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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 신앙생활

성경읽기 0083 : 마태복음 27장~28장 (첨부 : 예수님과 노무현의 고통에 대해서)

어멍 2011. 7. 9. 23:52
  

    성경읽기 0083 : 마태복음 27장~28장 (첨부 : 예수님과 노무현의 고통에 대해서)



27장 15절

명절이 되면, 백성들이 원하는 죄수 한 명을 총독이 사면해 주는 관례가 있었습니다.

16절

당시 감옥에는 바라바라고 하는 아주 악명 높은 죄수가 한 명 있었습니다.

17절

사람들이 모였을 때, 빌라도가 말했습니다. “너희는 누구를 놓아주기를 원하느냐? 바라바냐, 아니면 그리스도라고 하는 예수냐?”

18절

빌라도가 이렇게 말한 것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시기해서, 자기에게 넘겨준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20절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은 군중들에게 바라바를 놓아 주고, 예수님을 죽이도록 요청하라고 시켰습니다.

21절

빌라도가 사람들에게 말했습니다. “이 두 사람 중에 누구를 석방시켜주길 원하느냐?” 사람들이 대답했습니다. “바라바요!”

22절

빌라도가 물었습니다. “그러면 그리스도라고 하는 예수는 어떻게 해야 하겠느냐?” 그들이 모두 대답했습니다. “그를 십자가에 매달아 죽이시오!”

23절

빌라도가 물었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이냐? 그가 무슨 악한 일을 했느냐?” 그러자 사람들은 더 크게 소리쳤습니다. “그를 십자가에 매달아 죽이시오!”

 

    로마총독 빌라도에게 끌려오신 예수님은 또 한 차례 재판을 받게 된다.

    바라바와 예수님 중 누가 더 악한가? 누가 죄인인가?... 비교할 수 없다. 하지만 예수님에겐 바라바에게 없는 죄가 있다. 바로 괘씸죄다. 예수님은 당시 종교적, 세속적 기득권을 갖고 있던 대제사장, 장로, 서기관 등에게는 실질적인 당면한 위협이기도 했지만 백성들과 더불어 그들 역시 예수님에 대해서 몹시 분노, 증오하며 괘씸하게 여겼다.

    군중들은 예수 대신 바라바를 놓아 주고, 바라바 대신 예수님을 십자가에 매달아 죽이라고 아우성이다. 한마디로 난리도 아니다. 그것은 단순히 대제사장과 장로들의 사주에 의한 것이 아니다. 그들 역시 마음 속 깊은 곳에 예수를 시기하며 괘씸하게 여기고 있었던 것이다. 같은 족속이면서도 잘난 체 하고 있다고 증오하고 있었던 것이다.

    누구를? “그를 십자가에 매달아 죽이시오!” 이유는? “그를 십자가에 매달아 죽이시오!” 막무가내다. 무조건, 무조건이다. 내가 왜 이유를 대야 하나? 왜 굳이 스트레스 받아가며 이유를 찾아야 하나. 내게 스트레스를 준 것 자체가 예수의 죄다. 더 이상 무슨 이유, ‘무슨 증인이 더 필요하겠는가?’[마가 14:63]

    그들은 그들이 무슨 짓을 하고 있는지 깨닫지 못하고 있다. 눈 먼 양떼, 우매한 군중이다.


    예수님은 대제사장과 장로들에 의해 신성모독의 죄목으로 유죄판결을 받은 종교범으로 볼 수도 있지만 엄밀히 얘기해서 유대의 왕이라 하여 민심을 흉흉하게 하고, 유일한 하나님의 아들인 그리스도라 하여 비루한 백성들의 시기심을 자극한 정치범이었다. 기득권, 제도권에 도전해 기존질서를 뒤흔들었다는 점에선 공안사범이랄 수도 있다.

    당시 예수님은 철저한 소수 비주류였다. 예루살렘에는 예수님의 친구보다 적들이 더 많았다. 예수님을 적극적으로 살리려는 세력보다 적극적으로 죽이려는 세력들이 더 강했다. 그것은 전체 유대 땅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예수님의 십자가 고난 이후에도 기독교는 나사렛 도당으로 불리며 유대교 소 종파로 얼마간 남게 된다.

    당시 예수님은 고향 나사렛에서도, 성지 예루살렘에서도 환영받지 못했다. 대제사장과 장로들에게도, 백성들에게도 인정받지 못했다. 예루살렘 입성 때 환호와 축복을 보냈던 인파 중엔 진실로 독생자 예수님을 믿었던 자들도 있었겠지만 단지 호기심에, 분위기에 휩쓸려 환영 나온 자들도 분명 섞여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보다 더 많은 이들이 여전히 성 안에서 이 초대받지 않은 손님을 마땅치 않게 여기고 있었다.

    높으나 낮으나, 배웠거나 안 배웠거나, 그들 모두는 예수님에게 화나 있다. 이유? 몰라서 더 화가 난다. 알아도 차마 솔직히 말할 수 없어서 더 화가 난다. 하여튼, 어쨌든, 밉다. 죽이고 싶도록 밉다. 이유를 찾을 순 없어도 너나없이 죽이라 하니 죄인임에 틀림없다. 내가 미워하니 예수는 반드시 죄인이어야만 한다. 이 세상에 괘씸죄보다 더 큰 죄는 없다. 그 괘씸함은 모두 시기와 질투에서 비롯된다.

    분노는 잔인하고 화는 사람을 삼키지만, 질투처럼 파괴적이지는 않다.[잠언 27:4]



27장 28절

그들은 예수님의 옷을 벗기고, 대신 붉은색 옷을 입혔습니다.

29절

그리고 가시로 왕관을 엮어, 예수님의 머리 위에 씌웠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오른손에 지팡이를 쥐어 주었습니다. 그리고 “유대인의 왕, 만세!”라고 말하며 예수님께 무릎 꿇고 절하면서 놀렸습니다.

30절

그들은 예수님께 침을 뱉고 지팡이를 빼앗아 예수님의 머리를 쳤습니다.

 

    그들은 로마 병사들이다. 빌라도는 결국 군중의 폭동이 두려워 바라바를 풀어주고 예수님을 채찍으로 때리게 한 후, 십자가에 매달도록 내어 준다. 그 채찍은 단순한 채찍이 아니다. 여러가닥의 가죽끝에 날카로운 쇠뭉치, 갈고리 등을 매단 것으로 살점을 뜯어내고 근육을 파괴하고 신경을 끊어놓는 무시무시한 것이었다. 아마도 대부분 십자가에 달리기도 전에 까무라치거나 미치거나 죽었을 것이다. 태형을 마치자 로마 병사들은 예수님 주위로 모여들어 예수님을 조롱하고 욕보인다.

    왕의 자색 옷을 입히고 거짓 왕관에 거짓 왕홀을 쥐어준 후 “유대인의 왕, 만세?”라고 무릎 꿇고 외친다. 거짓 유대 왕에 대한 최고의 예우, 최고의 모욕이다. 이미 몸은 채찍질로 너덜너덜 만신창이다. 그 몸에 삐에로의 분장을 하며 웃고 떠든다. 때리고 꾸미고 갖고 논다. 짧지만 길고 길었던 고난의 십자가 길이 이제 막 시작되고 있었다.




Altarpiece <Crowning by Thorns> 중 일부분



27장 32절

군인들이 나가다가 구레네 출신의 시몬이라는 사람을 만났습니다. 군인들은 그에게 강제로 예수님의 십자가를 지고 가게 하였습니다.

33절

그들은 골고다라는 곳으로 갔습니다. 골고다는 ‘해골의 땅’이라는 뜻입니다.

35절

군인들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고, 제비를 뽑아 예수님의 옷을 나누어 가졌습니다.

 

    골고다 언덕을 향한 십자가의 길이다. 예수님은 이미 심한 고초를 겪으셔서 더 이상 십자가를 어깨에 지고 올라갈 수 없으셨을 것이다. 아마도 심한 출혈과 상처로 체력이 소진되고 정신이 몽롱해져 발걸음을 떼기도, 서 있기도 힘든 빈사상태셨을 것이다. 그래서 군인들은 시몬이란 사람에게 예수님의 십자가를 강제로 지고 올라가게 한다.




예수님(좌)과 구레네 출신 시몬(우). 영화 <패션 오브 크라이스트> 중에서



27장 45절

낮 12시부터 오후 3시까지 온 땅이 어둠에 덮였습니다.

46절

오후 3시쯤에 예수님께서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하고 큰 소리로 외치셨습니다. 이 말은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습니까?’라는 뜻입니다.

50절

다시 예수님께서 큰 소리로 외치셨습니다. 그리고 숨을 거두셨습니다.

51절

그 때, 성전 휘장이 위에서부터 아래까지 두 조각으로 갈라졌습니다.

 

    길고 긴 십자가의 고통을 끝내시고 예수님이 마지막 숨을 거두신다. 이 때, 성전의 지성소와 성소를 구분하는 휘장이 두 조각으로 찢긴다. 지성소는 대제사장만이 일 년에 한 번 대속죄일에 들어갈 수 있는 곳이었다. 이 사건은 이제 모든 성도들이 하나님께 직접 나아갈 수 있게 되었음을 상징하는 사건이다. 하나님의 뜻이 모두에게 개방되었음을 의미한다.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습니까?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예수님을 버리셨습니까?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죄 많은 저희들을 긍휼히 여기시고 구원하여 주시옵니까?

    예수님의 탄생은 우리에게 축복이었다. 예수님의 죽음 역시 우리에게 축복을 가져다주었다. 예수님의 존재 자체가 복음인 것이다.



28장 1절

안식일 다음 날, 즉 한 주의 첫 날 동틀 무렵에, 막달라 마리아와 다른 마리아가 무덤을 보러 갔습니다.

2절

그 때, 강한 지진이 일어나고, 하나님의 천사가 하늘에서 내려왔습니다. 그 천사는 돌을 굴려 치우고, 그 위에 앉았습니다.

3절

그 모습은 번개와 같았고, 옷은 눈처럼 희었습니다.

6절

“예수님은 여기 계시지 않다. 말씀하신 대로 다시 살아나셨다. 와서 예수님이 누우셨던 곳을 보아라.”

 

    예수님은 장사한 지 삼 일만에 부활하신다. 천사들은 여자들에게 ‘예수님께서 먼저 갈릴리로 갈 것이니 이 소식을 제자들에게 전하라’고 일러준다.


프라 안젤리코(Fra Angelico) <예수의 부활>



28장 18절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가 내게 주어졌다.

19절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라.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어라.

20절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지키도록 가르쳐라. 보아라, 내가 너희와 세상 끝날까지 항상 함께 있겠다.

 

    갈릴리에서 제자들을 만난 예수님이 하늘로 들려 올라가시기 전 제자들에게 마지막으로 하신 말씀이다.

    할렐루야! 예수님의 희생을 감읍할 지어다. 예수님의 부활을 찬양할 지어다. 아멘!




예수님의 승천



    마태복음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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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예수님의 일생을 다룬 4권의 복음서의 첫째 권인 마태서는 이것으로 끝난다. 나머지 복음서에 대한 포스팅은 겹치는 대목이 많아 훨씬 짧고 적으리라 생각된다. 전에 예수님의 거룩한 죽음과 그 의미에 대해서는 시대적, 정치적 배경을 중심으로 이미 포스팅한 바 있다.(☞ 성경읽기 구약을 마치고 신약에 들어가며)

    이제 글을 맺기 전에 예수님이 겪으신 ‘고통’에 대해서만 따로 적어보도록 한다. 그 정신적 고통, 육체적 고통은 인간이 겪을 수 있는 극한의 고통이었다. 육체적, 물리적 고통은 실재다. 그것은 존재 자체를 쓸어버리는 거대한 해일이다. 인간은 그것 앞에 하나의 나뭇잎에 불과할 뿐이다. 아무리 천하를 호령하는 진시황, 고매한 인품의 공자라도 극한의 고통을 가한다면 개처럼 기고 짖으며 허겁지겁 발가락을 핥게 할 수 있는 것이 고통이다.




고통...... 언어와 이미지 그 이상의 것!



    그들은 충분히 잔인하였다. 예수님은 충분히 고통스러우셨다. 하지만 그 이상은 없었을까? 그 이외의 경우의 수는 없을까? 너무 나쁜 생각, 위험한 상상인가? 아니면 너무 불경한 생각인가?...... 그 이전에 부질없는 생각일 수가 있다. 어차피 모든 것이 하나님이 오래전부터 계획하신 뜻이요, 섭리다. 조연, 악역까지도 각자 그 뜻을 이루기 위해 제 역할을 다한 것으로 볼 수 있다. 하지만 인간의 고통은 상상 이상으로 깊다. 인간은 생각보다 잔인하며 정치는 생각보다 미묘하고 복잡하다.

    엄밀히 얘기해서 그들은 프로가 아닌 아마추어였다. 고만고만한 힘을 가진 권력자들이었다. 대제사장과 율법학자들은 빌라도의 눈치를 보고, 빌라도는 로마황제를 비롯한 중앙의 권력자들의 눈치를 보는 처지였다. 그들에게 폭동, 혁명, 전복을 비롯한 일체의 걱정, 일체의 두려움이 없었다면, 그런 태산 같고 바다 같은 절대 권력이 있었다면, 예수님은 어쩌면 순교(!) 이외의 다른 결말을 맞으셨을 수도 있지 않을까. 적어도 대중 앞에서 장렬하고 거룩한 공개적인 최후를 맞지 않으셨을 수도 있지 않을까.


    조지 오웰의 소설 <1984>는  절대전체주의국가 오세아니아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 그 곳은 ‘당’을 의인화한 ‘대형’(Big Brother)이 지배하고 있다. 당은 반역자들을 처형치 않는다. 오직 그들이 세뇌되고 회개하여 죄를 고백하고 벌을 자청할 때만 처형한다. 죽여준다.(!) 왜냐하면 신념을 지닌 채로 죽는 순교란 당에게는 용납될 수 없는 또 다른 반역이자 당의 패배기 때문이다. 길게 보면 당에게는 손해기 때문이다.

    회개를 끌어내기 위한 세뇌의 수단은 회유와 설득을 포함한 끊임없는 육체적, 정신적 고통의 무한 반복이다. 찢겨진 상처를 꾀매 주고, 끊어진 신경을 이어준 후 다시 고통을 가한다. 이것은 철저히 비공개적으로 실종, 증발 상태에서 이루어진다. 중간에 죽어나가지 않고 누군가, 정말 누군가 끝까지 버틴다면, 그는 어디선가 자연사할 것이다. 그리고 아무도 그가 존재했었다는 것을 기억하지 못할 것이다. 이것이 절대 권력이다. 이것이 프로다.

    못된 권력들 역시 어설프지만 이것을 흉내 낸다. 공개적이고도 철저한 기록과 절차를 거친 재판, 판결, 집행보단 암암리에 지들끼리 후딱 해치워버린다. 인혁당 사건이다. 아예 재판 없이 방해물을 제거한다. 암살, 의문사다. 백범 암살, 장준하 실족사다. 어둠이 빛을 피하듯이 이들은 광장을 싫어한다. 그들이 공개적 순교를 달가워 할 리 없다.

    예수님은 적어도 자연사, 의문사는 아니었다. 암살당하시지도 않으셨고 실종되지도 않으셨다. 예수님이 마지막 숨을 거두시며 “다 이루었도다.”[요한 19:30]고 하신 것처럼 예수님은 십자가의 순교 이후 대중들에게 더욱 또렷이 기억되고 많은 기록, 소중한 가치, 위대한 믿음 그리고 수많은 제자와 성도들을 만들어 내셨다.


    불교에서 말하길 지옥에 있는 죄인들은 모두 이목구비, 사지가 멀쩡하다고 한다. 끊임없는 고통을 끊임없이 느껴야 하기 때문이다. 백만 개의 촉수가 백만 개의 고통을 느낀다. 죽음보다 더한 고통에서 벗어나기 위해 이미 죽었는데도 다시 ‘죽여 달라’고 아우성이다. 하지만 그들에게 다시 죽는 자비는 허락되지 않는다. ‘죽음’이라는 안식은 허락되지 않는다. 중단 없는, 기약 없는, 영원한 고통만이 허락될 뿐이다.

    고통은 사람을 황폐하게 만든다. 정신도, 육체도 배겨내기 힘들다. 예수님은 “몸은 죽일 수 있으나 영혼은 죽일 수 없는 사람들을 두려워마라. 영혼과 몸을 모두 지옥에 던져 멸망시킬 수 있는 분을 두려워하여라.”[마태 10:28]고 말씀하셨지만 극한의 고통은 영혼을 죽이고, 영혼을 바꾸는 것을 넘본다. 감히 하나님의 권능에 도전한다.

    아침에 일어나 매 맞고,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를 올라, 오후에 십자가에 못박혀 매달려 있는다. 단, 생명줄을 잡았다가 놨다가 죽지 않을 만큼만. 저녁에 내려져 상처를 치료받은 후, 좋은 음식과 안락한 잠자리를 제공받는다. 다시 아침에 일어나 매 맞고...매달리고...먹고...자고... 무한 반복이다. 극한 고통의 연속이다. 주먹 다음에 뭉둥이, 몽둥이 다음에 채찍, 채찍 다음에 못질... 일상다반사다.

    이것 말고도 준비된 옵션은 많다. 굳이 십자가형을 고집할 이유는 없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인간에게 극한의 공포와 고통을 줄 수 있는 잔인한 형벌과 기상천외한 고문은 차고도 넘친다. 육체가 버틴다면, 신경과 감각이 살아있다면 돌려가며 혹은 둘셋을 조합하여 영원히, 중단없이 고통을 느끼게끔 할 수 있다. 지상에 마련된 지옥이다. 사는 게 지옥이다.

    벌써 10년 하고도 101일째다. 그들이 내게 제의한 것은 대제사장 비서 겸 성전 내 상인들을 관리하고 성전세를 걷는 감독관이다. 굴복한 예수님, 전향한 예수님, 바리새파의 충실한 개가 된 예수님은 상상할 수 없다. 일찍이 예수님이 독사의 자식, 회칠한 무덤이라고 저주했던 자들 아닌가.

    고통에 못 이겨 실은 자신은 거짓말쟁이라고, 하나님의 아들이 아니라 인간 요셉의 아들이라고 인정한다면... 어쩌다 보니 뻥을 좀 쳤는데 일이 생각지도 못하게 커지게 된 것이라고, 그들을 올려다보며 헤헤 천박한 웃음을 지어보인다면... 그렇게 면죄부를 받은 후 누구보다 열정적인 바리새파가 되어 세속적 출세가도를 달리는, 소극적 전향을 넘어선 적극적 변절의 길로 들어선다면... 부귀영화의 안온한 삶을 살다가 안락한 죽음, 하지만 평범한 죽음으로 그 최후를 마감한다면...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저를 버리셨습니까? 어찌하여 저를 잊으셨습니까?’


    육체적 고통 못지않게 정신적 고통 역시 인내하기 힘들다. 욕하고 침 뱉고 조롱하고... 지체 높은 귀하신 분, 자존심 강한 사람일수록 참아내기 힘들다. 하지만 굳이 예수님 본인을 괴롭힐 필요는 없다. 굳이 큰 힘 쓰지 않더라도 간단한 방법이 있다. 바로 주위 사람, 사랑하는 사람들을 괴롭히는 것이다.

    칠레, 볼리비아에서 미국에 의해 자행된 ‘저강도 전쟁’, 군부와 기득권을 포섭, 회유, 조종하여 수행된 ‘더러운 전쟁’에서 수많은 민주인사들은 고문과 박해를 꿋꿋이 버텨냈지만 남편 앞에서 아내를, 아내 앞에서 남편을 욕보이고, 자식 앞에서 부모를, 부모 앞에서 자식을 고문하는 것에는 백이면 백 모두가 무너졌다. 그만! ㅜ.ㅜ 그마~~~~안!!! ㅠ.ㅠ 유혈이 낭자해도, 몸이 걸레처럼 쪼그라들어도 눈동자가 시퍼렇게 살아있던 사람들이 한순간에 무너졌다. 비명을 지르고, 혼절하면서도 버티던 사람들이 순식간에 무너졌다.

    만약 예수님이 보는 앞에서 열두 제자를 하루에 한 명씩 십자가에 매달았다면, 성모 마리아를 채찍질하고 침을 뱉고 욕보였다면, 아버지 요셉에게 열두 달, 십이 년을 쉬지 않고 갖은 고문을 가했다면... 과연 예수님은 그것을 인내하실 수 있었을까? 당장 분노의 불벼락을 떨어뜨리시지 않으셨을까? 그 상황에서도 ‘아버지의 뜻대로 하소서’ 하시며 모든 것을 하나님께 맡기고 마냥 지켜보고만 계셨을까? 아직 믿음이 깊지 않아서인지, 예수님을 알지 못해서인지 솔직히 자신 있게 말할 수 없다.


    온갖 악행이 있지만 사람 갖고 장난치는 죄, 사람 갖고 협박하는 죄가 가장 악질이다. 온갖 악인이 있지만 노예상, 포주, 인신매매범, 고문기술자, 납치범, 인질범이 가장 저질이다. 도둑, 강도, 살인보다 더한 가장 상종 못할 종자들이다. 때려도 나를 때리고, 죽여도 나를 죽이는 것이 낫다. 침을 뱉든지, 욕을 보이던지 내게 하는 것이 더 견딜 만하다.

    하나님의 사랑과 능력, 예수님의 온유와 인내는 우리의 상상 이상이다. 하지만 인간의 잔인함, 비열함, 간교함, 악랄함도 상상 이상이다.


[2]


    마태복음을 읽고 예수님의 일생을 뒤돌아볼 때 나는 인간 노무현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개인적으로 관심과 사랑이 각별했던 사람, 가장 최근에 내게 가장 큰 심리적 트라우마를 안긴 사람이기도 하지만 예수님의 일생과 노무현의 삶과 죽음이 많은 부분에서 오버랩되며 유사하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비록 다윗의 자손이기는 하나 목수를 아버지로 둔, 내세울 것 없는 집안 출신이었다. 노무현 역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난 유복하지 않은 집안 출신이다. 두 분 다 귀한 직업, 부자, 권력자 집안의 자제들이 아니었다.

    예수님은 성지 예루살렘 출신이 아니라 갈릴리 나사렛 시골 출신이다. 노무현 역시 서울 수도권 출신이 아니라 봉하마을 지방 출신이다. 집안으로 보나, 고향으로 보나, 모두 보잘 것 없는 변방 출신의 소수 비주류다.

    예수님의 왕으로서의 예루살렘 입성과 노무현의 대통령으로서의 청와대 입성. 하지만 백성들의 외면과 민심의 변화. 오래된 적들과의 끊임없는 갈등은 그 곳에서 폭발하고 그 곳은 결국 결과적으로 예수님의 사지, 노무현의 사지가 된다.

    예수님으로 인해 많은 사람들이 원치 않는 시험에 임하여 정체를 드러냈듯이(이 일 때문에 많은 사람들의 마음에 있는 생각이 드러날 것입니다.[누가 2:35]), 노무현 때문에 많은 사람들의 본색이 드러나고 수준이 탄로났다.

    예수님이 여러 사람 앞에서 드러내 놓고 말하여도 사람들은 그에게 아무 대꾸도 하지 못했다.[요한 7:26] 하지만 예수님의 적들은 뒤돌아서선 예수님을 바알세불(마귀의 우두머리)이라고 불렀다. 호시탐탐 예수님을 죽일 궁리를 하며 기회를 엿봤다. 노무현은 대화와 토론을 마다하지 않았지만 정적들은 이런저런 핑계를 대며 공개적인 토론을 회피하였다. 하지만 그들은 뒤돌아서선 '말 많으면 공산당, 말 잘하면 빨갱이'라는 비겁한 자기변명으로 노무현을 모함했다. 이를 갈며 원한을 키우고 복수를 꿈꿨다. 그리고, 어쨌든, 그들의 음모와 복수는 현실에서 성공을 거두었다.

    예수님의 몸은 찢기고 패이고 헤지고 말이 아니었을 것이다. 노무현의 몸 역시 찢기고 깨지고 꺾이고 그 몰골이 형용할 수 없이 비참했을 것이다. 시신을 수습하기 위해 많은 곳을 꿰매고 손보아야 했다고 한다. 그리고 두 분 다 불행하게도 한순간에 절명하지 않으셨다. 죽기 전까지 일정시간 감내하기 힘든 극한의 고통을 겪으셨다.

    단, 다른 점은 2000여 년 전 유대 땅에는 조중동 같은 적극적인 바람잡이들이 없었다는 점. 인자(예수님)는 사람들(제사장, 율법학자, 로마병사)의 손에 넘겨졌지만 노무현은 정치검찰의 손에 넘겨졌다는 점. 예수님은 종교범, 정치범으로서 혐의를 받았지만 노무현은 정치보복을 당하면서도 치욕적인, 변변치 않은 액수의 뇌물로 인한 잡범으로 혐의를 받았다는 점. 예수님은 주로 자신에게 가해진 육체적 고통을 감당하셨지만 노무현은 사랑하는 주위 사람들로 인해 더욱 정신적 고통을 받았다는 점이다.


    완전한 예수님과 불완전한 노무현, 2000여 년 전의 유대와 2011년의 대한민국을 단순비교하는 것은 무리일 수도 있다. 노무현에 비판적인 이, 무덤덤한 이에게는 절대 동의할 수 없는 얼토당토않은 이야기, 비약과 억지가 난무하는 황당한 이야기일 수도 있다. 하지만 내게는 많은 부분이 겹쳐 보인다. 자살이든 자결이든 희생이든 예수님도 노무현도 자신 앞에 놓인 그 길이 죽음에 이르는 고통의 길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기꺼이 걸어들어 가셨다.

    예수님은 거룩한 희생을 통하여 우리에게 구원의 복음을 주셨다. 노무현은 자신의 죽음을 통해서 그가 사랑하던 사람들에게 얼마간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는 자유를 주었다. 결과적으로 친노 인사들이 권력의 핍박으로부터 풀려나 정치적으로 복권됐다.

    예수님은 십자가와 구원의 복음을 전하셨다. ‘하나님 나라’라는 비전을 제시하셨다. 수많은 제자와 성도들을 남겼다. 노무현은 ‘상식과 원칙’이란 가치를 남겼다. ‘사람 사는 세상’이라는 비전을 제시했다. 그로 인해 눈물을 뿌린 수많은 사람들, 그를 기리고 그리워하는 수많은 추종자들을 남겼다. 그 어떤 가치보다 귀중한 가치요, 그 어떤 비전보다 아름다운 비전이요, 그 어떤 유산보다 위대한 유산이다.


    하지만 시간이 필요했다. 우리에겐 지속적인 기도와 노력이 필요하다. 예수님의 죽음과 승천 이후에도 예수님의 가르침이 전파되고 공인받기에는 많은 시간이 필요했다. 예수님의 기적의 능력을 보고 믿지 않은 사람은 예수님의 거룩한 십자가를 보고도 여전히 믿지 않는다. 믿을 리가 없다.

    깨닫고 믿게 되었대도 잠시뿐이다. 금세 잊어버리고 양처럼 흩어져 제 갈 길을 간다. 각기 왔던 길을 그대로 다시 간다. 이 모든 것을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고,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며, 심장이 있어도 깨닫지 못하는 이가 있다. 깨달아도 간직하지 못하는 이가 있다. 예수님의 십자가 보혈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수많은 제자들의 더 많은 피가 요구되었다.

    노무현도 마찬가지다. 그가 역사에서 올바로 자리매김 되기까지는 더 많은 시간이 필요하다. 바울 같은 위대한 전도자, 베드로 같은 열정적인 순교자들이 아직은 더 요구된다. 그의 가치를 이어가려는 이들의 더 많은 노력과 희생이 필요하다. 단, 그 시간은 단축될 수 있을 것이다. 옛날 옛적 100년은 지금의 1년에 맞먹을 정도로 빠른 세상이니까. 찾고자 한다면 무한대의 정보가 무한대로 개방된 정보사회니까.

    결국 예수님이 십자가의 희생을 통하여 모든 것을 다 이루셨듯이 노무현은 죽음을 통하여 그의 삶보다 더 많은 것을 이룰 것이다.




노무현 대통령 노제때 서울광장 위로 드리운 오색채운


    예수님의 보혈에 감사드리며 기도드린다. 노무현의 죽음을 슬퍼하며 그의 영혼에 안식이 있기를 기도드린다.

    예수님의 영광이 이 땅에 이루어지기를 기도드린다. 노무현의 가치가 이 땅에 실현되기를 기도드린다.

    

    하나님 감사합니다. 예수님 감사합니다.

    저희의 죄가 너무 크옵니다. 예수님의 사랑이 너무 크옵니다.

    얼마나 아프셨습니까? 얼마나 고통스러우셨습니까? 얼마나 서러우셨습니까?

    저희가 예수님을 때렸습니다. 제가 예수님께 침을 뱉었고, 제가 예수님을 죽였습니다.

    저희를 용서치 마옵소서.


    그래도 저희를 사랑해 주시렵니까? 죄를 짓고 도망가 숨어있는 저희를 기어코 찾아내 용서해 주시렵니까?

    염치없지만 울며 엎드려 비옵니다. 저희를 용서하여 주시옵소서. 저희를 불쌍히 여겨 주시옵소서.

    하늘엔 영광, 땅에는 평화, 저희에겐 자비를 베풀어 주시옵소서.

    아멘. 아멘.


 

    ※ A, A', B, B', 가, 가', 나, 나'

    <나>를 때리고 미워하는 A, A'(가해자) - 그것에 전혀 무관심한 B, B‘(방관자) - 형세 따라 유행 따라, 혹은 이익을 얻거나 혹은 불이익을 피하려고 이에 가담하는 가, 가’(강화자 또는 동조자) - 내내 같이하다가 하루아침에 안면몰수하고 <나>의 등에 칼을 꽂는 나‘(왕따 종결자)

    이것이 <나>를 둘러싼 왕따의 구조


    예수님 왕따 사건의 가해자는 바리새파, 사두개파, 헤롯당 등 당시 유대 사회의 기득권층(바리새파 사람들의 누룩과 헤롯의 누룩을 조심하여라. 마가 8:15) - 방관자는 에세네파 - 강화자는 열심당, 흥분한 군중(적극적 강화자), 실망하고 지친 백성(소극적 강화자) - 종결자는 베드로와 가룟 유다

    노무현 왕따 사건의 가해자는 한나라당, 조중동, 우파 주류 개신교 등 우리 사회의 기득권층 - 방관자는 정파를 떠난 정치혐오, 정치무관심층 - 강화자는 진보좌파 일부, 흥분한 군중(적극적 강화자), 실망하고 지친 국민(소극적 강화자) - 종결자는... 없다. 유력한 친노 인사 중 결정적으로 그를 배반한 사람은 아직 없다.


    예수님은 사람에게서 배우지 않으셨다. 예수님의 스승은 없다. 당연히 동문도, 선후배도 없다.

    공생애 시작 전 광야에서 유혹과 시험을 홀로 극복하셨을 뿐 정식 교육기관에서 권위 있는 스승에게 정식 교육을 받으신 바 없다. 부유한 집안이나 귀족 출신으로 권위 있는 기관, 권위 있는 인물에게 수학하여 제사장, 서기관, 율법학자, 고급관리로 진출하는 엘리트 코스를 밟지 않으셨단 거다. 다윗의 자손이기는 하나 철저히 계급적으론 서민출신이었고 세속적 의미의 학벌이란 것이 없으셨다.

    노무현 역시 서민출신에 고졸 학력으로 엘리트 계급과는 거리가 멀다. 심지어는 선후배로 묶여 형님동생 하는 대학교 운동권 출신 진보 정치세력, 진보 엘리트로부터도 무시를 당했다. 그에게는 학벌, 동문이란 백그라운드가 없었다.


    추가하여 예수님과 노무현의 공통점은 이것이다.

    철저한 왕따였다는 것. 서민출신으로 가방끈이 짧았다는 것.


2012/11/08 추가함