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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혁명사≫ 7권 <제2의 혁명> 리뷰

어멍 2023. 12. 6. 21:50

 

≪프랑스 혁명사≫ 7권 <제2의 혁명> 리뷰

 

<제2의 혁명>

부제 : 입법의회와 전쟁, 왕의 폐위

 

  문화는 역사를 구축하는 방식을 말한다. 다시 말해 역사는 문화적 구축물이다. 자원을 활용하고 생활에 이용하는 방식, 인간관계를 유지하는 방식, 사람이 태어나서 살고 죽는 과정이 모두 문화다. 물론 죽은 사람과 이별하는 방식, 꿈꾸는 방식, 사고방식, 세계관, 가벼운 몸짓과 행동까지도 문화가 아닌 것이 없다. - 13, 14p

 

    저자인 주명철 교수의 말이다. 우리 삶에서 문화 아닌 것이 없고 따라서 우리 삶이 좀 더 나아지고 진보하려면 궁극적으로 우리의 문화가 발전적으로 바뀌어야 한다는 의미일 것이다. 고 노무현 대통령이 퇴임 후에 ‘결국 우리의 생각이 바뀌어야 한다’며 회한을 섞어 얘기한 것도 같은 맥락일 것이다. 생각이 바뀌면 말과 행동도 바뀌게 마련이다.

 

    보통 자기 남편이 진보적이라고 말하는 아내는 없다. (자기 아내가 지혜롭고 알뜰하다고 말하는 남편 역시 흔치 않다.) 밖에서는 탈권위 진보인양 하더라도 집안에선 손도 까딱 않고 고집불통, 권위적이라고 여기는 아내가 많을 것이다.

    실재로 이렇게 정치적으로 진보를 주장하더라도 생활에서는 보수인 경우가 비일비재하다. 생각 따로 말 따로 행동 따로인 경우가 많다. 이렇게 정치와 생활, 사고와 문화가 분리 모순되는 것은 보통사람이라면 이 둘을 철저히 의식하며 통합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예는 우리 주위에서 심심치 않게 발견할 수 있는데 이들은 양심의 가책은 물론 부자연스러움마저 느끼지 못한다. 극단적이지만...

    산을 사랑한다면서 케이블카 등 자연을 훼손하는 무분별한 개발을 찬성하는 등산회원, 노동자인권과 진보세상을 주장하는 남성우월주의 마초 육체노동자, 들꽃을 사랑한다면서 촬영이 끝나면 다른 사람이 찍지 못하게 꺾어버리는 사진작가, 보수 친구와 술자리서 대판 싸우고 새벽에 들어와선 자는 아내를 깨워 술상을 봐오라는 진보 가부장, 일회용품을 애용하고 뒤죽박죽 분리수거하면서도 깨시민을 주장하는 가정주부 ......

 

    우리사회 진보, 보수의 갈등도 자세히 살펴보면 그 밑바닥에 문화적 차이와 갈등이 깔려있다. 2030 신세대와 4050 중견세대와 6070 구세대의 생각과 문화의 격차가 크다. 굳이 세대갈등을 강조, 부추겨서는 안 되겠지만 현실은 있는 그대로 인정해야 한다. 이와 관련해 일부 젊은 세대에서 공유되고 있는 일베문화는 우리의 미래를 생각한다면 큰 걱정거리가 아닐 수 없다. 경계할 일이다.

    모든 정치혁명은 궁극적으로 문화혁명으로 완성돼야 한다. 정치가 자꾸 뒤뚱거리며 제동이 걸리고 때론 뒷걸음질 치는 것도 구성원 전체의 문화가 뒷받침되지 못하기 때문이다. 문화로서의 진보, 생활형 진보가 진짜 진보다. 몸짓과 표정까지도 민주주의와 진보에 걸맞아야 한다. 리더로서 고독한 결단의 순간에서도 구성원 전체를 의식, 배려하며 결정해야 한다. 이렇게 생각이 바뀌고 그 생각이 우리 삶의 구체적 양식과 행동을 바꿔야 한다.

 

  이미 1791년 초부터 ‘상퀼로트’라는 말로 지칭하던 계급이 점점 정치무대의 전면으로 나서고 있었다. 1789년 혁명 초부터 그들의 무기는 창이었다. 그들의 복장은 그 계급을 지칭하는 말이 되었다. 그들은 귀족의 짧은 바지(퀼로트, Culotte)가 아니라 노동자의 긴 바지(상퀼로트, Sans-Culotte)를 입은 사람들이었다. - 118p

 

    의복도 일종의 문화로 계급을 구분하기도 하고 경우에 따라선 종교적, 정치적 표식이 되기도 한다. 정확히는 ‘퀼로트를 입지 않은’이란 뜻인 상퀼로트는 귀족도 아니고 부르주아도 아니고 당시로 말하자면 도시노동자, 서민, 빈민층으로 하류계층이나 선거권이 없는 수동시민에 속한 계급으로 무산계급(프롤레타리아)에 비유할 수 있겠다.

    귀족은 짧은 바지에 칼을 찼지만 상퀼로트는 긴 바지에 창이나 몽둥이를 들었다. 이는 양반무관이 검을 찼다면 상민병졸은 창을 들고 민란 때의 백성은 죽창이나 낫을 든 우리의 사정과 같다. 현대에 와선 사무실에서 글밥 먹는 화이트칼라는 양복 입고 공장에서 기름밥 먹는 블루칼라는 잠바를 입는 것과 같은 이치다.

 

    계급, 정치를 떠나 때와 장소에 맞게 입고 꾸미는 것이 예의다. 아무리 거친 아스팔트에서 활동하는 진보운동가라도 방송인터뷰라면 좀 깔끔하게 꾸미고 나와야 한다. 아무리 긴 네일아트에 손에 물도 안 묻히는 여성 부르주아 정치인이라도 김장봉사에는 편한 복장에 고무장갑은 껴야 한다. 아무리 독실한 기독교 영부인이라도 이슬람국가를 방문해선 히잡을 흔쾌히 쓸 수 있어야 한다.

    하지만 사람마다 평소 자신에게 가장 편한 복장과 최애 스타일은 따로 있다. 그리고 이것은 어느 정도 그의 개성, 가치관, 세계관, 정치적 성향에까지 연결되어 있다. 히피에게 하이힐은 고역이다. 명품녀에게 몸빼바지는 악몽이다. 태생부터 거들먹거리는 것, 군림하고 얌전빼는 것을 싫어했고 남몰래 자유를 꿈꿨던 고 노무현 대통령이라면 갑갑한 양복과 넥타이보다 면티에 잠바가 몸에도 마음에도 더 편안했을 것이다.

 

양복이 없었던 것일까? 굳이 입지 않았던 것일까?

사법연수원시절 양복들 속에서 홀로 잠바를 입었던 노무현

 

    1789년의 혁명이 부르주아가 주도하여 왕과 세습귀족을 상대로 일으킨 혁명이라면 1972년 제2의 혁명은 왕, 귀족, 보수적 부르주아를 상대로 상퀼로트가 주도하여 일으킨 혁명이었다. 1789년 이후의 정국은 부르주아 제헌의회의 시간이었다면 1792년 이후는 상퀼로트 영향력 하의 국민공회의 시간이었다. 예전엔 왕과 귀족이 부르주아에게 끌려 다니며 숨죽였다면 1792년 이후엔 보수 부르주아들이 상퀼로트와 급진좌파에 눌려 숨죽였던 시간이다.

    당시 사회적, 경제적, 정치적 하류층을 상징했던 상퀼로트는 1791년 초부터 점점 정치무대의 전면에 나서기 시작하다가 1791년 6월의 왕의 도주 사건으로 왕정에 대한 근본적인 신뢰를 저버린 듯하다. 강제로 파리로 귀환한 왕의 처리를 두고 제헌의회와 대립하던 차에 7월 17일 샹드마르스 광장 학살 사건에서 큰 희생을 치름으로서 정치적으로 각성한 듯하다. 이들은 1972년 8월 제2의 혁명의 주력으로 곧이어 9월 학살까지 저지르며 폭주하게 된다.

 

루이 레오폴드 부알리(Louis-Léopold Boilly)

<상퀼로트 분장을 한 가수 슈나르>

 

    누가 무지하지만 온순한 백성을 화나게 했는가? 누가 잠자고 있는 상퀼로트의 코털을 건드렸는가? 그들은 프랑스 혁명을 힘차게 추동하고 전쟁의 위기에서 조국을 구한 위대한 인민이었나? 아니면 단지 공포정과 반동의 빌미를 제공한 무도하고 잔인한 폭도였던가?

 

  (1792년) 6월 20일 수요일이 되었다. 1789년 죄드폼의 맹세와 1791년 왕의 도주를 기념하는 이날, 파리 검찰관 마뉘엘과 검찰관보 당통은 은밀히 비밀봉기위원회를 가동시켰다. - 251p

 

    1791년 9월에 제헌의회는 헌법을 완성하고 다음 입법의원들에게 국회를 넘겨주지만 혁명의 실질적 완성은 아직 요원하고 국내외의 사정은 대략 난감을 넘어 위기다. 주변 국가들의 군주들은 프랑스에 파견한 대사들을 통해서 루이 16세를 몰래 격려하고, 망명한 왕족들이 군대를 모집하는 것을 용인해주었기 때문에 프랑스에서 혁명을 진행하는 한 전쟁이 터지는 것은 시간문제였다. - 55,56p

    결국 1792년 4월 28일 첫 전투로 프로이센, 오스트리아 연합군과의 전쟁이 시작되면서 프랑스는 국내 반혁명세력과 국외 전제왕권국가를 상대로 한 두 전쟁을 헤쳐 나가야 할 처지가 됐다.

 

    사정이 이러한데도 1791년 연말에서 1792년 6월까지 왕은 국회가 제정한 망명세력에게 불이익을 주는 망명자법과 비선서 사제 유형법, 2만 병력 증원법을 연이어 거부하고 주위를 왕당파 대신들로 채우는 등 혁명세력에 노골적으로 반발한다. 이에 의회보다 더 급진적이고 상퀼로트 세력이 강한 파리 시 지도부는 참다 참다 왕이 있는 튈르리 궁으로 1972년 6월 20일 상퀼로트를 앞세우고 쳐들어간다.

    상퀼로트는 왕궁에 들어가 왕을 만나 붉은 프리기아 모자를 씌우고 자신들이 마시던 포도주를 나눠주면서 왕과 형제애를 나눴지만 기대했던 결과를 얻지는 못했다. - 259p 그들은 무기를 들고 궁에 들어가 왕 앞에 섰지만 차마 왕에게 물리적인 위협을 가할 수는 없었다. 왕 역시 속으로 두려움과 모멸감에 부들부들 떨었더라도 내색조차 할 수 없었다. 루이는 마치 자원해서 그 자리에 참여한 것처럼 행동했다. 짐짓 태연한 척 했지만 속으로 분노를 삭이며 복수를 단단히 별렀다. 결과적으로 6월 20일은 진정한 화해의 마침표가 아니라 또 다른 갈등과 파국을 향한 서막이었다.

 

7권 표지그림 확대 - “내가 떨고 있소?”

중앙에 포도주병을 든 상퀼로트가 있고

좌측에 의자에 올라 무기를 든 시위대를 진정시키는 파리 시장 페티옹,

우측에 병사의 손을 가슴에 얹고 태연한 척하는 루이가 있다.

 

    6월 22일 루이 16세는 20일 사태에 대한 포고문을 발표한다. 내용은 입헌군주제인 헌법과 헌법기관들을 지킬 것이라는 언뜻 들으면 당연한 말이었지만 속내는 왕을 몰아내고 공화정을 해볼 테면 어디 한번 해보라는 선전포고였다. 28일에는 왕에게 우호적인 동부전선 사령관 라파예트가 전선을 무단이탈하여 파리에 나타나 국회에서 발언한다. 그는 왕을 지키고자 6월 20일의 상퀼로트들을 반역자로 처벌하고 자코뱅 클럽을 해체해달라고 요청한다.

    라파예트는 1789년 혁명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던 국민방위군 사령관으로서 당시 큰 인기를 누렸으나 점점 왕에게 가까워져 진보좌파와 파리시민들에게 신망을 잃은 인물이었다. 그는 이러한 전선 무단이탈과 이 날 국회발언으로 더욱 파리 상퀼로트들의 미움을 사게 된다.

 

    사태는 더욱 악화된다. 전선에서는 승리보다는 패배의 소식이 들려오고 급진좌파를 주축으로 한 파리 시 지도부와 시 상급기관인 보수우파를 주축으로 한 도 지도부와의 불화에 왕당파와 비선서 사제가 연합한 노골적인 저항도 여전하다. 시중에는 왕과 귀족들을 편들고 혁명파와 민중을 향해선 노골적인 위협을 가하는 적군 총사령관 브룬스비크 공의 선언문이 나돌아 민심이 크게 동요하는 와중에 국회는 민심을 정면으로 거스르는 결정을 내린다.

    8월 8일 국회는 630명의 호명투표로 라파예트 고소 문제를 표결에 부쳐 406표 대 224표의 압도적인 차이로 고소하지 않기로 의결한다. 이제 왕은 물론 국회에도 더 이상 기대할 게 없음이 분명해졌다. 상퀼로트는 왕의 폐위에 대해서도 국회가 거부할 것임을 확신했다. 이제 봉기만이 남았다.

 

    8월 10일 아침 6시 급진좌파는 파리 코뮌 의회를 장악한다. 당통이 세운 반란코뮌이자 혁명코뮌이다. 당통은 형식적이지만 시장 페티옹을 가택연금하고 튈르리 궁으로 쳐들어간다. 이번에는 지난 6월 20일처럼 평화롭게 끝나지 않을 것이 분명했다. 왕은 가족과 몇몇 측근과 함께 이미 국회로 피신한 상태였지만 궁에서는 피비린내 나는 전투가 벌어져 양측 많은 희생자를 내게 된다.

    국회로 피신한 루이 16세는 의장석 뒤에 있는 방에 가족과 함께 갇혀서 자신의 운명을 초조하게 기다려야 했다. 입법의회 의원들은 마침내 왕의 권한을 정지하고 왕과 가족을 뤽상부르 궁에 가둔다고 의결했다. 루이 16세는 하루만 버티면 튈르리 궁으로 되돌아갈 수 있으리라고 낙관했지만 어림없는 바람일 뿐이었다. 그에게는 이제까지 지나온 길보다도 더욱 험난하고 비극적인 앞날이 기다리고 있었다.

 

듀플레시 베르트랑(Duplessi Bertaux) <튈르리 궁의 전투>

 

    이 기간 동안에 벌어진 일들에서 나는 대한민국 현대사의 세 장면이 겹쳐 보인다. 루이 16세가 국회가 입법한 법률을 줄줄이 거부한 것에서 현재 윤석열 대통령의 반복되는 거부권 행사를 본다. 이미 양곡법, 간호법을 거부하였고 이번에 노란봉투법과 방송 3법까지 거부하면서 총 3차례 여섯 개의 법안을 연이어 거부한 것이다. 윤 대통령은 낮은 지지율과 강서구청장 선거 참패 이후에도 6월 20일 이후의 루이처럼 어디 한번 해볼 테면 해보라며 연일 마이웨이를 고집하고 있다.

    둘째가 라파예트 장군의 근무지 이탈이다. 우리 역시도 자기 주둔지를 이탈해 쿠데타를 일으킨 박정희 소장, 전두환 소장 등이 있다. 셋째가 라파예트의 처리를 두고 여론을 명백히, 정면으로 거스른 국회의 결정이다. 이해가 안 될 정도로 어리석은 이러한 결정은 2004년의 노무현 대통령 탄핵 때도 그대로 나타났다. 한번은 왕의 폐위와 함께 입법의회는 수명을 다하고 한번은 탄핵 역풍과 함께 노무현 대통령과 열린우리당의 압승을 가져왔으니 그 후폭풍이 모두 어마어마했다.

 

    라파예트가 군대를 이끌고 파리로 쳐들어온 것은 아니지만 당시는 외국과의 전쟁 중이었으므로 그 죄가 간단치 않다. 군인의 기본, 본분은 자기 위치를 지키는 것이다. 전투에 임해서는 군기가 강하고 충성스러운 군대일수록 적이 코앞에 이르렀어도 명령이 떨어질 때까지는 총도 쏘지 않고 미동도 않고 자기 자리를 사수한다.

    계륵(먹기도 버리기도 애매한 닭갈비)이라는 조조의 혼잣말에 그 속마음을 눈치 채고 먼저 부대에게 철수준비를 시켰던 양수가 조조에 의해 처형을 당한 것도 군인으로서의 근무지 이탈의 엄중함을 시사하고 있다. 군대에서 계통과 명령에 의하지 않은 군대이동은 곧 반란을 의미한다. 라파예트는 군법에 의해서도, 당시 민심에 의해서도 당연 엄벌에 처해졌어야 했다.

 

    하지만 입법의회는 왕은 물론 라파예트에 대해서도 미온적이다. 여론을 오판했는지 알면서도 무시한 건지 라파예트에게 면죄부를 줌으로써 가뜩이나 불안한 민심에 기름을 부었다. 왜 이렇게 프로 정치인이면서도 정세를 읽지 못하고 뻔히 예상되는 결과를 무시했을까? 이것은 2004년의 노무현 탄핵도 마찬가지다.

    라파예트는 1789년보다는 못하지만 당시까지도 여전히 실력자였다. 제헌의회 출신으로 상당수 입법의원들과 개인적인 친분도 있었을 것이다. 원래 정치적으로 진영을 달리하더라도 지역, 가문, 학벌 등 사적 인연으로 얽혀 있다면 한 수 봐주고 들어가는 경우가 많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는 계급적, 사상적으로 상퀼로트(긴 바지)가 아닌 퀼로트(짧은 바지)였다.

 

    라파예트는 1789년 혁명을 지지했으나 앞장서 주도하지는 않았다. 1791년 왕의 폐위를 청원하려는 군중과 샹드마르스 광장에서 충돌함으로서(샹드마르스 학살) 왕을 수호하려는 의지를 분명히 드러냈다. 그는 대부분이 엘리트 부르주아인 국회의 퀼로트 속의 퀼로트였고 고졸의 노무현은 비록 사법고시에 합격한 엘리트였지만 양복들 속으로 들어간 잠바였던 셈이다.

    양복 입으면 양복 입은 사람처럼, 잠바 입으면 잠바 입은 사람처럼 생각하고 행동한다. 광장의 잠바를 양복으로 갈아입고 국회의사당에 모이고 밀실에서 양복끼리 만난다. 낮에 핏대 세우며 싸우고 밤에 파안대소하며 술잔을 나눈다. 그렇게 광장의 목소리에서 멀어져 대중과 유리된다. 이렇게 해서 얼토당토 않는 착각과 오판에 빠진다. 그러므로 정치인은 하방하듯 정기적으로 시민대중과 섞여 어울려야 한다. 고관대작만 만나지 말고 현장의 서민들과 호흡해야 한다.

 

    같은 맥락에서 정치인은 대중을 너무 앞서가지 말아야 한다. 때론 왕에게 간언하듯 대중에게 쓴 소리도 해야겠지만 아무리 뜻이 높고 훌륭하더라도 대중과 보폭을 맞추어야 한다. 민주주의는 딱 국민 수준만큼 간다. 정치인이 그 수준보다 너무 높게 있으면 국민과 괴리되고 괴리되면 국민과 겉돈다. 국민에게 영합해서도 안 되지만 초인인양 홀로 이상에 젖어서는 안 된다. 결국 정치인 개인으로는 명성을 얻더라도 전체 국민은 패배한다.

    그런 면에서 과거 노무현 대통령의 대연정 제안과 최근 더불어민주당 일각의 위성정당을 만들지 않겠다는 약속을 틀림없이 지키자는 주장은 순진한 동시에 한편으론 대중을 억지로 가르치고 선도하려는 오만한 행태일 수 있다. 대중은 리더가 방향제시를 해주기를 바라지만 동시에 리더에게 고삐를 채우고자 한다. 방향을 틀며 바꾸기도 하고 빨랐다 느렸다 완급을 조절하기도 한다. 언뜻 이랬다저랬다 변덕을 부리지만 어느 경우든 자신이 배제되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

 

    시민 대중은 약속이 지켜지길 원한다. 하지만 그에 앞서 공정을 원하고 역할을 원한다. 사정이 있고 납득할 수 있다면 약속을 어겨도 양해한다. 승패를 떠나 같은 조건에서의 공정한 게임을 원하고 그 게임의 심판이 되길 원한다. 칼이든 총이든 똑같은 조건에서 싸우길 원한다. 정치가 서로 죽기살기로 싸우는 것도 싫어하지만 형님먼저 아우먼저 저들끼리 사이좋게 골고루 나눠먹는 것도 싫어한다. 경기는 재미없어지고 심판(국민)은 소외된다.

    민주주의에서 주인인 국민이 소외돼선 안 된다. 가족이라도 구성원 모두에게 합당한 역할을 주며 존중하고 그에 걸 맞는 대접을 해주어야 한다. 정치인이라면 어떤 경우든 대중과 함께 가야 한다. 너무 뒤처지지도, 너무 앞서가지도 말고 때론 기다리며 겸손한 자세로 딱 반걸음만 앞서가야 한다.

 

    - 7권 리뷰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