

 

    D-11,10/ 1218,19일 수,목요일 / 매일 8k 러닝

 

    D-9/ 1220일 금요일 / 휴식

 

    D-8/ 1221일 토요일 / 22.65k 장거리주 1:56:49 평균속도 5‘09“/km

 

    D-7/ 1222일 일요일 / 휴식

 

    D-6,5/ 1223,24일 월,화요일 / 매일 8k 러닝

 

    D-4/ 1225일 수요일 / 휴식

 

    D-3/ 1226일 목요일 / 전력질주 8k로 모든 훈련 종료

 

    D-2,1/ 1227,28일 금,토요일 / 휴식. 스트레칭만 하며 컨디션 조절

 

    • • 대회 전날인 28일까지 12월 누적 러닝 12, 총거리 172.6km, 평균속도 5‘26“/km • •

 

 

 

 

 

      - 대회 참가

 

 

 

 

 

      1229일 일요일 D-Day!

 

      평소와 다름없이 아침 750분 기상. 일기예보를 보니 이런 된장! 눈비소식이 없다. 공기도 맑고 바람도 잔잔하고 구름은 꼈지만 영상 1~4도로 뛰기에 딱 좋은 날씨란 불길한 소식이다.

 

      간단히 식사를 한 후 다른 대회와 달리 배번호를 현장에서 직접 수령해야 하므로 서둘러 출발. 대회장까지는 약 2.5k로 워밍업 삼아 빠른 걸음으로 가기에 알맞은 거리다.

 

 

 

 

 

      9시 좀 못 되서 대회장에 도착해 주위를 둘러보니... 한산하다. 앗싸! ^.^ 화색이 돌며 용기가 난다. 이 정도면 충분히 해볼 만하다.

 

 

 

 

 

      배번호부터 수령하고 용변을 보고 탈의실에서 환복을 한 후 나와 보니... 망했다! .

 

      그 사이 인파가 늘어 참가자들이 너무 많아졌다. 이래선 트로피를 장담할 수 없다. 자격지심인지 보이는 사내들이 다 트로피를 노리는 것 같다. 심지어 대회준비에 분주한 러너들이 걸어 다니는 트로피, 뛰 댕기는 트로피로 보인다. 저기서는 킵초게가 신발끈을 조이고 있고 여기서는 황영조, 이봉주가 몸을 풀고 있다. 어쩌면 저들에겐 나도 그렇게 보일지도 모르는 일?

 

      프랑스 어디엔가 있는 누드 해변에는 여성들은 없고 남성들만 하릴없이 배회하고 있다던데(어쩌다 마주치면 어색하게 먼 바다와 하늘만 멀뚱멀뚱 바라본다고) 모두들 마라톤에 대한 열정보단 이 해가 가기 전에 어떻게 트로피라도 하나 건져 볼까! 하는 꿍꿍이로 모여든 것인가?

 

 

      그렇게 생각하고 보니 모두들 서로 눈을 마주치지 못하고 외면하며 서성이고 있는 느낌이다. - 나는 여자들 알몸을 보기 위해 온 것이 아니라 누드를 즐기는 자연주의 누드 애호가란 말이다! 나는 트로피 때문에 온 것이 아니라 마라톤을 즐기는 순수 마라톤 매니아란 말이다!

 

      이런 생각에 갑자기 모두가 정답고 살갑게 느껴진다. 맞다! 우리는 모두가 마라톤을 사랑하는 마라톤 매니아이자 작은 트로피라도 하나 갖고 싶어 하는 소박한 사람들이다. 하지만 지금은 경쟁자! 트로피는 단 100!(누구에겐 무려 100개겠지만) 5위 안에 든다 해도 25,000원짜리 마라톤 대회 참가권은 양보할 수 있어도 트로피는 절대 양보할 수 없다.

 

 

      주주클럽 회원들이 모여 있는 곳을 찾아 인사를 드린다. 클럽 지정 정식 대회는 아니지만 일요 정기 달리기 모임을 겸하고 있어 꽤 많은 회원들이 모였다. 따뜻한 차를 나누며 다 같이 몸 풀기를 한다.

 

 

 

 

(오랑캐? 유재석?) 형이 왜 거기서 나와?

출발 전 바짝 긴장한 어멍

 

 

      10시 못 되서 출발선으로 이동. 출발신호가 떨어지자마자 스타트하여 최대한 빨리 본격적인 페이스에 진입하기 위해 평소 다른 대회와는 달리 대기줄 후미에 서지 않고 맨 앞줄에 선다. 앞 주자들의 정체로 인해 내 진로가 막혀서는 안 된다.

 

      인파 속 좁은 공간에서 추위와 긴장으로 가녀린 살떨림을 느끼며 연신 제자리 뛰기를 하고 있는데 출발신호를 하지 않는다. 뭔 놈의 사설이 그리 긴지 끝날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사람들을 불러 모았으면 시간은 지켜줘야지!

 

 

      105분 출발! 출발하자마자 양 옆으로 주자들이 휙휙 추월하며 앞서간다. 그래도 첫 40~50미터는 폭풍질주! 그럭저럭 한 그룹에 속해 뛰고 있다. 내 앞으로 얼마 없다.

 

      이런 경험, 이런 느낌은 처음이다. 마치 올림픽 마라톤에 출전, 메달 색을 다투며 선두그룹에서 뛰고 있는 기분이다. 이렇게 달려 나중에 유체이탈, 하의실종을 맛보더라도 지금 이 순간만큼은 뿌듯하고 행복하다.

 

      하지만 여기까지! 더 이상 오기와 급한 마음에 무리하여 쫓아가면 안 된다. 저들은 하프 1시간 10, 20분대로 나와 레벨이 다른 주자들이다. 그럼에도 분위기에 도취되어 무모함을 이어간다면...

 

 

 

 

0.5k 킵초게 페이스로 1등 후 떡실신. ㅠ.ㅠ

 

 

      4k를 지나면서 나이키러닝앱이 들려주는 평균페이스는 km452. 애초 계획했던 10.5k 반환점까지의 페이스 55초보다 한참이나 빠르다. 하지만 흐르는 물결 속의 물방울처럼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는 주자들에 뒤섞여 페이스를 늦출 수가 없다. 왠지 이대로 계속 가야만 할 것 같은 강한 예감이 든다. 오버페이스가 아닌가 걱정도 되고 약간 벅차다는 느낌이 들기도 하지만 이제까지 내가 한 연습, 내 의지를 믿고 그대로 달려본다.

 

      계획대로 5k 급수대에서 후다닥 물을 먹고 다시 파이팅. 이제까지는 추월하기도 하고 추월당하기도 하였지만 이제는 나를 추월하는 이보다 내가 추월하는 이가 훨씬 많아졌다. 속도는 더 빨라진 듯한데 호흡은 오히려 더 편안해졌다. 국도를 벗어나 고속도로에 들어선 자동차처럼 체온이 오르며 동작이 부드럽고 편안해지며 리듬을 탄 느낌이다.

 

 

      하천을 건너 디귿자로 꺾어지는 8.5k 지점. 멀리서 반환점을 돌고 오는 선두그룹이 보인다. 마주치면서 나보다 앞선 이가 몇 명인가 카운트한다. 주주클럽 회원을 비롯한 지인과는 파이팅하며 인사도 나눈다.

 

      하나. ... .... 다섯.........여섯. 일곱........... - 반환점을 돌기까지 카운트한 숫자는 여성 빼고 백다섯? 아니면 여섯? 백 명이 넘는 것만은 분명하다. 10k 지점에서 들려주는 평균 페이스는 448, 계획보다 훨씬 빨리 달렸는데도 백 명안에 들지 못했다. 초조하기도 하고 한편으론 투지가 불타오른다. 계획을 변경해서 반환점 직전 급수대는 생략, 물마시지 않고 내쳐 달린다.

 

 

      이후로 카운트는 멈추고 마주치는 지인들과 인사만 나눈다. 상대가 깜짝 놀랄 정도로 괴성을 지르며 파이팅한다.

 

      파이팅! - 아자! - ! - 퐈이아! - (상대에게 건네는 파이팅이라기보다는 나 자신에게 거는 주문이자 기합이다.) - 잘한다! - 좋구나! - 조아! - 얼씨구! - (저번 풀대회 이후 다운받아 익혔던 신바람 이박사노래 중에 등장하는 추임새도 써먹는다. 실성한 사람처럼 보인대도 어쩔 수 없다.) - 으아아~~~! - (어떻게든 이 속도로, 혹은 이보다 빨리 달려야 한다.)

 

 

      다시 하천을 건너 되돌아가는 길. 앞으로 8k 직선 주로만 남았다. 이제부터가 진짜 승부다. 적어도 여섯 명은 추월해야만 하고 절대 추월당해서는 안 된다.

 

      한 명 추월했다. 한 명 추월당했다. 다시 한 명 추월했다. 하지만 두 명에게 한꺼번에 추월당한다. 좀 전에 내가 추월했던 이가 나를 추월하고 내가 다시 추월한다. 저짝도 카운트를 한 걸까? 서로가 악착같이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는 꼬리잡기 게임이다.

 

 

      계획한 대로 5k 남은 급수대에서 마지막으로 물을 마시고 파이팅한다. 이제 마주치는 이 없이 자신과의 싸움만 남아있다. 앞선 이와의 거리가 좀처럼 좁혀지지 않는데 뒤에서 착--- 착지음이 들리며 점점 커진다. 경찰에게 쫓기는 범인처럼 불안하고 초조하여 무섭기까지 하다.

 

      달아나려 하는데 소리로는 분명 가까워지고 있다. 뒤돌아보고도 싶은데 그 순간 속도가 늦춰지며 페이스 리듬이 끊길까 두렵다. 밤길 정체모를 짐승에게 쫓기는 나그네처럼 뒤돌아보기가 겁난다. 오 마이 갓! 드디어 슬금슬금 옆 시야에 나타났다. .

 

 

      앗싸! 여자다! ^.^ 체형은 길쭉길쭉하지 않은 단신인데 보속(피치)이 엄청 빠르다. 반가운 마음에 길을 터주며 잘한다!” 파이팅을 외쳐준다. 이것은 그녀와 나 모두를 응원하는 기합이다.

 

      레이디 퍼스트! 여성은 추월을 용납해도 남성은 추월 금지다. 이 경우 남자의 자존심은 의미 없다. 자존심이 밥 먹여주나? 더 빨리 달릴 수만 있다면, 트로피를 얻을 수만 있다면, 오뉴월 미친 개처럼 긴 혓바닥을 휘날리며 네 발로 뛰어도 좋다! 트로피를 두고 다투는 남자인간만 아니라면 낙타, 기린에서 토끼와 거북, 맘모스, 원숭이, 다람쥐, 오징어, 꼴뚜기, 나무늘보, 쥐며느리, 쇠똥구리... 그 무엇이든 나를 짓밟고 가도 상관없다!!

 

 

 

^.^ 소똥을 굴리며 사뿐히 (나를) 즈려밟고 가시옵소서! ^.^

 

 

      이제 남은 거리는 2k. 평균페이스는 442초로 속도가 느려지지는 않았다. 1k를 남겨두고 마지막 스퍼트를 시도하지만 좀처럼 탄력이 붙지 않는다. 보이지 않은 벽이 가로막고 있는 느낌이다.

 

      그 사이 한 명의 남자 선수를 추월하고 결승선 직전 한 명의 여자 선수, 한 명의 남자 선수에게 추월당해 기분이 좋아졌다가 나빠졌지만 어차피 쌤쌤이다. 하지만 방금 나를 추월한 사내가 만약? 만약? 100위라면.... 이것은 천추의 한이 될 것이다.

 

 

      '나를 버리고 가시는 님은 십리도 못 가서 발병난다'지만 이제 모든 레이스는 끝났다. - '님은 갔습니다.' 님과 함께 트로피도 멀리멀리 사라졌습니다. 저 님은 '한 많은 이 세상 야속한 님'이 되었습니다.

 

      '아아, 님은 나를 버리고 떠나갔습니다. 마지막 남은 트로피를 챙겨가지고 푸른 산빛을 깨치고 하천을 따라 난 적은 길을 뛰어서 참어 떨치고 갔습니다. 마라톤도 사람의 일이라 추월할 땐 추월당할 것을 염려하고 경계하지 아니한 것은 아니지만, 추월당함은 뜻밖의 일이 되고, 놀란 가슴은 새로운 슬픔에 터집니다. 제 곡조를 못 이기는 슬픔의 노래는 결승선의 침묵을 휩싸고 돕니다.' ㅠ.ㅠ (한용운의 <님의 침묵>을 패러디한 어멍의 <결승선의 침묵>)

 

 

      이런 비극을 피하려면! 지금 이 순간이 트로피가 걸려있는 결정적인 순간이라면! 최소한 같은 속도로 옆에서 게처럼 뛰며 몇마디 주고받을 최소한의 시간이 허락된다면! 좀 느닷없고 구차하지만 최후의 설득을 시도하는 거다. - "저기요... 음~ 혹시 트로피가 이미 있으시다면 어떻게 양보 좀...... 번만 도와주십쇼!"

 

      이것도 통하지 않는다면 좀 비겁하지만 안면몰수하고 나만의 비장의 기술을 시전할 밖에!

 

 

 

성난 황소도 1초만에 정신이 아득해지고 다리에 힘이 쫙 풀리며 주저앉게 만드는,

마라톤 규범에도 올라와 있지 않은 반칙 아닌 반칙

 

 

      이것도 여의치 않으면 자력으로, 정면으로 승부를 거는 거다. 어차피 올 데까지 왔다. 이제 피도 눈물도 없고 이판사판 공사판이다. 좀 무모하지만 어떻게든 따라붙어 마지막 순간에 부상을 각오하고 수영선수처럼 다이빙을 하던지 쇼트트랙 선수처럼 슬라이딩으로 날 들이밀기를 하던지 최후의 승부수를 띄우는 거다.

 

 

 

100위 트로피, 101위 아차상! (트로피 없음)

 

 

      하지만 지금 내가 몇 위인지 알 도리가 없다. 저짝도 나도 이미 100위 안이면 헛짓거리요, 이미 100위 밖이어도 헛짓거리다. 두 손을 마주 잡고 깡총깡총 서로 기뻐하든지, 함께 부둥켜 안고 슬픔을 위로하든지 해야할 상황! 저짝이든 나든, 슬라이딩과 다이빙으로 서로 죽기살기로 다투는 것은 만인의 웃음과 눈물을 동시에 자아내는 블랙코미디다. - 이미 100위 안이라면 웃음과 유쾌함의 코미디(희극) 쪽에 가깝고, 이미 100위 밖이라면 슬픔과 눈물의 트레지디(비극) 쪽에 가깝다.

 

 

 

이것은 희극>비극

 

 

이것은 희극<비극 

 

 

      하지만 그 누가 알겠는가! 마음만 심란할 뿐 육체는 이미 말을 듣고 있지 않다. 가속도를 내야하는데 종아리 근육, 정강이 근육이 도무지 움직이려 하지 않고 승모근과 아랫턱이 뻐근할 정도로 목에 핏대만 선다.

 

 

 

형이 왜 또 여기서 나와?

 

 

      기진맥진 골인! 나를 비롯한 모두가 끝까지 긴장을 놓치지 않고 모든 힘을 쏟아부은 레이스였다. 진인사대천명(盡人事待天命)! 최선을 다한 모든 러너들에게 행운과 마라톤신의 가호가 있기를 빈다.

  

 

 

 

기뻣다 ^.^ 슬펐다 .- 이랬다 저랬다 - 스윙 마라토너

Performance from <스윙 키즈>

 

 

      최종기록은 1시간 3921! 개인 최고기록은 갱신하지 못했지만 첫 번째 하프코스 기록은 갱신했다. 문제는 과연 이 기록으로 100위 안에 들 것인가??

 

      반환점 이후 추월도 했고 추월당하기도 했지만 정신없이 달리느라 정확히 몇 명을 제쳤는지는 모르겠다. 막연히 추월한 경우가 조금 더 많은 느낌이다. 기록은 나름대로 만족이지만 과연 트로피를 획득할지는 아직 확신할 수 없다.

 

 

      주최 측이 제공하는 뜨끈한 순두부 한 접시와 시원한 막걸리 한 컵을 마신 후 트리플리님이 손수 갖고 오신 고소한 구운 계란과 달달한 식혜까지 먹으니 원기가 다시 살아나는 느낌이다.

 

      환복을 하고 따뜻하게 외투를 걸치고 나왔지만 아직까지도 결과를 발표할 기미가 없다. 마치 12라운드를 뛰고 심판과 함께 링 위에 서서 승패를 기다리는 복서처럼, 연기를 마치고 코치와 함께 부스에서 평가를 기다리는 피겨스케이트 선수처럼 초조하게 앉아 다리를 연신 까불며 결과를 기다린다.

 

 

      아무 말이 없다가 본부석에서 부정 혐의자가 있어 기록과 순위집계가 늦어지고 있다는 안내방송이 나온다. 이런! 천인공노헐!! 가뜩이나 결과를 목 빠지게 기다리고 있는데 이 무슨 아름답지 않은 소식인가! (분노 X 짜증) 게이지 급상승이다.

 

      내가 만약 100위 안에 든다면 하해와 같은 성은을 베풀어 불문에 부치겠지만 그렇지 않다면 내 결코 용서치 않으리!! 짐이 100위 안에 들기를 하늘에 빌어야 될 게야! 갑자기 사극 버전?!

 

 

 

 

누구인가? 누가 기침소리를 내었어 부정행위를 하였어?

 

 

      한편으론 나보다 더 트로피를 열망하는 자가 있었다는 사실이 놀랍고 동정이 간다. 더구나 10k, 하프만 있는 약식 무료 초청 대회에서까지 반칙으로 입상을 노리다니 참으로 불쌍하고 애잔하도다!

 

      또 한편으론 그 수법이 궁금하기 짝이 없다. '입김 불기' 외에 내가 모르는 또 다른 비기(秘技)가 있는 것인가?? 예전에 언젠가 뉴욕인가 보스톤 마라톤에서 중간에 지하철로 이동한 후 합류하여 우승한 선수가 있다는 이야기를 들은 것도 같은데 오늘 코스에선 지하철은 고사하고 작은 샛길도 없잖은가! 하천 밑으로 땅굴이라도 파지 않고서는 그 수법을 상상하기 어렵다. 아니면 남자면서도 여장을 하고 뛰었던 것일까?

 

 

 

 

화장 이렇게 하는 남자들 목적?

여장한 채 마라톤에 출전하여 트로피를 타내려고!

 

 

      전에 알던 내가 아냐! 볼수록 아름답고 신기하구나! - (소름끼치게도) 거뭇거뭇 우람한 수컷들이 미친듯이 거친 숨결에 흙먼지를 일으키며 두-두-두-두- 사냥감이나 암컷을 쫓듯 줄줄이 따라 붙을 기세다. 그렇담 생존을 위해 능력이상을 발휘할 수밖에 없다. 트로피는 따 논 당상이고 하프 한국신기록 달성이다!!

 

      어쨌든 이번에 트로피를 못 타면 내년에는 아내 이름으로 등록한 후 C컵 뽕브라에 짙은 스모키 화장을 하고 뛰던지 아니면...

 

 

 

 

3년 계획으로 땅굴을 파야겠다.

 

 

      혹시 반환점의 기록측정 매트가 없었던 것일까? 너무 정신없이 뛰다보니 있었던가 없었던가 기억이 나지 않는다. 하여튼 병적인 호기심에 염탐을 해서라도, 돈을 주고라도 정확한 정보를 얻고 싶다. ‘누가보다 어떻게가 더 궁금하다.

 

 

      결국 궁금증은 해결해주지 못하고 다음 방송이 나온다. 남자 하프는 1시간 47분을 마지막으로 입상자가 결정됐다는 것이다. 앗싸! ^.^ 100위 안에 들었구나! 그것도 넉넉하게 들었다.

 

      1시간 47분이라니! 만약 처음 계획했던 대로 전반을 55초의 페이스로 뛰었다면 아슬아슬! 100위 안에 못 들 수도 있었다. 좀 힘에 부치게 뛴 것이 결과적으로 도움이 됐다. 그럼 과연 몇 위? 궁금증을 안고 본부석으로 가서 확인해 보니 58?!

 

 

      58위라니! 내 앞에 한참이나 많았는데 순위가 너무 높다. 그럼... 그들 중 많은 수가 무료참가자였다는 말! 하하. 어쨌든 생각보다 높은 순위에 기분은 좋다.

 

      잡았다! 트로피를 얻었다!

 

 

 

 

드디어 트로피를 붙잡은 어멍

Performance from Scrat of <Ice Age>

 

 

 

 

      - 평가 및 마무리

 

 

 

      대회는 ‘A-’ : 추위에 떠는 주자들을 대기시켜 놓고 별다른 내용도 없는 사설을 길게 늘어뜨리는 것은 땡볕에 학생들을 세워 놓고 장시간 교장훈시를 이어가는 것같이 예의 없고, 눈치 없는 짓이다. 결국 예정된 시간을 5분이나 넘겨 출발했다. 고의도 아니지만 불가항력이나 단순실수도 아니므로 한 단계가 아닌 두 단계 감점요인이다.

 

      반면 세밑을 앞둔 마지막 일요일에 달림이들의 한 해 아쉬움을 달래주는 좋은 기회를 마련한 전마협측의 기획력은 한 단계 득점요인. 거기다 무료 및 저렴한 참가비에 비하면 풍성한 먹거리, 이벤트, 부상 등 높은 가성비도 한 단계 플러스. 거기다 본인이 목표한 트로피 획득에 성공했으므로 기분 좋아 다시 한 단계 플러스다.

 

      도합 세 단계 상승하여 플러스마이너스 하면 저번 대회 ‘B+’보다 한 단계 상승한 ‘A-’로 최종 평가한다. (짐이 100위 안에 든 것을 다행으로 알아야 할 게야!)

 

 

 

      어멍은 ‘A+’ : 목표달성에 성공했으므로 백점, ‘A+’이다.

 

 

 

 

구간별 페이스

 

 

      최종기록은 1:39:21 - 평균페이스는 4‘42“/km - 가장 느린 구간은 1~2k 4'56" - 가장 빠른 구간은 10~11k 4'26"(반환점 전후로 실성한 듯 파이팅했던 구간). 이번도 저번 풀코스와 마찬가지로 후반(48’56”)이 전반(50’25”)보다 약간 빠른 네거티브 스플릿을 달성했다.

 

      저번 풀코스 대회와 같은 코스였지만 1LAP이어서인지, 레이스 내내 순위에 신경쓰느라 긴장하며 뛰어서인지 저번과 다르게 전혀 지루함이 없었다. 출발해서 골인까지 최선을 다한 레이스였고 레이스 후 결과가 나올 때까지도 긴장을 놓을 수 없어서 육체적, 정신적으로 에너지를 많이 소모했다. 하지만 그 덕분에 마지막까지 쫄깃쫄깃, 짜릿짜릿했던 스릴 넘치는 재미난 대회였다.

 

      하프라 그런지 대회 후 이렇다 할 후유증은 없다. 발목도, 종아리도 가볍다. 대신 저번 풀대회 이후에도 없었던 앞 대퇴부 위쪽 사타구니 근처에 은은한 뻐근함이 발생했다. 아무래도 안간힘을 써 속도를 내느라고 평소 안 쓰던 근육에 약간 과부하가 걸린 것 같다.

 

      마지막 스퍼트 때 힘이 모자란 느낌이었음으로 다음 하프 때는 15k 지점 이후에 에너지젤을 하나 섭취해야겠다.

 

 

 

      2019년 모든 대회를 마치고 시즌 마감이다. 일 년 내내 게으름만 피다가 11월부터 풀, , 하프로 몰아치기로 뛰었다. 내년에는 좀 일찍부터, 성실히 뛰어야겠다.

 

      2020년에는 주로 잘 알려지지 않은 소규모 마이너 대회를 노려 트로피 사냥에 나설 생각이다. 꿈★은 이루어진다! (트로피는 다 내꼬얌!)

 

      재밌고 즐거웠던 2019년 러닝을 마치고 새롭게 다가올 2020 러닝을 흥분과 기대로 맞이한다. 어멍! 파이팅! -!

 

 

 

 

 

 

      - 대회 참가 전

 

 

 

    나 : 다음 주 일요일에 마라톤 대회 있어.

 

    아내 : (걱정 반, 불만 반의 목소리로) ~? 저번 주에 뛰었잖아? 너무 무리하는 거 아냐?

 

    나 : 이번엔 하프라 괜찮아. 그리고 참가비 없는 무료야. (사실은 만원 냈다.)

 

    아내 : 그래도 연말인데 가족과 함께 있어야지!

 

    나 : ............ ~ 사실은 트로피를 준다길래... (사실은 100위 안에 들어야 탈 수 있다.)

 

    아내 : ...... (곰곰 생각하는 눈치) 그럼 잘 다녀와! 너무 무리하진 말고.

 

 

    역시 트로피의 힘이 세다. 단번에 수긍한다는 눈치, 수긍을 넘어 말투가 온화해지고 눈빛이 너그러워졌다. 그것은 여자의 눈빛이라기보다 차라리 철부지 아들, 장난꾸러기 아들을 보는 자애로운 어머니의 재밌고 사랑스런 눈빛이다.

 

    하여튼 반드시 트로피를 타야 한다. 트로피가 없으면 집에 돌아올 수 없다. 12일 밤낚시 후 이렇다 할 고기가 없으면 새벽 수산시장에서 손바닥만한 붕어라도 사서 들어오는 남편처럼 못 타면 훔치고, 없으면 만들어서라도 갖고 와야 한다.

 

 

 

 

 

 

      대회 전 각오를 다지기 위해 간절한 마음으로 정성을 다해(!) 직접 만들어 본 전마협 트로피. 정신력 강화를 위한 일종의 멘탈 트레이닝, 동기부여랄까! 미완성으로 볼 품 없지만 최종적으로 금칠까지 할 요량이었다. 다행히 대회 트로피를 획득해서 이제는 쓸모가 없어졌지만 많은 도움이 된 고마운 트로피(?)였다.

 

 

 

 

 

      비닐봉지로 만든 메시 유니폼을 입은 아프칸의 5메시 소년은 메시로부터 직접 사인한 유니폼과 축구공을 받았다고 하고 붕대로 만든 나이키 신발을 신고 육상대회에 나간 필리핀의 11나이키 소녀는 이후 협찬이 쏟아졌다던데 접이식 삼발이 찜판과 키친타월 봉, 택배종이상자로 전마협 트로피를 셀프 제작한 한국의 50트로피 아재에겐 전마협 회장님이 직접 초대형 트로피와 평생 무료참가권을 증정함이 마땅하다.

 

 

 

 

      - 대회 참가 후

 

 

 

    나 : 여보세요? 전마협이죠?

 

    전 : !

 

    나 : 어제 마라톤 참가한 사람인데요. 뭐 하나 여쭤보려구요.

 

    전 : . 말씀하세요.

 

    나 : ...... 혹시 하프 유료로 뛴 남자선수가 몇 명이었는지 알 수 있을까요?

 

    전 : ?.... ~ ~! 전부 220명이네요.

 

 

    트로피 경쟁률은 2.21 - 생각보다 경쟁자가 적었다. 한편으론 다행이었다는 생각도 들었지만 그보다는 갑자기 약간 허탈하고 우수어진 기분?? 대회장의 그 많던 사람들이 다들 무료참가자였던 것인가!

 

    태산명동서일필(泰山鳴動鼠一匹)까지는 아니더라도 깊은 산 칠흑 같은 어둠속에서 시퍼런 안광을 뿜어내던 짐승, 밤새 팽팽한 긴장감으로 서로가 서로를 노려보던 이름 모를 야수가 날이 밝자 귀엽고 무심한 다람쥐였음을 알아버린 느낌이다.

 

    하지만 이 트로피의 가치가 훼손되진 않았다. 어쨌든 내 힘으로 얻어낸, 내겐 최초로 주어진 소중한 보물, 마이 프레셔스(My precious).

 

 

 

 

 

이것이 진짜 트로피!

최대한 클로즈업해서 거대하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