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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망(大望)》 12권 리뷰

어멍 2016. 3. 25. 20:48

 

    《대망(大望)12권 리뷰 

   

 

    전 우대신 도요토미 히데요리님의 군사로 온 하야미 가이요. 걸상을 주시오.” (중략)

    “훌륭하신 식견이오. 성은 다 타버렸지만 우대신은 우대신이니 말이오.”

    실은 처음에 주고받은 이 말이 이 날의 비극을 결정적인 것으로 만들고 말았다. (206~207p)

 

    항복교섭을 위해 온 히데요리측 패장 하야미 가이와 이를 맞이한 쇼군 히데타다측 승장 이이 나오타카의 대화다.

    오사카와 에도의 갈등은 2차례의 전쟁(오사카 겨울의 진과 여름의 진) 끝에 오사카의 패배로 결판나고 히데요리 모자는 궁지에 몰려 성내의 벼창고로 숨는다. 이 때 히데요리측 항복 군사로 나온 하야미 가이는 죽기를 각오한 두려움 없는 사나이! 하지만 원숙하고 지혜로운 사자(使者)는 아니었다.

    사람은 자신의 목숨을 완전히 내던졌을 때 이상한 용기를 갖게 되는 법이다. 그렇다 해서 그 용기와 평소의 자신이 아무 관련 없다고 생각하는 것은 잘못이다. 평소의 단련이 없으면 그 용기도 역시 거칠어지기 마련이며, 평소의 연마가 철저하면 그 용기의 질도 역시 철저한 것이 된다. 하야미 가이는 그런 의미에서는 얼마쯤 철저하지 못했다. (206p)

 

    필요 이상으로 앙연히 가슴을 젖히고 들어가 대뜸 패장 주제에 거만하게 허세를 부리며 걸상을 요구한다. 개인적 자존심과 주군인 히데요리의 위신을 생각한 오버액션이다. 그는 패전 장수로서 우선 상대의 말을 정중한 자세로 들어야 이롭다는 것을 잊고 있었다.

    그를 맞이한 나오타카 역시 마찬가지! 지혜롭고 원숙한 이에야스가 아닌 아직 혈기왕성한 젊은 무장이다. 아니꼽게 여기어 발끈하며 조롱한다. 첫 대면부터 감정이 어긋났다. 이후 벼창고를 나올 때 히데요리 모자를 가마에 태우느냐 말에 태우느냐 그도 아니면 손수레에 태우느냐 하는 예우 문제로 옥신각신하며 더욱 감정이 상하게 된다.

    결국 이것이 빌미가 되어 히데요리 모자는 벼창고에서 자결하게 되고 이를 사후 보고받은 이에야스는 노발대발 쇼군 히데타다에게 화를 내며 좀 더 일찍 현장에 도착하지 못한 자신을 책망한다.

 

    첫 인사, 첫 인상이 중요하다. 남녀 사이에도 첫 5분간의 인상이 호감, 비호감을 결정한다. 실실 웃으며 비굴한 태도를 보여선 안 되지만 상대에게 호감이 있다는, 적어도 적의가 없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 필요하다. 그래야 일이 성사된다.

    첫 단추, 첫 실마리가 중요하다. 그래서 정치와 외교에서 의전과 사전조정이 중요하다. 회담 전에 실무선에서 이미 일의 8,90%가 성사되어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회담은 최고결정권자가 만나 악수하고 사진 찍는 요식절차의 성격이 짙다. 하지만 요식은 요식이되 반드시 필요한 절차다. 이것 역시 빠뜨릴 수 없는 중요한 의미를 갖는 의전이기 때문이다.

    정치, 외교는 의전에서 시작해 의전에서 끝난다는 얘기가 있다. 그만큼 절차와 격이 중요하다는 얘기다. 형식주의, 권위주의를 부정하고 소탈함과 변화를 꿈꾸는 진보가 특히 취약한 부분이다. 하지만 이것은 권력을 획득하고 운영하는데 기본이다. 골목대장놀이에 만족하지 않으려면 반드시 보강해야 할 부분이다.

 

    만나기 전에 일을 성사시켜라. 물위는 한가하지만 물밑은 분주한 백조처럼 요모조모, 미리미리 생각하고 조정하라. 모든 이를 호의를 갖고 우정으로 대하고 상대의 체면을 살려주라. 내 편이라면 집안에서 화내더라도 집밖에선 웃으라. 적이라면 비판하고 화낼지언정 천박하게 야유하거나 비꼬지 말고 격을 갖추어 대접하라.

    극기복례(克己復禮)! 진보, 보수를 떠나 예를 갖추라. 인간이 먼저 되어라.

 

    세상 사람들은 자신의 못난 점을 남의 실패에 견주어 스스로 위로하는 버릇을 갖고 있소.” (309p)

 

    이에야스가 자신의 후계자인 2대 쇼군 히데타다에게 그 동생 다다테루를 처벌하리라 결심한 것을 말하는 대목. 여기서의 실패란 다다테루에 얽힌 나쁜 소문이라기보단 그것을 공명정대하게 처리하지 못하는 것을 가리킨다고 보여진다.

    명목상 처벌의 이유는 오사카와의 전투에 지각한 것과 전장에서 쇼군의 가신을 함부로 죽인 것 등이었으나 핵심은 형인 쇼군을 위협하는 천하대란의 싹을 미연에 방지하기 위함이었다. 다다테루 자신이 오사카성을 탐내는 야심만만한 인물이었고 그의 장인인 다테 마사무네 역시 사위를 앞세워 천하를 호령하려는 역심을 품고 있었기 때문이다.

    다정다감한 면도 많았던 이에야스는 이런 다다테루에 대해 마음고생이 심했는데 히데요리와의 형평성과 천하대란을 막기 위해 결단을 내린 것이다. 남에게 엄격한 자는 스스로에게 더욱 엄격해야 한다는 경계와 공사의 구별은 엄격하고도 준엄해야 한다는 교훈을 세상에 드러내기 위함이었다.

    스스로에게 엄격한 사람은 대개 남에게 관대하다. 남에게 가혹한 사람은 대개 스스로에게 관대하다. 남이든 자기든, 엄격하든 관대하든, 공평무사하면 뒷말이 없다. 당대의 최고 권력자로 법도를 세우고 모범을 보여야할 이에야스는 결국 아들 다다테루에게 아버지와의 영원한 대면금지라는 처벌을 내리고 이는 이에야스가 임종할 때까지 지켜진다.

 

    이에야스가 다다테루를 벌하지 않으면 하하! 그럼 그렇지! 지는 뭐 별 수 있나! 히데요시와의 의리를 배반하고 그 아들 히데요리를 (어쨌든) 죽게 하더니 지 아들은 사랑스러운가보지?!

    노무현 대통령이 뇌물을 받았네 안 받았네, 알았네 몰랐네 보도가 나오자마자 얏호! 그럼 그렇지! 지는 뭐 별 수 있나! 그렇게 깨끗한 척, 잘난 척 하더니 꼬~올 좋다!

    이들이 비판하면서도 내심 기뻐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욕하면서도 심리적으로 갑자기 이에야스와 노무혀니에게 친밀해진 이유는 무엇인가? 마음 한구석에 이와 비슷한 공정하지 못하고 깨끗하지 못한 못난 점이 있기 때문이다!

 

    (노무현이라는) 인간이 어떻게 100% 깨끗할 수 있겠어? 노무현이도 인간인데! (이명박이라는) 인간이 어떻게 100% 사악할 수 있겠어? 이명박이도 인간인데! - 이렇게 위에 있는 노무현은 끌어내리고 밑에 있는 이명박은 끌어올려 자기주위에 도덕적 방어막을 친다. 인간이면 누구나 갖고 있는 자기방어기제가 밑바탕에 깔려있다. 일종의 알리바이 만들기, 공범 만들기와 같다. 무혀니든 명바기든 이에야스든 자기와 같이 별 수 없는 인간이라는 거다.

    그래서 사람들은 노무현은 사랑하든가 증오하고 이명박은 친밀해하거나 경멸한다. 극과 극이 갈리는 지점이다. 위에 있는 노무현보다 아래 있는 이명박과의 거리가 가깝고 올려다보는 것보다 내려다보는 것이 편안하기 때문이다. 이것이 정치적 성향을 떠나 타인을 바라보는, 특히 도덕적 잣대로 타인을 바라보는 보통사람들의 방식이다. 정치적, 도덕적으로 옳고 그름보다 정서적, 심리적으로 편안하냐 불편하냐 하는 점이 우선이다.

   

편안함친밀함매력으로 비약하는 등신스러운 병맛의 진수

 

    이것이 못난 사람들의 못난 심리다. 자기보다 잘난 사람보다 못난 사람이나 만만한 사람을 선호한다. 자신의 못난 점을 남의 실패, 남의 추문에 견주어 스스로 위로하는 못된 버릇을 갖고 있다. 남의 행복에서 자신의 불행을 느끼고 남의 불행에서 자신의 행복을 느낀다.

    이것이 비루한 사람들의 비루한 심리다. 리더가 100억을 해먹으면 비판은커녕 안도하며 100원을 해먹는다. 남의 큰 허물로 내 작은 허물을 감싸고 합리화하여 평안을 얻는다. 이렇게 큰 도둑 밑에 작은 도둑들이 들끓어 세상은 온통 썩어간다. 거세개탁(擧世皆濁)이다.

 

    리더든 구성원이든 명심할 일이다. 하나의 악이 열 개의 악이 되고 그 열 개의 악이 다시 백 개의 악이 된다. 하나의 선이 열 개의 선이 되고 그 열 개의 선이 다시 백 개의 선이 된다.

 

    평생 조식(粗食)을 지켜온 이에야스의 생명의 불꽃이 꺼져가는 것을 살피고 하늘에서 마지막 진미를 내렸는지도 모른다. (569p)

    “나는 서쪽을 지그시 노려보겠다. 그것은 아직 서쪽이 마음에 걸리기 때문이야...... 황궁뿐 아니라...... 더 서쪽에는 남만도 있고 홍모인 나라도 있다. 우리가 침략할 필요는 없겠지만 침략당하는 일이 있으면 전()...... 세이이타이쇼군(征夷大將軍)으로서는 더없는 큰 실수...... 그러므로 서쪽을 지그시 노려보면서 오로지 한 뜻으로......”

    덴카이가 다시 무릎을 쳤다.

    “서쪽을 노려보는 입상(立像)으로 장례지내란 말씀이십니까?”

    이에야스는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601p)

 

    이에야스 나이 75. 환갑이 큰 동네잔치였던 옛날에는 엄청난 장수요, 지금으로 쳐도 결코 적지 않은 나이다. 특별한 지병은 없었지만 이미 생명의 불꽃이 사그라드는 시기다.

    권력자이면서도 항상 소박하고 거친 음식만 주로 먹었던 이에야스가 어느 날 광귤 식초와 후춧가루를 섞어 올리브기름으로 튀겨낸 도미를 맛본다. 반주를 곁들여 기분 좋게 먹고 잠자리에 들지만 새벽에 측간에서 쓰러진다. 익숙치 않은 진미를 너무 과식한 탓으로 토하고 설사하며 심한 배탈이 난 것이다.

    이렇게 발병한 이에야스는 좋아지고 나빠지고를 반복하지만 고령으로 인해 버티어낼 체력이 없다. 결국 계속되는 기침, 가래, 고열 등으로 증상이 나날이 악화되어 결국 숨을 거두게 된다. 노인 분들이 여러 이유로 병석에 눕게 되고 결국 폐렴으로 진행돼 사망하는 전형적인 케이스다.

    연로하신 분들은 평소의 식습관, 먹거리를 갑자기 바꾸면 안 좋다. 위장이 적응치 못하고 탈이 날 수가 있다. 심한 설사와 구토는 가뜩이나 약한 체력을 급속도로 악화시킨다. 연로하여 약해진 연하기능(嚥下機能)으로 식도와 기도로 분리하여 넘기지 못하면 기도로 음식물 등이 들어가 폐렴을 일으키기도 한다.

 

    이에야스는 자신의 유해를 구노잔(久能山) 도쇼구(東照宮)로 옮겨 서쪽을 향해 서 있는 채로 장사지내라고 한다. 현재 지명으로는 시즈오카현 닛코(日光).

    우리가 침략할 필요는 없겠지만 - 우리는 간토(關東) 8주일 수도 있고 일본일 수도 있다. 교토, 오사카의 간사이(關西)를 경계한 거라면 우리는 간토고 남만, 홍모의 유럽을 경계한 거라면 일본이 된다. 침략할 목적이 아닌 침략에 대한 경계이고 국태민안을 향한 이에야스의 염원이었지만 이후의 역사는 주지하다시피 일본의 동아시아 침략이다. 이것으로 세계평화를 해치고 동아시아 인민들뿐 아니라 일본인들까지 전쟁의 포화에 고통 받고 신음하게 되었으니 일본의 후예들은 이에야스의 유지를 배반한 셈이 된다.

 

    한평생 전쟁의 종식과 전() 일본의 평화정착을 위해 초인적인 인내와 노력을 경주해온 철인 이에야스! 그것이 가능하도록 신으로부터 불가사의한 지혜의 축복을 받았던 노인 이에야스! 살아서는 분쟁의 씨앗을 정리한 후 3대 쇼군 이에미쓰를 지명하여 250여년간 이어지는 평화의 주춧돌을 놓고 죽어서는 전쟁을 염려해 자신의 유해를 입상으로 세우길 유언했던 한 시대의 거인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역사에서 퇴장했다.

    1616417. 향년 75.

   

서쪽을 향해 입상으로 서 있는 이에야스의 묘

 

    《대망(大望)12권 끝. 소설 대망(大望).