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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혁명사≫ 8권 <피로 세운 공화국> 리뷰

어멍 2024. 1. 15. 21:47

 

≪프랑스 혁명사≫ 8권 <피로 세운 공화국> 리뷰

 

<피로 세운 공화국>

부제 : 9월 학살에서 왕의 처형까지

 

  (파리코뮌은) ‘자유의 제4년’이라는 말 뒤에 ‘평등의 원년’을 집어넣기로 의결했다. - 56p

 

    1792년 8월 10일 루이 16세를 끌어내린 제2의 혁명 이후 실질적인 권력은 급진좌파를 주축으로 한 파리코뮌이 장악했다. 그리고 그 배후세력, 지지세력은 상퀼로트라고 불리는 무산계급이었다.

    파리코뮌은 혁명이 있었던 1789년을 ‘자유의 원년’이라고 부른 것에 빗대어 자신들이 주도한 제2의 혁명을 기념해 1792년을 ‘평등의 원년’이라고 부르기로 한다. 실재로 권력은 아래로 내려오며 더 평등해졌다. 아직 여성은 남성만큼 권리를 누리지 못했지만, 적어도 남성을 능동시민과 수동시민으로 분류하는 일은 사라졌다. 이제 모든 남성 시민은 정치적으로 동등한 (능동)시민이 된 것이다.

 

    거칠게 말해 자유는 가진 자들, 유산계급이 선호한다. 평등은 가지지 못한 자들, 무산계급이 선호한다. 즐길 자유, 가질 자유, 누릴 자유도 돈과 권력이 있어야 가능하다. 그것이 없는 자들은 자유 이전에 자유에 닿기 위한 기회의 평등을 원하고 심지어 결과의 평등까지 원한다. 때에 따라선 개성이나 다양성까지 용납하지 않는 획일적, 기계적 평등을 주장하기도 한다.

    확실히 자연은 평등하지 않다. 먹이사슬로 이어져 우열과 승패가 극명히 갈리는 불평등의 세계다. 평화는 서로 떨어져 있을 때, 자연환경이 우호적일 때, 배부를 때만 유지되는 평화다. 인간사회도 비슷한 경향이지만 문명이 있으므로 서로 섞여도, 환경이 열악해도, 배가 고파도 서로 평화를 유지해야 한다. 그것이 자연과 다른 점이다. 자연은 야만의 다른 이름인 것이다.

 

    자유와 평등이 함께 하는 문명사회, 서로 다른 점을 뽐내면서도 불화하지 않고 오히려 배려하고 존중하는 화이부동(和而不同)의 사회는 쉽지 않다. 말 그대로 이상사회다. 이렇듯 자유와 평등은 모두 소중한 가치지만 서로 대립, 반비례 관계를 어느 정도 내포하고 있다. 이 모순을 염두에 두었는지 프랑스 혁명 정신은 자유, 평등 다음에 우애(형제애)를 제시하고 있다. 바로 배려, 존중, 관용, 사랑의 다른 이름이다.

    하지만 그 우애는 박애는 아니다. 아직 전 세계의 인민을 아우르는 완전한 인류애는 아니다. 여성과 이민족은 아직도 차별받았으며 식민지에서는 여전히 노예제도를 허용하고 있었다.

 

    파리코뮌은 왕과 가족을 입법의회가 결의한 뤽상부르 궁 대신에 좀 더 경비가 수월한 탕플 수도원에 가두고 군주제나 귀족주의를 옹호하는 신문의 발행을 금지한다. 언론인, 관리, 종교인, 수상한 사람을 마구 잡아들여 감옥을 꽉꽉 채우는 한편 왕과 바이이(초대 국회의장이자 초대 파리 민선시장), 라파예트(초대 파리 국민방위군 사령관)의 잔재를 코뮌의 집에서 몰아낸다.

 

  우리의 뒤에 어떤 위험, 어떤 반역자, 어떤 음모가도 남겨놓지 말아야 우리는 안심하고 전선으로 달려갈 수 있습니다. - 95p

 

    8월 10일 이후 파리 민중은 분기탱천해 있었다. 그들은 멀리는 1789년 바스티유 정복부터 시작해 1791년 샹드마르스 학살에서의 희생을 거쳐 8월 10일 튈르리 궁 전투까지 많은 피를 뿌리면서 왕을 중심으로 한 반혁명세력에 대한 처벌의지를 다져왔다.

    이것은 확실히 복수고 심판이다. 하지만 거기에 공포가 더해졌다. 파리로 진군해오는 적군이 마지막 요새도시인 베르됭에 이른 것이다. 경우에 따라선 왕당파를 지원하는 적군에 의해 정세가 재역전되어 혁명세력이 더한 보복을 받을 수도 있는 것이다.

 

    파리에는 왕당파 장교들이 감옥의 죄수들을 지휘하여 반란을 도모할 것이라는 등 온갖 소문이 나돌아 민심이 흉흉하다. 파리 주민들은 조국과 파리를 지키러 전방으로 떠나기 전에 후환을 남겨놓지 않겠다는 의지로 피바람을 일으킨다. 그들은 파리가 적의를 가진 사람들 손에 들어갈까 봐 두려운 나머지 8월 10일의 모든 흉악범을 몰살하고 떠나기로 마음먹는다.

    주민들은 너나없이 감옥으로 달려가 죄수들을 인민재판, 즉결심판 한다. 죽이던지 내보내던지 꽉꽉 채웠던 감옥을 텅텅 비운다. 9월 2일에서 6일까지 벌어진 ‘9월 학살’로 파리의 감옥에 있던 2,500여명의 죄수들 중 1,090~1,395명이 학살당했고 파리 인근에서도 150명 정도가 희생되었다고 한다.

    9월 학살은 왕은 쫓겨나고 국회는 신뢰를 잃어 공권력이 확실히 작동하지 않는 현실에서 정치판에 새롭게 등장해 세력을 얻기 시작한 상퀼로트가 폭주한 사건이다. 상황이 모든 것을 정당화할 수는 없지만 당시 상황과 정국이 상퀼로트를 그렇게 몰아간 측면이 있는 것도 사실이다. 역사에서도 이와 유사한 사건은 비일비재하다.

 

    전쟁에서 포로로 잡힌 병사라면 적군이 전투에 져서 급히 퇴각할 때가 가장 위험하다. 데리고 가기엔 짐이 될 뿐이고 그대로 놔두고 가기엔 후환이 두렵다. 숱한 전쟁에서 그대로 죽임을 당했다. 우리 역시 한국전쟁에서 좌우진영 간에 비슷한 경우가 많았고 일제의 태평양전쟁 역시 개전 초기보다 패망을 앞두고 이러한 참극이 빈번했다.

    정쟁, 전쟁과 함께 인종, 종교 간에 벌어지는 학살, 집단살해(제노사이드)의 참극은 복수, 처벌의지에 더해 보복에 대한 두려움, 공포가 함께할 때 발생한다. 그때 인간은 패닉과 광기에 빠진다. 대개 인간은 상황이 나빠지면 나쁜 결정을 더해간다. 이제 될 대로 되라, 세상은 끝났다는 심정으로 자포자기에 빠져 도박을 감행하며 폭주한다.

 

  글로 선동하던 마라가 국민공회 의원이 되어 연단을 활용하는 때가 왔으니, 프랑스 혁명도 많이 급진화했음을 알 수 있다. - 149p

 

    마라는 혁명초기부터 가장 과격한 주장을 해왔던 급진좌파 언론인으로 이제 국회의원이 됐다. 그밖에 로베스피에르, 당통, 마뉘엘, 데물랭 등 자코뱅파에 속했던 여러 좌파 인사가 국민공회에 진출한다. 국민공회는 1792년 8월 10일 제2의 혁명으로 입법의회가 제정한 새로운 선거법에 따라 선출, 구성되었는데 더욱 좌파세력이 득세하게 된다.

    1789년의 전국신분회로 출발하여 1789년 6월 20일 죄드폼의 맹세로 국민의회로 진화한 후 제헌의회로 임기를 마무리한 1대 국회는 2대 국회인 입법의회로 권력을 넘기지만 입법의회는 예상치 못한 혁명으로 인해 3대 국회인 국민공회 구성안을 의결한 후 급하게 선거를 치뤄 국민공회가 구성되면 해산하기로 하면서 임기를 채우지 못하게 된 것이다.

    1대 제헌의회 의원은 2대 입법의회 의원이 될 수 없었지만 국민공회(國民公會)는 이 제한을 두지 않고 누구든 25세 이상의 남성이면 입후보가 가능했다. 또한 선거권도 더욱 확대되어 능동시민, 수동시민 가리지 않고 21세 이상의 남성이라면 투표할 수 있게 되었다.

 

    혁명이 진행됨에 따라 주도세력은 극우 왕당파인 왕과 귀족, 성직자에서 중도우파인 부르주아로, 다시 부르주아에서 언론인이나 상퀼로트를 주축으로 한 극좌파를 포함한 좌파로 넘어왔다. 얼마 전까지 공화정을 주장하면 가장 좌파에 속한 자코뱅 클럽에서도 쫓겨나는 분위기였지만 이제는 어느 누구도 공화정을 반대하는 이가 없게 됐다.

    보수보다 진보, 우파보다 좌파가 혁명의 온도가 높다고 봤을 때 낮은 순에서 높은 순으로 거칠게 열거해보면 다음과 같다. 왕, 왕족, 귀족, 고위성직자, 고위법관, 군 고위직 장교, 대지주, 부농, 상공인, 전문직, 언론인, 도시 노동자인 평민이나 빈민(상퀼로트) 순일 것이다.

    물론 상퀼로트라고 모두 다 진보공화주의자는 아니었다. 교육을 받을 기회가 없었던 이들 상퀼로트 중 상당수는 아직도 계몽주의의 세례를 받지 못하고 보수귀족주의에 머물고 있었다. 이는 저학력 빈민계급에서 보수권위주의가 유의미하게 존재하는 현대의 정치지형과도 유사하다.

 

    혁명 초기 왕실은 전국신분회의 압력에 마지못해 끌려 다니다가 곧이어 파리민중의 압력을 더 강하게, 더 직접적으로 받게 되었다. 이제 혁명이 급진화되면서 왕을 몰아낸 민중은 파리코뮌을 중심으로 국회를 더욱 노골적으로 압박한다. 국민공회는 전국 83개 도의 지역대표가 모인 최고 권력기관이었지만 루이 16세가 그러했듯 혁명의 도시인 파리의 포로가 된 형국이었다.

 

  각 구마다 연설자 1명과 박수꾼 6명.....4만 3,000리브르 - 193p

 

    루이 16세의 비밀금고 안에서 발견된 예산명세서 중 일부다. 루이 16세는 여론을 유리하게 만들기 위해 국회의원, 작가, 가수, 신문기자 등을 매수한다. 그도 모자라 주요 회의나 집회에서의 연설자에다 거기에 호응하는 박수꾼에게까지 막대한 예산을 배정했으니 그 꼼꼼함과 치밀함이 혀를 내두른다.

    지금의 정치는 여론정치니 여론의 중요성은 그때완 비교도 할 수 없게 커졌다. 조중동을 위시한 보수 메이저 신문사에다 인터넷, SNS까지 24시간 쉬지 않고 갑론을박으로 시끄럽고 피곤하다. 그때도 권력에 종속된 기레기와 어용지식인이 있었고 돈으로 작동되는 여론공작, 선전선동이 있었다.

 

    진보, 보수를 막론하고 여론을 유리하게 이끌기 위해 갖은 수를 다한다. 이제 신문, 방송 등 전통적인 레거시 미디어 뿐 아니라 인터넷 등 뉴미디어까지 전선이 확대됐다. 이명박 정권하에서 있었던 수구보수의 네티즌 십알단이나 일베 육성, 진보진영에서 있었던 드루킹 사건도 같은 맥락이다.

    이제 내년 총선을 앞두고 여론전은 더욱 치열해질 것이다. 갈수록 편파, 왜곡, 과장, 허위의 쓰레기 정보, 편향된 정보가 양산되는 다매체, 대량정보사회에서 유권자 시민들의 지혜로운 정보소비활동이 요구되고 있다.

 

    비밀금고는 루이 16세의 부탁으로 자물쇠공 가맹이 튈르리 궁의 벽 안에 몰래 만든 것으로 돈보다는 문서나 편지 등을 감추는 것이 목적이었다. 가맹은 루이가 폐위되어 탕플 감옥에 갇히고 국민공회에서 왕을 재판하는 문제를 거론할 때부터 금고의 비밀을 알고 있다는 걱정 때문에 잠을 이루지 못했다. 마침내 그는 금고의 비밀을 털어놓기로 결심한다.

    이렇게 국민공회는 서신을 포함한 총 625개나 되는 문서를 확보하게 되는데 이것은 루이의 재판에서 루이에게 불리한 중요 증거가 된다. 이제 루이가 겉으로는 혁명과 1791년 헌법에 따르는 체하면서도 오랫동안 얼마나 고집스럽고도 능숙하게 사람들을 속여 왔는지 명명백백하게 드러난 셈이다.

 

  이 머리를 도끼로 자르면, 유럽의 다른 폭군들이 스스로 신성하다고 믿는 환상에서 벗어난다는 사실을 보지 못하십니까? 개인과 마찬가지로 모든 나라의 인민들은 서로 흉내를 냅니다. - 254p

  나는 그를 곧 처형하라는 명령이 비정치적이고 위험하다고 생각합니다. 루이는 인질입니다. 아니 그 이상입니다. 우리는 왕좌에 오를 권리를 주장하는 모든 사람을 물리치는 데 그를 이용할 수 있습니다. - 277p

 

    첫 번째는 국민공회 의원인 카라의 발언이다. 그는 단호하게 루이의 처형을 주장한다. 그는 왕의 처형이 본보기가 되어 유럽열강의 왕들에겐 두려움을 주고 인민들에겐 혁명을 위한 봉기의 기회를 제공할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의 발언에서 보듯이 당시 혁명파인 공화주의자들은 자국만이 아니라 유럽대륙, 어쩌면 전체인류의 진보, 대의를 의식하며 정치활동을 하였음을 알 수 있다.

    두 번째는 역시 국민공회 의원인 메르시에의 발언이다. <서기 2440년>이라는 미래소설을 쓴 작가이기도 한 그는 평화를 위해서, 공화국의 혁명이 안착할 때까지 시간을 벌기 위해서, 왕정복고의 반혁명을 막아줄 방파제로서 그의 이용가치를 언급하며 처형보다는 종신형을 주장한다. 그는 너무 가혹하지 않은 벌로 다스리는 것이 현명하다면서 왕이 아닌 루이는 일종의 유령으로서 공화국은 공화국에 봉사할 수 있는 이 유령과 함께 천천히 걸어가자고 주장한다.

 

    이 둘은 의견은 달라도 다 같이 계몽주의의 세례를 받은 공화주의자들이다. 그들에게 과거의 왕정은 절대군주제든 입헌군주제든 야만이자 코미디로서 일종의 미신이다. 카라의 강경책이 옳은가? 메르시에의 온건책이 옳은가? 상황에 따라, 각자 생각에 따라 판단은 다르겠지만 모두 장단점이 있다.

    즉각적이고도 단호한 처형은 하나의 이정표, 선언이다. 1000년을 훌쩍 넘게 이어져온 왕의 시대가 끝나고 인민의 시대가 열렸음을 알리는 상징적인 증거인 셈이다. 그리고 대개 이런 상황에서는 강경파가 득세하기 마련이고 실재 왕의 처형으로 결론나게 된다.

 

    이제 루이 16세로 대표되는 왕정, 귀족주의는 시대의 방해물, 역사의 걸림돌이 되었다. 이 경우 역사는 스스로 막힌 곳을 뚫고 꼬인 것을 푼다. 파괴하듯 폭력적으로 뚫고 잘라내듯 일거에 푼다. 아마도 시대에 정신이 있고 역사에 섭리가 있다면 바로 이러한 거스를 수 없는 물결일 것이다.

    몇 달 후 있을 총선에 야권이 개헌선을 넘는 200석 이상을 차지할 수도 있으리란 예상이 공공연하게 얘기되고 있다. 거의 한국 정치지형을 뒤엎는 혁명적인 결과다. 이것은 바꿔 말하면 한국사회의 총체적 모순이 오랜 시간 누적되어 왔음을 말하는 것이자 윤석열 대통령 뿐 아니라 국민의힘으로 대표되는 한국의 보수 세력이 그 효용과 역할을 다했음을 의미한다. 즉 윤대통령을 포함한 검찰권력과 국민의힘이 한국사회의 전진을 가로막는 장애물이자 걸림돌이 된 것이다.

 

    책으로 돌아와서... 메르시에의 주장은 숙고할 여지가 많다. 카라는 단박에 해결하는 타도, 제거책이라면 메르시에는 상황을 계속 관리, 제어하면서 장기전으로 가자는 것이다. 이 경우 많은 에너지가 든다. 계속 외줄 타듯 긴장하며 스트레스를 이겨야 한다. 이기는 것을 넘어 즐기는 태도마저 가져야 한다. 계속 밀려드는 어려운 미션을 하나하나 클리어하는데서 오는 성취감을 기쁨이자 보람으로 삼아야 한다.

    하지만 이것은 말처럼 쉽지 않다. 고수만이 취할 수 있는 전략이다. 섣부른 과용이나 허세로 흉내만 내려 한다면 오히려 폭망하기 십상이다. 결국 관건은 역량이다. 그 역량은 뛰어난 몇몇 개인이나 집단의 역량이 아니라 그 사회공동체의 총체적인 역량이다. 역량만 충분하다면 현실에서는 이것이 최상책이다.

 

    힘을 비축하며 잡힐 듯 말 듯 계속 리드를 유지하는 것이다. 지역구 선거라면 30% 차이로 1곳을 이길 것인가? 1% 차이로 30곳을 이길 것인가? 바둑이라면 만방, 불계승으로 한판을 이길 것인가? 반집승 아슬아슬하게 백번을 이길 것인가? 당연 후자가 좋다! (때론 백번에 한번쯤 져주는 것도 좋다.)

    어느 경우든 자기실력 이상의 큰 승리, 횡재는 좋지 않다. 원한, 분노를 포함한 적의 분발을 일으키고 아군의 방심, 나태, 교만을 부른다. 정치라면 적에게 계속 승리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희망고문을 주되 영원히 임계치를 넘지 못하게 묶어두는 것이 최상이다. 이것이야말로 압도적 실력, 현명한 정치술이다.

    친구는 가까이, 적은 더 가까이! 적이 폭망하여 사라지면 없는 적이라도 새로 만들어야 한다. 계속 적과 함께, 적을 달고 가야한다. 이것은 장기전이자 단체전이다. 동료에 대한 믿음, 미래에 대한 희망에 기초해 긍정과 자신감을 갖고 씩씩하고 끈질기게 전진해야 한다. 내가 아니면 동지, 지금 아니면 다음 세대가 미션을 이어갈 것이라 생각한다면 일시적 패배에 낙담하거나 더딘 역사의 전진에 굳이 초조하거나 조급해할 필요도 없다.

 

    이 생각과 입장을 더 확장하면 세계관과도 연결된다. 당연히 선을 추구하고 악을 미워해야겠지만 바로 절대선과 절대악을 부정하고 세상을 흑백으로만 나눠 단순하게 보지 않게 된다. 적, 나쁜 것, 악한 것, 쓸모없는 것(처럼 보이는 것)마저 모두 저마다 역할과 존재이유가 있게 되는 것이다. 이렇게 악 마저도 자신이 의식하지도, 의도하지도 않게 자기에게 주워진 배역을 수행하는 것! 어쩌면 이것이 바로 신의 뜻이자 섭리일 수도 있지 않을까?!

    연극, 영화라면 선악이 선명히 대비되는 것이 좋다. 권선징악, 사필귀정의 통쾌한 결말로 카타르시스와 대리만족을 주는 것이 흥행한다. 하지만 단순히 상업적 흥행이나 즐길 거리를 넘어 뭔가 새로운 것을 깨닫는 점에 이르러선 그 이상이 필요하다. 선함 속에 악함, 악함 속에 선함, 평범함 속에 비범함, 천재 속의 찌질함, 히어로의 치명적 결점, 빌런의 감춰진 순수함... 이렇게 복합적이고 입체적인 케릭터들의 이야기들이 더 깊이 있고 생각할 여지가 많은 것이다.

 

    다시 책으로 돌아와서... 8월 10일 제2의 혁명 후 새로이 구성된 국민공회는 루이에 대한 처리를 11월까지 차일피일 미룬다. 혁명과 전쟁을 동시에 수행해야하는 국내외의 사정을 감안하면 자의반타의반 미루어진 것이지만 이제 민중의 성화에 더 이상 미룰 수 없는 지경이 되었다. 결국 12월부터 본격적으로 논의하기 시작해 해를 넘겨 1793년 1월 15일부터 20일까지 네 차례의 호명투표를 거쳐 24시간 내 루이의 사형을 확정한다.

 

  1차 호명투표 : 루이는 유죄인가 무죄인가? → 유죄!

  2차 호명투표 : 판결에 대해 기초의회에서 국민의 재가를 받아야 하는가? → 받지 않는다!

  3차 호명투표 : 루이에게 어떤 벌을 내려야 하는가? → 사형!

  4차 호명투표 : 사형을 당장 집행할 것인가 유예할 것인가? → 24시간 내 사형집행!

 

    투표 전에 루이에 대한 판결을 법관이 아닌 국회의원들이 하는 것이 맞는지, 그래도 한때 프랑스인의 왕이었는데 과반결정이 아닌 2/3의 찬성으로 결정하는 것이 맞지 않는지 논란이 있었지만 다른 입법안과 같이 모두 재적의석 과반이 넘으면 결정되는 것을 원칙으로 하였다. 1차 유죄판결이 92% 이상으로 가장 압도적이었고 3차 사형판결이 과반에서 5표를 더한 366표를 얻어 가장 아슬아슬하게 통과됐다.

    3차 호명투표 때 사형 이외에도 유배형, 추방형, 종신형 등도 나왔는데 특기할 것은 극소수지만 사형제 폐지의 입장에서 사형 또는 사형집행에 반대한 의원도 있었다. 이는 현재 많은 나라에서도 사형제에 대한 의견이 분분한 것을 감안하면 당시로서는 가장 진보적인 최첨단의 인권의식을 드러낸 셈이다.

 

    만약 나라면 그때 그 장소에서 어떤 결정을 할 것인가? 다수 의원과 똑같이 1차 유죄, 2차 국민재가 없음, 3차 사형, 4차 바로 집행에 투표할 것이다. 유죄임엔 이론의 여지가 없고 국민재가의 과정을 거치기엔 당시 상황이 녹록치 않았다. 자칫 심각한 국론분열로 내란으로 치달을 가능성도 있었다.

    당시 국내외의 상황을 보면 안타깝지만 사형이 맞다. 합당한 벌이라기보다 불가피한 결정 쪽에 가깝다. 루이 본인이 구체제의 상징일뿐더러 사형 이외의 형벌로 그를 존속시킨다면 언제고 반혁명의 구심점과 빌미가 될 수 있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그를 관리하고, 관리를 넘어 이용할 수 있을 정도로 당시 혁명세력과 프랑스의 역량이 충분치 않았다. 그러므로 일단 사형으로 결론나면 가급적 빨리 형을 집행해 매듭짓는 편이 낫다.

 

    만약 지금 여기의 나라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물론 국회탄핵 후 헌법재판, 민형사 재판이 있겠지만) 똑같은 죄를 지은 왕 혹은 독재자가 있다면 1차 유죄, 2차 국민재가 있음, 3차 유기징역, 4차 바로 집행에 투표할 것이다. 유죄가 확정되면 국민재가를 거친 후 일정기간의 징역을 산 후 출소하여 완전한 민주시민으로 복귀하는 것이 가장 좋은 그림이다.

    국가공동체의 역량이 된다면 그런 죄인마저도 용도에 맞게 관리, 이용할 수도 있고 갱생시킬 수도 있으리라. 어쩌면 양심적이고도 투철한 어엿한 민주시민으로 거듭나서 비중 있는 역할을 하면서 공동체에 봉사할 수도 있으리라. 이것이 역사와 민중의 진정한 승리, 완벽한 승리다.

 

    신념을 지킬 것인가, 현실과 타협할 것인가? 당장의 이득을 취할 것인가, 좀 손해보더라도 길게 보고 명분을 얻을 것인가? 냉정하고도 지혜롭게 판단해야 한다. 김대중 전 대통령이 정치인에게 꼭 필요한 덕목으로 말씀하신 '서생적 문제의식과 상인적 현실감각'도 결국은 같은 맥락일 것이다.

 

    때에 따라 다르고 상황에 따라 다르다. 충분히 그때는 맞고 지금은 틀릴 수 있다. 그때는 틀리고 지금은 맞을 수 있다. (실재로 티리옹 의원은 루이의 사형에 찬성하면서도 앞으로는 사형제를 폐지하자고 주장했다.) 지금 여기는 그때 거기와 무엇이 다른가? 획기적으로 진보했다! 야만을 벗어나 문명화되고 정보화의 양과 속도가 눈부시게 발전했다. 사회공동체도 개개인의 역량도 그때와 비교할 수 없이 성장했다.

    국민재가를 받는 등 직접민주주의를 되도록 확장하는 것이 좋고 충분히 그럴 여건과 역량이 된다. 국가의 주요 목표를 시민 개개인의 민주적 역량 증대에 두고 약간의 혼란과 부작용과 비용을 각오하고서라도 그러한 학습과 체험과 고민의 기회를 제공하는 쪽으로 가야한다. 민주주의는 딱 시민의 수준까지 간다. 시민이 각성, 발전한다면 나머지는 거의 해결된다.

 

    더 이상 사형제 폐지가 소수 진보의 주장이 아닌 대다수의 보편적 생각이 되는 공동체를 만들어야 한다. 당시 프랑스가 유럽의 공화주의 혁명의 모범이 되기를 자부심을 가지고 자처했듯이 우리도 가장 앞서가는 문명, 문화, 민주사회를 이루어 세계의 모범이 되는 것에 도전해야 한다.

 

  나는 얼마 후면 하느님 앞에 설 사람으로서 진심으로 맹세컨대, 내 백성의 행복만을 계속 원했으며, 그것을 거스르는 마음을 한 번도 먹은 적이 없소. - 318p

 

    죽기 며칠 전 루이 16세가 국민공회에서 자신을 변호한 말제르브에게 한 말이다. 루이의 전력, 유죄판결의 결과를 보면 이 말은 100%의 진실은 아니지만(하긴 이 세상에 100%의 진실은 없다!) 절반은 진실이다. 적어도 새빨간 거짓말은 아니다. 루이는 선의를 가지고 자신의 백성을 사랑하고 나름 봉사하기 위해 노력했다. 문제는 그 선의가 ‘왕의 선의’였다는 것이다.

    늑대는 양을 사냥하면서도 양떼가 더 번성하기를 기원한다. 도둑은 도둑질을 하면서도 그 집이 더 부자가 되기를 기원한다. 왕의 선의도 이와 비슷한 것이다. 왕의 백성에 대한 사랑, 그 사랑을 베푸는 배경이 되는 막강한 재산과 권력, 이것들은 백성들로부터 온 것, 또는 빼앗은 것이다. ‘나는 관대하다’며 은혜를 베푸는 것은 결국 수많은 백성들 하나하나의 땀과 눈물과 피에서 나온 관대함이다.

 

    왕 루이가 아닌 인간 루이로 봤을 때 그의 죽음은 동정의 여지가 많다. 그는 인간으로서도 왕으로서도 함량미달, 인격미달은 아니었다. 대대로 이어져온 왕권을 지키려는 것은 어쩌면 그로서는 당연한 몸부림이었다.

    가장 독실한 기독교도임을 자처했고 성적으로도 문란하지 않아 정부를 두지 않고 왕비만을 곁에 두었다. 왕 치고는 열쇠 만들기, 목공을 취미로 하는 소박하고 서민적인 면도 있었다.

 

    결국 루이의 가장 큰 죄는 혁명의 시대에 그가 왕이었다는 사실 자체에 있다. 그는 죄의 유무, 인품을 떠나 외국의 침략과 내부의 반혁명세력의 중심에 있었기 때문에 그에 대한 미움은 오히려 그의 신체를 파괴할 때까지 정점을 모르고 치솟아 올랐으리라. - 328p

    루이의 삶은 1789년 혁명 이후 줄곧 내리막을 걷다가 1791년 도주 실패 후 더욱 가속도가 붙으며 급경사를 탔다. 이제 그가 삶을 견딜 수 없다고 느끼는 것보다 파리의 투사들이 그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더욱 견디지 못하는 시점에 이르렀다.

 

    루이는 탕플 감옥에서 혁명광장으로 호송된 후 단두대에 올랐다. 형 집행 전 손을 묶는 것에 대해 망나니와 잠시 옥신각신하였으나 루이는 곧 체념한 후 망나니에게 몸을 맡겼다. 망나니는 루이의 손을 묶고 가위로 목덜미의 머리카락을 잘랐다.

    망나니는 루이를 판에 묶고 칼날 밑으로 루이의 머리를 밀어 넣은 뒤 칼날을 떨어뜨렸다. 그는 루이의 머리칼을 잡아 피 흘리는 루이의 머리를 사람들에게 보여주었다. 거기 모인 ‘8만 명’이 입을 모아 “공화국 만세!”를 외쳤다. 1793년 1월 21일이다.

 

화려했던 시절의 루이 16세

인민들이여, 모든 왕좌를 눈여겨보시라.

그들은 모두 먼지일 뿐이니! - 339p

 

 

    - 8권 리뷰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