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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 신앙생활

성경읽기 0100 : 에베소서 2장~5장

어멍 2011. 9. 22. 19:56

    성경읽기 0100 : 에베소서 2장~5장



    저자 : 사도 바울

    주요 인물 : 바울, 두기고

    기록 목적과 대상 : 에베소에 있는 그리스도인들을 위해 쓰여 졌다. 그리스도 안에서 이방인과 유대인이 하나가 되어 한 몸(교회)을 이루고 있음을 주장하며 그리스도의 지체들인 성도들이 주님과 교회 안에 거하면서 행해야 될 삶에 대해 권면하고 있다.

    에베소서와 이어지는 빌립보서, 골로새서 3권은 바울이 감옥에 갇혀 있는 상태에서 썼기 때문에 옥중서신이라고 불린다. (뒤에 나오는 목회서신 중 하나인 빌레몬서 역시 옥중서신에 속한다.)



2장 8절

여러분은 하나님의 은혜 안에서 믿음으로 구원을 받았습니다. 여러분 스스로는 자신을 구원할 수 없습니다. 구원은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9절

또한 착한 행동으로 구원받은 것이 아니므로 아무도 자랑할 수 없습니다.


2장 15절

유대인의 율법에는 너무나 많은 명령과 규칙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러한 율법을 폐하셨습니다.

 

    ‘(오직)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로움을 얻는다.’ ‘(오직)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는다.’

    바울이 말하는 정의론, 구원론이다. 바울은 철저히 인간(행위), 율법의 한계와 불완전함, 하나님의 사랑과 은총의 완전함을 주장하고 있다.

    정의(로움), 구원(받음)을 동일한 것으로 볼 것이냐, 전혀 다른 별개의 것으로 볼 것이냐. 이 둘의 관계를 어떻게 볼 것이냐 하는 문제는 너무 어려운 신학적 주제이므로 여기서 각설한다.


    ‘예수님은 이러한 율법을 폐하셨습니다.’ 여기서 폐(廢)하는 것은 영어로 abolish다. ‘폐지하다.’, ‘파괴하다.’의 의미다. 어감이 다소 강하다.

    구약은 율법의 시대다. 그럼 구약과 신약, 유대교와 그리스도교, 여호와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 십계명으로 대표되는 율법과 사랑과 희생의 가르침으로 대표되는 십자가의 도(道)... 이들의 관계는 어떻게 해석하고 받아들여야 하는가? 서로 단절된 대립되는 것으로 봐야 하는가? 이어지는 계승발전된 것으로 봐야 하는가? 이것 역시 어려운 주제다.

    분명한 것은 십자가의 사랑의 도가 율법보다 훨씬 더 중요하다는 거다. 예수님의 가르침 자체가 그랬고 바울 및 역대 신학자들의 가르침이 그랬다. 적어도 예수님은 율법을 창조적으로 부정했다. 창조적으로 파괴했다. 그러면 예수님이 폐한 것은 율법뿐이었을까?


    예수님께서 성전을 떠나 걸어가실 때, 제자들이 와서 성전 건물을 가리켜 보였습니다.[마태 24:1]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너희가 이 모든 것을 보고 있지 않느냐? 내가 너희에게 진정으로 말한다. 여기에 있는 돌 하나도 돌 위에 남지 않고 다 무너질 것이다.”[24:2]

    예수님께서 숨을 거두셨습니다.[마태 27:50] 그 때, 성전 휘장이 위에서부터 아래까지 두 조각으로 갈라졌습니다. 땅이 흔들리고, 바위들이 쪼개졌습니다.[27:51]

    당시 예루살렘에 있던 헤롯 성전은 무척 웅장하고 화려했다고 한다. 일부는 금칠까지 했었다고 하니 그 크고 흰 벽면에 석양이 드리우면 반짝반짝 아름다우면서도 장엄한 것이, 한 폭의 천국의 풍경이었을 것이다. 대부분이 시골 갈릴리 나사렛 출신이었던 예수님의 제자들은 그 앞에서 아마도 입을 다물지 못하고 눈이 휘둥그레졌을 것이다. 하지만 예수님은 성전의 파괴를 예언하신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박혀 숨을 거두실 때 지성소와 성소를 구분하는 성전의 휘장이 두 조각으로 갈라진다. 하나님의 뜻이 일부 제사장, 성직자 그리고 유대인뿐 아니라 모두에게 개방되었음을 의미한다. 이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이라면 때와 장소에 상관없이 누구라도 하나님 앞으로 직접 나아갈 수 있게 된 것이다.

    무엇인가? 예수님께서 스스로 성전이 되고, 제사가 되고, 제물이 되고, 율법이 되심으로서 이 모든 것을 폐하신 것이다. 우리의 죄와 함께 이 모든 것을 짊어지고, 대신 자신의 목숨을 내어 주신 것이다. 오직 사랑의 가르침만을 남겨주신 것이다.




헤롯 성전(미니어처 모형)
지금은 대부분이 무너지고 ‘통곡의 벽’이라고 불리는 외벽만이 일부 남아있다.



    성전은 없다. 율법과 함께 성전도 예수님께서 폐하셨다. ‘가장 높으신 하나님께서는 사람이 손으로 지은 집에 살지 않으십니다.’[사도행전 7:48] 예수님께서는 성전을 폐하시고 대신 우리에게 '교회'를 주셨다.

    ‘교회’는 성전이 아니다. 건물도, 특정 공간도 아니다. 다만 ‘하나님의 부름을 받은 구원받은 백성들의 모임’이다. '주님을 머리로 하고 성도들을 지체로 하여 이루어진 성령이 임하는 모임'이다. 그 곳이 광장이든 가정집이든, 비바람 부는 허허벌판이든 안온하고 큰 건물 안이든 상관없다. 두 사람이 모였든 만 사람이 모였든 상관없다. 교회는 사람이다. 성도가 곧 교회다. 이것이 교회(敎會)의 엄밀한 의미다.

    그런데 지금은 이것을 또다시 교회(건물) 심지어 성전이라고 부르곤 한다. 불과 몇 십 년 전에 ‘교회당’, ‘예배당’이라고 간판을 달고 그렇게 부르던 것을 편의에 의해 ‘교회’라고 칭하게 된 것이다. 이제 교회라고 하면 신실하고 소박했던 초대교회 사람들의 회합이 연상되는 것이 아니라 높은 십자가와 큰 건물이 먼저 연상된다.


    교회가 건물이 되면 외양을 따지게 된다. 규모를 따지고 편의시설이 중요해진다. 교회는 건물이 커지고 교인들이 느는 것을 부흥과 은혜의 증거로 내세운다. 성도들 역시 믿음의 성장보다 편리함, 유불리를 기준으로 교회를 선택한다. 큰 교회는 더 커지고 작은 교회는 더 작아진다. 교회도 부익부 빈익빈이다.

    교회가 성전임을 강조하게 되면 예배는 제사, 연보(헌금)는 제물, 목사는 제사장이 된다. 성전 건축이라는 명목 아래 헌금이 강요되고 무리하게 대출을 받는 등 교회의 재정사정이 악화된다. 그런 교회들이 실지로 많다. 성공(!)해서 어마어마한 건물을 지은 후 잘 나가는 교회도 있지만, 무리해서 폼 나는 건물만 지어놓고 빚더미에 앉은 교회도 있다.

    일부 제사장과 성직자에서 유대민족 전체로, 유대민족에서 이방세계 전체로... 하나님의 영광과 예수님의 사랑의 가르침은 계속 개방, 확장되었다. 이제 교회의 또 다른 벽을 허물 때이다. 그 벽은 건물이라는 물리적 벽이기도 하고 우리 마음속에 갖고 있는 심리적 벽이기도 하다. 바로 교회가 이교도, 불신자를 포함한 모든 이웃에게 문을 여는 것이다. 주님의 크신 영광과 한없는 사랑으로 이들을 품어 안는 것이다. 그 영광과 사랑을 그리스도인뿐만 아니라 전 인류에게 개방하여 함께 공유하는 것이다.


    자기신앙에 대해 자신감이 있고 떳떳하다면 함께 섞여 어울리는 걸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 방법론적 측면에서도, 이웃과 화평을 함께한다는 측면에서도, 기존 기독교의 선교방법은 이상적이지도 않고 효과적이지도 않다. 지금처럼 벽을 쌓아가며 배타적, 폐쇄적으로 교회의 범위를 넓히는 것은 이미 한계에 왔다. 교회 문을 열고 모든 이를 맞아들여라. 교회 문을 나서서 지역공동체에 녹아들어라.

    녹아 없어지지나 않을까? 허물어진 벽을 타고 세속의 것이 교회내로 넘쳐 들어오지나 않을까? 시험을 당하고 원심력이 작용해서 뿔뿔이 흩어지지나 않을까?... 걱정될 수도 있다. 하지만 주님은 완전하시며 기독교 신앙은 그렇게 허약한 게 아니다. 설혹 교회(조직)가 녹아 없어진들 또 어떤가!

    거듭 말하지만 중요한 것은 교회(건물) 혹은 인간관계의 유지가 아니라 주님을 알고 주님의 뜻이 이 땅에서 이루어지도록 힘써 행하여 그 영광과 사랑을 널리 밝히는 데 있다. 교회는 그것을 이루기 위한 강력하고 효과적인 수단일 뿐이다.


    겉을 보지 말고 속을 보라. 세속의 외양에 눈을 돌리지 말고 이웃의 아픔에 눈을 돌려라. 교회 안에만 머물면서 성을 쌓으려고만 말고 교회 밖으로 나와 함께 나누어라. 하나님은 그것을 원하신다. 예수님도 그리 하셨을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아무리 크고 아름다운 교회라도 언제고 회칠한 무덤이 될 수도 있다. 아무리 교양과 엄숙함과 성스러움을 강조하더라도 바리새인들처럼 독사의 자식들이 될 수도 있다.

    하나님은 우리의 겉을 보시지 않고 우리의 중심을 보신다.



5장 16절

때가 악하니 가능하면 선한 일을 할 수 있는 기회를 잘 붙드시기 바랍니다.

세월을 아끼라. 때가 악하니라.

Making the most of every opportunity, because the days are evil.

 

    같은 의미나 느낌이 달라 <쉬운 성경>, <개역 한글>, <NIV>를 모두 병기해 보았다. <개역 한글>판이 가장 짧으면서도 함축적인 게, 의미가 깊고 멋진 느낌이다.

    <NIV>를 내 나름대로 번역하자면 ‘최대한 모든 기회를 살리십시오. 왜냐하면 시대가 악하기 때문입니다.’ 정도 되겠다. 'opportunity'는 기회다. 선한 일을 할 기회, 의미 있고 가치 있는 일을 할 기회다. 'the days'는 때, 시대, 세월, 세상이다. 시간적 의미가 크지만 (하늘이 아닌) 이 지상이라는 공간적 의미로도 읽힐 수 있다. 'evil' 역시 ‘악하다’의 의미가 크지만 ‘비루하고 거칠고 위험하다’는 의미로도 읽힐 수 있다.


    시대적으로 보면 그리스도교가 아직 유대 땅에서도, 로마 제국 내에서도 공인받지 못하고 핍박받던 때였으니 그리스도인들에겐 고난의 시대였다. 하나님의 공의와 예수님의 사랑이 모두에게 드러나지 않은 악한 시대였다. 극단적으로 말하면 언제 박해를 받아 잡혀가고 순교할지 모르는 악한 시대이니 시간을 아껴 기회 있을 때마다 선을 행하고 주님의 말씀을 실천하자는 것이다.

    일반론으로 말하면 인생은 유한하니 헛되이 보내지 말라는 것이다. 까불지 말고, 허송세월하지 말고 지혜롭게 처신하라는 말이다. 세상은 악하기 이전에 비루하고 거칠은 곳, 유혹이 넘치는 위험한 곳이니 함부로 나대지 말라는 것이다. ‘여러분은 자신의 생활을 늘 살피십시오. 어리석은 자처럼 살지 말고, 지혜롭게 행동하십시오.’[5:15]

    당시의 사정을 강조해서 한 말인지, 일반론으로 한 말인지 확실하지 않지만 개인적으로는 후자 쪽에 가까운 느낌이다. 앞뒤 구절을 보면 ‘거짓말하지 마라’, ‘화내지 마라’, ‘다른 사람을 사랑하라’, ‘탐욕을 절제하라’, ‘부모를 공경하라’, ‘남편의 권위를 존중하고 아내를 아끼며 사랑하라’, ‘자녀를 주님의 훈계와 가르침으로 사랑 안에서 키워라’는 말씀을 하고 있다.

    바울은 계속해서 그리스도의 지체들인 성도들에게 주님과 교회 안에 거하면서 형제와 이웃과 가족들에게 갖추어야 할 보편적, 이상적, 도덕적 삶의 태도에 대해 권면하고 있는 것이다.



    樹欲靜而風不止(수욕정이풍부지)  나무는 가만히 있고자 하나 바람이 그치지 않고

    子欲養而親不待(자욕양이친부대)  자식은 효를 다하고자 하나 부모는 기다려주지 않네.

    ▲ 韓氏外傳(한씨외전)


    少年易老學難成(소년이노학난성)  소년은 쉽게 늙고 학문은 이루기가 어려우니

    一寸光陰不可輕(일촌광음불가경)  짧은 시간이라도 가벼이 여길 수가 없다.

    未覺池塘春草夢(미각지당춘초몽)  아직도 연못가 봄풀의 꿈에 젖어 있는데

    階前梧葉已秋聲(계전오엽이추성)  어느덧 뜰 앞의 오동잎은 가을 소리를 내는구나.

    ▲ 朱熹(주희) 偶成(우성)

 

    5장 16절과 비슷한 의미의 글이다. 위에 것은 고어(皐魚)라는 사람의 말이다. 풍수지탄(風樹之嘆)은 ‘수욕정이풍부지(樹欲靜而風不止)’에서 따온 말로 부모가 살아계실 때 효도하지 않으면 뒤늦게 한탄하게 된다는 사자성어다.

    주희(朱熹)는 곧 성리학(性理學)의 시종(始宗)인 주자(朱子)로 우성(偶成)은 우연히 지었다는 의미다. 계전(階前)은 ‘뜰로 내려가는 계단 앞’을 이름이고 추성(秋聲)은 마른 오동잎이 내는 소리다. 그것은 떨어진 오동잎이 바스락거리며 밟히는 소리일 수도 있고, 서로 뒤엉킨 채 바람에 나뒹구는 소리일 수도 있고, 아직 붙어있다면 스스스스- 찬바람에 나부끼며 서로 부딪히는 소리일 수도 있다.

    하나는 효도를 권하고 하나는 학문을 권하며 세월의 유한함과 덧없음을 얘기하고 있다. 시간을 귀하게 아껴 쓰라는 교훈은 둘 다 에베소서와 같지만 ‘때의 악함’보다 ‘때의 유한함’, ‘덧없이 빠름’을 말하고 있어 에베소서와는 느낌이 많이 틀리다.




탄은(灘隱) 이정(李霆)의 풍죽도(風竹圖)



    비슷한 느낌, 비슷한 결론을 말하고 있는 구약이 있다. 바로 전도서다.

    내가 알기에, 살아생전에 행복하고 선을 행하는 일보다 더 좋은 일은 없다.[전도서 3:12] 이처럼 하나님의 선물은 사람마다 먹고, 마시고, 자기의 수고에서 만족을 느끼는 것이다.[3:13]

    인생은 허무하다. 세상만사가 허무하다.[전도서 12:8] 세상만사의 결론을 들었으니,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분의 명령을 지켜라. 이것이 사람이 해야 할 본분이다.[12:13]

    인생은 허무하다. '그러므로(Therefore)' and '그럼에도 불구하고(Yet)' 향유하고 감사해야 한다. 굳세고 의로워야 한다. 낙담커나 포기하지 말고 하나님의 뜻과 의를 행해야 한다. 이것 외에 우리의 본분과 보람이 없다.


    결론은 비슷해도 에베소서와도, 주자의 ‘우성’과도, 느낌이 또 틀리다. 전도서는 에베소서보다 좀 더 세속적이다. 에베소서가 구체적인 도덕책이라면 전도서는 포괄적인 지혜책이다. 하지만 전도서는 우성보다는 좀 더 종교적이고 서사적이다. 우성이 시인의 일시적 감흥으로 지어진 서정시라면 전도서는 하나님을 믿는 현인이 인생을 통찰하며 들려주는 수상록이나 회상록이다.

    허무와 덧없음을 말하는 것이 동양적인 정서와도 통한다. 전도서는 에베소서와 우성 사이 어디쯤에 있는 느낌이다. 에베소서가 ‘세월을 아끼라. 때가 악하니라.’라면 전도서는 ‘세월을 아끼라. 때가 헛되니라.’ 정도 되겠다.


    에베소서. 끝.

 

 

 

 

    다음은 2019/05/13 덧붙임

 

    이 또한 지나가리니, 메멘토 모리! 카르페 디엠!

 

    이 또한 지나가리니(This, too, shall pass away), 영광도 좌절도, 고통도 즐거움도 한 순간!

    언젠간 죽음이 찾아올 것을 기억하고(Memento mori) 너무 기뻐하지도 슬퍼하지도, 너무 우쭐대지도 낙담하지도 말라.

    게으름도 없이 조급함도 없이 오직 지금 이 순간에 집중하라. 충실히 지금 이 순간을 잡아라! (Carpe Diem)

    가능한 모든 기회를 잡고 모든 의를 구하고 모든 선을 행하고 모든 감각을 느끼고 모든 기쁨을 맛보라. 세월을 아끼라. 때가 빠르니라. (Making the most of every opportunity, because the days are fast.)

 

 

    묻지 말게, 안다는 건 불경한 일, 신들이 나에게나 그대에게나 무슨 운명을 주었는지,

    레우코노에여, 점을 치려고도 하지 말게.

    더 나은 일은, 미래가 어떠하든, 주어진 대로 겪어내는 것이라네.

    유피테르 신께서 그대에게 주시는 게, 더 많은 겨울이든, 마지막 겨울이든.

    지금 이 순간에도 티레니아해의 파도는 맞은편의 바위를 깎고 있네.

    현명하게나, 포도주는 그만 익혀 따르고, 짧은 인생, 먼 미래로의 기대는 줄이게.

    지금 우리가 말하는 동안에도, 인생의 시간은 우릴 시기하며 흐른다네.

    지금 이 시간을 잡도록 하게나(carpe diem), 미래에 대한 믿음은 최소한으로 해두고.

    ▲ 호라티우스의 시 <송가> 중에서

   

    carpe는 라틴어로 잡다. 뽑다. 즐기다. 사용하다. 이용하다. / diem은 날을 의미 / carpe diem은 영어로는 Seize the day(현재를 잡아라), 의역하면 현재를 즐겨라, 현재에 집중하라 정도로 번역할 수 있다.

 

    에피쿠로스 학파에 속했던 로마 시인 호라티우스(BC65~BC8)의 시 <송가>에서 따온 구절로 철학적으로는 쾌락주의 사상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단 여기서의 쾌락주의는 당장의 육체적 쾌락, 순간적이고 감각적인 쾌락을 주장한 키레네 학파와는 달리 신체의 고통이 없는 소극적 쾌락주의, 정신적, 영적 평안상태를 쾌락으로 보는 쾌락주의로 금욕주의, 허무주의 느낌이 섞여있다. 외부의 자극과 내부의 욕망, 욕구에 흔들리지 않는 마음을 추구한다는 면에서 유교에서의 극기복례나 부동심과 상통한다고도 보여진다.

 

    하여튼 인간은 과거도 미래도 아닌 현재를 살아갈 수밖에 없다. 하지만 한편으론 현재를 잡을 수도 없다. 시간은 쉼 없이 흘러지나갈 뿐 한사코 그 곳에 머물 수는 없다. 모든 것은 지나가리니 행복도 불행도, 고통도 쾌락도 영원하지 않다.

    해 아래 새로운 것도 없고 영원한 것도 없다. 잡을 수 없는 것을 잡으려 하고 머물 수 없는 곳에 머물려 하면 집착이 되고 미련이 된다. 잡고 있는 것을 놓지 않으면 새로운 것을 잡을 수 없다.

 

    현재를 잡아라. , 잡은 후엔 바로 놓아라.

    현재를 즐겨라. , 머물지 말고 바로 떠나라.

 

 

사탕을 갖고도 싶고 먹고도 싶지만 동시에 할 수 없다.

사탕을 갖을 수도 있고 먹을 수도 있지만 무엇이던 영원히 할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