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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혁명사≫ 9권 <공포정으로 가는 길> 리뷰

어멍 2024. 2. 14. 21:14

 

≪프랑스 혁명사≫ 9권 <공포정으로 가는 길> 리뷰

 

<공포정으로 가는 길>

부제 : 구국위원회와 헌정의 유보

 

  1793년 3월에 확전과 국내의 반혁명 운동의 확산과 함께 파리 서민의 봉기는 입법가들 사이의 권력투쟁과 맞물리면서 혁명의 상황을 더욱 긴급하게 몰아가지 않으면 안 된다는 위기의식을 한층 더 고조시켰다. - 58p

 

    1793년 1월 21일 루이 16세가 단두대에서 처형됐다. 이제 “왕이 죽었다. (새) 왕 만세!”에서 “왕이 죽었다. 인민 만세!”의 시대가 열렸다. 프랑스는 입헌군주제에서 공화제로 바뀌었다. 하지만 국내외의 사정은 여전히 혼란스럽고 어렵다. 대외전쟁을 수행하면서 동시에 뿌리 깊은 왕당파 귀족주의 세력의 저항과 반란을 이겨내야 한다.

    왕이 죽은 이후 국민공회 의원들은 더욱 더 분열하게 된다. 공화국의 인민들 역시 정치적으론 예전보다 평등해졌지만 정치경제적인 상대적 박탈감은 오히려 상승했다. 민생은 여전히 어려웠고 그럴수록 불만세력은 늘어났다. 서민인 상퀼로트를 중심으로 ‘차라리 왕 밑에서 살던 때가 나았다’고 말하는 이도 있었고 일부는 ‘앙라제(enragés)’라는 과격폭력주의자가 되기도 했다. 앙라제는 ‘성난 사람들’이라는 뜻으로 일체의 권위와 권력을 부정하는 무정부주의자(아나키스트)에 가까웠다.

 

    원래 혁명의 시대는 어지럽고 혼란스럽다. 온갖 과격한 주장과 폭력이 난무한다. 혁명의 초기부터 마라는 왕당파 귀족을 몇 백, 몇 천 명 죽여야만 혁명이 완수될 것이라고 주장했고 루이의 사형에 찬성한 국민공회 의원인 르펠티에는 파리 시내의 한 식당에서 밥을 먹다가 왕당파에게 살해되기도 했다. 심지어 비선서 사제의 뺨을 인두로 지져서 구별하고 외국의 왕들을 암살할 특수부대격인 ‘폭군살해단’을 조직하자고 주장하는 과격혁명주의자(국민공회 의원 드브리)도 있었다.

 

국민공회 의원이기도 했던 자크 루이 다비드 그림 <마라의 죽음>

마라 역시 왕실과 비선서 사제에게 우호적이고

지롱드파의 영향을 받은 여인인

샤를로트 코르데의 칼에 살해된다.

 

    이제 왕당파도 공화파도 앙라제도 이판사판이다. 혁명과 전쟁과 반란과 불만세력의 소요가 혼재하는 비상시국에서 국민공회 내에서 보다 현실주의적이고 강경한 혁명파인 몽타뉴파는 상대적으로 온건하고 반혁명세력에 미온적인 - 그래서 혁명정국에서 답답하고 심지어 비겁하게 비쳐 파리 투사들에게 인기를 잃은 - 지롱드파를 국민공회에서 몰아낸 후 새 헌법을 채택한다.

    헌법을 통과시켰으니 원래대로라면 국민공회를 해산하고 새 의회와 정부를 구성해야하지만 국내외의 사정이 여전히 엄중함으로 국민공회는 해산하지 않고 헌정을 유보한 채 비상체제를 유지하기로 한다. 몽타뉴파는 정국을 주도하고 공공질서를 잡기 위해 구국위원회, 안보위원회와 혁명법원(특별형사법원)을 도구로 공포정을 본격적으로 시행하게 된다.

 

    ※ 정파 이름에 관하여 : 몽타뉴파는 산악파, 중도파는 평원파 또는 늪지파라고도 한다. 지롱드파의 지롱드는 프랑스 서남부 도시 보르도를 중심으로 한 지명에서 따온 이름이다. 몽타뉴(강경개혁), 지롱드(온건개혁), 중도파는 모두 공화파에 속하여 주로 자코뱅협회에서 활동하였으나 지롱드는 혁명이 급진화될수록 인기를 잃어 자코뱅협회와 국민공회에서 쫓겨난다. 참고로 자코뱅, 코르들리에협회 등의 이름은 회합장소(주로 수도원)에서 따온 이름이다.

 

  지롱드파의 가데는 파리의 모든 권력기관이 국민공회를 우습게 여기고 있으니, 이제는 애국자로 위장한 한 줌의 반혁명세력과 국민 전체의 투쟁을 끝내야 할 때라고 말했다. 그는 우선 다음 일요일(5월 6일)부터 국민공회를 베르사유로 옮겨서 회의를 하자고 요구했다. - 225p

 

    1793년 5월까지도 국민공회의 지배권은 지롱드파가 쥐고 있었다. 몽타뉴파는 소수로 파리 투사들의 지원을 받았지만 중도파의 지원을 받는 지롱드파에 매번 표결에서 패배를 맛봐야 했다. 결국 파리코뮌을 중심으로 한 파리의 투사들은 참다못해 5월 31일과 6월 2일 봉기하여 국민공회를 포위하고 물리력을 행사하여 의원들을 위협한다. 결국 소수인 몽타뉴파가 국민공회 밖의 외부의 힘, 민중의 힘을 빌려 정국을 뒤집은 것이다.

    1789년 혁명의 초기부터 파리는 혁명의 지휘부, 사령부였다. 물리력을 동원하여 베르사유에서 왕실과 전국신분회를 파리로 끌고 오고 전국신분회에 압력을 가하여 왕당파, 귀족주의자를 몰아낸 후 이제 보수적 부르주아와 지롱드파마저 무릎 꿇린 것이다.

 

    이미 왕당파, 귀족주의 정치클럽은 공식적으로 자취를 감추었고 혁명을 주도했던 자코뱅클럽과 코르들리에클럽은 협회로 이름을 바꾼 채 정국을 주도하고 있다. 자코뱅협회에서는 상퀼로트를 경계한 지롱드파가 내쫓기고 몽타뉴파 일색이 되었다. 하지만 몽타뉴파는 극렬좌파인 앙라제까진 받아들이지 않고 그들을 사회를 혼란시키는 불순세력으로 보아 경계했다.

    몽타뉴파의 지도자인 로베스피에르는 상퀼로트가 수구왕당파나 앙라제에게 이끌리지 않고 혁명의 우호세력으로 남아있는데 힘썼는데 상대적으로 파리에선 앙라제를, 지방에선 반혁명왕당파를 더욱 경계하였다. 그도 그럴 것이 이들 평범한 민중, 교육과 경제수준이 그리 높지 않은 서민인 상퀼로트는 수가 가장 많으면서도 진보 보수, 좌파 우파, 혁명 반혁명 세력들 모두가 가장 선동하기 쉬운 계층이었기 때문이다.

 

    극렬좌파에 앙라제가 있었다면 우파에는 새롭게 떠오르는 뮈스카댕(Muscadin)이 있었다. 표현이 어색하지만 ‘젊은 수구’로서 귀족이나 부유층 자제 출신의 멋쟁이 왕당파 젊은이들이다. 이들은 패션부터 독특했는데 과장된 양식에 의도된 찌질함까지 더해진 관종 패션이었다.

    앙라제도 뮈스카댕도 모두 불만에 차있다. 사납고 폭력적이다. 하지만 불만의 원인은 다르다. 앙라제는 거듭된 혁명에도 빵과 비누 등 생필품을 중심으로 개선되지 않은 생활고 때문에 화가 나있다. 매점매석과 투기 등 새롭게 대두되는 부르주아의 적폐에 분노하고 있다. 뮈스카댕은 시민혁명을 넘어 계급혁명의 성격을 띠어 가고 있는 정국에 화가 나있다. 귀족을 넘어 부르주아나 부자들을 적대시하는 분위기에 분노하고 있다.

 

    2024년의 대한민국도 정치적 대립이 심하고 모두가 예민해져 화가 나 있는 것 같다. 그 중에서 특히 병적으로 심한 사람들, 좌파 우파 가리지 않고 정치적 열정에 들뜬 극렬주의자, 별종들이 있다. 그것을 빌미로 진보는 보수를 보수는 진보를 확대, 과장하여 공격하지만 우파가 좀 더 문제를 일으키고 있다.

    우파의 경우 60,70대 이상에선 뿌리 깊은 반공보수, 극우보수의 태극기 부대가 문제라면 10대 20대 젊은 층의 경우 일베류가 문제다. 일베의 경우 세대와 문화에서 뮈스카댕과 유사한 점이 많다. 하지만 뮈스카댕이 계급적으로 상류층, 귀족층, 부유층 일색이었던 반면 일베층은 그렇지 않다. 간혹 의사 등 사자 붙은 엘리트 일베가 출현하면(심지어 재벌 일베도 있는 듯) 일베 멤버들의 스타가 되고 그 중에 일부는 정치권에 영입되기도 하는 것 같다.

 

    대부분의 일베 멤버들은 서민층으로 치열한 경쟁과 각박해진 삶에 지치고 좌절하여 화가 나있는 젊은이들이다. 현실에 대한 불만에 젊은이 특유의 튀려는 놀이 문화가 결합되어 다소 기괴하고 상규에서 벗어난 패륜적 행태까지도 보이는 일베는 기성세대와 정치가 젊은 세대에게 드리운 어둡고 비뚤어진 그림자다.

    반면 뮈스카댕이나 소수의 부유한 엘리트 일베는 서민 일베와 정치문화적 코드는 비슷해도 사회경제적 처지는 다르다. 이들은 젊고 화려한 멋쟁이다. (넓게 보면 1990년대부터 회자되던 ‘강남 오렌지족’도 정치문화적으로 비슷한 부류라 할 수 있다.)

 

    뮈스카댕은 깃을 한껏 크게 부풀려 올리고 이각모에 머리는 일부러 길고 난잡하게 흩뜨려 내리고 때 묻은 꼬질꼬질한 스타킹을 일부러 드러내놓는 등 관종끼를 보이지만 그 의상의 원자재는 최고급이다. 부르주아의 럭셔리함만큼은 숨긴 듯 숨기지 않은 듯 어쩔 수 없는 것이다.

    이것이 넘볼 수 없는 젊은 부자들의 진정한 허세이자 멋이다! 100달러 지폐로 담뱃불을 붙이는 것처럼 근래에 깨끗한 초고가 운동화에 까만 때를 묻힌 상품이 흥행에 성공한 것도 넓게 보면 같은 맥락이다. 뮈스카댕은 화려함과 저항의지와 B급 똘끼가 결합한 독특한 패션으로 18세기 초부터 유행하다가 혁명으로 몰락한 화려하고 럭셔리한 귀족주의 문화양식인 ‘로코코’가 퇴폐적으로 부활한 새로운 패션이었다.

 

럭셔리한 관종 - 뮈스카댕

 

    뮈스카댕이 수구 귀족주의와 궁합이 맞다면 일베는 보수 국민의힘과 궁합이 맞다. 사고방식, 문화코드 역시 유사한 면이 많다. 정치 본연의 것보다 외모, 스토리, 화제성으로 흥행을 노리는 얼굴정치, 이미지정치, 쇼정치에 능하다. 국민의힘에 픽업되는 젊은 남녀들을 보면 외모는 준수한 반면 정치와는 무관한데다 정치철학이나 인문학적 소양이 부족하다는 인상을 지울 수가 없다.

    엘리트 일베든 서민 일베든, 젊은 일베든 늙은 태극기든, 공통적으로 공부가 부족하기 때문이다. 특히 민주공화국 시민의 소양을 갖추는데 필수적인 철학, 역사, 인문학이 부족하다. 늙은 보수는 먹고살기 바빠 아예 가방끈이 짧았거나 반공교육, 독재정당화 교육만 받았고 젊은 보수는 입시와 출세를 위해 수학공식, 영어단어만 외웠다.

 

    89학번인 나의 대학시절만 해도 이 정도는 아니었다. 군사독재정권의 막바지로 심심찮게 캠퍼스 안팎에서 데모도 했었는데 그 때는 젊은 지성인으로서 비록 서툴고 앳되지만 나름대로의 정의감과 사명감이 있었다. 놀고먹는 아리랑 대학이란 비판도 있었고 경쟁에 이리저리 치이는 현시대의 젊은이들에겐 얄밉게 들리겠지만 멋과 낭만이 남아있었다.

    거칠게 어림잡아보면 데모에 적극 참여하는 학우는 10%를 넘지 않는 소수였지만(운동권이라 할 수 있는 학생회간부급은 1~2% 극소수) 대다수의 학우들은 그들을 별종으로 보지 않고 비교적 우호적으로 보았다. 그렇다고 인기 있거나 환영하는 분위기는 아니었고 사실 대다수의 학우들은 무관심한 편에 가까웠다. 통계는 알 수 없지만 가장 엄혹했던 70~80년대 군사독재시대는 물론이고 평생 데모 한번 안 해본 사람이 해본 사람보다는 많을 것이다.

 

    데모가 벌어지면 소수의 참여 학우를 제외한 절대다수의 학우들은 제 하고 싶은 것을 한다. 집 안에서 뒹굴뒹굴 쉬거나 친구끼리 먹고 마시거나 놀러 다니거나 한다. 예정된 수업과 시험이 연기, 취소되면 나중은 어찌 되던지 일단은 야호! 대환영이다! 물론 그 시간을 쪼개서 알바로 학비를 버는 친구, 도서관에 숨어 시험공부, 고시공부를 하던 친구도 있긴 있었을 것이다.

    운동권 학우들 중에도 단지 공부하기 싫어서, 학생회 조직의 권력과 이권을 노리고, 들뜬 소영웅주의로, 심지어 장차 정치권 진출을 위해서 학생운동, 독재반대 운동을 했을 친구가 있을 수도 있다. 하지만 현재 우리가 누리고 있는 민주주의는 군사독재정권에 저항했던 학생민주화운동의 노력과 희생에 힘입은 바 크다. 그 시절 대학생 선후배에게 우리는 고마움과 미안함을 가져야 마땅하다. 독재정권에 무모할 정도로 용감하게 저항했던 학생운동은 두고두고 이 땅의 젊은이들에게 모범이 될 우리의 자랑스런 역사이자 위대한 유산이다.

 

    리뷰가 옆길로 세서 뮈스카댕, 일베와 관련하여 필요이상으로 글이 길어졌다. 그만큼 한 사회의 젊은이들이 중요하기 때문이다. 60대 이후 노년층이야 이미 흘러간 물이고 변화를 기대할 순 없다. 장차 사회가 진보할 것인가, 퇴보할 것인가는 젊은이들에 달려있다.

 

    다시 1793년 프랑스로 돌아가서... 당시 세력지형은 수구왕당파(반혁명세력)와 중도파와 극렬좌파(앙라제)를 제외하고 상대적으로 보다 온건하고 보수적인 지롱드파와 보다 강경하고 혁명적인 몽타뉴파로 대별할 수 있다. 두 파 모두 공화주의, 계몽주의자들인 것은 공통이지만 무시할 수 없는 차이가 있었다.

    거칠게 구분하자면 몽타뉴파는 파리를 중심으로 한 중앙집권주의, 통일연맹주의에 가까웠고 지롱드파는 파리 이외의 지방분권주의, 자주연방주의에 가까웠다. 연맹주의는 ‘프랑스는 하나이며 나눌 수 없다’는 구호로 대표되는데 당시 프랑스가 전쟁과 혁명을 수행하면서 분열을 다잡고 정국을 돌파하는 중요 모토가 된다.

 

    몽타뉴파가 득세하고 지롱드파가 몰락한 것은 공간적으로 국민공회가 혁명의 한복판인 파리에 위치했고 시간적으로 평화시기가 아닌 전쟁과 혁명의 비상시국이었다는 점이다. 이럴 때는 원심력보다 구심력이 작동한다. 권력을 한 곳으로 몰아준다. 자연스레 한 곳으로 집중된다. 강경파, 매파가 득세한다.

    현대에도 평화롭고 심심한 사회에서는 내각제, 지방분권제가 적당하고 위험하고 분주한 사회에는 대통령제, 중앙집권제가 어울린다. 권력이 집중된 대통령제가 정국의 변동폭은 크지만 의사결정 속도와 국론을 하나로 모으는 데는 유리하다.

 

    우리나라는 미국, 중국, 러시아, 일본, 북한에 둘러싸인 분주하고 위험한 나라이므로 대통령제가 맞다. 하지만 국토의 크기, 사회의 다양성으로 보자면 내각제, 지방분권제가 오히려 필요한 측면도 크다. 가뜩이나 크지 않은 땅덩이에 서울 일극(一極)이다. 사회 어느 부문이나 서울대 출신이 카르텔을 이루어 헤게모니를 장악하고 있다.

    국토가 크고 인구가 많으면 중앙 집권해야 나라를 유지, 운영하기가 수월하다. 국토가 작고 인구가 적으면 오히려 지방 분권해야 숨통이 트인다. 중국도 미국도 국토가 크고 민족구성이 다양하여 원심력이 강해질 수 있으므로 오히려 대통령이나 주석 같은 강력한 중앙권력이 구심력으로 제어해야 그나마 통일성 있게 나라를 유지할 수 있다.

 

    모이면 흩뜨리고 흩어지면 모은다. 원심력과 구심력을 적절히 통제해서 다양성과 통일성을 동시에 추구하며 균형과 조화를 이루어야 한다. 가족이라도 수가 많으면 더욱 신경 쓰고 관리해 주고 적으면 오히려 신경 끄고 자유롭게 놔줘야 한다.

    자식이 예닐곱이면 어느 하나 안보여도 알아채지 못하고 하나둘이라면 어디 숨어도 금방 찾아낸다. 안 보이는 자식, 멀리 떨어져 있는 자식은 더욱 신경 써서 챙기고 자주 보는 자식, 가까이 붙어있는 자식은 오히려 놔줘야 한다. 그래야 갈등 없이 원만하고 화목한 가정을 유지할 수 있다.

 

  모든 일이 일사불란하게 진행되었다. 공포의 힘이다. 민주화한 사회에서는 꿈도 꾸지 말아야 할 체제이긴 해도, 혁명이 국시인 시기였으니 모 아니면 도를 추구하는 식으로 정치적 논리가 단순해졌다. 혁명/반혁명 모두 자신의 자유와 목숨을 걸고 싸웠다. - 343p

 

    모두가 사생결단, 복수에 대한 복수, 반격에 대한 반격이다. 정치권의 시선에서 잠시 벗어나 있던 마리 앙투아네트도 7월 13일 ‘인민의 친구’ 마라가 샤를로트 코르데의 칼에 죽임을 당한 것을 계기로 명을 재촉하게 된다. 그녀는 온갖 더럽고 흉흉한 혐의와 소문으로 대중의 모욕을 받은 후 10월 16일 단두대에서 처형되었다. 그해 1월 21일 남편인 루이가 처형된 지 8개월여 만이다.

    곧이어 숙청된 지롱드파 의원 21명이 혁명법원의 판결을 거쳐 10월 31일에 처형되며 공포정의 광풍은 계속 이어지게 된다. 20명을 처형하는데 불과 26분밖에 걸리지 않았다. (판결 당시 감추었던 단도로 자결했던 뒤프리슈 발라제의 시신은 혁명광장에 갔다가 다른 시신들과 함께 처리되었다.)

 

    위 파란 원문에서 나는 현재의 한국정치를 생각하게 된다. 4월 국회의원 총선거를 앞두고 정치가 너무 과열, 폭주하고 있기 때문이다. 정치인이 피습을 당하는 등 죽고 죽이는 살벌한 분위기다. 당시의 프랑스와 겹쳐 보이고 해방 이후 극렬히 대립했던 친일잔존세력과 민족해방세력, 좌파와 우파 간의 암살정국을 떠오르게 한다.

 

    지금 윤석열 정권은 공포정인가? 혁명법원은 없어도 검찰을 통해 위협정치, 공포정치를 하고 있다. 야당 뿐 아니라 여당 의원들까지 털면 털린다는 암시를 주고 있다. 아무 말이 없으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가만히 있으면 목숨만은 살려준다는 고압적인 자세다. 검찰독재가 어색하지 않을 만큼 검사전성시대다.

    윤 대통령과 국민의힘 지지자들 역시 막무가내고 맹목적이다. 합리적이고 균형 잡힌 사고력을 잃고 편견, 증오, 분노만이 남았다. 왜곡되고 치우친 정보만을 무한 소비하며 정치 중독을 넘어 망상에 이르렀다. 누가 우리의 평범한 이웃인 공화국 시민, 유권자들을 이렇게 망가뜨렸는가?

 

    정치인들이 쏟아내는 분노의 언어, 증오의 언어에도 책임이 있지만 그것을 확대증폭하고 교묘히 부추기고 그것을 통해 시민들을 가스라이팅한 언론, 특히 조중동 수구보수언론과 극우유튜브에게 가장 큰 책임이 있다.

    유감스럽게도 4월 총선이 다가올수록 이러한 살벌하고 혼탁한 분위기는 계속될 것 같다. 윤 대통령으로서는 총선 결과에 정치생명을 넘어 그의 인생 전체의 파탄여부가 달렸다. 절박하기는 조중동 역시 마찬가지다. 윤 대통령의 무모한 스타일과 조중동의 악착같은 권력의지를 감안한다면 혹 북한의 도발까지 유도하지 않을까 염려될 정도로 사용 가능한 모든 수를 쓸 것이다.

 

    그 어느 때보다 중요한 선거가 되었다. 결과에 따라 짧게는 윤 대통령의 남은 임기, 길게는 향후 몇 십 년의 한국정치와 한국사회의 진로를 결정지을 중요한 변곡점이 될 것이다.

 

 

    - 9권 리뷰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