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읽기 0039 : 시편 131편~150편
131편 1절
여호와여, 내 마음은 허황되지 않으며, 나의 눈은 교만하지 않습니다. 나는 커다란 일들에 관심을 두지 않으며, 너무 놀라운 일들에도 관심을 두지 않습니다.
2절
그 대신 나는 잠잠하고 조용히 있습니다. 내 영혼이 어머니와 함께 있는 젖 뗀 아이와 같습니다.
‘예배드리러 올라가는 자의 노래’로 디윗의 시다.
허황된 일, 사람을 놀라게 하고 두려움에 떨게 하는 커다란 일, 스스로 미치지 못하는 기이한 일에 휘둘리거나 한 눈 팔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 안에서 흔들리지 않는 평온, 중심을 말하고 있다.
세속적으로는 호사가들이 입에 담기 좋아하는 자잘자잘한 험담과 괴담이 될 수도 있고 경천동지할 사태, 현상, 이적이 될 수도 있다. 실로 하나님의 품 안에서 그 분의 말씀에 의지한다면 옆에서 벼락이 떨어져도 흔들리지 않고, 당황하지 않고 경거망동하지 않는 중심을 지킬 수 있으리라.
방금 어머니에게서 젖을 떼고 새근새근 잠을 자는 아이의 영혼은 얼마나 평안한가! 얼마나 순수한가! 피할 수 없는 거칠고 비루한 세상의 풍파 속을 해쳐온 성인(成人)이라면 가히 성인(聖人)의 경지다.
순수한 아기는 자연스럽다. 현명한 노인도 자연스럽다. 자연스러운 것을 굳이 칭찬할 일은 아니지만 순수한 아기는 사랑스럽고 현명한 노인은 존경받는다. 하지만 모든 아기는 순수하지만 모든 노인이 현명한 건 아니다. 복잡한 인생행로에서 길을 잘못 들고 그르게 배운다면 우매한 노인, 표독하고 노욕에 찌든 보기 흉한 노인이 될 수도 있다.
가끔 현명한 아이, 존경할 만한 청년을 볼 때도 있다. 애늙은이처럼 조숙하고 되바라지고 영악해서 부자연스러운 아이도 간혹 있지만 자제력, 겸손함, 사고력 등 ‘고매한 인품’이라고 불러도 손색없는 아이, 감탄과 존경이 절로 나는 기품 있는 청년을 볼 때가 있다. 욥의 지인 중에서도 가장 나이어린 엘리후가 가장 지혜롭고 신실하지 않았던가. 찬물은 장유유서(長幼有序)지만 지혜, 인품, 신앙심은 어른 아이 순서가 없다.
가끔 순수한 노인, 사랑스런 노인을 볼 때도 있다. 철부지 아이처럼 버릇없고 막무가내 떼쓰는 한심한 어른도 간혹 있지만 부끄러움, 순수함, 쾌활함, 호기심 등 ‘순수한 영혼’이라고 불러도 손색없는 어른, 경이롭고 사랑스런 노인을 볼 때가 있다. 큰 물질보다 작은 기쁨에서 행복을 찾고, 체면에 구애받지 않고 아이들과 뒹굴며, 간혹 예술적 감흥에 상기되어 촉촉하게 눈망울이 커지고, 작은 칭찬에도 수줍은 미소를 보이며, 작은 실수라도 할라치면 얼굴이 빨갛게 달아오르는 노인을 볼 때면 나도 모르게 사랑스러워 입가에 미소가 번진다. 세상과 인생이 아름다워 보인다.
모두 어려운 일이다. 어린이는 현명함을 얻기 힘들고 늙은이는 순수함을 지키기 힘들다. 그래서 ‘순수한 아이’, ‘현명한 노인’과 달리 마땅히 칭송받을 일이다. 그럼 ‘어린 현자’, ‘늙은 순수’ 중 어느 것이 더 훌륭하고 칭송받을 일인가. 당연히 ‘늙은 순수’다. 이것이 더 어렵다. 왜 어려운가. 거칠고 비루한 세상 탓도 있지만 생리적으로 늙어가기 때문이다.
깨끗한 것은 더러워지고 새 것은 낡아지고 난 것은 늙어간다. 이 모든 것은 거스를 수 없는 운명이다. 세월을 이길 수 있는 것은 없다. 육체뿐만 아니라 정신 역시 마찬가지다. 열정, 상상력, 호기심, 감수성 등 정신적 생명력이 모두 쇠퇴한다. 그래서 ‘늙은 순수’는 성인(聖人)이라고 불러도 부족함이 없다.
부정적인 의미로서 그 반대편엔 무엇이 있나. 순수하지 못한 아이, 현명치 못한 노인이 있다. 이 중 어느 것이 더 나쁜 것이고 경계해야 할 일일까. 당연히 순수하지 못한 아이다. 영악한 청년이다. 흉한 늙은이는 눈살이 찌푸려지지만 악한 어린이는 모골이 송연해지고 소름이 끼치기도 한다. 왜 그런가. 같은 이치다. 현명, 곧 지력, 사고력, 절제력, 분별력, 판단력 역시 세월에 따라 쇠퇴하고 늙어가는 것이 자연스런 현상이기 마련이다.
이러한 능력은 죽을 때까지 상승곡선을 그리는 것이 아니라 피크가 있다. 현명치 못한 노인이 칭찬받을 일은 아니나 그리 욕먹을 일도 아니다. 실로 경계할 것은 어두운 영을 가진 아이, 영악하고 교활한 청년이다.
유연하지만 유혹과 시험에 약하다. 강하지만 생명력이 떨어져 딱딱하다.
노화에 따른 부정적 현상은 평범한 일반인들뿐만 아니라 고위 성직자 역시 마찬가지다. 올곧던 사람도 굽어지고 굽은 사람은 더욱 굽어진다. 물론 마더 테레사, 문익환 목사, 함석헌 목사, 강원용 목사, 성철스님, 법정스님 같은 분들도 있다. 이제 모두 고인이 되셨지만 말년까지 고결하고 강직한 인품으로 만인의 존경과 사랑을 받으셨던 종교계의 큰 어른, 원로 분들이시다. 반면 존경받던 김수환 추기경은 말년에 총기가 흐려진 측면이 있고 고령인 현 정진석 추기경 역시 마찬가지다. 이밖에 순복음 조용기 목사, 통일교 문선명 총재, 조계종 자승 총무원장 등 돈과 이권에 관련된 크고 작은 구설수와 공의를 외면한다는 비판을 받는 종교지도자들이 있다.
어제(101211) 경향신문을 보니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이 정진석 추기경의 4대강 옹호발언을 자의적 해석이며 궤변이라고 비판성명을 냈다. 궤변! 속된 말로 헛소리 말라는 거다. 위계질서가 엄격하고 순명을 강조하는 천주교에서는 초유의 일이다. 교계의 최고어른인 추기경 입장에서는 이보다 더한 모욕이 없다.
추기경 말씀은 대충 ‘(천주교 최고의결기구인) 주교회의 입장은 4대강 반대가 아닌 염려로 일단 4대강 공사는 토목전문가에게 맡겨두고 결과가 나올 때까지 두고 보자’란 얘기인데 사제단이 이에 대해 조목조목 비판을 한 것이다. 이 중 종교적인 것만 언급하자면 첫째 4대강 공사가 생명과 평화라는 천주교 및 모든 종교의 보편가치에 위배된다는 것이다. 둘째 종교의 예언기능을 무시한 발언이란 것이다.
모든 것을 두고 보고 사태의 추이를 보아가며 의견과 행동을 정한다면 종교의 존재의미가 없다. 하나님의 뜻과 세계의 이치를 궁구하는 성직자뿐 아니라 지식인이라면 일반이 못 듣는 것을 미리 듣고 못 보는 것을 미리 볼 수 있어야 한다. 그것의 정오(正誤)를 통해 실력과 현명함과 영성을 가늠할 수 있다. 잠자코 결과를 기다리자는 것은 거짓 예언이다. 훗날의 재앙을 내다보고 당장의 회개를 촉구하여야 한다. 곧 빛과 소금의 역할이다. 4대강 사업의 폐해와 부작용을 예상치 못하는 전문가는 사이비 전문가다. 하나님의 섭리와 뜻을 안다면 쉽게 예언할 수 있는 것을 알지 못하는 성직자라면 어두운 성직자다.
조계종 총무원장 자승스님 역시 마찬가지다. 이명박 정권의 불교배척과 탄압에도 불구하고 집권당의 지원을 바라고 안상수 한나라당 대표와 어울리더니 새해예산안에서 템플스테이 예산이 삭감되자 뒤늦게 발끈하며 한나라당 인사들의 사찰 출입을 금지하고 교단차원에서 4대강 반대를 표명한다고 한다. 뭔 영화를 보자고 세속의 흉내를 내는가. 4대강이 얼마주면 지지해주고 안주면 반대할 조건부 사안인가. 이러니 당하고서도 응원을 받지 못한다. 애초에 부처의 뜻을 좇지 않고 돈을 좇았기 때문이다.
모두가 나이가 들어감에 따라 완고해지고 욕심이 늘어 마음이 어두워지고 영이 흐려졌기 때문이다. 현실에 안주해 변화를 거부하고 가진 것을 지키려고만 한다. 언제까지고 한자리 차지하여 좋은 옷만 입고 좋은 것만 먹고 좋은 차만 타며 대접받고 안락을 누리려고만 한다. 중도가 보수가 되고 보수는 그것을 넘어 수구가 되어간다. 성경을 앞에 두고 거룩함을 추구하기보다 계산기를 두드리며 유불리를 셈하기 바쁘다.
한번은 고인이 된 노무현 대통령의 자결을 두고 전두환씨가 “전직대통령으로서 꿋꿋하게 대응했으면 하는 아쉬움이 든다”라고 말했던 적이 있다. 심한 모욕감과 욕지기가 났었다. 그렇다! 1212 쿠데타 군바리이자 학살자이자 독재자였던 전두환씨는 노무현 대통령처럼 그깟(!) 일로 자결할 인물이 아니다. 수백억의 미납금을 진채 단돈 29만원으로도 골프를 즐겨 치며 꿋꿋하고 악착같이 살아가는 대인배가 보기엔 안타깝고 이해되지 않을 일이다.
노무현 대통령이 과연 심약하고 유약한 인물이었을까? 아니다! 절대 아니다! 그의 언행, 정치역정을 보면 강직하고 용기 있는 쾌남아, 순수하고 순결한 지사형에 가깝다. 노 대통령이 자결한 것은 죽음보다 더한 고통 때문이기도 하였지만 그가 본래 순수한 인물이었기 때문이다. 그의 죽음의 본질은 비겁한 도망이나 자포자기가 아니다. 희생이었다. ‘늙은 악한’이 ‘늙은 순수’를 욕보였으니 슬프고 화나는 일이다.
실로 긴 세월을 보내고도 깨끗하다면, 순결과 순수를 지켜낼 수만 있다면 이것보다 위대한 것은 없다. 우리가 ‘거듭 난다’는 것 역시 본래 갖고 있던 순결한 영혼을 회복하는 일일 것이다.
정리하자. 내 멋대로 나쁜 것부터 순서대로 나열해보자. 『 악한 아이, 교활한 청년〈 우매하고 노욕에 찌든 노인〈 순수한 아이〈 현명한 노인〈 어린 현자〈 늙은 순수 』다. 주로 흉하지 않은 외모와 육체적 건강을 유지하며 나이를 먹는 것을 ‘곱게 늙는다’고 부른다. 그렇다면 정신적, 영적 순수함을 잃지 않고 나이를 먹는 것이야말로 ‘아름답게 늙는다’고 부를 수 있지 않을까!
따라서 어린 영혼을 악에 물들게 하여 타락시키는 것, 학대하는 것이 가장 큰 죄다. 무엇보다 올바른 보육, 교육이 중요하다.
제가 잠들 때 하나님의 얼굴을 보여 주시옵고 제가 깰 때 저와 눈 맞춰 주시옵소서. 제가 늙고 죽을 때까지 이 맑고 순수한 어린 영혼, 지킬 수 있도록 도와주시옵소서.
141편 4절
나의 마음이 악한 것에 이끌려, 악을 행하는 자들과 함께 악한 일들에 참여하지 않게 해 주소서. 내가 그들과 함께 앉아 음식을 먹지 않겠습니다.
5절
의로운 자가 나를 때리는 것은 은혜로운 일입니다. 그가 나를 꾸짖게 해 주소서. 그것은 내 머리 위에 붓는 향유입니다. 내가 그것을 싫어하지 않을 것입니다.
역시 다윗의 시다. 이상하게 유독 다윗의 시에 눈길이 간다. 뜻도 깊을뿐더러 아름다운 표현, 정제된 문장 등 다윗 특유의 향기가 나는 느낌이다.
141편 4절은 1편 1절의 말씀 곧 “행복한 사람은 나쁜 사람들의 꼬임에 따라가지 않는 사람입니다. 행복한 사람은 죄인들이 가는 길에 함께 서지 않으며, 빈정대는 사람들과 함께 자리에 앉지 않는 사람입니다”가 연상된다.
“나의 마음이 악한 것에 이끌려” : 악한 세력에겐 이끄는 힘, 끌어당기는 힘, 물들이는 힘이 있다. 섣불리 가까이하거나 건방지게 덤벼들어서는 안 된다. 치기어린 공명심에 무릎 꿇리려 하거나, 어줍지 않은 오지랖에 설득하려 하는 것은 위험하다. 멀리하여 상종하지 않는 것이 상책이다. “저들과 같이 길을 다니지 말고 저들이 있는 곳에 발도 내딛지 마라.” 뒤이은 잠언 1장 15절 말씀이다.
근묵자흑(近墨者黑) 근주자적(近朱者赤), 교학상장(敎學相長)이다. 미워하면서도 닮고 욕하면서도 동화된다. “호랑이를 잡으려면 호랑이 굴로 들어가야 된다.”지만 대개 먹이가 되거나 심복이 된다. 호랑이를 잡아먹더라도 또 다른 호랑이가 되어 군림하려 든다.
일찍이 군사독재정권의 후예인 민정당과의 합당을 위해 민주세력을 배반하고 떠나간 김영삼 전 대통령이 했던 속담이 이것이다. 외견상 호랑이(전두환, 노태우)를 잡아먹고 새로운 호랑이(대통령)가 되었지만 내용상으론 결국 호랑이(수구기득권세력)의 또 다른 심복(대리인)이 되었던 셈이다. 지역주의, 기회주의, 좌절감... 그 폐해가 지금에까지 이루 말할 수 없다.
이 땅의 호랑이(수구기득권)는 생각보다 힘이 세다. 포수라면 때에 따라 위험을 감수하고라도 굴속으로 들어가겠지만 이 땅의 포수(민주개혁세력)들은 생각보다 힘이 약하다. 변변한 총이 없다. 우리에겐 호기어린 포수의 승부심보다 물려 죽는 처녀, 같이 죽는 논개의 희생심이 더 필요하다. 너무 비관적이고 나약한가? 멀게는 김영삼, 가까이는 노무현, 요즘 세상 돌아가는 모습이 생생히 증언하고 있지 않은가. 이것은 냉정하고도 슬픈 현실이다.
하지만 낙담할 일만은 아니다. 희생의 힘은 세다. 정의와 순수의 힘은 세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희생하셨듯이 오직 정의롭고 순수한 자만이 희생할 수 있다. 씨앗이 썩어 싹을 틔우듯 오직 희생만이 부활할 수 있다. 영원할 수 있다.
예수님. 십자가. 고난과 희생.
“내가 그들과 함께 앉아 음식을 먹지 않겠습니다.” : 악과는 아예 상종을 말아야 한다. 부딪치지 말아야 한다. 엮이지 말아야 한다. 음식을 함께 먹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각별한 의미다. 그 음식은 사랑(을 함께 나눈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하지만 이익을 의미하기도 한다.
하나님의 힘은 세다. 하지만 사탄의 힘도 이에 못지않다. 무릇 하나님을 두려워하듯이 악도 두려워해야 한다.
5절 말씀을 보면 다윗은 깊은 신앙뿐 아니라 성숙한 인격의 소유자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바로 비판수용력이다. 이외에 인격의 성숙함의 척도인 겸손함, 자기객관화, 절제력, 역지사지의 능력 또한 모두 뛰어나다.
그는 왕궁에서 사울왕의 경호대장으로서 최고수준의 학습과 훈련을 받았을 뿐 아니라 긴 고난을 통해서도 단련되고 그것을 통해 살아계신 하나님을 체험하고 영감을 얻은 인물이다. 특히 역지사지의 능력이 공감할 수 있는 능력, 선천적 감수성, 심성이라고 봤을 때 그의 아름다운 시들을 통하여 그가 순수하고 진실한 타고난 시인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忠言逆耳利於行 毒藥苦口利於病(충언은 귀에 거슬리나 행하기에 이롭고, 독한 약(좋은 약)은 입에 쓰나 병에 이롭다.) - 司馬遷 <史記> [留侯世家] 中에서
세상에서 가장 쉬운 일은 남에게 충고하는 것.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일은 남의 충고를 듣는 것.
새는 알에서 깨어나려 한다.
알은 곧 세계다.
태어나려고 하는 자는 한 세계를 파괴하지 않으면 안 된다. - 헤르만 헤세 <데미안> 중에서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일은 자기자신을 아는 것. 그보다 더 어려운 일은 스스로 변화하는 것.
남의 고언, 싫은 소리를 고맙고 즐거운 마음으로 듣는다는 것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자신의 약점, 허물을 신랄하게 지적받거나 자신도 미처 깨닫지 못하고 있던 자신의 숨겨진 본모습의 정곡이 찔리면......아프다. 일단 조건반사적으로 불쾌하고 화부터 난다. 속으로는 인정하면서도 일단 부정하고 싶다. 당장 표정관리부터 힘에 부친다.
하지만...개중에는 남의 고언을 겸허히 받아들이는 사람도 있다. 눈빛을 빛내며 귀를 쫑긋 세우는 이가 있다. 스스로의 됨됨이를 잘 알며 즐거이 개선하고 발전하려는 사람이 있다. 하지만......그렇다고 꼭 변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알면서도 변할 수 없는 것이 인간의 평범한 속성이다. 그것은 어쩌면 하나님의 영역이다.(물론 이 변화라는 것은 긍정적인, 발전적인 방향이며 단순한 변신이 아니라 질적 변화, 도약을 의미함이다.)
변화는 어디서 오는가. 변화의 주체는 항상 안(內), 나(我)일 수밖에 없지만 변화의 원천, 변화를 추동하는 힘은 절대적으로 밖(外), 나 아닌 다른 것(非我)에 있다. 변화라는 것 자체도 과거보다 미래, 기존 것이 아닌 새로운 것, 내가 아닌 새로운 나, 안보다는 바깥세상을 지향하고 있다. 병아리와 엄마닭이 내외호응하여 알을 깨고 밖으로 나오는 것이 가장 이상적이고 효율적인 변화의 모양새지만 애초에 세상에 생명으로 던져진 것은 온전히 밖으로부터 주워진 것, 비아의 의지이다.
변화의 바람은 밖에서 불어온다. 폐쇄되고 독립된 세계 안에서의 변화는 과연 가능한가. 과연 바람이 불 수 있을까. 태양이 없다면, 우주가 없다면 과연 지구는 스스로 자전할 수 있을까. 한 세계 안에서의 양적 팽창도 질적 도약으로 변화하려면 외부로부터의 새로운 에너지 혹은 자극이 필요하다.
스스로 변화할 수 있는 것, 무에서 유를 창조할 수 있는 것은 오직 하나님뿐이지 않을까! 그런 의미에서 칼뱅의 구원론, 예정론은 설득력이 있다.(물론 이 예정론은 구원에만 해당한다. 타락, 악행을 맘대로 하고 ‘이것도 예정된 거야’라고 말할 수는 없다. 악당, 악행을 통해 하나님의 뜻을 드러내는 것은 ‘예정’보단 ‘섭리’라는 표현이 어울릴 것이다.)
오직 불새, 상상의 새만이 스스로 알을 깰 수 있는 것일까? 불새가 스스로 알을 깨고 밖으로 나오는 것은 자신만의 의지인가? 아니면 유전자의 형태로 밖으로부터 이미 주워진 능력의 발현인가? 무엇이 나이고 무엇이 내가 아닌가? 무엇이 안이고 무엇이 밖인가? 우리의 순수자유의지의 실체는 무엇인가? 있기는 한 걸까? 그것으로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아직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지는 풀지 못한 의문들이다.
결론은?...
진인사대천명(盡人事待天命)!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
언제, 어디서나, 누구에게나 임재하시는 하나님은 간혹 불신자에게까지 임재하시는 오묘한 섭리를 보이시나 구하는 자에게 먼저 손을 내미시고 만나주신다. 우리의 구함은 필요조건이다. 하나님의 구원은 충분조건이다. 간절히 구함을 구하라. 하지만 우리를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은총이 없이는 우리가 구원받을 길이 없음을 명심하라.
스스로에겐 준엄하게 구하고, 하나님에겐 겸허하게 기도하라.
결국 원죄를 지닌 나약한, 혹은 겸손한 인간이 도달할 수밖에 없는, 다소 평범하지만 유일한 결론이다.
이상 붉은 박스 이하의 내용은 예전 포스팅 <사랑은 변해도 사람은 변하지 않는다.>에서 따온 자기표절이다.
사랑은 변해도 사람은 변하지 않는다. 사람은 변해도 하나님은 변하지 않으신다.
하나님은 선하시며 그 사랑은 영원하시다.
주님. 악인은 형통하고 의인은 고난받고 주님은 침묵하고 계십니다. 사탄은 저희를 유혹하고 주님은 저희를 시험하십니다.
주님. 주님은 저희의 피난처시며 방패이지 않으십니까. 어여 속히 저희에게 얼굴을 보여주소서. 저희를 불쌍히 여기소서. 저희를 도와주소서.
저희가 갓 태어난 아기같이 울어재끼며 졸라대고 애원합니다. 배고픈 아기같이 칭얼댑니다. 저희를 안아주시고 먹여주소서. 저희 영혼이 평안한 잠을 맛볼 수 있도록 하여 주시옵소서. 저희가 주님만을 믿고 의지합니다. 저희를 어머니의 체온으로 감싸주시고 아버지의 팔뚝으로 보호해주소서. 저희가 그 안에서 하나님의 권능과 자비로우심을 찬양하겠습니다. 시간을 가로지르고 공간을 세로지르며 주재하시는 하나님. 저희가 우주에서 우주까지, 영원에서 영원까지 하나님의 은혜를 찬미하겠나이다.
하늘과 땅과 바다의 모든 것들아. 날고 기고 걷는 모든 것들아. 영원히 하나님을 찬양할지어다.
150편 6절
숨을 쉬는 모든 것들이여, 여호와를 찬양하십시오. 여호와를 찬양하십시오!
시편 마지막 편, 마지막 절이다. 시편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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