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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 신앙생활

성경읽기 0027 : 에스라 10장

어멍 2010. 10. 23. 00:02
 

    성경읽기 0027 : 에스라 10장



    저자 - 에스라가 쓴 것으로 본다.

    주요 인물 - 스룹바벨, 에스라

    핵심어 - 귀환, 재헌신

    주요 내용 - 유대민족의 귀환과 예루살렘 성전의 재건 및 개혁



    페르시아 왕 고레스의 칙령에 의해 해방을 맞이한 유대민족은 세 차례에 걸쳐 고향으로 귀환한다. 1차 귀환을 지도한 인물은 스룹바벨이고 2차 귀환을 지도한 인물은 에스라고 3차 귀환을 지도한 인물은 느헤미야다.

    스룹바벨은 다윗의 후손으로 그는 그 땅에 정착해있던 이민족들의 방해를 뚫고 우여곡절 끝에 성전을 재건하는데 이를 ‘제 2 성전’ 또는 ‘스룹바벨의 성전’이라고 부른다.

    에스라는 대제사장인 아론의 후손으로 제사장이자 율법학자다. 그는 이방인과의 결혼으로 상실된 민족적 순수성 회복을 위한 개혁을 한다.

    느헤미야는 페르시아 왕 아닥사스다 1세가 마시는 술을 관리한 관원으로서 예루살렘으로 귀환한 후 산발랏, 도비야, 게셈 등의 방해를 뚫고 성벽 재건을 완성한다.(에스라 편에 이어지는 느헤미야 편에 기록되어 있다.)



10장 10절

여러분은 죄를 지었소. 여러분은 유다 백성이 아닌 여자들과 결혼했소. 그리하여 이스라엘의 죄를 더 크게 만들었소.

11절

이제 여러분의 하나님이신 주께 고백하시오. 주님의 뜻을 따르시오. 여러분 둘레에 사는 백성과 헤어지고, 여러분의 이방인 아내와도 헤어지시오.

 

    에스라가 유대백성을 모두 예루살렘에 있는 성전 앞 광장으로 모이게 한 후 그들 앞에서 말하는 장면이다. 몇몇만이 반대하는 것으로 그치고 결국 이방인 아내와 그 자녀들은 이혼 증서를 주어 보내게 된다.

   언듯 이해가 안 되는 구절이다. 그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었을까. 신학자들의 해석이 궁금하다.


    역사적으로 보면 당시 상황은 막 해방을 맞이하여 고향에 돌아와 유대공동체를 재건하려는 시점이었다. 무려 70년간의 노예생활이다. 이국땅에서 뿔뿔이 흩어져 뿌리없이 부유하던 생활이다. 고유한 풍습과 문화전통, 언어, 믿음, 혈통에 문제가 발생하지 않았을 리 없다. 유대민족의 정체성이 소멸까지는 아니더라도 흐릿해져 있었을 것이다.

    현대국가가 아니라 민족을 단위로 생존을 도모했던 시대, 인구수가 가장 큰 국력이었던 시대다. 인구수가 아무리 많더라도 민족을 하나로 묶어낼 수 있는 정체성이 없으면 단일세력을 이룰 수 없다. 이 정체성의 가장 중요한 기본이 믿음이고 혈통이다. 그래서 한편으론 믿음을 회복하고 다른 한편으론 혈통을 회복하려 했던 것이 아닐까. 성전을 짓고 가계를 정리하는 것이다.

    지금은... 다르다. 세상도 달라지고 기독교도 달라졌다. 더 이상 유대민족만의 민족종교가 아닌 보편종교가 됐다. 예수의 보혈로 인해 인류의 보편종교가 된 신약 이전의 구약은 아직 민족종교의 성격이 강하다.

    성경은 정치적이다. 예수의 신약시대도 정치적이지만 사무엘, 열왕기, 역대기, 에스라로 이어지는 역사이야기는 특히 더하다. 개인적으로 에스라의 정책은 이방인과의 혼인으로 풍속이 타락하고 믿음이 약해지는 것을 막으려는 도덕적, 종교적 필요성도 있었지만 민족정체성을 회복하여 유대민족의 생존을 도모하려는 정치적 필요성도 그에 못지않았다는 생각이다.


    개인, 가문, 국가, 문명, 대륙의 흥망성쇠와 세력판도가 제각각 출렁이며 명멸하는 것이 다 마찬가지다. 속된 말로 인생 한 방이듯이 장구한 역사로 보면 국가와 거대제국도 한방이다. 솔로몬 제국이 그랬고 페르시아, 로마, 몽골, 대영제국이 그랬다.

    팍스 아메리카를 구가하고 있는 미국 역시 길고 짧음의 문제일 뿐 마찬가지일 것이다. 저물어가는 노쇠한 구대륙이 될 수도 있고 각 주로 사분오열되거나 열강의 식민지가 될 수도 있다. 인구증가 속도로 보아도 백인보다 흑인이나 히스패닉의 증가속도가 더 빠르다. 언젠가 백인의 나라가 아니라 흑인의 나라, 히스패닉의 나라가 될 것이다. 선거권을 제약하거나 추방하지 않는 한.


    이스라엘 역시 마찬가지. 솔로몬의 영광을 누리기도 했지만 이집트의 종노릇, 바빌로니아의 종노릇도 하고 나치에 의해 홀로코스트라는 고난을 당하기도 하는 등 굴곡이 많았다. 현재는 7일전쟁과 몇 차례의 아랍전쟁에서 승리한 후 강력한 유대인 정착정책을 실행하고 있고 혹자는 미국의 알짜배기 세력은 유대인들이 장악하고 있다고 하는 등 강소국 혹은 숨은 실력자로 인식되기도 한다.

    한국의 기독교도 사이에선 선택받은 민족, 머리가 비상한 우월한 민족이란 인식이 한민족과 비유되어 자랑스레 얘기되는 것도 같고 심지어 이슬람의 아랍을 적대시하여 전쟁이 나면 이스라엘 젊은이는 모여드는데 아랍 젊은이들은 뿔뿔이 도망간다는 얘기들을 즐겨하며 열등민족 취급하기도 한다. 하지만 구약에선 이집트의 종이었고 지금의 이란, 이라크인 페르시아의 종으로 소멸 직전까지 갔었다는 사실을 놓고 보면 언제 어디서나 통용되는 진실은 아니라는 거다.

    영광도 있었고 고난도 있었다. 도덕적, 종교적으로 높은 수준에 다다른 적도 있었고 타락하여 썩어 문드러진 시절도 있었다. 지금은 어떤가. 홀로코스트를 민망하게 하는 비인도적이고 강압적인 대 아랍정책,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정수로 한 기독교에 적대적인 유대교의 현재를 볼 때는 긍정적이지만은 않다. 개인적으로 우리 기독교도들이 갖고 있는 이스라엘에 대한 이미지는 많이 과장되고 왜곡되어 있다는 생각이다.


    우리의 역사와 현재상황도 마찬가지다. 내가 국민학생이었던 1970, 80년대 자랑스레 배웠던 단일민족, 백의민족, 평화를 사랑한 민족이란 말이 점점 시대에 맞지 않아가는 상황이다. TV에서도 다민족, 문화다양성에 대한 공익광고가 나오고 당위에서도 필요에서도 이 민족 저 민족, 이 인종 저 인종 다 같이 섞여 함께 살아가야할 처지다.

    평화를 사랑한 백의의 민족이란 말도 되짚어볼 필요가 있다. 그것이 핍박만 받은 약소민족의 자기위로나 합리화였지는 않았는가. 고구려의 정복전쟁, 백제 신라와의 패권전쟁, 가까이는 남북의 한국전쟁까지... 인간사에 다툼이 없을 수 없겠지만 이 땅에서도 크고 작은 분쟁이 계속되어 왔다. 한반도에 태평성대만이 구가된 시대는 결코 길지 않았다.

    백의(白衣)와 평화를 억지로 연결시킨 느낌도 있고 백의를 즐겨(?) 입은 것이 호화스러움보다 담백, 단아함을 선호하는 미적 성향과 연결시키는 것도 그리 자연스럽지는 않다. 단지 평민은 염색하고 가공하기 이전의 것을 소박하게 입었을 뿐 그 시절에도 권문세가, 거부, 한량, 기생들은 화려하게 입을 것 다 입었다.

    타민족에 비해 유독 호전적이었다는 증거도 없지만 세상과 동떨어진 무릉도원의 신선이나 선비처럼 유독 도덕적이고 평화로웠다는 증거도 없다. 단지 힘이 약했고 필요와 기회가 없었을 뿐 동기만 있었다면 중국대륙이든 일본열도든 정복전쟁에 나서지 않았으리란 보장이 없다.


    역사는 장구하고 하나님의 섭리는 오묘하다. 강한 것을 두려워하고 맹종하거나 약한 것을 업신여기거나 얕보면 안 된다. 강한 것은 약해지고 약한 것은 강해진다. 처음부터 강하고 날 때부터 약한 것은 없다. '부자 망해도 삼대 간다'지만 '삼대 가는 부자 없다'란 속담도 있다.

    '왕대밭에 왕대 나고 뱁대밭에 뱁대 난다'지만 '왕후장상(王侯將相)의 씨가 따로 있나'란 말도 전해져 온다. 종(種)이 다르면 다를 수 있다. 하지만 같은 종 안에서는 근본적인 차이가 크지 않다. 흑인이든 백인이든, 청소부든 대학교수든 날 때부터 능력이 다르고 자격이 주어지는 것은 아니다.

    하나님은 모두의 하나님이다. 이스라엘에서 진리고 하나님이면 한국에서도 아랍에서도 진리고 하나님이어야 한다. 기독교는 보편종교다. 유대교에서 카톨릭으로, 카톨릭에서 기독교로 보편종교의 길을 꾸준히 확장해왔다. 보편종교를 주장하면서 더 이상 (배타적인) 하나님의 나라, 선택받은 민족, 배제된 민족, 제외된 인간을 주장할 수 없다. 예수님은 이런 것 가리며 십자가에 못 박히지 않으셨다. 예수님이 구원하려 한 것은 모든 인간, 인류였다.

    교만이 가장 큰 죄라는 것을 아는 기독교도라면 욕심 많은 자식처럼 구원을 독차지하려해선 안 된다.




바람과 구름과 들꽃을 독점할 수 없듯이 예수님의 십자가 역시 그 누구도 독점할 수 없다.



    우리 모두를 대신해 죄를 감당하신 예수님과 거기에 임재하신 하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우리로 하여금 겸손하게 하시고 우리 이웃들을 내치지 말고 사랑하게 하옵소서. 그들을 존중하고 그들에게 하나님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크나큰 사랑을 전하게 하소서.


    에스라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