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망(大望)》 읽기를 마치며 – 첨부 : 도쿠가와 이에야스 유훈
《대망(大望)》 전12권
다 읽은 후 포스팅을 할까 말까 망설이다가 그냥 넘어가기 섭섭하기도 하고 기억도 되살릴 겸 최대한 간략히 훑어보고 마치려 하였는데 생각보다 길어졌다. 어쩌다보니, 내친 김에 13편의 포스팅을 해버렸다. 덕분에 전체적, 입체적으로 다시 한 번 조망할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됐다.
마지막으로 후기(後記) 혹은 독후감이랄까. 내가 느낀 느낌 몇 가지만 총론식으로 쓰는 것으로 《대망(大望)》 관련 포스팅을 마무리하기로 한다. 처음이 있었으니(☞《대망(大望)》읽기를 시작하며) 끝을 맺어야지... ^.^
다른 여느 소설처럼 첫 도입부를 읽을 때는 등장인물 외우기가 힘들었다. 거기다 우리에겐 다소 생소한 15,16세기 일본을 배경으로 한 역사대하소설로 지명이나 문물이나 문화... 등등 사전지식이 없으니 속도가 좀처럼 나지 않았다.
그 중에서 가장 힘든 건 그 사람이 그 사람인 것 같은 수많은 인물들의 성과 이름이다. 과장하자면 ‘가나다라 마바사아’의 아들 ‘가나다라 마바타카’ 식이다. 예를 들면 실재 등장인물들인 ‘히데요시’, ‘히데요리’, ‘히데쓰구’, ‘히데야스’, ‘히데타다’, ‘히로타다’와 같이 종성(終聲)이 없이 다 엇비슷해 이름이 뒤죽박죽인 느낌!
거기다 왜 그렇게 이름은 수시로 바꾸는 지... 아명(兒名)일 때 다르고 성장하면서도 몇 차례 바뀌기도 한다. 예를 들면 어릴 적엔 ‘다케치요’였다가 요시모토에게 아부하기 위해 ‘모토야스’로 바꾼 후 최종적으로 ‘이에야스’가 되는 식이다. 성도 바꾸고 이름도 바꾸고... 스스로 바꾸기도 하고 힘센 사람이 주기도 하고... 정신이 없다. @.@
게다가 한 술 더 떠 이곳에선 성, 저곳에선 이름으로 쓰여 있으니 사람 찾느라 시간 다 간다. ㅠ.ㅠ
전국시대인 만큼 전쟁에 얽힌 이야기가 많아서 할복(割腹)하는 장면이 다수 나오는데 이것 역시 전형적인 일본의 관습과 문화로, 받아들이기 거북한 점이 많았다.
전형적인 할복은 앙연히 절명시를 한 수 읊고 단정이 앉은 채로 과감히 배를 가르면 측근이 뒤에서 목을 쳐서 고통을 끝내주는 식이다. 하지만 전쟁터에서 경황이 없으면 그런 도움도 받지 못하고 고통 속에서 신음하며 죽어가기도 하고 심지어 자신의 내장을 들어내 뿌리면서 죽는 경우도 기록되고 있다.
사의 미(死の美), 죽음의 미학이다. 미학적으로 표현하면 ‘변태적 유미주의’고, 심리학적으로 말하면 ‘사의 충동’이다. 어둡고 병적이고 변태적이다.
고통 좋아하는 사람 없다. 죽음 환영하는 사람 없다. 우리의 일상도 물론이거니와 전쟁 역시 이기기 위해, 살기 위해 하는 것이지 지기 위해, 죽기 위해 하는 것은 아니다.
이들은 모두 의리와 충성과 운명을 이야기하며 죽어가고 있다. 하지만 실지로 그것을 위해 죽어간 이들이 몇이나 될까? 기실 궁지에 몰려 죽지 않을 수 없어 죽어간 게 아닌가! 살아날 방도가 없자 죽음을 받아들이는 방편으로 의리를 찾고 충성을 찾고 운명을 찾으면서 비장미를 한껏 갖춘 아름다운 최후를 장식하려 했던 것이 아닌가!! 일본의 투구와 갑옷 등 무장(武裝)이 특히 화려했던 것도 이것의 영향이 크다. 그들에겐 무장이 곧 수의(壽衣)였던 것이다.
이것이 미학적, 심리적으로 변형되면 자신과 세상을 병들고 어둡게 하는 악폐가 된다. 파괴와 자해의 죄악이 된다. (최후의 순간까지) 목숨을 바치려는 이 대의가 옳은지 고민하는 것을 포기하고 어떻게 하면 멋있고 폼 나게 죽을 것인지만 궁리한다. ‘왜’ 죽어야 하는지 따져보지 않고, 그저 ‘어떻게’ 죽을까만 고민하며 사실은 개죽음을 당하면서도 영웅적 죽음으로 자위하며 스스로 감동한다.
일본의 가미가제(神風)로 대표되는 무사도의 부정적 측면이다. 이것은 봉건낭만주의와 우익 파시스트 운명철학과 연결되는 것으로 근대 일제강점기를 거치며 우리나라에도 적잖은 부정적 영향을 미친 것이 사실이다. 바로 ‘하면 된다.’로 대표되는 강압적인 군인정신이다. 이렇게 이 땅의 시민들은 ‘우리는 민족중흥의 역사적 사명을 띠고 이 땅에(국민교육헌장)’ 새롭게 태어나게 된다. 사명을 띠고 태어나 사명을 위해 살다가 사명에 의해 죽는 국가의 충직한 일꾼들이 됐다.
무사계급인 가신과 영주들은 저마다 충성과 의리를 대의명분으로 내세우며 경쟁했지만 실상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살아남기 위해 서로 죽고 죽이는 아귀다툼이었다. 아버지가 아들을 죽이고 아들이 아버지를 내쫓는 패륜이 빈번하였고 날이 새면 적과 동지가 바뀌는 배신이 난무하였다. 무사정신은 고사하고 ‘정신’이라 부를 어떤 것도 발붙일 수 없는 무한생존투쟁이다.
이러한 혼란상은 일본인들의 민족성보다는 시대적 상황과 제도적 배경에 기인한 면이 크다. 덴노(일왕)와 쇼군(막부의 장군)과 다이묘(영주)가 얽혀 안정되고 강력한 집권세력이 부재했던 상황에서 수 십 개 나라들이 어지럽게 경쟁하는 춘추전국시대다. 전쟁에 져서 영지를 뺏기면 봉토뿐 아니라 가옥까지 몰수당해 하루아침에 알거지가 된다. 사실상 영지 안의 무사계급에겐 사형선고나 마찬가지다. 대개 할복을 명령받거나 운이 좋으면 머리 깎고 절에 들어간다.
정신문화, 통치이념 면에서도 아직 근거로 삼을 만한 규범이 없었다. 무력은 남아돌았지만 당시의 명이나 조선보다는 많이 뒤떨어진 문화적인 후진국이랄 수 있다. 이에야스는 통일 전후로 패권을 확립하면서 법과 제도를 정비하고 학문을 권장함으로서 이후 265년간 이어지는 에도막부의 안정적인 통치기반을 닦는다.
소설을 통해 드러나는 작가의 의중은 일본과 이에야스에 대해 편애하는 편인데 팔이 안으로 굽는 것이 자연스럽듯 이해해 줄만한 수준(혹은 독자에 따라선 참을 수 없는 수준)이다. 노부나가, 히데요시, 이에야스를 비롯한 숱한 인물들의 행적을 선의를 가지고 영웅적으로 묘사하고 있다. 특히 늘그막의 이에야스에 대해선 거의 평화의 화신, 생불(生佛)의 경지에 이른 인물로 묘사하고 있는데 균형을 잃고 거의 일면, 일방의 역사해석을 한 혐의가 보인다.
편협하고 노골적인 국수주의까진 아니더라도 임진왜란의 조선침략을 거의 생략하고 넘어가는 점, 당시 사카이 상인들의 세계를 향한 웅대하고 진취적인 안목과 도전정신을 강조한 점, 히데요시의 아들 히데요리와의 갈등을 이에야스 입장에서만 일방적으로 해석한 점 등은 주의 깊게 읽고 넘어가야 할 부분이다. 즉 일본은 평화와 번영을 염원한다면서 조선을 침략한 것이나 충분히 주어진 권한으로 일을 원만히 해결할 수 있을 것 같은데도 일부러 트집을 잡아 일을 복잡하게 만들어 히데요시 가문을 멸망시킨 혐의는 자기모순과 이율배반을 드러내고 있다.
작가의 시선은 시종일관 침략의 현장인 조선땅을 향하지 않는다. 당연히 그들의 잔인한 악행과 조선백성들의 참혹한 고통에 대해 일언반구 언급이 없다. 전쟁의 시작 역시 이에야스를 비롯한 무사, 사카이의 상인, 지식인 등등 모두가 반대하는데 히데요시 혼자만의 고집으로 발발한 것으로 하여 이순신에 의한 바다에서의 대패, 평양성에서의 패퇴 등 자신들의 엄청난 실패와 좌절은 생략한 채 갑자기 종결시킴으로서 얼렁뚱땅, 유야무야 면죄부를 주고 넘어간다.
노부나가, 히데요시, 이에야스는 모두 엄청난 기질과 기상을 타고 난 영웅들이고 대부분의 가신, 무사들은 겁을 모르는 용맹한 자들로서 사리사욕 없이 주군을 위해 제 한목숨 초개와 같이 버리는 충성스런 자들이다. 또한 그 주의의 여성들 역시 남자 못지않은 엄청난 식견을 소유하고 있다. (하지만 의사결정에는 전혀 영향력을 행사하지 못하고 소모품 취급을 받는다.)
이에야스와 갈등하거나 맞선 쓰키야마 마님(이에야스의 정실), 오가 야시로, 다케다 가쓰요리, 이시다 미쓰나리, 요도 마님(히데요시의 측실)과 그 아들 히데요리 등을 모두 악당, 어리석고 못난 인물, 비뚤어지거나 꼬인 인물로 부정적으로 그리고 있다. 반대편에 있던 인물로 비교적 긍정적, 호의적으로 묘사한 인물은 전국시대의 마지막 명장(名將)으로 알려진 사나다 유키무라 정도다.
반면 사카이 상인들에 대한 시선은 각별히 우호적인 느낌이다. 그들을 당대 세계최고수준의 식견과 기상을 갖추고 히데요시를 좌지우지할 수도 있는 엄청난 배후 지원세력으로 그리고 있는데 실지론 자기이익에 급급해 권력자에 굽실대는 보잘것 없는 장사치에 지나지 않은 것을 과장한 측면이 크다. 작가는 일본재계와 많이 친했다는데 이런 평소성향이 적잖이 작용한 듯하다.
이상과 같이 작가의 시선은 일본과 이에야스에 편파적으로 우호적이다. 신격화까지는 아니더라도 영웅시하여 미화한 측면이 크고 국수주의의 냄새를 풍기며 공명정대하지 않다. 여러 곳에서 서구열강에 맞서 가장 뛰어난 일본인들이 아시아를 대표해야 하고 자신들의 주도하에 그들로부터 아시아를 보호하여 공동번영을 이루어야 한다는 논리인 ‘대동아공영’의 인상을 지울 수 없다.
당시의 상황을 민주주의, 보편주의, 세계주의의 세례를 받은 지금의 시각으로 해석, 평가할 수야 없겠지만 소설 속의 해석과 글쓰기로 볼 때 작가를 ‘일본의 양심’으로 평가하기엔 부족한 면이 많다. 그도 어쩔 수 없는 일본인! 악의적으로 평가하면 일본제일주의의 골수우익 국수주의자이고 최대한 우호적으로 평가한대도 민족주의에 기초한 보수우익 정도에 그친다.
재미도 있고 깊이도 있고 교훈을 주는 메시지도 있지만 보편적 민주주의와 세계적 양심이란 측면에서 노벨문학상 수상자이자 일본의 양심으로 불리는 오에 겐자부로에는 한참 못 미친다는 것이 내 개인적 평가다.
《대망(大望)》의 작가 야마오카 소하치(山岡莊八) 1907~1978
소설은 잘 짜맞춰진 스위스 시계처럼 시공간을 넘나들며 이야기를 정밀하고 재미있게 풀어나간다. 특히 인물의 심리묘사에 탁월한 것이 어느 심리소설 못지않게 인물의 행위를 설명하는 데 설득력을 가진다. 마음의 한 조각 한 조각을 기계부품 해체하듯 낱낱이 해부하여 독자 앞에 늘어놓는다. 가히 심리소설, 역사소설의 모범이랄 수 있다. (섭섭한 소리를 했으니 칭찬도 해줘야지! ^.^)
역사소설은 이야기의 다음 행선지와 최종 행선지가 이미 정해져 있다. 이것은 역사소설의 장점이자 단점으로 작가가 이야기를 풀어나가는 게 편하기도 하고 제약으로 작용하여 불편하기도 할 것이다. 그 지점과 지점 사이의 빈 공간을 얼마나 빈틈없이 짜임새 있고 설득력 있게 채워나가느냐에 성패가 달려있는데 작가는 이 방면에 놀라운 필력을 자랑하고 있다. 어느 한 대목 어색하거나 허술한 곳이 없는 느낌이다. 등장인물들의 대사마저도 그 상황, 그 성격으로는 그랬을 것 같은, 아니 반드시 그렇게 말할 수밖에 없었으리란 생각이 들게 한다.
(사실 몇 군데 스토리 전개가 끊어지는 빈 공간, 허술한 곳이 있는데 단락으로 구분된 신문연재물이라는 글의 성격과 1950년부터 1967년까지 장장 18년의 긴 연재기간을 감안하면 불가항력적인 구석이 있어 이 부분은 패스! 작가의 컨디션과 필력이 항상 일정할 순 없을 테니까.)
그래서 드는 의문이 어디까지가 사실(事實)이고 어디까지가 허구인가 하는 점이다. 어디까지가 사실(史實)이고 어디까지가 가공인가? 어디까지가 드러난 것이고 어디까지가 드러나지 않은 것인가? 나로선 알 수 없다. 분명 작가만의 상상력으로 만들어낸 가공의 인물, 가공의 에피소드들이 있겠지만 소설 속 이야기들은 무엇이 있었던 것이고 무엇이 없었던 것인지 구별할 수 없다. 모두가 눈앞에서 실재 일어나고 있는 것처럼 현장감과 사실감을 갖는다.
소설 《대망(大望)》을 통해 많은 것을 얻었다. 잘 모르던 일본역사를 통해 일본에 대해 더 많이 알고 더 많이 이해하게 됐다. 소설이 그리는 당시 일본역사에 대한 해석에는 의견이 갈리겠지만 변하지 않는 사실(史實)들은 분명하다. 노부나가, 히데요시, 이에야스는 서로 그 뜻을 이어가며 일본의 전국시대를 평정하고 평화를 가져왔다. 이에야스는 음흉하다기보다 너그럽고, 인색하기보다 절제했던 덕장이자 현인이었다. 누가 뭐래도 이에야스는 일본역사에서 과보다 공이 많았음은 분명하다.
이후의 역사는 크게 명치유신과 아시아 태평양 전쟁으로 이어진다. 임진왜란에서 한일합방을 거쳐 지금에 이르기까지 우리와 일본은 악연이 많다. 하지만 사람도 사람 사는 곳도 다 같은 사람, 다 같은 산천이다. 그들도 우리와 같은 평범한 인간인 것이다. 같은 인간끼리, 두 나라 시민들끼리 미워하며 싸울 필요는 없다. 서로 알고 배우며 이해를 넓혀가면서 상대의 나쁜 점은 고쳐주고 상대의 좋은 점은 배우면 된다.
일본놈들이 대단해! - 놈(혹은 쪽바리)이라고 욕하면서도 칭찬한다. 미워하면서도 부러워한다. 아직까지 한국은 일본의 ‘그것’을 욕하면서도 ‘그것’을 따라하며 흠모하고 있다. ‘그것’은 앞서도 언급했던 굴절된 일본 무사도 정신이다. ‘그것’이 우리가 일본을 욕하는 핵심이고 우리가 일본을 무의식적으로 선망하는 핵심이다. 까발리면 이는 곧 식민사관에 뿌리를 둔 우익파시스트 군국주의임에 분명하지만 대부분 의식하지 못하고 있다. 한참 뒤떨어진 지나간 시대의 낡은 찌꺼기지만 강력하고도 뿌리 깊은 찌꺼기이기도 하다.
시대의 찌꺼기인 우익파시스트 군국주의 늙은 무사들
우리도 군복 입고 활개 치는 비슷한 부류들이 있다.
우리가 진정 배우고 따라야 할 일본의 ‘그것’은 무엇인가? 절대 이 같은 시대의 찌꺼기는 아니다. 일본의 무사도 정신은 절대 조선의 선비정신에 못 미친다. 왕과 사대부들의 일방적인 통치를 받았던 당시 조선백성들과 영주, 무사들의 강압적 지배를 받았던 일본백성들 중 어느 누가 더 행복하고 존엄한 삶을 영위하였을까 묻는다면 나는 조선의 손을 들겠다.
우리보다 서구문물을 더 빨리 받아들여 근대화에 앞선 것 역시 무사도 정신에 힘입은 것이 아니라 아시아의 최동북에 위치한 섬나라로서의 지정학적 위치에 힘입은 바 크다. 무사도 정신은 유교의 고루하고 부정적인 이미지와 대비돼 산뜻하고 멋있는 것처럼 보일뿐 인류에게 행복을 가져다 줄 아름답고 차원높은 정신문화가 절대 아니다.
실재로 이에야스는 <논어>를 즐겨 읽었고 전국시대의 혼란상을 마감하고 평화시대를 여는 기본 통치이념으로 유교, 그 중에서도 퇴계 이황의 '경(敬) 사상'을 그 근간으로 삼았다.
무사도 정신이란 ‘죽는 것’이다. 죽을 정신이면 못 해낼 일이 없다. 그러므로 무슨 일이든 ‘하면 된다?’... 심지어 ‘안 되면 (수단방법 가리지 말고) 되게 하라??’... - 세상에는 해도 해도 안 되는 일도 있고, 해서는 절대 안 되는 일도 있다. 해서는 안 되는 일을 알고 절제하며 도리를 지키는 것이 더 중요하다. 그것이 예(禮)이고 겸양이다. 그것이 사람과 사람을 서로 평화롭게 공존할 수 있게 만드는 핵심 덕목이다.
일본에서 좋은 것이면 한국에서도 좋은 것이고, 한국에서 옳은 것이면 일본에서도 옳은 것이다. 누구 것이든 버려야 할 것을 버리고 취해야 할 것을 취하자. 일본에도 좋은 사람, 좋은 문화가 많다. 꼼꼼한 장인정신, 투철한 직업의식, 세련된 미적 감각, 질박한 서민문화...... 이런 것들만 배우고 교류하면 양국은 물론 동아시아 전체가 평화와 번영을 누릴 수 있을 것이다.
마지막으로 이에야스가 남긴 유훈(遺訓)을 옮겨보는 것으로 소설 《대망(大望)》 관련 포스팅을 종결한다.
人の一生は重荷を負うて遠き道をゆくが如し、 いそぐべからず、 不自由を常と思へば不足なし、 こころに望おこらば、 困窮したる時を思ひ出すべし、 堪忍は無事長久の基、 いかりは敵とおもへ、 勝事ばかり知りて、 まくる事をしらざれば、 害其身にいたる、 おのれを責めて、人をせむるな、 及ばざるは過ぎたるよりもまされり
사람의 일생은 무거운 짐을 지고 먼 길을 걷는 것과 같다. 서두르면 안 된다. 무슨 일이든 마음대로 되는 것이 없다는 것을 알면 굳이 불만을 가질 이유가 없다. 마음에 욕망이 생기거든 곤궁할 때를 생각하라. 인내는 무사장구(無事長久)의 근본, 분노는 적이라 생각하라. 승리만 알고 패배를 모르면 해가 자기 몸에 미친다. 자신을 탓하되 남을 나무라지 마라. 미치지 못하는 것은 지나친 것보다 나은 것이다. 모름지기 사람은 자기 분수를 알아야 한다. 풀잎 위의 이슬도 무거워지면 떨어지기 마련이다.
※ 상기 내용 중 일본 문화와 역사에 대한 해석에 있어 진중권이 지은 <네 무덤에 침을 뱉으마>에서 다수 도움을 받아 인용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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