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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혁명사≫ 10권 <반동의 시대> 리뷰

어멍 2024. 2. 21. 22:13

 

≪프랑스 혁명사≫ 10권 <반동의 시대> 리뷰

 

<반동의 시대>

부제 : 공포정의 끝인가, 출구인가

 

  (1793년 9월) 17일에 국민공회는 반혁명혐의자법을 통과시켜 공포정을 본격적으로 시작했다. 아무나 특정인에게 혐의를 씌우면 그는 위험한 처지에 떨어진다. 유죄추정은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이며, 누구도 벗어날 수 없다. - 38p

 

    1793년 5월 31일과 6월 2일, 국민공회에서 소수파였던 몽타뉴파는 파리 투사들의 힘을 빌려 지롱드파를 몰아내고 정국을 주도하게 된다. 그들은 로베스피에르를 중심으로 반혁명혐의자법을 제정하고 구국위원회를 장악한다. 일당독재와 공포정이 본격적으로 시작된 것이다. 혁명기 국내외의 전시 상황에서 ‘혐의’라는 것이 얼마나 무서운 벌을 수반할 수 있는지는 불과 1년 전의 ‘9월 학살’에서 충분히 유추, 상상할 수 있다.

 

    현재 2024년의 대한민국은 혁명기도 아니고 전쟁도 없다. 하지만 여당과 야당의 극한 대립으로 정치적 온도가 과열되어 있다. 거기다 치열한 경쟁과 팍팍한 삶에 지친 사정으로 인해 모두들 신경이 날카롭고 예민해져 있는 듯하다. 넉넉한 품과 여유가 예전만 못하여 신경질적이고 성마르다.

    흉흉한 뉴스도 많고 거기에 딸린 댓글들 역시 흉흉하다. 연민의 시선은 고사하고 객관적, 이성적으로 차분히 살펴보려 않는다. ‘고발하라! 고소하라! 잡아넣어라! 죽여라!’ 무턱대고 핏대를 세우며 분노와 증오를 쏟아낸다. 무죄추정보다 유죄추정이 대세다.

 

    신상필벌보다 일벌백계가 대세다. 어느 하나를 타겟으로 초죽음을 만들면 권력주변은 분위기를 읽고 숨을 죽이고 대중은 금방 잊어버리고 잠시잠깐의 화풀이에 만족한다. 전수조사는 없다. 시스템의 점검도, 업그레이드도 없다. 물론 공평과 공정 역시 없다.

    내로남불, 내로남불 말이 많지만 시민들 역시 마찬가지다. 솔직히 나를 포함해 정도의 차이만 있을 뿐 내로남불 아닌 사람이 없다. 인민은 기본에선 항상 선하고 절대 충성해야할 대상이지만 민주주의에선 최종책임자 역시 결국은 유권자 시민이다. 정치인, 권력자, 타인을 욕하기 전에 먼저 스스로 돌아보고 자신의 내로남불, 허위의식부터 점검해야 한다.

    그런 면에서 현재 대중의 수준은 아쉬운 점이 많다. 불만, 분노만 많고 판단력과 식견이 부족한 대중은 나쁜 권력의 선동에 쉽게 속아 넘어가고 이용당한다. 그렇게 속고 속고 또 속으며 나쁜 선택을 반복한다. 불만은 그대로고 삶은 조금도 나아지지 않는다.

 

    몽타뉴파의 공포정치와 지금 윤석열 정권의 검찰정치는 유사한 면이 많다. 로베스피에르는 구국위원회와 안보위원회(또는 구국안보합동위원회)를 통해 정적이나 라이벌을 잡아들이면 혁명법원의 판결을 거쳐 처형하는 식으로 공포정치를 운영했다. 전직검사이자 대통령인 윤석열은 검찰을 동원한 수사, 기소를 통해 여론전을 병행하며 정적을 제거하려 하고 있다.

    로베스피에르는 구시대 기득권을 뒤엎는 혁명의 최일선에 있었다면 윤 대통령은 촛불혁명을 배신하고 구시대 기득권 세력, 가깝게는 박근혜 이명박 멀게는 박정희 이승만과 제휴하고 있다. 비록 정치적, 이념적 스탠스는 다르지만 처한 상황은 비슷하다.

 

    로베스피에르는 공포정치를 가속화하다가 자기가 단두대에 세운 사람들과 똑같이 단두대에서 처형됐다. 호랑이 등에 올라타 호랑이를 통제하지도 못하고 굴러 떨어져 잡아먹힌 것이다. 윤 대통령 역시 호랑이 등에 올라탄 형국이다. 여차하면 떨어져 잡아먹힌다. 그래서 더욱 더 강권통치의 고삐를 놓지 못한다.

    절대 후퇴도 사과도 없다. 약한 모습 보이는 순간 칼이 들어온다. 하지만 권력이 영원할 수 없다. 역사의 섭리는 그 누구도 비껴갈 수 없고 역사의 격랑은 그 누구도 피해갈 수 없다. 좌파, 우파, 진보, 보수, 잘난 놈, 못난 놈, 착한 놈, 나쁜 놈, 이상한 놈 ...... 예외 없다.

 

  1조. 앞으로 파리의 48개 구의회는 매주 일요일과 목요일에만 모인다.

  2조. 일용직 임금노동자가 회의에 참석할 때 한 번에 40수를 요구할 수 있다. 회의시간은 5시부터 10시까지다. - 40p

 

    1793년 9월 5일 몽타뉴파 의원인 당통이 발의해서 통과시킨 국민공회 명령 중 일부다. 이에 파리 구의회는 상퀼로트를 중심으로 반발, 항의한다. 파리에만 한정한 이 명령으로 국민공회가 헌법과 인권선언의 정신을 훼손했다는 것이다. 어떻게 감히 인민의 의회가 모이는 횟수와 회의시간을 줄일 수 있느냐는 것이다. 돈으로 인민의 명예를 더럽히냐는 것이다.

    당시 상황은 음모자들이 구민들과 극빈자들을 그릇된 길로 이끌려고 선전선동에 노력할 때였다. 아마도 당통은 이것을 염려한 듯하다. 혁명초부터 가열찬 민중혁명을 주창했던 그가 지롱드파처럼 상퀼로트를 성가시게 여겨 배제하려는 것은 아니었겠지만 그는 어렴풋이 이대로는 안 된다, 뭔가 잘못돼가고 있다고 느끼기 시작했을 수도 있다.

 

    지금도 마찬가지지만 정치에 관심을 넘어 직접 참여하는 계층은 극히 일부분이다. 과연, 의회에 참석하기 위해 시간을 희생할 수 있는 사람은 누구인가? 근면하고 존경받을 만한 장인 계급이나 자기 노동의 산물로 먹고사는 시민이 아니라 오직 부자ㆍ음모자ㆍ뮈스카댕뿐이다. - 43p 지역사회의 혁명위원회도 대소인, 종교인, 집달리, 개업의사, 전당업자, 상인들이 장악하고 국유재산을 분할할 때 주머니를 불렸다. 심지어 구 귀족은 사업대리인을 보내기도 했다.

    혁명이 길어지고 급진, 과격화될수록 살아남기 위해 혹은 이권을 위해 스스로 애국자인양 하는 온갖 악당들, 음모론자들도 파리뿐만이 아니라 전국의 민중협회에 흘러들어왔는데 이들에 의해 일부 민중협회는 본래의 취지와 다르게 변질되기도 하였다. 정치체제는 바뀌었지만 사회저변은 여전히 기득권 귀족주의자들의 영향력을 벗어나기 힘들었다. 왕당파 귀족들은 몰락했지만 새롭게 부르주아, 부자들의 적폐가 쌓여가고 있었다.

 

    당통은 인민이 모이는 횟수와 시간을 줄이는 한편으로 그들에게 대신 금전적 보상을 제시했다. 언뜻 제한과 장려가 같이하는 모순된 명령이다. 그는 상퀼로트나 극단파의 정치적 간섭을 줄여 혁명의 열기를 좀 누그러뜨리고 싶어하면서도 평범하고 건전한 상퀼로트의 발언권은 장려, 보장해주려는 입장이었다.

    현대 민주주의 사회에서도 배심원출석, 선거관리 등의 공공성격의 모임에는 마땅한 보상을 지급하고 있다. 시의회, 구의회부터 각종 시민사회단체들이 자발적으로 구성, 활동하고 있다. 집회, 시위에 대해선 시간과 장소에 제약을 두지만 이들 자생적 단체들이 모이는 횟수나 시간에는 제한이 없는 것으로 안다. 시민들에겐 마땅한 보상이 따라야 하고 그들의 정치참여는 되도록 넓게 보장하는 것을 확고한 원칙으로 해야 한다.

 

    이와 관련하여 현재의 한국정치에는 아쉬운 점이 많다. 여야 정치권은 모두 듣고 싶은 민심, 필요한 민심만 들으려 한다. 특히 윤 대통령은 진보당 국회의원은 물론이고 시민들의 목소리까지 입틀막하려는 기세다. 김건희 여사의 디올백 의혹도 사과는커녕 오히려 음해, 공작이라고 역공하고 있다.

    정치, 권력을 바라보는 시민들의 시선 역시 아쉽기는 마찬가지다. 정치인과 언론의 책임이 크겠지만 정치를 혐오, 냉소하는 분위기가 팽배하다. 더럽고 살벌한 아귀다툼에 관심을 거두고 정치인이라면 여야 가릴 것 없이 공공의 적이 되었다. 정치혐오를 넘어 정치무용론이다.

 

모든 시민이 바라는 통쾌한 장면?

 

    그래서 시민들은 국회의원수를 줄이고 그들의 세비를 삭감하고 불체포특권을 폐지하는데 대찬성이다. 할 수 있다면 구의원, 시의원, 지방정부도 없애고 싶다. 하지만 자유로운 의정활동과 신변보호를 위해선 불체포특권은 필요한 것이다. 올바른 정치인들이라면 국회전용기를 사준데도 아깝지 않다. 청렴하고 일만 잘한다면 천명이고 만명이고 많을수록 좋다.

    실재로 300명인 우리의 국회의원수는 OECD 국가 평균에 미치지 못한다. 모두 상하원을 둔 나라인 미국은 500명이 넘고, 일본은 700명, 프랑스는 900명이 넘는 국회의원수를 보유하고 있다.

 

    정치는 더럽고 살벌한 대표적인 레드오션이지만 동시에 가장 가치 있는 숭고한 영역이기도 하다. 욕심 많은 게걸스런 거대 악당들에겐 가장 매력적인 시장이기도 하다. 정치를 통해 권력과 부와 명예를 단박에 쓸어 담을 수 있다.

    정치는 맛있는 음식이다. 막대한 이권이 오고가고 모두가 칭송하며 제 앞으로 줄을 서고 머리를 조아리는 권력의 달콤함을 맛볼 수도 있다. 그래서 수단방법 가리지 않는다. 그 방법 중에 정치혐오를 유도하고 이용하는 것도 포함된다. 중고딩 못된 친구놈들이 맛있는 것에 먼저 제 침을 잔뜩 발라 남들이 먹지 못하게 하는 것이다. 가까이 다가오지도 못하고 눈살부터 찌푸리게 만들어 버리는 것이다.

    그러므로 가장 나쁜 정치는 반정치, 정치혐오를 이용하는 정치다. 그것을 주장하며 정치에 뛰어드는 정치인을 가장 경계해야 한다. 예를 들자면 정치인으로는 이명박, 안철수, 윤석열, 한동훈 등이 있다. 그리고 이들은 정치혐오를 이용함과 동시에 대중혐오의 혐의가 있는 엘리트라는 공통점이 있다. 한동훈 국민의힘 비대위원장이 말하는 ‘동료시민’은 서민대중을 배제한 혐의가 있다.

 

    결론으로 요지는 정치권 생리야 원래 그런 거고 시민들의 의식 수준, 정치를 바라보는 관점을 좀 높이자는 거다. 정치권, 정치인에 대한 막연한 환상이나 혐오를 갖지 말고 그들에게 일방적 희생이나 봉사를 바라지도 말고 무턱대고 욕부터 하지도 말자는 거다. 잘 살펴서 뽑아 일을 시키고 성과에 따라 합당한 대우를 해주면 된다. 무조건적 정치혐오는 무책임한 유권자의 정치에 대한 일종의 공짜심리, 부당청구일 뿐이다.

    앉은 자리에서 모든 것을 바랄 수는 없다. 하늘에서 자유와 평등, 정의와 평화가 뚝 떨어지길 바랄 수는 없다. 감시하고 참여해야 한다. 무엇보다 관심을 갖고 정보를 분별하여 바르게 판단해야 한다.

 

  바쓰는 동인도회사의 주식 값을 떨어뜨린 뒤 회사가 주식을 방출할 때 사들여 값을 올려서 되팔자고 제안했다. 바쓰와 브누아가 일을 하고, 의원들은 필요한 법안이나 상정해 통과시키면서 이익을 나누자는 계획이었다. - 174p

 

    외국인 음모가, 자본가들과 이재에 밝은 부패한 국민공회 사업가 의원들이 연루된 동인도회사 사건이다. 예나 지금이나 이권을 매개로 검은 거래가 횡행한다. 그 수법도 비슷하다. 지금으로 치면 주식사기, 주가조작에 해당한다.

    이밖에도 금융, 투자사기는 그 수법이 일반인들의 상상을 초월한다. 가히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신의 영역이랄까! 제일모직 주식가치를 부당하게 책정한 후 삼성물산과의 합병을 통해 삼성그룹의 지배권을 확보한 이재용 회장의 경우도 놀랍기는 마찬가지다.

 

    자본은 국경도 뛰어넘고 정파도 초월한다. 어차피 정치도 사업도 심지어 믿음도 제 한 몸 잘 먹고 잘 살자고 하는 짓 아니겠는가! 박근혜 청와대와 양승태 대법원의 재판거래, 박근혜와 이재용 등 재벌들 간의 미르재단을 둘러싼 뇌물사건, 개발업자와 법조인 언론인들이 얽힌 50억 클럽 사건 등등... 사법거래, 입법거래, 행정거래 등이 난무한다.

    얼마전에는 이재용 삼성그룹 회장의 경영권 불법승계 의혹사건이 1심 재판에서 무죄가 선고되기도 했다. 그룹 지배권 확보의 과정도 놀랍지만 무죄선고는 더 놀랍다! 저들끼리 입법하고 집행하고 재판하니 어떻게 시민들이 손쓸 도리가 없다.

 

    사익을 위해 주주이익을 훼손하고 회사이익, 국가이익, 공공의 이익을 훼손한다. 이것이야말로 대도(大盜)다.

 

  로베스피에르가 합법적인 절차로 혁명적 조치를 마련하면서 목표를 향해 나아가는 동안, 혁명적 조치도 부족하게 여기면서 더 과격한 요구를 하는 앙라제나 에베르파에 맞서기 위해서는 당통을 내치기 어려웠다. 그러므로 당통의 순서가 앙라제나 에베르파보다 늦었을 뿐이다. - 181p

 

    국민공회에서 지롱드파를 몰아낸 후 몽타뉴파는 이후 본격적으로 분화, 갈등하며 파벌싸움과 숙정에 들어간다. (좌우는 상대적인 개념이므로) 몽타뉴파에서 로베스피에르가 가운데에서 중심을 잡았다면 그 오른쪽에 온건우파, 관용파인 당통과 데물랭이 있었고 왼쪽에는 에베르 등 극단파, 극좌파가 있었다.

    에베르파는 1793년 가을부터 거세게 불기 시작한 탈기독교 운동을 주도하였는데 로베스피에르는 이 운동이 과격해지며 무신론, 종교탄압으로까지 나아가자 제동을 걸었다. 로베스피에르는 극단의 혁명가는 반혁명분자만큼 위험하다는 입장에서 미사를 올리는 사람보다 그것을 금지하는 사람들이 더 광신도라고 비난하면서 종교의 자유를 내세웠다.

 

    로베스피에르는 성실한 기독교도들의 지지를 잃으면 갈 길이 더욱 멀고 험난해진다는 사실을 깨닫고 어떻게든 탈기독교 운동을 멈추려 하였는데 이러한 과정에서 관용파인 당통과 협력하게 된다. 결국 그는 당통의 힘을 빌려 극단파인 에베르파를 제압, 숙정하였지만 곧이어 당통과 갈등하게 된다.

    당통은 혁명초기부터 가장 강력한 공화파에 속하였으나 점차 현실정치에 타협하는 자세를 취하게 된다. 그는 로베스피에르보다 좀 더 일찍, 적극적으로 유화책을 시행해서 좀 느리더라도 혁명을 연착륙시키려는 입장이었다. 반면 로베스피에르는 그보다는 좀 더 강력하고 흔들림 없이 혁명정책을 시행해서 가급적 빨리 헌정으로 복귀하고자 하는 입장이었다. 당통은 혁명가에서 정치인으로 변신중이었지만 로베스피에르는 여전히 혁명가의 입장이었다.

 

    로베스피에르가 보기에 극단파인 에베르파도 관용파인 당통파도 결국은 혁명을 위태롭게 하는 적이었다. 국내외의 반혁명 왕당파를 이롭게 하거나 원치 않아도 적들의 꾀임에 빠져 이용되기 쉬운 당파로 보았다. 대외전쟁과 혁명 과정 중에 온갖 모사꾼, 음모가, 야심가, 간첩, 이중간첩, 악당 등이 획책하는 공작, 역공작, 이간질, 가짜뉴스, 선전선동에 일부나마 넘어갈 가능성이 큰 것도 사실이었다.

    이렇게 로베스피에르는 몽타뉴파의 거두로서 에베르파에 이어 당통파마저 쳐내고 혁명가, 권력자로서 최절정기를 맞이했지만 결국은 이것이 순망치한(脣亡齒寒)처럼 자신의 입지를 좁히는 결과를 초래하게 된다. 만약 좀 더 정치력을 발휘해서 혁명의 완급을 조절하며 당통파로 에베르파를, 에베르파로 당통파를 상호 견제하며 이끌어갈 수 있었다면 그의 몰락은 없었거나 훨씬 늦추어졌을 수도 있다. 혁명은 그럭저럭 마무리되고 정상적인 헌정으로 이어졌을 수도 있다.

 

    로베스피에르 하면 공포정을 시행한 무자비하고 잔인한 독재자로 알려져 있지만 사정은 결코 그렇게 간단치만은 않다. 그는 원칙에 충실한 강인한 사람이었고 실수하지 않기 위해 술도 끊고 물만 마시는 등 자기관리에 철저했으며 사리사욕보다 공공을 생각한 청렴한 사람이었다. 제헌의회의 미라보(백작)에 비견되는 유려한 연설을 몇 시간이고 조리 있게 할 수 뛰어난 언변과 지성의 소유자였다.

    그는 평화 시의 정부는 덕만 가지고도 충분하지만 혁명기의 정부는 ‘덕과 공포’를 원동력으로 삼아야 한다고 했다. 덕은 곧 정의고 공포는 그것을 이루는 가장 강력하고도 확실한 수단인 셈이다. 비슷한 맥락에서 공포를 좀 더 확장하면 마키아벨리 식의 카리스마, 권위, 힘으로 비유할 수도 있다. 확실히 권력이 가볍거나 우습게 보여서는 대중에게 먹혀들지 않는다. 작동하지 않는다.

 

냉혹한 원칙주의 청렴가 로베스피에르

 

    정의를 쫓든지 공포에 쫓기든지 카리스마에 이끌리든지 사람은 무언가를 근거로 판단하고 행동한다. 믿고 의지할 내 밖에 있는 흔들림 없는 강력한 근거, 가치관, 신념, 신앙이 필요하다. 로베스피에르에게 그것은 이성이고 자연이었다. 그는 가톨릭이나 어느 종교도 믿지 않았지만 무신론을 경계하였다. 종교의 자유를 옹호하고 최고 존재와 영혼불멸성을 인정하였다.

    그것이 없다면... 신앙, 신념을 넘어 어떤 가치관이나 판단의 준거가 없다면 생은 위험하고 허망하다. 도스또예프스키의 <까라마조프네 형제들> 중 대심문관 대목에서 나오는 “신이 없다면 모든 것, 어떤 것도 가능하다.”는 무시무시한 생각이 가능하다. 선이든 악이든 수단방법 가리지 않고 닥치는 대로 살아남기만 하면 된다.

 

    왕이 단두대에서 목이 잘리는 혁명의 시대, 기존의 가치관과 문화가 송두리째 뽑혀나가던 혼란의 시대였다. 악착같은 왕당파, 음흉한 귀족주의자, 탐욕스런 부르주아, 거칠고 난폭한 앙라제와 온갖 악당들이 날뛰며 서로 죽고 죽이던 살 떨리는 시기였다.

    현재의 한국정치, 한국사회는 어떠한가? 그 정도로 살벌하고 폭력적이진 않아도 별반 다르지 않다. 정치는 자신은 살고 상대는 죽이기 위해서 수단방법 가리지 않는다. 허울 좋은 구실일 뿐 철학이나 신념은 없다. 김대중, 노무현 이후 단심(丹心) 있는 사람, 걸출한 정치인이 자취를 감추어 고만고만한 난장이들만 아웅대고 있다. 시민들 역시 마찬가지다. 모두가 가치관, 권위, 신념을 상실하고 극도의 실용주의만 쫓는듯하다.

 

    로베스피에르는 공포정을 실행하고 제어하지 못한 책임, 그 결과 자신 또한 공포정의 희생양이 되어 단두대에서 처형된 과오가 있지만 나름대로의 확고한 철학과 원칙이 있는 정치인이었다. 적어도 살아남기 위해 카멜레온처럼 이리저리 변신하며 세속적 삶을 구차하게 추구하진 않았다. 자신의 고집대로 신념대로 살다가 생을 마감한 셈이다.

 

  울부짖듯이 발언권을 요구하는 (로베스피에르의) 소리가 날 때마다 (튀리오가 울리는) 방울소리가 웅변가의 입을 막았다. 의원들이 마지막으로 들은 말은 처절할 정도로 비장했다. “마지막 한 번만 발언권을 주시오. 살인자들의 의장이여.” - 339p

 

    1794년 7월 27일(공화력 2년 테르미도르 9일) 프랑스 혁명에서 또 한고비를 넘기는 중요한 이 날, 로베스피에르는 순식간에 몰락한다. 그 날 그의 정적들은 국민공회에서 담합하여 로베스피에르에게 발언권을 주지 않고 그의 체포안을 통과시킨다. 물론 그 전부터 정적들과의 갈등이 쌓이고 긴장이 상승하는 과정을 거쳤지만 이러한 사태전개는 로베스피에르도 미처 예상치 못한 것이었다.

    그는 불과 하루이틀사이에 이들이 이렇게 전격적이고 긴밀하게 협력하여 자신을 몰아붙일 줄은 몰랐다. 현장에서 이심전심으로 협력하였는지, 사전에 모의하여 치밀하게 시나리오를 짰는지는 알 수 없지만 그만큼 그들은 로베스피에르에 대한 적개심과 이대로는 자신들도 당할지 모른다는 위기의식이 강했다. 정적들 중 순순히 굴복하지 않고 맞서 싸울 궁리를 하던 사람들이 내심 벼루고 있다가 더는 물러설 수 없는 상태에서 역공을 했고 성공했다.

 

    공포정은 1793년 9월 17일 반혁명혐의자법이 제정되면서 시동을 걸어 점점 거세지다가 1794년 6월 10일 프레리알법(공포정치법)이 통과되면서 대공포정의 절정으로 치닫게 된다. 프레리알법으로 변호인 입회와 증인심문이 폐지되고 선고는 무죄 아니면 사형의 두 가지 판결로 축소된다. - 프레리알은 초원의 달, 테르미도르는 무더운 달로 새롭게 지정된 공화력 열두 달 중에 하나다.

    프레리알법 통과 후 단두대가 쉬지 않고 가동된다. 혁명광장에서 트론광장으로 6월 12일 옮겨진 처형장이 더욱 바빠졌다. 국민공회와 부자동네에 가까운 혁명광장이 여름철 역한 피비린내로 이미 진동하고 있었기 때문에 옮긴 것이다. 파리의 감옥수와 수감자수는 급격하게 늘고 프레리알법 통과 전 14개월 동안 1,251명이 파리에서 처형되었다면 이후 테르미도르 반동(7월 27일)까지 48일 동안은 1,376명이 처형된다. 수레에 희생자들을 태우고 지나가는 광경을 보는 사람들은 두려움에 몸서리를 쳤다.

 

    이것은 로베스피에르는 물론이고 몽타뉴파 정치인들이 감내할 수준이 아니다. 실재로 하나둘 발을 빼면서 문제의식을 느끼는 분위기다. 하지만 공포정의 관성은 아직 살아있다. 공포정을 실행하는 사람도 공포를 느끼지만 어느 하나 제동을 걸 수 없는 형국이다.

    로베스피에르의 정적들은 모든 것을 로베스피에르 탓으로 돌린다. 로베스피에르가 원한다. 그가 시켰다. 그에게 항의하라며 그의 등 뒤에 숨어 이간질과 중상비방을 일삼았다. 실재로 이 시기부터 위기의식을 느낀 로베스피에르는 구국위원회, 안보위원회와 거리를 두기 시작한다. 그러나 적들이 너무 많이 늘었다. 공포정을 완화하기엔 때가 이미 늦었다.

 

    정적들은 6월 15일 사교집단이 왕정복고를 시도한다는 ‘카트린 테오 음모사건’에 로베스피에르를 엮어 치명타를 가하려 하였고 그의 독주를 견제하는 것을 넘어 공공연히 그를 독재자라고 비난하기 시작했다. 로베스피에르를 죽이려는 시도도 있어 그는 밖에 나갈 때 항상 권총 두 자루를 품고 호위대를 거느렸다.

    7월 27일 국민공회에서 로베스피에르는 그가 작성한 반혁명혐의자 명단을 발표하기도 전에 정적들에게 선공을 당했다. 그가 믿고 의지하려던 국민공회 내 순수한 다수는 이미 적이 되었거나 적에게 가담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들 역시 공포에 밤잠을 설칠 정도로 스트레스를 받고 있었던 거다. 로베스피에르는 어느새 그에게서 위협을 느낀 사람들이 힘을 합쳐 타도해야 할 대상이 되어 있었다.

 

샤를 모네 <로베스피에르의 몰락>

 

    국민공회에서 체포된 로베스피에르는 뤽상부르 감옥으로 호송되지만 사람들이 모여들어 그를 구출한 후 파리코뮌으로 피신한다. 로베스피에르 측에는 파리코뮌, 자코뱅협회, 국민방위군이 있고 테르미도리엥 측에는 국민공회, 구국, 안보위원회, 국민공회군이 있다.

    결국 7월 28일 새벽 2시 국민공회군은 코뮌의 집을 장악하고 이 과정에 로베스피에르는 턱에 총상을 입고 체포된다. 결정적 24시간 동안의 구체적인 양측 동선이나 병력이동은 전두환의 1212 쿠데타를 다룬 영화 <서울의 봄>에서와 같이 긴박하고 아슬아슬하지만 너무 길어지므로 생략한다.

 

    오전 10시 혁명법원 대표단이 국민공회를 방문해서 프랑스 전체가 축하할 일에 동참하겠다고 말하고 나서 음모자들의 재판에 대한 명령을 받으러 왔다고 설명했다. 국민공회의 구국, 안보 합동위원회는 역적들의 재판을 오늘 중 마무리하라고 혁명법원에 명령하고 당일로 로베스피에르 일파를 처형하기로 결정한다.

    부랴부랴 단두대를 다시 혁명광장으로 옮겨 처형하기로 한다. 스물두 명을 나눠 실은 수레가 처형장으로 가는 길은 좋은 자리를 차지하려는 사람들로 붐볐다. 창가의 자릿값은 비쌌다. 상류층 아낙들은 날아갈 듯 차려입고 기분 좋은 웃음을 재잘거리며 광장 근처로 몰려갔다. 이윽고 수레가 혁명광장으로 들어섰다. 1793년 1월 21일 왕이었던 루이 카페가 처형된지 1년 6개월만이다.

 

    로베스피에르가 단두대로 올라갔다. 칼날이 목을 칠 때 그는 외마디 소리를 질렀다.

 

    이렇게 1789년부터 계속된 프랑스 대혁명은 사실상 끝났다. 아직 공포정의 출구도 찾지 못한 상태였는데 테르미도르 반동으로 다시 알 수 없는 미지의 영역으로 들어간 것이다. 테르미도리앵은 자코뱅협회를 폐쇄하고 모든 구민에게 충성맹세를 시키고 상퀼로트 운동을 탄압한다.

    대외전쟁은 장기화하고 국내에서 숨죽이던 보수세력이 백색공포를 퍼뜨리는 가운데 국민공회는 새로운 헌법을 마련한다. 1795년 8월 22일에 총재정부와 양원제 국회를 채택한다. 이후에 포병장교인 나폴레옹이 전쟁수행능력을 인정받으면서 야망을 키우다가 1799년 11월 9일 쿠데타를 일으켜 집정관정부를 세워 민주주의 혁명의 길을 막고 결국엔 황제에까지 오른다.

 

    로베스피에르는 물론이고 프랑스 대혁명의 와중에 모두가 그 급류와 격랑에 휩쓸릴 수밖에 없었다. 그는 뒤늦게 공포정의 강도와 속도를 늦추려하였지만 때를 놓치고 정적들에게 패배하였다. 분명 그에겐 무지막지한 공포정의 책임이 있다. 하지만 누구라도 그 때 그 상황에서는 다른 뾰족한 방도가 쉽지 않았을 것이다.

    공포정 하에서 공포와 스트레스가 극에 달했다. 전쟁과 혁명과 정파간 극한 투쟁의 숨 막히는 정국에 피로감이 더 이상 참을 수없이 누적됐다. 이럴 땐 어떻게든 새롭게 방향을 틀고 출구를 내어 분위기를 환기시키고 압력을 빼야 한다. 전두환 독재정권에서 ‘국풍’이란 대대적 잔치행사를 벌였듯이 서커스라도 대중에게 보여줘야 한다.

 

    로베스피에르 역시 1794년 6월 8일 '이성의 제전'을 샹드마르스에서 개최했다. 국민공회 의장 자격으로 가톨릭 하나님이 아닌 최고존재를 봉축하는 행사를 주관한 것이다. 하지만 분위기는 신나는 축제라기보다는 엄숙한 제사와 비슷했다. 더구나 그는 최절정의 권력자인데다가 대제사장으로까지 비춰져 모든 이의 경계의 시선에 원치않게 노출되었으리라.

    분명히 그는 유쾌한 활력가라기보단 진지한 원칙주의자였다. 위기관리와 분위기 반전을 위해 이런저런 행사와 기획을 시도하긴 하였지만 크게 힘쓰진 않았다. 아마도 엄혹한 상황에서 자연스럽지 않았던지, 정적과의 투쟁에 매몰되어 있었던지, 아니면 그 자신 쇼에 능하지 않은 너무 진지하고 융통성 없는 꽉 막힌 원칙주의, 원리주의자이지 않았나 싶다.

    확실히 1794년의 대외전쟁과 공포정 하에서는 1790년의 샹드마르스에서 열린 전국연맹제 같은 대대적인 축하잔치를 할 여건도 분위기도 아니었다. 공포정이 맹위를 떨치던 1794년 여름이 왕정시대였던 1789년 이전보다 나았다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을까? 상퀼로트의 정치적 권리와 발언권은 혁명적으로 확장되었지만 그들의 삶이 그에 걸맞게, 그에 비례해서 실질적으로 나아졌는지는 의문이다.

 

    역사의 진보를 냉소하거나 혁명을 폄훼하자는 것이 아니다. 체제와 권력의 정체, 생리에 대해 말하고자 함이다. 1789년 이후 거듭되는 혁명으로 앙시앵레짐을 탈피하며 체제가 바뀌었지만 그것 역시 앙시앵레짐이긴 마찬가지다. 즉 새롭게 세워진 앙시앵레짐일 뿐이다. 말장난 같지만 새로운 체제는 모두 앙시앵레짐이다.

    권력 역시 마찬가지다. 권력을 얻기 위해 기득권과 죽음을 불사하고 투쟁하지만 승리하여 권력을 획득하면 이미 기득권이 되어있다. 그것은 음식은 만들자마자 부패하고, 생명은 태어나자마자 늙기 시작하고, 새 차는 출고되자마자 이미 중고차인 것과 같다. 가장 좋은 때, 전성기는 생각보다 짧고 빠르다. 역사의 여러 왕조국가 역시 최전성기를 구가하는 때는 개국이후 2대, 3대 왕의 치세였다.

 

    어떻게 평화와 번영을 오래 구가하며 전성기를 이어갈 수 있을까? 안에서는 답이 없다. 밖으로 새로운 개척지와 먹거리를 계속 찾아나서야 한다. 진보가 밖에서 무언가를 발견하면 보수가 안에서 그것을 빼먹는다. 진보가 새로운 권력을 창출, 생산하면 보수가 그 권력을 행사, 소비한다.

    보수와 진보가 안에서 아무리 사이좋게 합리적으로 분배하며 산다 해도 영원할 수 없다. 안팎으로 항상 상황은 출렁이고 인간에겐 시기와 탐욕과 투쟁심이란 것이 있다. 못된 인간에겐 <혼자만 잘 살믄 무슨 재민겨-전우익 저>가 아니라 <다같이 잘 살믄 무슨 재민겨>다. 너와 나 모두 10을 먹는 것보다 나는 8 너는 4를 먹는 것을 선호한다.

 

    아무리 자원이 넉넉하더라도 모두가 영원히 꿀빨 수는 없다. 닫힌계에서 권력과 먹거리는 곧 한계를 드러내고 소진된다. 결국은 너나없이 모두 보수가 되어 서로 먹겠다고 아웅다웅 피바람이 분다.

    진보는 밖에 나가 부지런히 먹거리를 장만하고 보수는 집안에서 묵묵히 관리하며 지키는 것은 태고부터 주어진 제 역할이다. 서로 적대하지만 말고 상대의 역할과 한계를 인정해야 한다. 생각 있는 보수라면 섣불리 밖으로 나대지 말고 생각 있는 진보라면 안에서 죽치고 앉아 음식 두고 다투지 말아야 한다.

 

    권력이 우리의 일용할 양식이라면 역사는 진보, 개혁, 혁명을 통해 그 생산량을 늘려왔다. 왕과 귀족, 성직자만이 생산하고 소비하던 권력이 부르주아, 전문직, 상퀼로트, 여성, 청소년에게까지 꾸준히 아래로 내려오며 확장되었다. 이렇게 권력의 총량이 크고 골고루 분포된 사회, 민주주의가 발달 성숙한 공동체가 경쟁력이 있다. 활력 있으면서도 안정적으로 공동체를 유지해나갈 수 있다.

    그래도 문제가 생기고 한계에 다다르면 밖에서 활로를 찾아야 한다. 먼 목초지, 넓은 대양을 찾아 나서야 한다. 언제까지? 태양이 차갑게 식어 에너지를 다할 때까지다! 어차피 우리 삶의 모든 에너지는 태양에서 오는 것이다. 지구 위의 생명은 모두 태양을 빼먹고 사는 것이다.

 

    그때까지 기득권과 그에 도전하는 세력 간의 투쟁은 계속될 것이다. 보수와 진보가 엎치락뒤치락하는 변증법적 역사는 계속될 것이다. 그러면서도 역사는 조금씩 진보할 것이다. 다행히 우리에겐 그것을 가능케 하는 교통, 정보통신, 생명공학 등의 도구들이 있다.

    하지만 도구는 도구일 뿐 언제든 악용될 수 있다. 공포정 역시 인민의 원한을 풀어줄 수도 있지만 폭정의 도구로도 쓰일 수 있는 양날의 검이었다. 팸플릿, 신문, 방송, 인터넷, 유튜브 등으로 발전해온 미디어 역시 마찬가지다. 초기에 개발, 사용될 때는 진보의 독무대였지만 곧 수구보수가 유입되며 물이 흐려졌다. 악화가 양화를 구축하듯, 좋은 길을 내면 똥차가 먼저 지나가듯, 그러한 도구들도 수구보수와 악당들의 손에 넘어간다.

 

    생명의 순방향, 진화의 순방향, 역사의 순방향은 모두 진보다. 하지만 특정시점, 특정장소에선 테르미도르 반동처럼 예기치 않은 드센 역류를 만나 잠시 멈추거나 크게 후퇴할 수도 있다. 어쩌면 인류 전체가 돌이킬 수 없는 파국을 맞을 수도 있다. 우리에겐 원자폭탄이라는 가공할 무기과학이 있기 때문이다.

    태양이 식기 전이라도 인류는 멸종되거나 선사시대 이전으로 리셋될 수 있다. 하지만 어딘가에 생명이 남아있다면 생명은 스스로의 길을 내며 새롭게 시작할 것이다. 그 길은 진보의 길이다.

 

    주명철 교수의 역저 전10권 ≪프랑스 혁명사≫를 다 읽었다. 한창 연주되던 거문고가 텅-하며 줄이 끊기듯 로베스피에르의 몰락과 함께 혁명의 대장정이 갑자기 끝났다. 하지만 역사에 엔딩은 없다.

 

    마지막 책장을 접으면서 역사의 무정한 듯 장엄하고 도도한 물결에 씁쓸하면서도 숙연하다. 프랑스 대혁명은 비록 실패했지만 19세기 유럽 사회주의 운동의 시초가 되었고 지금도 전 인류의 혁명교과서로 영감과 교훈을 주며 이어지고 있다.

 

 

    - 마지막 10권 리뷰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