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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혁명사≫ 4권 <1790> 리뷰

어멍 2023. 9. 27. 22:11

 

≪프랑스 혁명사≫ 4권 <1790> 리뷰

 

<1790>

부제 : 군대에 부는 혁명의 바람, 낭시 군사반란

 

  병사들은 애국자입니다만 식견이 많다고 말하기는 어렵습니다. 장교들은 식견이 많지만 애국자가 아닙니다. - 60p

 

    간혹 병사 중에 식견이 많은 자도 있겠고 장교 중에 애국자도 있을 것이나 위의 말은 일반적으로 맞는 말이다. 여기서의 애국자, 애국파는 왕당파, 귀족주의자에 대항하는 개념으로서 귀족, 특권층이 독차지한 장교와 평민출신의 병사들은 식견이나 사상이나 취향 면에서 본래 많은 이질적인 요소를 내재하고 있었다. 신분사회를 벗어난 현재에도 계급이나 명령계통의 차별이 뚜렷한 장교와 사병의 갈등이 적잖은데(사병의 주적은 장교라는 말도 있다) 당시에는 그 갈등이 더 첨예했을 것이다.

    같은 맥락에서 군대에서 사회로 범위를 넓히면 엘리트와 민중의 관계를 살펴볼 수 있다. 당시 엘리트는 군대장교(대검귀족), 법관(법복귀족), 귀족(세습혈통), 성직자로 나눌 수 있고 민중은 대부분을 차지하는 농민과 소상공인이었으며 새롭게 부상하는 부르주아 자산계급이 그 중간 정도에 위치했다고 볼 수 있다.

 

    엘리트 중에서 전통적으로 가장 뿌리가 깊은 것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무력을 관장하는 군인과 종교를 관장하는 성직자다. 한 젊고 매력적인 평민 청년의 야심과 파멸을 다룬, ‘1830년의 연대기’로 불리는 스탕달의 <적과 흑>의 제목이 군인의 적색 옷과 성직자의 흑색 옷에서 따왔듯이 당시의 평민에게는 군대와 성직이 그나마 열려있는 출세길이었다.

    왕족 귀족, 군인, 성직자가 사회를 지배하는 나라는 현재에도 일부 후진국에서 찾아볼 수 있다. 하지만 자본주의가 발달하고 문명화된 선진국 중에서는 찾아보기 힘들다.

 

    현대자본주의 사회에서 신분제도는 폐지됐지만 또 다른 형태의 신분과 계급은 엄연히 존재한다. 보통 금수저, 흑수저라고도 부르는 그것으로 거칠게 나눠보면 엘리트와 서민대중으로 나뉘고 엘리트는 다시 지력(知力)으로 무장한 지식엘리트와 금력(金力)으로 무장한 자본엘리트로 나눌 수 있겠다.

    여기에 덧붙이자면 극소수지만 매력(魅力)으로 무장한 신흥엘리트를 덧붙일 수 있는데 연예계나 스포츠계의 슈퍼스타들이 이들이다. 같은 반이라도 잘 사는 놈(金力), 공부 잘하는 놈(知力), 잘 생겼거나 운동 잘하는 놈(魅力)이 인기가 많다.

 

    아직 어리고 풋풋한 학생한테는 이 셋이 앞서거니 뒤서거니지만 세상에서의 첫째, 으뜸은 금력의 자본엘리트다. 엘리트들이 최종적으로 추구하는 목표이기도 하고 모든 거래수단, 지속가능한 확대재생산의 수단이기 때문이다. 영화 <아일랜드>에서 거부와 스포츠, 연예계 스타들이 자신의 생명연장을 위해 클론을 주문해 만드는 것도 결국은 돈이다.

    하지만 나무수저, 흑수저들은 돈이 없다. 귀족들이 자기 마차에 짐을 가득 싣고 온 유럽을 그랜드투어할 때 당시 대다수의 농민들은 자기가 태어난 곳에서 죽을 때까지 살면서 입에 풀칠하기도 빠듯했다. 여행으로 견문을 넓히고 교육으로 식견(지식)을 높이고 사교로서 교양을 쌓는 것은 평민, 농민들에겐 딴 세상 이야기다. 이 모든 것이 돈이 있어야 가능하다.

 

    일본 전국시대(戰國時代)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난리 통에 가신 몇몇만 데리고 급히 귀향하다가 산길에서 농민 폭도를 맞닥뜨린다. (☞ ≪대망≫ 4권 리뷰) 멍석깃발과 피 묻은 낫과 도끼를 앞세운 폭도를 만난 절체절명의 위기에서 이에야스는 폭도의 우두머리에게 농민, 백성을 고통으로부터 구제하려는 무사의 도를 설파하며 난이 평정되면 자신을 찾아오라며 황금과 손수 쓴 증서를 내린다.

    폭도는 살기등등하다가 어리둥절하여 고분고분해지고 급기야 속으로 울먹울먹, 감동을 먹는다. 도망치거나 저항하거나 벌벌 떨 줄 알았는데 떡 하니 버티고 앉아 세상이 어지러울 동안 경거망동하지 말고 동료 농민들을 보호하며 치안에 힘쓰라고 격려하니 어리둥절할 밖에!

    소출의 7할이 넘는 세금을 내며 항상 무사계급에게 무시 받고 짓밟혀온 그들이 최초로 자신들의 하소연에 귀 기울여주는 무사, 처음으로 자신들을 인간으로 대접해주는 영주를 만났으니 감동할 밖에!

    “훌륭하신 분을 죽여 그보다 못한 사람이 천하를 잡게 되면, 농민들은 또다시 평생 울 수밖에 없지요.” - 결국 그들은 이에야스의 부탁을 받고 길 안내를 하는 것도 모자라 다른 무리들까지 불러 모아 이에야스를 목적지까지 무사히 경호하게 한다.

 

    이에야스는 백성을 존중하고 사랑하는 마음에서 한 행동이 아니라 단순히 위기에서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임기응변으로 기지를 발휘한 것뿐이었다. 그래서 이에야스는 그들의 순진한 감격에 양심이 찔린다. 그래서 이에야스는 더욱 백성의 소리에 귀 기울이고 그들을 더 존중하고 더 사랑하게 된다. 처음 동기야 어찌됐든 농민들은 이에야스를 살리고 이에야스는 농민들을 살린 것이다.

    황금과 증서도 재밌다. 이에야스는 처음 상을 내린다고 하면서 광포한 폭도 속에서 우선 계산과 이성을 끌어내려는 시도를 한 후 황금과 증서를 그 상으로서 제시한다. 황금이 계산이고 증서가 이성인 셈!

 

    돈 싫어하는 사람 없다. 피를 보고 흥분한 군중에게 돈을 제시함으로서 급한 대로 그들의 광란을 현실적 이기심으로 살짝 방향을 튼, 혹은 브레이크를 건 것이다. 멍석깃발과 피 묻은 낫과 도끼 앞에서 붓과 종이로 증서를 써내려가는 장면은 폭도들의 눈에도 일반 독자의 눈에도 기이하게 보이긴 마찬가지다!

    일자무식의 농민들이 글자를 알 리는 없다. 그들에겐 글자도 무사계급도 열등감인 동시에 경외의 대상이다. 아마도 그 증서를 일생 최대의 훈장이나 대대로 전해줄 가문의 가보처럼 여길 것이다. 이로서 광란이 순식간에 조용해지고 난폭한 폭도는 온순한 양이 되어버렸다.

 

    프랑스 대혁명에서 대략 200년 전 일본에서 있었던 일로 감동까지 있는 해피엔딩의 알흠다운 이야기지만 현실에선 드물 것이다. 본래 순박한 농민이 유민이 되어 잠시 폭도가 된 경우겠지만 흉포한 도적떼라면 황금을 모조리 빼앗고 죽였을 것이다. 전쟁 중에는 부하가 장수의 목을 갖고 가 상금과 벼슬을 얻는 배반도 다반사였다.

    어쨌든 정사인지 야사인지 작가의 순수한 창작인지는 알 수 없지만 많은 것을 시사하는 재밌는 이야기다. 확실히 사람은 돈, 유불리에 가장 빠르고 확실하게 반응한다. 가롯 유다부터 이완용을 비롯한 친일파, 밀정들 그리고 혁명파에 가까운 중도였다가 왕에게 매수되어 왕당파가 된 미라보(백작)까지 역사에서는 돈에 팔린 배반자, 변절자들이 무수히 등장한다.

    맹자는 하필왈리(何必曰利, 왜 하필이면 이익을 말하는가)라 하였지만 돈을 떠나서, 돈을 무시하고 이 세상을 살아갈 수도, 설명할 수도 없다.

 

    인간은 무엇에 근거하여 판단하고 행동하는가? 내 생각에 그것은 첫째 유불리, 둘째 호불호, 셋째 정의(옳고 그름)다. 유불리는 주로 금력으로 대표되는 손에 잡히는 세속적 가치, 호불호는 매력으로 대표되는 개인의 취향과 스타일, 정의는 지력으로 대표되는 사상이나 철학과 관련이 깊을 것이다.

    사람마다 조금씩 달라서 누구는 유불리에, 누구는 호불호에, 누구는 정의에 유독 민감하다. 보통 계산에 밝은 똑똑이들은 유불리에, 그렇지 않은 범인(凡人)들은 호불호에 민감하고 정의에 민감한 이들은 그리 많지 않은 느낌이다. 사람의 성격과 취향을 파악한 후 소인배는 유불리로 설득하고 대인배는 명분과 옳고 그름으로 설득하면 성공확률이 높다.

 

인간의 생각과 행동을 결정짓는 세 가지 판단기준 (내 생각임)

 

    정의에 민감하더라도 그 정의가 항상 맞다는 보장은 없다. 정의가 정치(이데올로기)와 얽힌다면 왜곡과 고집은 더욱 강화된다. 보통은 옳다고 여기는 것은 예뻐 보이고, 자기에게 유리하다 싶으면 멋지고 옳다고 여기는 것이 보통 사람의 사고방식이다. 이 세 카테고리를 분리하여 생각하는 이, 내 마음에 들지 않아도 내게 유리한 것, 내게 불리해도 옳은 것은 옳은 것을 가려내는 이는 적다.

    정의에 대한 생각이 옳고 유불리에 대한 셈이 정확하고 개인적 취향이 도덕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면 이 세 동그라미의 교집합은 크면 클수록 좋다. 항상 내 마음에 들고 내게 유리한 것이 어김없는 정의라면, 이 세 동그라미가 완벽히 일치하여 하나의 동그라미를 그린다면, 가히 성인(聖人)이나 군자(君子)라고도 불릴 만하다.

 

    세상에는 범인은 많고 흔해도 성인군자는 적고 귀하다. 어느 사회고 평민은 다수고 엘리트는 소수다. 식견 있는 평민은 적고 식견 있는 엘리트라도 정의와 민중(평민) 편에 서는 엘리트는 적다. 하류인생에서 자수성가한 입지전적 인물이라도 기득권 엘리트에 편입되면 초심을 잊고 민중을 배반한다. 배반치 않고 그 속에서 외롭게 고군분투하더라도 민중은 알아주지 않고 도리어 그를 배반하다.

    어쩌다 정의로운 엘리트 지도자와 현명한 민중이 만나 위대한 역사를 만들기도 하지만 그 시기는 오래가지 않는다. 때로는 민중이 그를, 그가 민중을 배반한다. 다시금 엘리트 기득권 세력의 끈질긴 반격에 민중은 다시 고통의 질곡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민중을 대변한 엘리트 지도자는 대개 비참한 최후를 맞이하곤 했다.

 

    소수 엘리트와 다수 민중의 구조는 진리라 할 만큼 불변이다. 민중 내부의 다양한 계층간 갈등, 엘리트 내부의 세력집단간의 경쟁과 갈등도 상수다. 어떻게 할 것인가?

    전체 대중의 수준, 식견을 높여야 한다. 아직도 경제적 불평등, 교육의 불평등에 따라 한계는 있지만 기회는 옛날보다 많이 열려있다. 신문, 잡지에서 TV, 방송과 PC, 핸드폰, 인터넷, 유튜브를 거쳐 이제 AI가 얘기되고 있다. 아직 무엇을 보여주고 들려주는지는 엘리트 기득권의 손에 달려있지만 통로는 열려있는 셈이다.

 

    명심할 것은 정보를 가려내어 올바른 길로 가는 것이다. 양보다 질을 추구하여 악화가 양화를 구축하지 않도록 해야 한다. 세상에 의인이 귀하듯이 온라인 세상에 뭔가 배우고 깨우칠 만한 정확하고 훌륭한 정보는 귀하다. 오히려 쓰레기 정보, 왜곡되고 편향된 정보들이 넘쳐난다.

    바른 미디어, 텍스트를 가려내라. 소수 특권층이 아닌 전체 시민의 이익을 위해 봉사하는 양심적이면서도 수준 높은 사이트에 접속하라. 그리하여 ...

 

    평민이라면 높은 식견의 엘리트를 지향하라! 엘리트라면 평민과 함께 하는 애민정신을 잃지 마라! 평민이든 엘리트든 빈부귀천을 뛰어넘어 순박한 성품과 고결한 정신의 소유자가 되자!

 

  결투에 열광하는 행위를 슬기로운 법의 힘으로 진압해야 합니다. 분노에 찬 단 한 번의 행위로써 남의 생명을 앗아갈 권리가 어디 있겠습니까? - 134p

 

    이미 150년 전인 루이 13세 치세에 결투는 금지되었지만 당시까지도 공공연하게 벌어지고 있었고 갈등이 깊었던 국회의원 간에도 벌어졌다. 전쟁은 정치의 최대치, 정치는 전쟁의 최소치란 말처럼 정치가 격해지면 죽고 죽이는 싸움이 된다. 혁명의 시대, 정치적 격변기에는 더할 것이다.

    세상에 가장 재밌는 것이 불구경, 쌈구경이듯이 결투 전후로 사람들의 이목이 집중된다. 이러쿵저러쿵 편을 갈라 열광한다. 사자가 이긴다 호랑이가 이긴다 어린 시절 티격태격하였고(숲에서는 호랑이, 초원에서는 사자가 이기고 개인전은 호랑이, 단체전은 사자가 이긴다) 지금도 일론 머스크와 마크 저커버그가 맞짱을 뜰 수도 있다는 소문에 대중은 관심집중이다.

 

    인간의 판단과 행동에 영향을 미치는 것은 위의 유불리, 호불호, 정의 외에 호기심을 추가할 수 있을 것이다. 관련된 키워드로는 재미, 승부, 새로움, 관종, 드라마, 게임, 도박, 호승심, 기분 등으로 호모 루덴스(유희적 인간)를 구성하는 것들이다.

    자신에게 불리하고 옳다고 생각지 않아도 단지 궁금해서, 재미를 위해, 권태에서 벗어나기 위해 일단 저지르고 보는 게 인간이다. 판도라의 상자를 여는 힘, 불탄 폐허에서 전쟁놀이를 하는 힘이다. 어린아이가 옥상에서 병아리를 떨어뜨리는 것은 악해서도, 이익이 있어서도 아니고 단지 호기심과 재미 때문이다. ㅡ 아 두렵다! / ... / 잠자고 있을 때조차 / 호기심은 우리를 들볶으며 뒤흔든다. (보들레르 <여행> 중에서)

 

    미친 놈의 미친 짓이라도 사람들은 저 인간이 대체 어디까지 미친 짓을 할까 궁금해한다. 그래서 사태는 대개 극단까지 치닫는 경우가 많다. 사람들은 잘못된 길이라는 것을 알아채더라도 대개 갈데까지 가본 후에야 돌아선다. 좋은 일이든 나쁜 일이든, 자기 일이든 남의 일이든 끝장을 보고 싶어한다.

    이는 자연의 이치와도 부합된다. 달은 만월까지 찬 후에야 찌그러지고 해는 동지 이후에야 늘어난다. 원래부터 중용, 적당한 것은 극히 힘든 예외적인 경우다. 우주의 대부분은 생명이 살 수 없는 극한의 공간이다.

 

    하여튼 호기심, 궁금증은 인간의 행동을 결정짓는 강력한 제4의 동기다. 그래서 천방지축, 예측불허, 똘끼충만한 케릭터가 의외로 인기가 많다. 반전과 재미가 있기 때문이다. 연인이든, 정치인이든 도대체 어떤 사람인가? 과연 무엇을 하려나? 궁금증을 강하게 유발하는 경우라면 경쟁력이 높다.

 

    정치는 가장 오래되고 치열한 승부의 세계다. 거기에는 스포츠, 게임, 도박, 드라마의 재미진 요소가 모두 포함되어 있다. 드라마라면 복수극이 가장 재밌고 장면이라면 추격신이 가장 흥미진진하다. (프랑스) 왕들의 큰 기쁨은 사냥이었고 작은 기쁨은 연극과 오페라였다.

    최근의 한국정치 역시 마찬가지다. 노무현 사냥부터 시작해 박근혜, 이명박, 조국을 거쳐 이재명이 사냥되고 있다. 식견이 높지 않은 보통의 평범한 시민은 정치에 대한 깊은 철학이나 이해 없이 그저 어느 한 편(진영)을 선택해 한쪽에는 무조건적인 지지와 응원, 반대쪽에는 저주와 야유를 보내며 열광할 뿐이다.

    지역 연고의 프로팀이나 슈퍼스타 응원하듯, 일일연속극을 보며 인물들의 희로애락에 감정이입하듯, 일희일비한다. 자신이 이긴 것처럼 짜릿하고 주인공의 천신만고 끝의 해피엔딩에 열광한다. 기분이 좋고 행복하다. 이것은 결국 호르몬이고 중독이다.

 

    지면 기분 나쁘고 불행하다. 그래서 사람들은 어떻게든 이겨먹으려고 한다. 이겨먹으려고 강자는 약자를 공격하고 약자도 자기보다 만만한 약자를 공격한다. 자유, 평등, 우애, 공정, 정의는 물론 철학과 이념까지도 그냥 갖다 붙이는 허울이다.

    이렇게 힘의 논리, 돈의 논리만이 지배하는 세상은 천박하다. 힘의 논리 앞에 세상은 야만과 폭력이 지배하고 돈의 논리 앞에 세상은 낭만이 증발하여 삭막해졌다. 연인 사이라도 손편지와 종이학은 더 이상 찾아볼 수 없다.

 

    어떻게 할 것인가? 연민을 갖고 약자에게 공감해야 한다. 이 편이냐 저 편이냐는 진영에 매몰되지 말아야 한다. 작은 싸움에 아등바등 이기려 말고 인류지성과 문명의 승리를 위한 큰 싸움에 승부를 걸어야 한다. 선수가 아닌 리그를 흥행시키고 시스템을 발전시키는 운영진의 위치로 한 단계 올라서야 한다. 1차원에서 전개되는 싸움을 2차원, 3차원에서 내려다보는 안목이 필요하다.

    하지만 평범한 이들에게 이 같은 고담준론은 다 필요 없다. 현실적으로 가장 중요한 것은 의도하던 의도치 않던 처음에 어떤 길을 만나 어디로 들어서냐다. 처음 마음을 준 프로팀을 대개 평생 응원하듯이 첫 생각, 첫 선택, 첫 투표가 중요하다.

 

    세상일도 정치도 처음 '좋아할 결심, 미워할 결심'을 하면 바꾸기 힘들고 더욱 그 방향으로 가속화하고 강화된다. 그 편이 스트레스를 덜 받고, 일관성을 유지하며 좋아하고 미워할 때 나오는 호르몬을 공급받기 수월하기 때문이다.  나를 포함한 그 누구도 호르몬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호르몬을 극복하는 이는 성인군자만큼이나 찾기 힘들다.

 

  낭시의 불행한 참사가 오직 끊임없는 오해와 과장된 의심으로 대립하고 불타오르고 악화된 열정과 의견의 치명적인 결과일 뿐이라고 생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 283p

 

    1790년 8월 낭시에 주둔중인 세 개 연대(그 중 하나는 스위스 용병부대)에서 군사반란이 일어난다. 군대에도 혁명의 바람이 불어 평민 출신의 병사들이 의결권을 가진 위원회를 구성하고 귀족 출신의 장교들과 대립한 것이다. 결국 이들은 국민방위군과 근처에 주둔중인 총기병의 일부(평민 출신)와 함께 반란을 일으키지만 부이예 장군에 의해 진압되며 많은 희생을 치르게 된다.

    혁명을 계기로 프랑스 내부의 갈등은 전방위적으로 확산, 심화되었다. 구시대의 왕당파와 신시대의 혁명파, 귀족과 평민, 성직자들과 계몽사상가, 가톨릭과 개신교, 보수우파와 진보좌파 등이 갈등하였는데 군대내부도 예외는 아니었다. 이 모든 갈등은 혁명의 바람을 타고 번졌지만 아주 오랫동안 내재된 구조화된 갈등이었다.

 

    이것은 정치 이전에 신뢰의 문제, 문화의 문제다. 평민은 귀족을 부러워하면서도 시기한다. 삐딱하게 반항적이거나 체제에 순종적이라도 귀족, 엘리트를 진심으로 믿고 존경하지 않는다. 귀족, 엘리트는 일상화된 갑질에 오만하여 평민이라면 사납고 게으르고 할 일 없는 아랫것들 취급한다. 선입견에 안 좋은 경험이 한두번만 겹치면 평민이라면 진저리를 치며 혀를 내두른다. 간혹 평민에게 친절하더라도 민중을 섬기며 충성하지는 않는다.

    이 둘은 다른 문화권에서 살고 있는 다른 종이다. ‘끊임없는 오해와 과장된 의심’은 바로 여기서 비롯된 것으로 이 불화는 뭐라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미묘하고 애매한 성격의 것이다.

    서로 사이가 좋고 우호적인 분위기면 웬만한 문제는 가볍게 해결된다. 적대적 분위기면 가벼운 문제도 크게 번진다. 실재로 병사의 개가 장교의 개를 물은 사건, 장교의 가혹하고 부당한 체벌 등 평소에는 원만하게 절차에 따라 해결될 문제들, 우연찮은 문제들이 불에 기름 붓듯 서로 상승작용을 일으켜 갈등을 극대화했다.

 

    낭시 군사반란을 단 몇 문장으로 설명할 수 없지만 큰 줄기는 이것이다. 혁명의 바람을 타고 의결권을 주장하는 평민 병사와 귀족 장교간의 케케묵은 갈등에 우연과 필연의 사건이 겹치고 ‘끊임없는 오해와 과장된 의심’이 서로 간에 상승작용을 일으키면서 파국으로 치달은 참사였다.

 

  증오의 눈에는 미운 것만 보이고 본 것만 현실이라고 생각합니다. (ㆍㆍㆍ) 입법가는 판사와 다른 방식으로 상황을 볼 수 있습니다. 그는 벌을 그 결과와 비교할 수 있습니다. - 304p

 

    낭시 군사반란은 진압되었지만 많은 후유증과 과제를 남긴다. 군대뿐만이 아니라 지방정부와 민간인들까지 얽힌 복잡한 갈등 상황은 그대로였다. 많은 사상자를 뒤로 하고 재판을 비롯한 뒷수습이 남았다.

    이 상황에서 국회의 강경보수파는 엄벌을 주장하고 온건진보파는 화합책을 제시한다. 결국 모든 재판을 중단, 폐지하고 감옥에 갇힌 이들을 방면하여 자유를 회복하는 것으로 결정난다. 이는 진보가 주도하는 혁명정국이었기 때문에 가능했던 일로 만약 왕정이었으면 진압도 더 단호했고 처벌도 훨씬 가혹했을 것이다.

    낭시 반란은 정권찬탈이라는 명확한 목적 하에 군 수뇌부에 의해 벌어진 쿠데타는 아니었고 혁명의 바람을 타고 평민 사병들의 불만이 표출된 성격의 사건이었기 때문에 이 선에서 마무리된 것이다. 하지만 군조직의 특수성을 감안하면 사병들이 의결권을 가지는 위원회를 구성한다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확실히 무리한 요구다. 민주 군대는 있어도 군대 안의 민주주의는 없든지 한계가 있다.

 

    평민출신의 병사들이었고 나름대로 이유가 있었다 하더라도 잘못은 잘못이다. 재판을 통해 죄의 경중을 따져 그에 합당한 벌을 주는 것이 원칙상 맞다. 하지만 국회는 후유증을 최소화하고 갈등을 조기에 수습하고자 용서와 화합으로 정리한다. 이는 혁명의 순방향에 부합하는 결정이었다.

    이렇듯 당시 정치의 주도권은 국회에 있었다. 이미 왕의 승인권은 유명무실해져서 국회가 결정, 입법하면 왕도 군대도 법원도 따르는 식이었다. 이는 삼권분립이 정립되면서 정치가 선진화되는 과정이기도 하다.

 

    정치(적 결정)는 법을 뛰어넘는다. 정치는 법의 아버지요 법은 정치의 아들이다. 그리고 그 정치가 가장 활발히 작동되는 곳이 국회다. 입법부인 국회가 법을 만들고 결정하면 행정부는 그에 따라 정책을 시행하고 사법부는 가장 마지막에 위치하여 이미 이루어진 결과를 법에 준하여 해석하고 판단한다. 굳이 서열을 따지자면 입법, 행정, 사법 순이다.

    2023년 9월 작금의 대한민국은 행정부, 그것도 일개 부처인 검찰이 입법과 사법은 물론 사회 전 분야를 압도하고 있다. 모두 검사출신의 윤 대통령 덕분이다. 검찰독재, 검사 전성시대로 삼권분립이 훼손되어 모두다 겁을 먹고 설설 기고 있다. 굴곡의 현대사를 거치며 어렵게 성취해낸 한국 민주주의의 위기다.

 

    오늘(2023년 9월 27일)은 검찰이 청구한 이재명 민주당 대표의 구속영장이 법원에 의해 기각되었다. ‘불구속 수사의 원칙을 배제할 정도로 구속의 사유와 필요성이 있다고 보기는 어렵다.’는 유창훈 영장전담 부장판사의 결정문을 보자면 이는 죄의 유무를 떠나 상식과 원칙에 부합하는 지극히 올바른 판단이다. 아직까진 사법부가 제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이 그나마 위안이다.

    보통은 민주주의의 최후의 보루는 사법부라고 한다. 근데 사법부가 무너지면...? 결국은 고 노무현 대통령 말씀처럼 ‘민주주의의 최후의 보루는 깨어있는 시민의 조직된 힘이다.’ 나라도 민주주의도 누가 대신 지켜주지 않는다. 세상에 공짜는 없다. 최종 책임자도, 수혜자도 결국 주권자인 시민일 수밖에 없다.

 

    세상에 선한 독재자, 전지전능한 통치자는 없다. 현실정치에서 모든 문제를 일거에 해결하는 메시아는 없다. 민주주의는 피곤한 것이다. 손도 많이 가고 스트레스도 많다. 완전하지도, 튼튼하지도 않다. 언제고 후퇴하고 망가질 수 있는 허약한 제도다.

    정치는 이상을 좇아야 하지만 현실정치에서 절대선은 없다. 단지 견제와 균형, 대화와 타협의 원칙하에 권력 간의 가장 최적의 균형점, 황금비율만이 있을 뿐이다. 그리고 그것은 내외부의 환경변화에 따라 부단히 조정되는 동적균형을 추구해야 한다.

 

    시민대중이 언제나 옳은 것은 아니다. 오판하거나 잠들어 있을 때도 있다. 하지만 옳다는 희망과 믿음을 갖고 자체 역량을 키워나가야 한다. 도전과 응전을 거치며 오류를 수정하면서 계속 싸워나가야 한다. 이것 외에 다른 방도는 없다.

 

    - 4권 리뷰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