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몬, 때론 먹의 향내가 나는 글과 음악 그리고 사람

성경, 신앙생활

성경읽기 0030 : 에스더 2장~8장

어멍 2010. 11. 2. 23:06
 

    성경읽기 0030 : 에스더 2장~8장



2장 7절

하닷사는 에스더라고도 불렸으며, 몸매와 얼굴이 매우 아름다웠습니다.

17절

왕은 모든 처녀들 가운데서도 에스더를 가장 좋아했습니다. 드디어 아하수에로 왕은 에스더의 머리에 왕관을 씌워 주고, 와스디를 대신해서 에스더를 왕후로 삼았습니다.

 

    와스디 왕후가 폐위된 뒤 아하수에로 왕은 신하들의 청을 받아들여 새로운 왕후가 될 후보 처녀들을 왕궁으로 데려오게 한다. 그 중 에스더라는 처녀의 미모가 특히 빼어났는데 그녀는 유대인 고아로서 사촌 오빠인 모르드개란 인물의 양녀였다. 결국 그녀가 새로운 왕후로 선택된다. 에스더는 왕궁에 들어와 왕후가 된 후에도 줄곧 자신이 유대인이라는 사실을 숨긴다.




Queen Esther



3장 9절

“왕께서 좋으시다면, 그 백성을 완전히 없애라는 명령을 내려 주십시오. 그러면 저는 왕의 재정을 맡은 관리에게 은 만 달란트를 주어, 왕의 금고에 넣도록 하겠습니다.”

10절

왕은 손에서 인장 반지를 빼어, 유다인의 원수인 아각 사람 함므다다의 아들 하만에게 주었습니다.

11절

왕이 하만에게 말했습니다. “그 돈과 백성은 그대의 것이니, 그대가 좋을 대로 하시오.”

 

    왕과 그의 가장 높은 신하 하만의 대화. 하만은 모든 이가 그에게 무릎 꿇고 절하는 데도 모르드개만은 그를 경멸하고 그에게 경의를 표하지 않는 것에 앙심을 품고 모르드개의 민족 곧 유대인들을 모두 몰살시킬 흉계를 꾸민다. 결국 하만의 감언과 금전에 넘어간 아하수에로 왕은 왕의 인장을 주며 그 일을 그에게 일임한다.



4장 14절

“왕비가 지금 왕비의 자리에 오른 것도, 바로 이런 때를 위한 것인지 누가 압니까?”

16절

“법을 어겨서라도 왕에게 나아가겠습니다. 그러다가 죽게 되면 죽겠습니다.”

“규례를 어기고 왕에게 나아가리니 죽으면 죽으리이다.”


    하만의 흉계를 안 모르드개가 왕비인 에스더에게 소식을 전하자 에스더는 삼일 동안 금식한 후 왕 앞에 죽음을 무릎쓰고 나아가 왕을 설득할 것을 결심한다. 당시 법에 의하면 누구든지 왕의 부름 없이 왕의 거처인 안뜰로 들어가면 죽음을 당하였다. 다만 왕이 금홀을 내밀 때만 그 사람은 살 수 있었다.

    “죽으면 죽으리이다.” 유명한 구절로 개역한글판의 번역이 비장미가 있는 게 더 깊고 멋있다. 이순신 장군이 명량해전을 앞두고 한 “생즉필사 사즉필생(生卽必死 死卽必生)-살고자 하면 반드시 죽을 것이오, 죽고자 하면 반드시 살 것이다.”라는 명언이 연상된다.



5장 3절

“에스더 왕후여, 무슨 일이오? 내게 무슨 부탁이라도 있소? 당신이 원한다면 내 나라의 절반이라도 주겠소.”

 

    여전히 왕의 총애를 받고 있는 에스더. 왕의 앞에 나간 에스더에게 왕은 금홀을 내밀며 그녀의 소원을 묻는다. 에스더는 왕과 하만이 함께 하는 잔치가 열리면 그 자리에서 소원을 말하겠다고 대답한다. 한편 하만은 유대인을 몰살시키기 전에 모르드개를 장대에 매달아 죽이기를 왕에게 요청할 계획을 세운다.



6장 1절

그 날 밤, 왕은 잠이 오지 않아 신하를 시켜 왕궁 일지를 가져오게 하여, 자기 앞에서 읽으라고 명령했습니다.

2절

그 일지에는 왕궁 문을 지키던 왕의 두 내시인 빅다나와 데레스가 왕을 죽이려 한 음모를 모르드개가 일러 주었다는 내용이 적혀 있었습니다.

 

    잔치 전날 밤 왕은 우연히 모르드개가 자신의 목숨을 구하였던 공로를 알게 되고 하만을 불러서 모르드개에게 왕의 옷을 입히고 왕의 말을 타게 한 후 왕의 가장 높은 신하 곧 자신에게 모르드개와 함께 성안 거리를 돌며 ‘왕은 높여주고 싶은 사람에게 이렇게 해 주신다’고 외치게 한다.

    대역전이다. 굴욕이다. 하만은 당황하고 부끄러워 얼굴을 가린 채 서둘러 집으로 돌아가지만 곧이어 에스더가 차린 잔치에 불려간다.



7장 3절

에스더 왕후가 대답했습니다. “왕이 저를 어여삐 보신다면, 그리고 제 요청을 들어 주실 마음이 있으시다면, 제 목숨을 살려 주십시오. 이것이 제 소원입니다. 그리고 제 민족도 살려 주십시오. 이것이 제 요청입니다.”

5절

“그가 누구요? 그가 어디에 있소? 누가 그런 짓을 하려 하오?”

6절

에스더가 말했습니다. “우리의 적, 우리의 원수는 바로 이 악한 하만입니다.”

10절

사람들이 모르드개를 달려고 하만이 세워 놓은 바로 그 장대에 하만을 매달았습니다.

 

    잔치에서 에스더가 소원을 말하고 하만의 흉계를 밝히자 왕이 분노하여 하만을 죽일 것을 명령하고 결국 하만은 그가 모르드개를 매달려고 세워놓은 장대에 매달려 죽임을 당한다.

    여기서 왕이 보인 반응(5절)은 다소 뜬금없는 느낌이다. 하만의 감언이설에 혹해서 유대인의 생사여탈권을 인장을 주면서 친히 위임한 장본인이었지 않은가! 잊었다면 아둔한 것이요 알면서도 모른 척 시치미 떼는 것이라면 교활하고 비겁한 것이다. 하지만 왕에게는 책임을 물을 수 없다. 왜? 절대권력자니까! 하찮은(!) 실수를 추궁한다는 것 자체가 불경이요, 죄다. 절대권력자, 무소불위의 독재자에게 자주 보이는 현상이다. 권력이 한 사람에게 집중돼있고 그것을 둘러싼 고만고만한 인물들이 행여 핍박을 받을까 두려워 몸을 사리거나 그로부터 흘러나오는 이권에만 혈안이 된 채 부패해있으면 자연적으로 성역화, 때로는 신격화된다.

    이명박 대통령에 대한 국민들의 숱한 오해(!)도 비슷한 맥락이다. 일이 터지면 일단은 안들리는 듯 사오정 모드지만 그래도 우기거나 생까려고만 않고 변명이라도 해대니 세상이 개명되었다고 봐야하나. 최소한의 성의는 있는 것 같은데 너무 구차한 변명이 계속되니 슬슬 짜증이 나고 싫증이 난다. 솔직담백하게 사려깊지 않은 말실수일 뿐이라고 변명하면 깔끔하기라도 할 텐데... 일이 커져 여론이 비등해지면 당사자인 대통령은 뒤로 쏙 빠지고 주위 군상들이 앞다퉈 나와 갖은 핑계를 대며 어설픈 논리로 합리화하기 바쁘다. 늑대는 어디가고 살쾡이, 너구리에 뱁새, 잔나비까지 북치고 장구치며 짓고 까분다. 이젠 뭐 웃기지도 않다. 뭐... 오해한 국민들이 이해해야지...

    6절의 ‘악한 하만’이란 표현을 빌어 혹자는 하만을 적그리스도의 원형으로 보기도 한다.




연회에서 하만을 아하수에로 왕에게 고발하는 에스더 - 얀 빅토르(Jan Victors)



8장 11절

왕의 조서 내용은, 각 성에 사는 유다인들이 함께 모여서 목숨을 지킬 수 있도록 한 것이었습니다. 어느 지방의 민족이든 군대를 일으켜 유다인을 치려하면, 그들은 물론 그들의 아내와 자식들까지 다 죽이고 멸망시켜 완전히 없애 버릴 수 있을 뿐만 아니라, 그들의 재산까지도 빼앗을 수 있게 하였습니다.

12절

유다인이 그렇게 할 수 있는 날은, 열두째 달인 아달 월 십삼 일 하루 동안으로 정했습니다.

17절

그들은 잔치를 베풀고, 그 날을 축제일로 삼았습니다. 그리고 그 땅에 사는 많은 사람이 유다인을 두려워하여 스스로 유다인이 되었습니다.

 

    왕은 인장을 내주어 모르드개로 하여금 하만이 자기 뜻대로 작성한 조서를 취소하고 새 조서를 작성하여 제국의 각지에 명령을 전한다. 이로서 유다인들이 합법적으로 생존권을 주장하고 그들이 적이라 여기는 자들을 죽일 수 있는 날을 보장받게 되는데 그 날은 원래 유대인 몰살을 위해 하만이 제비뽑기로 정한 날이었다. 곧 부림절로 제비뽑기를 뜻하는 히브리어 Purim에서 유래한다.

    뒤이은 구절들을 보면 유다인들은 수산 성에서만 13일에 오백 명, 14일에 삼백 명을 죽이고 15일에 잔치를 열었고, 다른 지방의 유다인들은 13일에 칠만 오천 명을 죽이고 14일에 잔치를 열었다. 지금도 부림절은 유대교의 중요 기념일이자 축제일인데 13일에는 엄숙하게 금식을 하고 회당에서 [에스더]서를 낭독하는 예배를 드린 후 축제 당일인 14일에는 서로 음식과 선물을 나누며 가난한 사람에게 자선을 베푼다고 한다. 한편으론 할로윈처럼 종교를 떠나 세속화, 관습화되어 과자를 굽고 연극을 하는 등 어린이들에게 즐거운 축제가 되었고 일부에선 그 정도가 지나쳐 유다인의 바커스 축제라고 빗대어 부르기도 한다.



    에스더서는 많은 논란과 특징이 있는 편(篇)이다.

    우선 매우 극적이다. 시기, 음모, 죽음, 복수을 소재로 왕과 미녀, 권세가가 등장하는 드라마틱한 긴장과 반전이 있는 한 편의 재밌는 이야기다. 그래서 일각에선 실재한 사실이 아니라 단지 유대민족의 희망과 상상이 가미된 역사적 로망(전기소설)으로 보기도 한다. 실재로 특정 날짜를 이민족 왕으로부터 허락받아 원수(어찌됐든 제국의 또 다른 신민들이다. 일종의 내전을 허용하는 것이다.)에게 복수한다는 이야기가 다소 소설적이기도 하다. 학살을 가까스로 면한 유다인들이 도리어 타 민족을 무자비하게 학살한다는 것 역시 잔인하고 부자연스럽다.

    어찌 보면 그만큼 그 때 그 시절 제국 내의 소수민족으로서 유대민족이 핍박받고 고통에 신음하고 있는 처지였던 것을 역설적으로 반증한다고도 유추할 수 있다. 특히 8장 17절, ‘그 땅에 사는 많은 사람들이 유다인을 두려워하여 스스로 유다인이 되었습니다.’를 보면 그러한 느낌이 더하다. 과장하여 표현하자면 피 흘리며 죽어가고 있는 사람이 내가 이 정도면 상대는 어떠했겠냐고 반문하며 애써 씩씩한 척 하는 걸 보는 것 같아 짠한 느낌이 들기도 한다. 실재로 유대민족의 역사, 바빌론 유수부터 시작된 기나긴 디아스포라로 점철된 그들의 유배의 역사는 비참 그 자체였다.

    그래서 오래전부터 [에스더]편을 정경(正經)에 넣을 수 없다는 주장이 있어 왔다. 역사적 근거가 부족하다는 것과 함께 드는 또 다른 이유는 다른 편과 달리 내용 중에 ‘하나님’이나 ‘기도’에 대한 언급이 없다는 점이다. 하만의 흉계에 모르드개와 에스더가 절치부심할 때도 하나님을 간구한다는 명확한 표현이 없으며 심지어 사태가 역전되어 화가 복으로, 슬픔이 기쁨으로 바뀐 부림절을 성취하고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울며 감사하는 경건한 분위기가 아니라 신나 자축하는 분위기다. 다분히 통속적이다.

    '하나님', '기도'와 관련해 비슷한 것으로는 4장 16절에 금식을 했다는 문구가 다다. 물론 그것으로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했다는 것을 유추할 수 있지만 직접적 언급이 빈번한 다른 편보다 상이한 건 사실이다. 이 또한 당시 유대인들이 하나님마저 떳떳히 내세울 수 없을 만큼 핍박받는 약소민족이었다는 단서일 수도 있다. 한마디로 숨소리조차 맘대로 내지 못하고 눈치보며 살고 있었을 수도 있다. 실재로 에스더는 자신이 유대인이라는 것을 줄곧 숨겼으며 왕 앞에서 자신의 처지와 소원을 얘기하면서도 '유다', '유대' 등의 표현은 명시하지 않는다. 그럼 하나님의 메시지가 없는 단순한 소설에 불과할 뿐일까. 우리가 얻을 수 있는 건 와스디보다 에스더가 똑똑했고 예뻤다는 결론뿐일까.

    물론 와스디와 에스더는 여러모로 비슷하면서도 다른 인물이다. 둘 다 엄청난 미인이었고 형식만 틀릴 뿐 대단한 용기를 발휘하였다. 와스디가 덜 지혜로왔고 에스더가 더 지혜로왔다고 볼 수 있지만 와스디가 덜 똑똑했고 에스더가 더 똑똑했다고도 볼 수 있다. (여기서의 똑똑하단 의미는 다소 부정적인 세속적 의미다.) 와스디가 더 독립적이었다면 에스더는 더 의존적이었다. 에스더는 잠시 망설였지만 양부이자 사촌오빠인 모르드개의 말에 따라 왕 앞에 나가는 등 남성중심의 가부장적 질서에 순종적이었다. 결국 그녀는 손해 본 것 없이 해피엔딩이다. 물론 이런 인물 연구도 재미있고 의미있다. 하지만...



    처음으로 돌아가 보자. 이 편의 핵심어는 ‘아름다움’과 ‘섭리’이다. 자세한 줄거리, 소소한 재미를 떠나 이것이 본질이고 하나님의 메세지다.

    ‘아름다움’은 와스디, 에스더의 외모가 아니다. 그것은 내면의 아름다움이다. 여성만이 가질 수 있는 깊고 우아한 정신적 내면의 숭고함, 거룩함이다. 하나님을 향한 깊고 경건한 신앙심이다. 괴테가 말한 “영원히 여성적인 것이 우리를 이끌어 올리도다.”의 그 아름다움이다. 실망과 두려움에 모두가 예수를 버리고 떠났을 때 끝까지 남아 예수의 마지막을 지킨 이들도 여인들 아니었던가.

    “마음이 고와야지 여자지”는 흘러간 유행가 가사가 아니다. 이런 말 하면 “머리 빈 것은 용서해도 못생긴 것은 용서할 수 없다”고 용감하게 주장하는 피 끓는 젊은 남자들이 코웃음 치겠지만 결혼해서 인생 조금만 살아보면 안다. 외모만 A뿔, 내면은 F가 결국 배우자로서도 F라는 것을. 행복을 가져다 줄 수 없다는 것을.

    겉모양으로 드러나는 외모의 아름다움은 한낱 석양에 핀 꽃, 새벽에 맺힌 이슬일 뿐. 찬 어둠이 내리면 땅으로 부서져 내리고 뜨거운 태양이 뜨면 하늘로 증발해 버린다. “눈부신 젊은이도 아가씨도 모두 새까만 굴뚝 청소부나 마찬가지로 흙이 되는 것이다.”(셰익스피어)


    ‘섭리’는 시공간을 초월한다. 악을 통하여 선이 드러나기도 하고 선을 가장하여 악이 찾아오기도 한다. 이방인을 통하여 하나님의 뜻을 행하기도 하시고 동족을 통하여 악을 행하기도 하신다. 왜 그 때 에스더는 페르시아 왕비로서 수산궁에 있었을까. 왜 그날 밤 왕은 모르드개의 공이 적힌 일지를 보았을까. 어찌하여 하만은 모르드개를 매달 장대에 도리어 자신이 매달리게 되었을까. 그 때 그 자리에 각자의 위치와 소임을 주시고 하나님은 모든 것을 역사하신다. 모든 것이 하나님의 뜻이요 섭리다.

    하나님의 ‘섭리’에 다가가 그 분을 닮는 것이야말로 우리가 도달해야할 가장 최상의 ‘아름다움’일 것이다.


    에스더 끝. 여호수아부터의 역사서 12권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