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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 신앙생활

마흔네 번째 주일 대표 기도문 (20230521) - 호수보다 먼저 잠잠케 하고 돌보다 먼저 소리치게 하소서.

어멍 2023. 5. 21. 22:45

 

마흔네 번째 주일 대표 기도문 (20230521)

- 호수보다 먼저 잠잠케 하고 돌보다 먼저 소리치게 하소서 -

 

 

  자비로우신 하나님, 은혜와 능력이 충만하신 하나님, 감사합니다. 오늘도 주님을 찬양하고 만나기 위해 주님 앞에 모였사오니 저희를 축복하여 주시고 새롭게 하여주시옵소서. 주님이 주시는 시간과 공간에 감사하며 평안한 일상에서도 주님의 뜻을 깊이 묵상하는 저희들 되게 하시옵소서. 하루하루 믿음과 소망이 성장하고 삶에서 주님의 뜻을 깨닫고 새기고 증거하는 저희들 되게 하여주시옵소서.

 

  주님. 사랑이 지극하면 서로 닮는다 하였사오니 저희의 사랑이 주님께 닿는다면 저희가 주님을 닮고 주님의 뜻을 깨닫고 주님의 사랑을 행할 수 있게 됨을 믿사옵니다. 닮는다면 주님이 인간을 닮을 게 아니라 마땅히 저희가 주님을 닮아야 하오니 모든 것을 저희가 아닌 주님을 기준으로 삼게 하시옵소서. 저희를 앞세우지 않고 항상 주님의 뒤에 서되 아버지와 장에 나온 아이처럼 떨어지지 않고 바짝 붙어 동행하게 하시옵소서. 가나의 잔칫집에서는 신랑신부가 되어 주님과 함께 즐겁게 놀게 하시고 골고다 언덕에서는 시몬이 되어 주님이 지신 십자가를 잠시 들게 하시옵소서.

  순종과 감사로 모든 것을 능히 받아안게 하시고 오직 할렐루야로 주님의 은혜와 사랑을 찬미하게 하시옵소서. 나귀를 타고 오시는 온유한 주님, 겸손하지만 거침없는 왕의 모습에 권능과 위용이 있사오니 저희가 이처럼 먼저 승리하고 나서 십자가의 길을 당당히 가게 하시옵소서.

 

  주님, 나라 안팎이 어렵고 어수선합니다. 모든 것을 저희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시되 저희가 기도해야 할 때 기도하고 행동해야 할 때 행동하게 하소서. 침묵해야 할 때는 침묵하고 말해야 할 때는 말하게 하소서. 저희를 호수보다 먼저 잠잠케 하시고, 돌보다 먼저 소리치게 하시옵소서.

  윤석열 대통령과 여야정치인, 그리고 세계의 모든 위정자들을 축복하사 주님의 말씀과 능력을 주시되 악한 임금은 악한 백성으로 인하고 어리석은 지도자는 어리석은 시민에 의해 선출된 것이오니 저희를 먼저 돌아보고 저희를 먼저 굳건히 세워 주시옵소서. 저희가 위로는 주님만을 왕으로 받드는 선한 백성이 되게 하시고, 아래로는 올바른 지도자를 알아볼 수 있는 지혜로운 시민이 되게 하시옵소서.

 

  주님. 저희 우정교회와 성도들을 축복하여 주시옵소서. 이 지역과 사회에 주님의 말씀과 뜻을 전하는 복된 교회가 되게 하시고 성도 하나하나의 간절한 기도를 들어주시고 헤아려주시옵소서. 항상 건강과 평안을 허락하시어 범사에 감사하는 저희들 되게 하여주시옵소서. 성가대와 찬양대의 목소리에 은혜 입혀 주시고 각 기관에서 성심봉사하는 성도들을 축복하여 주시옵소서.

  △△△ 담임목사님과 목회자분들을 축복하여 주시옵소서. 목사님께 성령을 내려주셔서 영육간에 항상 피곤치 않고 강건케 하여주시옵고 말씀 전할 때 저희 심령에 큰 깨달음과 울림이 있게 하시옵소서.

 

  이 모든 말씀 저희를 살리시기 위해 목숨을 내어주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감사하며 기도드렸사옵니다. 아멘

 

 

    ※ 기도해야 할 때 기도하고 행동해야 할 때 행동하게 하소서. 침묵해야 할 때는 침묵하고 말해야 할 때는 말하게 하소서.

 

    하지 말아야 할 일을 하지 않는 것과 해야 할 일을 하는 것 중 무엇이 더 중한가? 양자택일의 문제도 아니고 무엇이 더 중하고 무엇이 더 경하지도 않다. 둘 다 중하다.

    하지 말아야 할 일을 하지 않는 것은 기본이다. 가만히 있으면 중간은 간다. 하지만 거기에 그친다면 뭔가 부족하다. 많이 부족하다. 때론 가만히 있는 것이 하지 말아야 할 일인 경우도 있다.

    하기 쉽든 하기 어렵든, 할 수 있든 없든, 해야 할 일을 하는 것에 인생의 가치와 의미가 있다. 거기에 인생의 진면목이 있고 그 지점에서 인물의 진가가 드러난다. 바로 자신에게 주어진 소명, 미션, 십자가에 충실하기다. 시크하게 말하자면 극작가인 신(하나님)이 주신 배역을 이 지상이라는 무대에서 충실하고 멋지게 해내는 것이다.

 

    백세를 훌쩍 넘긴 노교수, 노철학자가 있다. 가끔 신문 인터뷰도 하며 감사, 겸손, 기쁨 등 인생의 지혜를 설파하며 삶의 아름다움을 찬미한다. 연세로 보자면 일제강점기로부터 군사독재정권을 거치며 산업화, 민주화의 격동의 세월을 보내셨는데 그 풍파를 이기며 참 곱고 점잖게 늙으셨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하지만 그의 이력에 일제와 독재정권에 저항했다는 기록은 없다. 하다못해 그 많은 시국선언의 한 귀퉁이에 이름을 올린 적도 없었고 사회적 의제에 매섭게 목소리를 낸 적도 없었다.

    개인적으론 집과 대학을 오가며 연구하고 가르치는 평범한 인생, 어찌 보면 모범적이고 행복하고 평안한 만족한 인생이었겠지만 뭔가 아쉽다. 하시는 말씀은 모두 아름답고 지당하지만 그것을 뛰어넘는 큰 울림은 없다. 그 분 나름대로 철학, 가치관이 있고 하실 말씀도 많겠지만 적어도 행동하는 양심, 시대와 함께 하는 지성은 아니었다.

    남의 인생, 나보다 더 잘나고 더 배우신 연로하신 분의 인생을 함부로 평가하는 것 같아 조심스럽지만 그 분이 살아온 시대와, 그 분의 위치, 그 분의 전공분야(철학)를 감안하면 얘기가 다르다. 먹고 살기에만 바쁜 필부가 아닌 어느 정도 입신양명하여 사회적 영향력을 행사하는 위치에 있었다면 얘기가 다르다. 실제로 그 시대를 살아온 많은 동년배 중 갖은 고초를 겪고 일찍이 인생이 꺾인 분들도 많았고 목숨을 잃은 분들도 있었다.

 

    요나는 악인도 아니고 불신자도 아니다. 그저 제 한 몸 평안을 바라는 못나고 평범한 사람일 뿐이다. 그가 하나님이 주신 사명을 끝끝내 거부하고 다시스로 도망쳐 한갓 박 넝쿨 그늘 아래서 평안을 맛봤더라도 하나님은 요나에게 불벼락의 심판을 내리시진 않았을 것이다. 그는 악행은 물론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그의 허물은 단지 (해야 할 일을) 하지 않은 것일 뿐이다.

    못난 요나는 처음 도망쳤지만 결국 돌아와 제 할 일을 했다. 주님의 사명을 거부하는 요나를 상상할 순 있어도 아버지 하나님이 건네시는 잔을 거부하는 예수님은 상상할 수 없다. 할 수만 있다면 그 잔을 거두시라 괴로움에 피땀까지 흘리시며 고뇌했던 예수님은 물론 어떻게든 도망치려 했던 요나에서도 보듯이 인물을 평가할 때 그가 한 일도 중요 근거지만 그가 (해야만 했는데, 혹은 할 수 있었는데도) 하지 않은 일도 중요 근거가 된다.

    때론 작위보다 부작위가 훨씬 중요할 때가 있다. 산천초목이 울고 돌들이 일어나 소리치는데 홀로 방구석에 처박혀 멍 때리고 있을 수만은 없다. 광장이 뜨거운 민중의 열기로 들끓는데 혼자 독서실에서 시험공부를 하거나 산으로 들로 놀러 다닐 수는 없다.

 

    아무 일도 하지 않으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요나가 주님께 순종하지 않았다면 니느웨의 회개 여부를 떠나 요나 자신의 구원은 없었을 것이다. 예수님의 십자가 고난이 없었다면 부활도 없었고 주님의 사랑과 은혜가 모든 이에게 열리는 은총도 없었을 것이다.

    주님이 주신 달란트를 땅에 파묻어 두고 아무것도 하지 않은 종을 주님은 악하고 게으르다고 꾸짖으셨다. 평소 근본으로는 겸손하여 남을 먼저 인정하고 앞세워야겠지만 자기가 해야 할 일, 자신만이 할 수 있는 일에는 스스로 용감히 박차고 나서야 된다.

    성공하든 실패하든 상관없다. 주님의 뜻, 주님의 겸손과 담대함이 함께한다면 결과에 상관없이 이미 승리한 것이다. 나귀를 타고 오시는 온유한 주님, 겸손하지만 거침없는 왕의 모습에 권능과 위용이 있다. 먼저 승리하고 나서 십자가의 길을 당당히 가는 것이다.

 

 

    ※ 호수보다 먼저 잠잠케 하시고, 돌보다 먼저 소리치게 하시옵소서.

 

렘브란트 1633 <갈릴리 호수 폭풍 속의 그리스도>

Rembrandt <Christ in the Storm on the Lake of Galilee>

 

    제자들이 나아와 깨워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죽겠나이다 한대 예수께서 잠을 깨사 바람과 물결을 꾸짖으시니 이에 그쳐 잔잔하여지더라. [누가 8:24]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너희 믿음이 어디 있느냐 하시니 그들이 두려워하고 놀랍게 여겨 서로 말하되 그가 누구이기에 바람과 물을 명하매 순종하는가 하더라. [8:25]

 

오렌테 페드로 1620 <예루살렘 입성>

Pedro de Orrente <Entry into Jerusalem>

 

    만일 이 사람들이 침묵하면 돌들이 소리 지르리라 하시니라. [누가 19:40]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입성하실 때 그 제자와 군중들이 겉옷을 벗어 길에 펴고 큰소리로 기뻐 찬양하니 한 바리새인이 예수님께 ‘당신의 제자들을 책망하라’ 말하자 예수님이 하신 말씀이다. 바리새인의 말을 선의로 보자면 이 상황이 정치적으로 오해의 소지가 크고 기존 종교기득권자들을 자극하여 그들의 표적이 될 것을 염려해 좀 조용히 하라 자제시킨 것이지만 내심 그는 이 장면이 눈꼴사납다 여기며 배알이 뒤틀렸을 것이다.

    예수님의 여정은 이 예루살렘 입성을 전후로 크게 나뉜다. 전에는 나사렛 예수, 선지자였다면 이후엔 하나님의 하나뿐인 아들 예수 그리스도, 메시아다. 전에는 언행이 신중하고 조심스러웠다면 이제는 거친 말과 채찍을 휘두른 성전정화처럼 거침이 없다. 오해 사기를 염려치 않고 적 만들기를 주저하지 않으신다. 결정적인 순간, 최후의 순간이 얼마 남지 않은 것이다.

 

    “돌들이 (일어나) 외치리라!” - 이 말씀은 이 장면, 이 상황과는 약간 다르게 현실에선 주로 시국선언 등 정치적 의제, 정치적 상황에서 자주 인유되고 있다. 본 기도문에서도 뒤이어 정치적 내용이 언급되듯이 이에서 전혀 자유롭진 않다. 즉, 불의한 정치권력의 은폐와 공작, 억압과 방해에도 불구하고 결국 진실, 진리, 정의는 드러난다는 주장이다. 언제까지고 침묵을 강요할 수는 없다는 주장이다.

    같은 문장, 같은 맥락이더라도 경우에 따라, 쓰는 이에 따라 전혀 달라지기도 한다. 각자 생각하는 진실, 진리, 정의가 다 다르고 심지어 정반대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전광훈 목사(‘하나님도 나한테 까불면 죽어’라고 말하는 자에게 목사 호칭을 붙이기 뭣하지만)가 주최했던 태극기집회에서도 415 총선을 부정선거라고 주장하며 문재인 정권을 비판하는 대목에서 이 말씀이 인용됐었다고 한다.

 

    성경의 말씀은 모두에게 공개된 공유물이다. 얼마나 그 뜻을 깨닫고 올바로 쓰는가는 각자 몫이다. 각종 사이비들이 쓰는 성경도 같은 성경이고 심지어 악마도 성경 말씀을 인용하여 예수님을 유혹했다. 그러므로 성경을 해석하고 인용할 때는 신중하고 조심해야 한다. 그럼에도 내가 이 말씀을 인용한 것은 지금은 침묵할 때가 아니라 말해야 할 때라고 여기기 때문이다.

    아마도 예민한 정치적 촉수를 가지신 성도님들은 눈치채실 것이다. 혹시라도 윤대통령과 국민의힘을 지지, 응원하는 분 중에는 심기가 불편하신 경우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를 감안, 각오하고서 굳이 이 기도문을 올리는 이유는 지금 나라안팎의 사정이 마냥 한가하지 않다는 위기의식 때문이다. 내게는 그렇게 보인다. (봇물 터지듯 이어지고 있는 각계각층의 시국선언을 보노라면 내게만 그렇게 보이는 건 아닌듯하다.)

 

 

    ※ 위로는 주님만을 왕으로 받드는 선한 백성이 되게 하시고

 

    돈, 권력, 명예, 이념을 비롯해 특정 정치인이나 종교인을 왕으로 모시고 사는 사람들이 있다. 오직 주님의 말씀을 따라 주님만을 왕으로 모셔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악한 세대로 인해 악한 시대만이 이어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