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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 신앙생활

성경읽기 0037 : 시편 49편~59편

어멍 2010. 11. 27. 00:20
 

    성경읽기 0037 : 시편 49편~59편



49편 8절

사람의 생명 값이 너무도 비싸며, 아무리 많이 내어도 살 수 없습니다.

9절

돈을 많이 낸다고 사람이 영원히 살고, 돈이 많다고 죽지 않는 것은 아닙니다.

 

    인명(人命), 인본주의, 인권의 중요성을 강조한 구절이다.

    아무리 돈이 다인 자본주의 사회라지만 돈으로 살 수 없는 게 둘 있다. 사랑과 목숨이다. 권력도 살 수 있고 명예도 살 수 있고 맘만 먹으면 달나라에도 갈 수 있는 세상이 곧 열리겠지만 이것만은 살 수 없다. 누구는 사랑도 살 수 있다고 주장하지만 그것은 진정한 사랑이 아니니 별개로 하자. 누구는 목숨도 거래될 수 있다고 주장하지만 이것은 흉악한 나쁜 생각이기에 별개로 하자.

    우리의 사랑, 양심, 마음, 신앙 그리고 목숨은 얼마인가. 돈으로 살 수 있는가. 흥정 가능한 것인가. 대제국을 건설한 위대한 알렉산더 대왕은 마지막 유언을 죽은 후 관 앞에 두 개의 구멍을 뚫어 자신의 맨 손을 드러냄으로서 인생은 공수래공수거(空手來空手去)임을 알리고자 하였다던데 우리는 필요이상으로 재물을 쟁겨놓으려 하고 있지는 않은가. 꽃내음보다 돈냄새를 좋아하고 있지는 않은가.


    성경은 재물과 부를 어떻게 바라보고 있는가.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은 낙타가 바늘구멍에 들어가는 것보다 더 어렵다.”[마태 19:24]라는 예수님의 유명한 말씀도 있고 ‘부는 자신의 노력에 화답한 신의 은혜’라는 취지의 구절도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

    재물을 받고 교회가 사람들에게 면죄부(免罪符)를 팔았던 적도 있고, 수도원을 중심으로 금욕주의를 추구하기도 했고, 깨끗함을 내세우며 개혁, 갱신을 주장한 청교도(淸敎徒) 운동이 일어나기도 했다.

    지금은? 프로테스탄트 곧 청교도 정신도 퇴색하고 교회 역시 시류에 영합하여 많이 세속화 되었다. 면죄부까지 대놓고 발행하고 있지는 않지만 많이 자본주의화 되었다. 그래서 나온 개념이 청빈(淸貧)과 대비되는 청부(淸富)다. ‘깨끗한 부(자)’라는 것이다.

    일반인은 물론이고 기독교인들 역시 부와 명예를 바란다. 교회 역시 이에 영합하여 복을 빌어주며 듣고 싶은 말, 기분 좋을 말만 해주고 들어야 할 말, 언짢은 말들은 하기를 꺼린다. 경건함보단 흥미위주의 설교가 인기가 있고 심지어 우스갯소리, 농담, 반복되는 말장난, 과장된 제스처, 노래가 뒤섞인 한 편의 쇼를 보는듯한 느낌이 들 때도 있다.

    세속화와 물신화는 동전의 양면이다. 청부는 그 자체로는 좋은 말이다. 권면할 일이다. 하지만 ‘깨끗한 부’가 ‘부는 깨끗한 것’이라는 데까지 오역되면 안 된다. 부는 복 있는 자가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선물이니 가난한 자는 복 없는 자요 신실하지 않은 자라는 논리로 왜곡되면 안 된다. “부자, 신실한 자, 복 있는 자, 의인, 선한 자 ↔ 빈자, 신실하지 않은 자, 복 없는 자, 죄인, 악한 자” 식으로 단순하게 묶어 둘로 나누어선 안 된다.

    청부는 대놓고 권면할 덕목은 아니다. 악용의 소지가 많기 때문이다. 부도덕한 치부를 감추는 방패로 작용할 소지가 크기 때문이다. 남이 “당신은 참 깨끗하고 도덕적인 부자군요” 칭찬하는 것은 아름다운 일지지만 “내 부는 청부요” 자랑하고 떠벌릴 일은 아니다. 졸부가 사진박고 떠벌리며 과장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우리 사회에 정말 필요한 것은 청빈론(淸貧論)이 아니라 청부론(淸富論)임을 강조하여 적지 않은 파문을 일으켰다. (중략) 우리 속담에 ‘개처럼 벌어 정승처럼 쓰라’라는 말이 있으나, 이제는 ‘정승처럼 벌어 정승처럼’ 써야 한다.” - 이명박 저 <신화는 없다> 292페이지


    “가난하게 살아왔던 이명박 시장은 돈에 대해서 청부론을 말한다. 열심히 땀흘리면서 1년 내내 휴가 하루 내지 못해가며 밤낮으로 뛰기만 하며 돈을 벌어 모은 재산을 청부라 했다. 청부자는 국가와 사회로부터 존경을 받아야 한다는 것이다. 요새 노무현 대통령처럼 부자를 죄악시하고 세금폭탄을 퍼붓게 되면 나라는 역동성을 잃게 된다.” - 이의관 저 <왜 이명박인가> 243페이지

 

    교회장로이자 역대 대통령 후보 중 가장 큰 재산가였던 이명박 대통령은 청부론을 유독 강조한다. <신화는 없다>가 그가 직접 쓴 저작인지는 논외로 하고 부는 하나님이 주신 축복이요 자신은 축복받은 자라는 거다. 자신의 재산은 정승처럼 벌은 것, 휴가도 못하고 밤낮으로 뛰어 벌은 청부라는 것이다.

    과연 그럴까. BBK, 도곡동 땅 등 숱한 의혹으로 볼 때 의문이다. 부지런하고 정력적인 인물이란 것은 의문의 여지가 없다. 분명 밤낮으로 열심히 벌었을 것이다. 하지만 정승처럼 벌었는지는 의문이다. 나도 고 노무현 대통령처럼 부자를 죄악시하고 시샘하는 못난 열패자, 비비 꼬인 삐딱서니일까??

    한국의 부자, 기득권자들의 도덕성이 변변치 않다는 것에는 대개가 의견이 일치할 것이다. 과연 이것이 그릇된 평가, 억울한 비난인가. 그들의 의무는 과다하고 권리는 과소한가. 그들은 그들이 공헌한 것에 비해 푸대접받고 있는가. 혹 개처럼 벌어 개처럼 쓰면서도 정승처럼 대접받고 싶어 하는 자는 없을까.

    그런 자들에게 청부란 이미 쌓아놓은 재산을 치장하기엔 더 없이 좋은 포장지다. 졸부의 무식함을 가짜 학위증으로 가리는 것과 같다. 부자를 죄악시 말라는 거다. 핍박하지 말라는 거다. 괜히 심통부리지 말라는 거다. 종부세 무력화에 대한 비판에 강만수 전 재경부장관이 말했던 것처럼 ‘부자들 가슴에 대못을 박지 말라’는 거다. 세금폭탄이라고 공격하며 부유층, 강자들의 정치적 방어와 공격의 수단이 된다.

    이렇게 한나라당과 조중동이 합작한 세금폭탄론 공세에 부자 뿐 아니라 중산층, 서민들까지 넘어갔다. 세금 좋아하는 사람은 없으니까. 그래서 이명박 후보가 대통령이 됐고 결과는... 부자감세, 복지축소다. 이 대통령의 세금폭탄론이나 부시 전 대통령의 세금구제론이나 다 자신의 지지층을 형성하고 챙기려는 같은 의도에서 나온 것이다. 매우 교묘하고 악의에 찬 정치적 언어, 프레임이다. 세금은 폭탄같이 그것으로부터 구제해야할 악인 것이다.




대통령 각하! 우리를 세금폭탄의 재앙으로부터 구제해 주소서!



    정치도 종교도 돈이 좌우하는 시대다. 옳고 그름보다 호불호요, 호불호보다 유불리다. 속든 안 속든, 어둡게 셈하든 똑소리나게 셈하든 정치는 정치 자체의 판단기준이 있다. 하지만 신앙생활은 돈, 이권을 중심으로 돌아가선 안 된다.

    욥기에서 (의인의) 고통이 반드시 죄에 대한 형벌이 아니고 (악인의) 형통이 반드시 하나님의 축복이 아닌 것처럼 부는 그 자체로 선이 아니고 가난은 그 자체로 악이 아니다. 죄 값은 희생과 선함으로만 갚을 수 있다. 부가 곧 선함이라면 돈을 주고 면죄부를 사는 것이 말이 된다. 탓할 수 없다.

    청빈을 남에게 강요하는 것이 궁상이라면 청부를 스스로 자랑하는 것은 주책이다. 금욕주의, 하늘의 성스러움만 추구해서는 종교적 도그마와 권위주의에 빠질 수 있고 부귀영화, 땅의 속됨만을 추구해서는 순간순간 일희일비하며 일상의 비루함에서 벗어날 수 없다. 극단적 금욕주의가 사라진 지금 우리가 경계해야 할 것은 돈이다.

    사람의 생명 값은 너무도 비싸며, 아무리 많이 내어도 살 수 없습니다.



50편 16절

하나님께서 못된 사람들에게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무슨 권리로 나의 율법을 읽느냐? 너희가 무슨 권리로 내 언약에 대해 말하느냐?

17절

너희는 나의 가르침을 미워하고, 내가 하는 말에 등을 돌린다.

18절

도둑을 보면 그와 함께 어울리고, 간음하는 자들 편에 선다.

19절

입으로 나쁜 말을 하며 너희 혀는 거짓말을 꾸며 댄다.”

 

    두려운 마음으로 성경을 읽어야 한다. 진실로 하나님의 말씀을 옳게 해석해야 한다.

    처음 통독을 하다 보니 답답할 때도 있고 궁금한 것도, 생각할 거리도 많다. 이게 맞나? 내가 옳게 가고 있나? 가이드가 없으니 불안하기도 하고 두렵기도 하다. 최대한 성경 안에서, 성경만을 갖고 충실하고자 하는데 혼자 읽다보니 기존의 신념을 강화, 고착시키는 방향으로 흐를 수도 있기 때문이다. 잘못된 신념이라면 큰 과오요 그렇지 않더라도 생각이 협소해지고 중언부언하는 셈이니 그리 좋지는 않다. 하여튼 이왕 시작한 거 끝까지 가볼 참이다.


    50편은 ‘못된 사람들’을 꾸짖으며 그들의 행태를 설명하고 있다. 악인들의 악행이야 이루 헤아릴 수 없이 나열할 수 있지만 거짓말에 대해서만 몇 자 적어보자. 가장 흔하면서도 본질적이고, 가벼우면서도 치명적인 거니까.

    ‘참과 거짓’만큼 근원적인 화두는 없다. 안으로 진실하고 밖으로 참과 거짓을 구별할 수만 있다면 만사여의다. 죄 지을 일 없고 세상사 꼬일 것도, 문제될 것도 없다. 하지만 세상이 그리 간단치가 않다. 하얀 거짓말, 검은 진실이 난무하고 우리의 눈은 하나님처럼 밝지가 않다.

    하얀 거짓말, 선의의 거짓말, 귀여운 거짓말...도 죄일까. 그거라고 우기면 면죄될까. 사악한 거짓말, 흉악한 거짓말과는 누가, 무엇을 기준으로 나누는 걸까.


    고 노무현 대통령은 정치를 혐오했다. 정치를 외면하고 그로부터 도망치려 했다. 퇴임 후엔 후배들에게 정치하지 말라고 했다. 그 자신이 정치의 한복판으로 뛰어들었으면서도 끊임없이 정치를 멀리하려 했던 이유는 계속되는 좌절과 퇴임 후의 회한 때문이기도 했지만 그가 거짓말에 능숙하지 못하고 피치 못할 거짓말에 그 자신이 상처를 입는 타입이었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그는 전통적(!)인 정치인 체질이 아니었다.

    언젠가 자신의 정치인생을 회고하면서 후회와 답답함을 섞어 하소연한 적이 있었다. “정치를 하다보면 도무지 거짓말을 안 할 수가 없다”고. 여느 정치인에겐 예삿일이나 인간 노무현에겐 큰 고민이고 아픔이었나 보다.




무현.

거짓말에 능숙하지 못하고 맘에 없는 말을 할라 치면 머뭇거리며 표가 났던 사람.



    이명박 대통령과 그 주위 인물들의 행태를 보면 입만 열면 거짓부렁이다. 이젠 무엇이 진실이고 거짓인지 뒤죽박죽 눈이 돌 지경이다. @.@... 이명박 장로님은 거짓말하지 말라는 십계명은 알고 계실까. 자신이 내뱉은 거짓말에 속으로 상처받고, 밤이면 밤마다 하나님께 회개라도 하고 계신 걸까. 굽힐 줄 모르고 계속되는 담대한 호언장담형 거짓말들로 볼 때 그건 아닌 것 같다.

    아마도 대통령 자리에 있음으로 해서 해야만 하는 하얀 거짓말, 필요한 거짓말, 선의의 거짓말이라는 꼬리표를 하나하나 붙여가며 온갖 구실을 찾고 있지나 않을까?! 그의 행태를 보면 그가 읽는 성경과 내가 읽는 성경이 과연 같은 책일까, 그가 믿는 하나님이 내가 믿는 하나님과 같은 하나님일까 의문이 들 때가 많다.


    계속되는 거짓말에 지치고, 4대강이다 대포폰이다 연평도 포격이다 요즘 하도 어수선해서 몇 마디 적어봤다. 하나님의 이름을 앞세워 집권한 장로대통령, 소용돌이치는 정치의 한복판에서 미우나 고우나 최고권력을 행사하고 있는 현직대통령이라서 몇 자 적어봤다.



55편 12절

만일 나를 모욕하는 자가 원수였다면 아마 나는 견딜 수 있었을 것입니다. 원수가 내게 대들었다면 나는 그 사람으로부터 숨을 수 있었을 것입니다.

13절

그러나 나와 같이 다니던 당신들이 그들이었습니다. 당신들은 나의 가장 친한 친구들이었습니다.

14절

한때, 우리는 친하게 지내며 함께 하나님의 집에도 다니곤 했습니다.


20절

내 친구였던 사람도 그의 친구들을 칩니다. 그는 자기가 한 언약을 깨뜨립니다.

21절

그의 말은 버터처럼 매끄러우나 그 마음속에는 전쟁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그의 말은 기름보다 더 부드럽지만 칼집에서 뺀 칼과 같습니다.

 

    잘못된 친구, 죄 짓는 이웃에 대한 기도다.

    어제까지도 재미있게 어울려 함께 놀던 친구가 나를 배반한다면, 안면을 바꿔 모른 체하고 나를 외면한다면 원수의 그것과 비할 바가 아니다. 같은 신앙, 같은 성향으로 함께 교회도 다니고 죽이 맞아 의기투합했던 교우가 알고 보니 뒤돌아서선 나를 험담하고 다녔다는 것을 안다면 그 배신감이 이루 말할 수 없을 것이다. 생판 모르던 사람보다 못하다. 가끔 들려오는 교회내의 권력다툼에 대한 이야기들은 더럽기가 세속에 전혀 뒤지지 않다.

    굳이 죄의 유무, 잘잘못을 따지지 않더라도 사람과 사람사이엔 갈등과 다툼의 가능성이 상존한다. 교회 역시 마찬가지다. 같은 신앙을 믿어도 다른 신념 때문에 다툴 수 있고, 같은 신념을 지녀도 다른 취향 때문에 멀어질 수 있다. 하다못해 짜장이냐 짬뽕이냐를 갖고도 사이가 틀어질 수 있는 것이 인간관계다. 그래서 시간의 담금질을 통과한 인간관계만이 진짜다.

    하지만 궁극적으로 교회는 인간(관계) 보고 가는 건 아니다. 아무리 좋은 인간, 인간관계도 한계가 있다. 분노하고 실망할 수밖에 없다. 교회 다니고 신앙생활 하는 것은 예수님 보고 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선하시며 그 사랑은 영원하시다.


    내 친구도 그의 친구를 배반하고 그 친구도 또 다른 친구를 배반하다. 배반의 일상화, 죄와 타락의 만연이다. 말씨는 온화하고 점잖으나 속으론 열불이 나고 폭탄이 터지는 전쟁이다. 괴로울까? 괴로우면 양반이다. 감언이설, 교언영색... 거짓말을 즐거이 꾸미고, 속이는 것에 스릴을 느끼며, 성공하면 짜릿한 쾌감을 맛본다. 전쟁이라면 엔돌핀이 팍팍 솟는 흥미진진한 전쟁이다. 이것이 프로 사기꾼, 진정한 악인이다.

    ‘입은 화를 부르는 문이며 혀는 몸을 베는 칼’이란 옛사람들의 말처럼 시편에서도, 동양사상에서도 악인의 말(言), 혀(舌)는 사람을 해하는 칼(刀)에 자주 비유된다. 그 말과 혀는 무엇인가. 무식한 말, 저속한 말, 천박한 말, 육두문자, 쌍소리가 아니라 거짓말이다.

    텅텅 깡통소리를 들을 때면 당혹스럽고 불쾌하지만 품위 있는 언어, 고상한 표현, 듣기엔 좋고 얌전하지만 악을 변호하고 악에 봉사하는 독이 든 거짓말과 괴변을 들을 때면 혀라는 붉은 검(劍)이 추는 칼춤을 보는 것 같아 섬뜩한 느낌이 들 때가 있다. 눈부신 여인의 입에서 아름답기 그지없는 시적 괴변과 거짓말이 흘러나올 때면 예술적 미와 윤리적 도덕의 부조화에 비애감마저 느껴지기도 한다. 이에 비하면 깡통소리, 쌍소리는 소박한 애교에 불과하다.

    무식하고 천박한 게 자랑은 아니지만 교묘한 거짓말보단 낫다. 못 배운 속인(俗人)이 배운 악인(惡人)보단 낫다. 지식과 논리와 아름다움으로 교묘히 포장된 악은 독약의 겉을 설탕으로 입힌 당의정(糖衣錠)처럼 똥덩이보다 보기에는 우아하지만 더 해롭고 치명적이다.


    성경은 하나님의 축복의 말씀이다. 항상 묵상하면 마음에 평안을 얻음에 족함이 있다. 또한 지식과 지혜와 진리의 보고다. 편리한데로 망령되이 써선 안 된다. 악을 돕고 선을 핍박하는 데 잘못 쓰여져선 안 된다. 사탄마저도 예수님을 유혹할 때 성경구절을 인용하지 않았는가. 경계할 일이다.



59편 11절

나의 방패시여, 그들을 죽이지는 마소서. 그렇게 하시면 우리 백성이 잊어버릴지도 모릅니다. 주의 힘으로 그들을 흩어지게 하시고 넘어뜨려 주소서.

 

    다윗이 그를 죽이려고 사울이 보낸 사람들에 대해서 하는 말.

    역시 다윗은 위대한 시인인 동시에 현명한 정치가다. 자신의 원수, 정적을 죽이는 것만이 능사는 아니다. 다윗은 자신을 죽이려는 사울을 두 번이나 살려주었고 사울의 죽음을 알리며 대가를 바라는 아첨하는 이를 벌주었다. 사울은 자신에게 행악(行惡)하였어도 자신은 사울에게 행악치 않았다.

    정치적으로 봐도 이것이 훨씬 이익이다. 몇몇 인물을 제거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세력을 규합하는 것이다. 인물교체가 아니라 세력교체다. 사람들을 각성시켜 전체 구성원들의 평균 수준을 높이는 거다. 그 사회의 도덕과 풍습을 일신하여 공유하는 것이다. 업그레이드, 곧 진보다.

    앞서 올린 <성경읽기 0036> 다스베이더 이미지 이하에 있는 결론을 인용하여 마무리한다.


    생명을 뺐지 않더라도 절차에 따라 권리를 보장해주면서 대명천지(大明天地) 만인의 법정에 세워 재판과 형벌을 받게 하는 것이 하나님의 방식이요, 세상의 진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