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몬, 때론 먹의 향내가 나는 글과 음악 그리고 사람

성경, 신앙생활

성경읽기 0029 : 에스더 1장 (부제 : 와스디를 위한 변론)

어멍 2010. 10. 30. 20:16
 

    성경읽기 0029 : 에스더 1장 (부제 : 와스디를 위한 변론)


    

    [에스더]

    저자 - 확실하지 않다.

    주요 인물 - 에스더, 아하수에로, 모르드개, 하만, (와스디)

    핵심어 - 아름다움, 섭리

    주요 내용 - 유다여자인 에스더가 페르시아의 왕비가 되어, 제국 내 유대인들을 몰살시키려는 재상 하만의 계략으로부터 이스라엘 동족을 구해낸 이야기.



    시대적, 공간적 배경 : (키루스 2세-캄비세스 2세-다리우스 1세-크세르크세스 1세-아르타크세르크세스 1세) 즉 성경 안의 표현으로는 (고레스-캄비세스-다리오-아하수에로-아닥사스다)로 이어지는 페르시아 제국 아하수에로 왕의 시대다. 아닥사스다 왕의 술 관원으로 유다 총독에 임명돼 예루살렘 성벽 재건을 완성한 인물인 느헤미야보다 앞선 시대다. 즉 전편 [느헤미야]보다 앞선 시대의 이야기다.

    사건이 일어나는 장소는 처음부터 끝까지 아하수에로가 다스린 페르시아 제국의 수도 수산 왕궁이다.

    고레스 칙령에 의해 고향으로 귀환하기 시작한 유대민족. 그들이 도착한 고향의 모습은 여전히 인적이 드물고 성벽이 무너진 폐허의 상태다. 아직도 바빌론을 중심으로 페르시아 제국의 여기저기서 소수 민족으로 흩어져 살고 있는 상태다.

∽∽∽∽∽∽∽∽∽∽∽∽∽∽∽∽∽∽∽∽∽∽∽∽∽∽∽∽∽∽∽∽∽∽∽∽∽∽∽∽∽∽∽∽∽∽∽∽∽∽∽∽∽∽


    따로 와스디(Vashti)를 위한 부제를 붙인 것은 에스더(Esther) 편에서 그녀의 위치가 너무 보잘 것 없게 그려져 있는 느낌이기 때문이다. 호기심이 나기도 하고 왠지 억울하기도, 가엾기도 하다. 그녀는 주연이자 영웅인 에스더에 비해 철저히 주연을 빛내주는 조연에 머무르고 있다. 본 편에서 와스디는 입이 없다. 그녀는 에스더가 등장하기 전 단 두세 절에서만 대사 없이 등장하는 행인 1의 엑스트라 수준이다. 악역이라 부른다 해도 카리스마 넘치는 비중 있는 악역이 아니라 막간에 소동만 일으키고 퇴장하는 삐에로 수준이다.

    아무리 주연이 각광받고 역사는 승자에 의해 쓰여진다고 하지만 와스디는 아하수에로의 왕비였다. 그녀의 폐위는 역사적, 정치적으로 큰 사건이다. 하지만 그녀에 대해서 언급된, 알려진 사실은 거의 없다. 출신성분, 왕과의 애정관계, 둘 사이에 자녀는 있었는지, 무슨 신을 믿었는지, 어느 세력의 누가 후원자였는지, 무슨 생각으로 왕 앞에 나오지 않았는지, 폐위 뒤 왕을 저주했는지 용서를 구했는지, 죽임을 당했는지 귀양을 갔는지에 대한 이후 행적도 알려져 있지 않다.

    따라서 성경구절을 중심으로 상상력을 동원하여 에스더 등장 이전의 와스디만 다루어보자. 그녀를 중심으로, 그녀를 변호하는 입장에 치우쳐 추측, 해석해보도록 한다.



[추측과 해석 1] 자존을 지킨 와스디와 술주정뱅이 아하수에로


4절

잔치는 백팔십 일이나 계속되었고, 그 동안, 아하수에로 왕은 자기 왕국의 부와 위엄과 영광을 마음껏 뽐냈습니다.

5절

그 잔치가 끝나자 왕은 신분의 높고 낮음을 따지지 않고, 수산에 있는 모든 백성들을 초대하여 왕궁 정원 뜰에서 칠 일 동안, 잔치를 베풀었습니다.

 

    아하수에로가 왕이 된 지 삼 년째 되는 해에 모든 귀족, 신하, 군 지휘관, 각 지방의 총독들을 초대하여 육 개월, 곧 백팔십 일이나 계속되는 잔치를 벌인다. 그도 부족해 칠 일을 추가하여 수도 수산에 있는 백성들을 불러 모아 잔치를 이어간다.

    왜? 자기 왕국의 부와 위엄과 영광을 원 없이 뽐내기 위함이다. 스스로 축하하고 자랑하기 위해서다. 더욱이 스스로 이룬 제국이 아니라 고레스, 캄비세스, 다리오로부터 물려받은 제국이다. 교만이다.



10절

칠 일째 되는 날이었습니다. 포도주를 마시고 기분이 좋아진 아하수에로 왕은(...)

제칠일에 왕이 주흥(酒興)이 일어나서(...)

11절

와스디 왕후에게 왕후의 관을 씌워 자기 앞에 나오게 하라고 명령했습니다. 왕후가 매우 아름다웠기 때문에 왕은 왕후를 백성과 귀족들에게 보여주고 싶어했습니다.

 

    마지막 잔칫날인 칠 일째 왕은 왕후에게 의관정제, 곧 곱게 차려입고 들라 이른다. 원래 주인공은 마지막에 등장하는 법이라서, 왕이 왕후를 끔찍이 아끼고 존중해서 불렀다기보단 잔치 막바지 파장 직전에 그것도 술에 취해서 술기운에 불렀던 쪽에 가깝다.(주흥이란 표현이 더 와 닿는다.) 그것도 왕후의 식견이나 재능, 인품을 선보이기 위함이 아니라 단지 아름다운 외모를 보여주고 구경시키기 위함이다. 영웅(英雄)은 호색(好色), 용감한 자가 미인을 얻는다고 스스로의 영광과 능력을 뽐내기 위함이다.

    왕의 평소 인품, 지금 벌어지고 있는 모든 상황을 파악하고 있었다면 왕후의 기분은 어떠했을까.



12절

그러나 왕후는 왕에게 나오지 않았습니다. 왕은 몹시 화가 났습니다. 마음속에서 불같은 분노가 일어났습니다.

 

    결국 왕후는 왕 앞에 나가지 않는다. 간밤에 부부싸움을 해서 토라져 있었나... 자신의 뛰어난 외모에 왕이 항상 쩔쩔매서... 왕이 자신의 손아귀에 있다고 방심해서... 하지만 남편 이전에 대제국의 왕, 그 자신이 법이요 국가인 절대권력자다. 철없는 어린 소녀도 아니고 왕의 명령을 거부한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모를 리 없다. 그녀는 죽음을 각오하고 왕을 거부한 것으로 보아야 한다.

    “(왕에게 나아가리니) 죽으면 죽으리이다.” - 뒤에 있는 4장 16절에 나오는 에스더의 말이다. 와스디가 했다 해도 전혀 어색하지 않다. - “(왕에게 나가지 아니하리니) 죽으면 죽으리이다.”




아하수에로 왕의 명을 거부하는, 또는 불순종하는 와스디 왕후 - 귀스타브 도레(Gustave Dore)



16절

므무간이 왕과 귀족들에게 말했습니다. “와스디 왕후는 왕에게만 잘못한 것이 아니라, 이 나라의 모든 귀족과 백성에게도 잘못한 것입니다.

17절

왜냐하면 페르시아와 메대의 여자들이 왕후가 한 일을 듣게 되면, ‘아하수에로 왕이 명령을 내려 와스디 왕후를 데려오게 했는데 왕후가 가지 않았다’고 말하면서 자기 남편을 업신여길 것이기 때문입니다.

19절

왕후의 자리는 와스디보다 더 나은 사람에게 주시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20절

그런 다음에 이 어명을 온 나라에 두루 알리신다면, 높은 사람이든 낮은 사람이든, 여자들이 다 자기 남편을 존경할 것입니다.”

 

    왕이 왕명을 거부한 왕후에 대해 처분을 묻자 가장 높은 일곱 귀족 중 한 명인 므무간이 대답하며 하는 말이다. 결국 왕은 므무간이 말한 대로 와스디 왕후를 폐위시키고 제국의 백성들로 하여금 각 가정을 남편이 다스리게 하고 남편이 쓰는 언어를 그 가정의 언어로 삼토록 명령한다.

    애들 싸움이 어른 싸움 된다고 한 가정의 불화가 나라 전체의 법과 제도까지 바꾸는 일로 비화된 것이다. 원래 페르시아 제국의 지배민족인 메대인과 페르시아인 중에서 메대인들은 다른 민족에 비해 여성의 발언권이 강했다고 전해진다.(현재 중동을 중심으로 세계 각지에 영토 없이 산재해 있는 쿠르드인들이 이들의 후손이라고 한다.) 제국의 시초를 연 고레스 왕 자신이 메대인 공주와 페르시아 장군과의 사이에서 태어난 족보를 갖고 있다. 하여튼 이 사건으로 인해 제국 내에서의 여성의 권력은 크게 위축되었으리라는 것은 쉽게 예상할 수 있다.


    아하수에로는 어리석고 므무간은 완고하다. 아하수에로는 아둔하고 비겁하며 므무간은 교활하고 정치적이다. 왕이 현명하고 명철하였다면 집안일은 집안일로 수습하고 끝냈어야 한다. 므무간의 충동질에 넘어가지 말았어야 한다.

    와스디 왕후를 시범케이스로 하여 제국의 왕권, 권위적 가부장들의 권력이 강화됐다. 므무간 같은 권위적이고 정치적인 사람이 꼭 있다. 바라만 보았는데 꼬나봤다고 눈 깔라고 위협하는 소인배들이 꼭 있다. 작은 잘못을 부풀려 자신의 정당성을 과장하고 이를 빌미로 권력을 강화하려는 꼰대들이 꼭 있다.

    연약하고 순결한 여인들에게 자비를!


    폐위된 왕비 와스디의 얘기는 여기서 끝난다. 그녀가 어떻게 반응했는지 어디로 갔는지 저자는 신경 쓰지 않는다. 수수께끼에 쌓인 비운의 여인! 와스디는 어떤 여자였을까.

    어쩌면 유서 깊은 메대 혹은 페르시아 혈통의 왕족이었을 수도 있다. 어느 남성보다 더 자존심이 강했으며 기품이 넘쳐흐르는 귀족이었을 수도 있다. 강직하면서도 순결한 여인이었을 수도 있다. 분명한 것은 에스더와 같이 대단한 미인이었다는 거다. 왕이 만백성과 신하들에게 자랑하고 뽐내고 싶을 만큼 절세미인, 경국지색(傾國之色)이었다.

    반면 아하수에로 왕은? 미녀를 좋아하고 술을 좋아하고 싸움을 좋아하고, 깊이 생각하지 않고 남을 쉽게 믿고 쉽게 일을 맡긴다. 지성보다 본능이 발달한 남자! 호쾌한 대장부라고도 할 수 있지만 속 깊은 남편, 존경받는 명군이랄 수는 없다. 실재로 역사에 보면 아하수에로 왕은 미색에 탐닉하여 왕궁의 여인들뿐만 아니라 신하들의 여인들까지 취하여 성적 문란에 이르고 결국 신하들에게 암살을 당하였다는 얘기가 있다.

    이런 아하수에로에게 강인한 인품에 눈이 부시게 순결하고 아름다운 와스디는 어쩌면 애증의 관계가 아니었을까. 사랑하면서도 다다를 수 없는 여인, 갖고 싶어도 진정 가질 수 없는 여인이었을 수도 있다. 해피엔딩으로 끝나는 낭만적인 ‘미녀와 야수’의 이야기보다 ‘고결한 아내와 왈패 남편’처럼 ‘귀부인과 짐승’의 관계였지나 않았을까... 상상해 본다.


    술좌석에 나가 뭇사람들의 눈요깃거리가 되기를 거부해 폐위당한 와스디. 상기한 사정과 내막이 맞다면 와스디는 불의에 대해 거부한 것이다. 정조와 순결, 자신의 신념을 생명보다 소중히 여긴 것이다. 심지어 예수님처럼 희생을 두려워하지 않았던 거룩한 여인이었다.



[추측과 해석 2] 교만에 빠진 와스디와 이를 징벌한 아하수에로


    와스디의 외모는 눈이 부시다. 하지만 그녀는 교만하다. 교만한 것에 더하여 어리석고 고집 세다. 어쩌면 왕궁 안의 작은 세계에만 갇혀 세상물정 모르고 사리분별 못하는 천둥벌거숭이, 자기만 아는 소아적 철부지일지도 모른다. 아니면 결벽증, 대인기피증이 있는 꽉 막힌 석녀(石女)이거나... 그도 아니면 육감적인 몸매, 아름다운 얼굴, 붉고 도톰한 입술을 갖고 있으나 머리는 텅텅 비어있는 된장녀일 수도 있다. 아하수에로 왕은 단지 그런 그녀를 벌한 것일 뿐이다. 남편으로서 가정을 바로잡고 군주로서 나라의 기강을 세운 것이다.

    다소 혼자만의 안드로메다행 상상놀이지만 교만에 방점을 두고 그녀의 허물에서 원인을 찾는 것은 대동소이하다. 정설처럼 받아들여지고 있는 가장 일반적인 추측이고 해석이다. 단순하고 간단하다.



[추측과 해석 3] 지혜롭지 않은 와스디와 속 좁은 아하수에로


    와스디가 정절을 지키는 데는 성공했지만 과연 그럴 필요까지야 있었을까. 좀 더 지혜롭게 처신할 수는 없었을까. 아하수에로의 상태가 만취해서 인사불성 정도였는지, 평소 술자리에서의 버릇이 고약했는지는 알 수 없으나 주연(酒宴)에 일단 나가서 그곳에서 지혜롭게 대처할 수도 있지 않았을까.

    대제국의 군왕이기 전에 한 여자의 지아비다. 체면이 있다. 여느 남편들도 아내를 부르는데 오지 않으면 화난다. 속에서 열불이 난다. 더구나 그 자리가 자기 손님들을 초대한 자리라면... 대망신이다.(지.못.미. ㅠ.ㅠ) 인격도 능력도 아내에게 미치지 못할수록 꼴에 남자라고 자존심만 내세운다.

    그래서 아하수에로는 분노를 다스리지 못하고 다소 오바한다. 훼손된 자존심과 권위를 보상받기 위해 뽑아 든 칼을 다시 칼집에 집어넣는 용기를 내지 못한다. 자의반 타의반 므무간을 비롯한 신하들에 떠밀려 혹은 그들의 손을 빌려 왕후를 내쫓는다.

    아하수에로의 분노의 본질은 이런 속 좁은 남편, 무시당한 수컷의 그것이다. 군주로서의 체통은 2차적인 것이다. 다만 여러 신하들과 백성들이 보고 있었으니 모욕감은 더 했겠지.



    맺음말 : 어떤 추측이 맞는지, 어떤 해석이 정확한지는 모른다. 자존과 자만과 교만, 신념과 소신과 고집, 겸손과 복종과 굴종이 엄연히 다른 것이지만 어떻게 보면 그 경계가 모호한 것일 수도 있다. 같은 사건도 관점과 가치관에 따라 해석과 주장이 다를 수 있다. 가장 단순한 것이 가장 진실한 것이란 말에 의하면 와스디는 단지 교만한 여자였을 수도 있다. 하지만 뭔가 밋밋하다. 허전하다. 그리고 그녀에겐 자신을 변호할 기회가 주어지지 않았다.

    성경을 너무 자의적으로 해석하는 것은 위험하다. 상상의 나래를 펴서 있지도 않았던 사실을 스스로 믿고 유포하는 것은 죄다. 하지만 열 도둑을 놓치더라도 한 사람의 억울함을 만들어선 안 된다. 예수님도 잃어버린 한 마리의 양을 찾아 나서지 않으셨던가.

    그녀 편에 서서 변호한 이유다.                                                            (끝)




PS : 인터넷에 교회청년들이 만들어 올린 ‘봉은사 땅밟기’란 동영상 때문에 시끄러운 모양이다. 에~효. 왜 이런 어처구니없는 일이 반복돼는 걸까. 부끄러운 일이다. 선교도 좋고 하나님의 뜻을 선포하는 것도 좋지만 최소한의 사회적 규범은 지켜야지... 이런 식이면 기독교가 욕먹는다. 스스로 신뢰를 갉아먹는 행위다. 말썽쟁이, 독불장군, 천방지축, 심지어 유치찬란...

    동영상을 봤지만 왜 다들 (10대?) 20대 젊은이들뿐인가. 누군가 시킨 것이라면 더 큰 문제고 그렇지 않더라도 교회 지도자, 어른들의 잘못이 없어지는 것은 아니다. 아이가 잘못하면 부모 책임이고 제자가 잘못하면 스승 책임이듯이 청년층이 잘못하면 장년층의 책임이다. 물론 다 큰 성인들이고 각자 판단력이 있겠지만 기독교 신자들의 잘못은 기독교 지도자들의 책임이 가장 크다. 잘못 인도한 그들에게 1차적 책임이 있다.

    한마디로 성도들도 지도자들도 어른스럽지 못하다. 미숙하다. 교계 전체가 함께 반성할 일이다.


“다른 종교와 어떻게 관계를 가져야 하는가? 우선 겸손한 태도를 갖고 많이 배워야 한다. 많이 배움으로써 신앙의 성숙한 경지에 이르러야 한다. 다른 종교인들의 신앙을 배운다고 우리 신앙이 없어진다면, 그 정도의 신앙은 차라리 없는 게 낫다. 자기 신앙이 있다면 그 신앙의 그릇에 다른 사람의 신앙을 담아내야 한다.” - 고 강원용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